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7일 오늘의 역사
2021년 미국 핵잠수함 남중국해에서 괴물체와 충돌
2018년 한국여자골프(박성현 김인경 전인지 유소연) LPGA 8개국 대항전 제3회 UL인터내셔널 크라운(인천 송도 잭니클라우스 골프클럽코리아) 우승
2013년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평생을 바친 홍근수 목사 세상 떠남(76세)
2005년 차세대 전투기 F-15K 한국 도착
2002년 강화도에서 돼지콜레라 발생
강화군 화도면 상방리 노모(46)씨가 기르던 돼지들이 의사(擬似)돼지콜레라 증상을 보여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이 정밀검사를 하는 동안 돼지값 폭락을 우려한 강화도 양돈농가들이 무더기로 돼지를 출하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인천시는 의사돼지콜레라 발병 소문이 돌기 시작한 7일 오후부터 강화도에서 평소보다 많은 양의 돼지가 인천·김포·부천 등지의 도축장으로 반출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인천 서구 가좌동 S식품 수탁과에 따르면 7일 오후부터 8일 오후까지 강화도에서 390마리의 돼지가 들어왔다. 이는 평소 반입량 100여마리의 3배가 넘는 수치. S식품은 이 돼지들을 9일 오전까지 도축, 유통시켰다.
인천시 농정과 관계자는 “돼지콜레라가 확인된 8일 오후 6시 이전에 팔려나간 돼지는 정상 출하로 봐야 한다”며 “7~8일 사이에 강화도의 돼지 출하량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확인 결과 돼지콜레라가 발생한 화도면에서 반출된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
농림부는 노씨의 농장을 중심으로 반경 3㎞ 안에 자리잡은 양돈농가의 돼지들을 대상으로 혈청검사를 실시, 돼지콜레라에 감염된 것으로 판명되면 역추적해서 판매 금지조치를 내렸다. 돼지콜레라는 인수(人獸) 공통 전염병이 아니기 때문에 감염된 돼지고기를 먹어도 탈은 없다.
2002년 일본서 인체통신장치 개발
서로 악수하거나 어깨를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개인정보를 상대방의 휴대전화 등 단말기에 보낼 수 있는‘인체통신’장비가 일본에서 개발됐다. NTT와 NTT도코모는 사람의 몸에도 다소의 전류가 흐르고 있다는 점에 착안, 사람의 몸이 접촉할 경우 자신의 휴대전화 안의 신상정보 등이 상대편 휴대전화 안으로 순간적으로 전송되는 장치를 개발했다고 보도했다.
전철역 개찰구를 통과할 때 손을 대기만 해도 전자화폐로 요금이 지급된다든지, 문 손잡이를 잡는 것만으로도 개인의 정보를 파악, 열어줄 사람과 열어주지 않을 사람을 가리는 장치로도 응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닛케이의 설명이다.
이 기술은 사람의 몸을 마치 통신전선처럼 생각하고, 휴대전화에 붙은 전용 송수신기를 사용해 약한 전기신호를 보내는 방법이다. 악수를 할 때 ‘인체 통신’으로 자신의 이름이나 전화번호·이메일 주소 등을 교환하면, 이런 개인정보가 상대 단말기 주소록에 자동적으로 등록된다. 옷이나 핸드백도 어느 정도 전기가 흐르기 때문에 휴대전화 등 단말기를 주머니나 백 속에 넣어두어도 통신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2002년 인터넷주소자원관리 공청회 개최
2001년 케냐 은데레바, 여자 마라톤 세계신기록
마라톤 왕국 케냐의 캐서린 은데레바(29)가 2001년 10월 7일 벌어진 미국 시카고마라톤 여자부에서 2시간18분47초의 세계 최고기록을 세우며 2년 연속으로 이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1주일 전 독일 베를린 마라톤에서 다카하시 나오코(29·일본)가 세운 종전기록 2시간19분46초를 무려 59초나 단축한 것이다. 이로써 은데레바는 통산랭킹 1위, 7위 기록(2시간21분33초)을 함께 보유한 `세계 1인자`로 이름을 올렸으며, 이 대회에서만 상금과 기록 보너스로 17만5000달러를 받았다.
다카하시에 이어 은데레바가 20분 벽을 돌파한 것은 1925년 2시간30분 벽을 처음 깨고(2시간29분02초·앨버트 미켈슨), 28년 뒤에 2시간20분 내(2시간18분41초·제임스 피터스)로 진입한 남자보다 6년이나 빠른 페이스다. 남자는 1999년 하누치의 세계기록 수립 이후 2시간6분대로 퇴보한 반면, 여자는 1999년 베를린마라톤에서 테글라 로루페(케냐)가 작성했던 세계최고기록(2시간20분43초)을 2분 가까이 단축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보였다.
