부처님 말씀 2권 146쪽 왼쪽 밑에서 3째줄
“백 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중요하다고 했어.
이유는 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지
않으면 나머지 양을 다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성경 속에서 주로 언급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은 가축을 기르고 여러 지역으로 옮겨
다니며 살던 유목민족이었던 탓에 성서
에서는 비유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양 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목자와 비유화해서 100마리 양중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해 말씀한 내용은
기독교에서 ‘돌아온 탕자’ 이야기와 더불어
하느님 품으로 다시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목자가
있는데 100마리 양들 중에 1마리 양이
길을 잃었다고 하면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두고, 길 잃은 그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이야기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목자는 하느님으로, 양은 하느님을
따르는 신자로 알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양들은 하느님 품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는데 반해서, 그 한
마리 양은 제 갈 길을 잃어버리고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하는 신자를
말하는 것으로, 그 신자가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만 된다는
교훈적 내용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성경속의 내용을 기독교에
맞게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목자를 모든
기독교인으로 칭하고,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모든 사람을 길 잃은 한 마리
양으로 간주해서 전도의 대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양과 목자의 이야기가 성서에는
유독 많이 언급이 되는데, 신자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양의 성질을 알게
되면, 왜 양과 양을 치는 목자의 이야기가
많은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양의 첫째 특징은 무리를 이루어삽니다.
방향감각이 둔해서 길을 잘 잃어버리고,
눈이 어두워 사물을 잘 살피지 못합니다.
대신에 귀가 발달되어 있어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서로 친화력이
강해서 동물 중에서 유독 서열을 따지지
않고 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무리 중에
어느 한 마리가 움직이면 다른 양들도
덩달아 움직이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양을 기르는데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 곳곳에서도 이와 같은
양의 특성을 닮은 우리의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소리에 익숙해있어
그들을 부르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을
해서 무리를 이루어 움직입니다.
양떼를 움직일 때 쓰는 방법 중 하나는
그 양의 무리 중에 한 마리를 어느
한 방향으로 빠르게 몰아가면 다른
양들은 떼를 지어 그 한 마리를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양치기 개도
그런 양의 습성을 이용해서 양을
몰 때 개가 원하는 방향으로 무리
중에 있는 한 마리의 양을 몰아서
다른 양들을 따라 움직이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양떼와 그 무리를 벗어나있는
한 마리의 양에 대한 제자들에 대한
견해를 물었습니다. 그 물음은 제자들에게
목자가 무리에서 벗어난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데려오는 것에 대한 단순한 긍정을
이끌어 내기위한 질문보다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양을 기를 때 지역 특성상
산에서 주로 키웠습니다. 넓은 지역에
방목 형식으로 자유롭게 풀어놓고
길렀습니다. 산등성이 너머에는 절벽도
있어서 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목자의 주된 일과의 하나였습니다.
무리를 이루어 안전한 산기슭에서
활동하던 양들 중에 한 마리가 산 너머
절벽 쪽으로 가면, 다른 양들도 양의
특성상 그 움직이는 양을 따라 그 위험한
곳으로 갑니다. 목자가 그런 모습을 보고
그냥 방치한다면 그 한 마리 양을 따라
다른 양들도 절벽으로 난 길을 따라 가게
됩니다. 그 결과는 참담한 재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목자를 하느님 부처님으로 비유하면,
산기슭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은
하느님, 부처님 말씀을 따라서 생활하는
사람들로 풀이됩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은 하느님, 부처님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신의 말씀대로 공부하지 않고, 반드시
지켜야하고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본류에서 벗어난 아류에 서 있는
사람인 ‘사이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이비는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 사이비를 보고 사이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이비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면 사이비를 너무 잘 알아봅니다.
그리고 거기에다 갖은 칭송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목줄을 맵니다.
양의 무리 중에 한 마리 양은 누구라도
될 수 있습니다. 무리를 이루고 있는
양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에 있는 숫자가
많다고 해서 안전하게 잘 있다고 단언
할 수 없습니다. 목자의 말을 잘 듣고
그의 가르침 그대로 따를 때는 괜찮지만,
목자가 이끄는 길에서 벗어나게 되면,
눈이 어둡고 사물을 잘 살피지 못하며,
방향감각이 둔해서 길을 잃기 쉬운
양들은, 그 무리들 중에 한 마리가
아닌 길로 움직이면, 집단으로 따르다가
산등성이 너머 절벽으로 곤두박질해서
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염려스러워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이 중요한 것입니다.
.
대다수의 사이비는...
자신이 사이비 짓을 하는지 모르고
자신을 사이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
.
진정한 불성의 힘은
자신을 옳은 쪽으로 가게 만들며
바른 것과 아닌 것의 판단의 중심에
서게 하여 잘못된 사이비의 길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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