2001년 미군,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군사거점 공격(테러와의 전쟁 시작)
2001년 10월7일 9011테러로 깊은 슬픔과 공포에 빠진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주요목표는 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라덴을 잡는 것
미국은 오사마 빈라덴을 보호하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데 이어 이라크를 공격하며, 제한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가 무너지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처형당했다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된지 10년이 지난 2011년5월1일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2001년 `철인` 칼 립켄 주니어, 메이저리그 은퇴
1998년 ‘매슈 사건’ 발생, 동성애자 매슈 셰퍼드(21) 나체에 구타당한 채로 발견
1998년 10월 7일 미국 국립공원 ‘옐로스톤’ 캠퍼스 인근의 바(bar)에 있던 21세의 동성애자 매슈는 자신도 게이라며 그를 유인한 두 명의 청년에 의해 끌려 나갔다. 18시간 후, 그는 교회의 인적이 뜸한 농장의 통나무 울타리에 묶인 채, 온몸이 피범벅이 된 상태로 발견됐다. 피로 물든 매슈는 린치를 당하여, 두개골이 골절되고, 얼굴과 목이 10여 군데 찢어졌으며, 18시간 가까이 추위에 노출되어 저체온증으로 혼수상태였다. 그는 덴버의 대학병원으로 옮겨져 집중치료를 받았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닷새 만에 숨을 거두었다.
미국에서 터진 이 엄청난 사건은 동성애자들이 제법 존재하고 그들의 문화가 일부 수용되던 미국 사회로 하여금 성적소수자의 인권문제뿐 아니라 종교, 장애인, 인종 등 수많은 편견에 대해 뜨거운 논쟁과 반성을 불러일으켰다. 오늘날 ‘매슈 사건’은 ‘성(性)’과 관련된 사례 가운데 하나로, 대학 강의에서 흔히 인용되고 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일본 방문(~10.10)
1998년 탤런트 이낙훈씨 별세
탤런트 이낙훈씨가 1998년 10월 7일 40여년 무대인생을 마감했다. 이낙훈씨는 어려서 무대 인생을 시작한 타고난 연기자였다. 10살 때 이미 라디오방송의 아역 성우를 했던 그는 중학 시절 연극을 시작했으며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인 1962년 KBS 개국과 함께 본격적인 탤런트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TV를 통해 명성을 쌓으면서 연극과 영화에도 관심을 가져 연극 `리어왕` `맥베스`, 영화 `갯마을` `청춘극장` 등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또 `6백만불의 사나이` `형사 콜롬보` 등 인기 TV 외화 시리즈를 번역하기도 했다.
1979년 탤런트협회 회장이 됐던 이씨는 11대 국회의원(민정당ㆍ전국구)을 지낸 후 다시 본업인 연기자로 돌아왔다. 이씨는 1980년대 후반 영화제작과 영화수입에 손을 댔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는 1990년대 들어 다시 TV에 출연하는 한편, 경기고 출신 연극인들과 함께 `화동연우회`라는 연극단체를 만들어 정열을 쏟았다. 이후 정상적인 활동을 하던 이씨는 갑자기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된 후 합병증으로 세상을 등졌다.
1997년 남북한 항공노선 개설 위한 남북한 당사자회의 열려 남북간 관제직통전화설치 합의
1996년 24시간 케이블 뉴스 채널 폭스뉴스 첫 방송
1994년 한국-체코 문화교류협정 체결
1993년 흑인여류작가 토니 모리슨 노벨문학상 수상
1993년 10월 7일 미국의 흑인여류작가 토니 모리슨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토니 모리슨을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환상의 힘과 시적 함축으로 특징지어지는 소설을 통해 미국의 현실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적인 정수를 살려냈다"고 밝혔다. 한림원은 또 "토니 모리슨이 서사시적 힘을 갖고 있으며 대화에 올바르게 귀를 기울였고 미국 흑인을 풍부하게 묘사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가장 푸른 눈`으로 문단에 등장한뒤 `사랑하는 사람` `재즈` 등 6편의 소설과 다수의 수필을 남겼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토니 모리슨은 여성의 시점으로 미국 흑인의 역사와 삶을 그려왔지만, 흑백문학을 통틀어 미국의 현대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혀왔다. 미국작가로서는 10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모리슨은 지난 1970년 소설 `가장 푸른 눈`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1987년 `사랑하는 사람`으로 퓰리처상을 받는 등 이미 미국문단에서 스타급 작가로 대접받았다.
문학사에서 흑인의 언어와 정서가 미친 영향을 제대로 존중해야 한다는 연구 시각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모리슨의 소설은 미국 흑인문학의 살아있는 대명사로 불렸다.
1992년 미국-캐나다-멕시코, 북미자유무역협정 가조인
1990년 제11회 베이징 아시안게임 폐막, 한국 금메달 54개로 2위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 방한
교황은 1989년 10월 5일부터 10월 8일에 걸쳐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를 맞아 대한민국을 두 번째로 방문하였다. 그는 65만여 명이 운집한 여의도 광장에서 남북간의 화해를 바라는 평화 메시지를 낭독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한국에 큰 사건이나 재해가 있을 때마다 메시지를 보내왔다.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때에는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고, 2002년 태풍 루사와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태풍 매미로 말미암은 피해 때는 위로 메시지를 전해왔다.
1982년 서울시교육위원회, 1983년에 외국어고교 신설하기로
1982년 미국-소련 전략무기감축회담(START I) 재개
1982년 중국, 잠수함발사 미사일(SLBM)실험 성공
1981년 한국-일본 대륙붕 공동개발. 7소구 시추 개시
1980년 대학교수 겸직금지조치 해제
1980년 부산도시고속도로(남구-동래 15.7㎞) 개통
1980년 내무부, 인구 2만이상 면을 읍으로 승격
1979년 김형욱 前 중정부장 파리서 실종
김형욱은 1963년부터 6년 3개월간 중앙정보부장을 맡으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한때 권력의 2인자로까지 불렸다. 육군사관학교 8기로 5.16 쿠데타의 주역이기도 했다. 70년대 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밖에 나면서 정권으로부터 배척당해 73년 결국 미국으로 망명했다. 79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김형욱은 박정희 정권과의 사이가 틀어진 이후 반독재 투사를 자처했다.
박동선 로비사건을 조사중이던 미국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박 정권을 성토한 그는 79년 제3공화국과 유신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는 회고록을 썼다. 김경재 전 의원은 1980년대'박사월'이란 필명으로 '김형욱 회고록'을 펴내 베스트셀러로 만들기도 했다. 부인 신영순(74.미국 거주)씨는 88년 국회에 김씨의 실종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냈으나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하자 90년 서울가정법원에 실종선고 신청을 냈다. 이어 81년 미 법원은 가족의 소송에 따라 그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렸다.
김형욱의 사망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많이 있다
마피아에 의한 사말설, 일본납치 살해설, 프랑스 파리 인근 양계장 살해설, 사우디 납치 살해설등이 있다
1978년 충남 홍성 지진 발생(가옥 2800여채 균열, 강도 4)
1978년 10월 7일 오후 6시 21분 12초부터 3분 9초동안 충남 홍성일대에 진도5의 강진이 발생하였다
이 지진으로 2명의 부상자와 건조물 파손 54동, 주택동 건물균열 1천1개소의 피해를 내며 주민을 공포속에 몰아넣었다.
피해복구비만도 4억원으로 추산된 홍성지진은 `우리도 지진에 방심할 수는 없다`는 경각심을 갖게 했다. 특히 홍성지진을 전후해 서울, 중부지역에도 지진이 일어 `지진쇼크`를 불러왔으며 이를 계기로 지진대책 등이 대두되기도 했다.
1976년 중국 4인방(강청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 등 30여명 숙청
1975년 동독-소련 새 우호조약 조인
1970년 닉슨, 인도차이나휴전 5개항 제시
1970년 사다트 이집트대통령 취임
1969년 진주 남강 다목적댐 준공
이 발전소건설의 주체인 남강다목적댐은 낙동강의 대지류인 남강에 댐길이 975m의 중앙차수벽식 토언제(土堰堤 : 흙으로 쌓아 만든 둑)를 축조하고 이 언제에서 최단거리인 사천만까지 11㎞의 인공방수로를 굴착하여 유역면적 3,492㎢에서 유입되는 대부분의 물을 사천만까지 방류시켜 하류의 홍수피해를 줄였다.
하천연안 경작지의 관개용수 공급과 진주시·삼천포지구의 상수도 및 공업용수에 대한 수자원을 확보하는 동시에 1만2600㎾용량의 수력발전소를 설치하여 전력을 생산하는 다목적댐이다.
발전소건설은 1967년 12월 건설부와 상공부간에 한국전력주식회사에서 시공하도록 결정되어 건설부에서 시공하던 잔여공사를 한국전력주식회사가 맡게 되었다.
이 발전소는 만수위 37.5m, 저수위 31.0m, 최대사용수량 100㎥/s, 유효낙차 15m로서 벌브형 수차발전기 2대를 설치, 1971년 6월에 완공함으로써 연간 약 4000만㎾의 전력을 생산, 경상남도지방일원에 공급하였다.
이 다목적댐공사에는 66억3900만원이 투입되었고, 발전소건설에는 프랑스 상업차관 176만7000달러와 내자 7억3800만원이 소요되었다.
1964년 한국-우루과이, 국교 수립
1961년 프랑스원자력위원회, 정부의 지상핵실험 완료를 발표
1961년 한국음악협회 발족
1961년 일본-소련 국교회복 공동선언
1959년 미국 테너 가수 마리오 란자 사망
1958년 파키스탄서 쿠데타
1957년 한미우호통상-항해조약 비준서 교환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에 우호통상 및 항해에 관하여 1956년 11월 28일 서울에서 서명된 조약을 말한다. 1957년 10월 7일 서울에서 비준서를 교환하고 같은 해 11월 7일 효력이 발생하였다. 이 조약은 전문과 25개 조문으로 구성되며, 이 밖에 이 조약과 불가분의 일체로 인정되는 하나의 의정서가 있다. 이 조약은 양국간의 통상 · 거주 · 항해 등에 관하여 서로 최혜국대우 및 내국민대우를 부여하기로 규정하였다. 다만, 이 조약상 최혜국민대우규정은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의거하여 부여되는 특별편익에는 적용하지 않기로 하였다(1882년에 미국과 최초로 성립 · 체결된 「평화 · 우호 · 상업 및 항해에 관한 협약」에는 미국민에 대한 치외법권적 규정이 들어 있었다).
이 조약은 내국민대우의 정의를 규정하였고(동조약 제22조1항), 또 조약의 해석 또는 적용에 관한 분쟁으로서 외교교섭에 의하여 해결되지 않는 것은 원칙적으로 국제사법재판소에 부탁하도록 규정하였다(동조약 제24조). 이 조약의 기한은 10년, 그 후 어느 때라도 1년 전의 문서에 의한 예고로써 이 조약을 종결시킬 수 있다(동조약 제25조).
1955년 이승만 저격미수사건 범인 김재호 외 7명 거사 전날 체포
1955년 앤더슨, 흑인 첫 뉴욕 오페라단에
마리안 앤더슨은 가난한 흑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주로 교회 성가대에서 음악교육을 받았지만 노래만큼은 최고의 재능을 보였다.
23세 때 뉴욕필과 협연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그의 진가는 미국보다 유럽에서 먼저 빛을 발했다. 1930년부터 시작한 유럽 순회 공연에 유럽인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풍부한 음량과 순수한 음색에 반한 작곡가 시벨리우스는 가곡 ‘고독’을 헌정했고, 토스카니니는 ‘100년에 한 명 나오는 목소리’라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내 분위기는 유럽과 사뭇 달랐다. 1939년 워싱턴 헌법기념홀에서 음악회를 가지려 했으나 일부 보수여성단체의 반대로 공연이 취소된 것이다. 피부색이 문제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을 포함한 시민들은 그 결정에 항의하며 링컨기념관 앞에서 연주회를 열도록 주선해, 7만5000명의 관중이 모이는 대성황을 이뤘다. 당시로서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흑인 민권운동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1955년 10월7일에는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입단, 오페라 무대에 서기도 했다. 1999년 미 ABC방송은 20세기에 발자취를 남긴 분야별 100명의 여성을 발표하면서 그를 문화ㆍ예술 분야의 최고로 꼽았다. 한국에도 두 차례나 방문했다.
1950년 유엔총회, 38선 이북 진격과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설치 결의
1950년 전남일보 창간
1950년 중국군 티베트침략 시작
1949년 동독, 독일민주공화국 수립
1946년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
1945년 경기매일신문 창간
1940년 독일군, 루마니아 진주
1929년 조선일보 서울에서 경평(京平)축구대항전 개최
1917년 한강인도교 준공
10월, 용산-노들섬-노량진을 잇는 한강 인도교가 개통됐다. 1916년에 공사가 시작된 지 1년여 만에 완공됐다. 다리 중앙 부분은 폭 4.5미터의 차도였고, 좌우는 폭 1.6미터의 인도였다. 이 다리가 개통됨으로써 사람들은 배를 타지 않고 한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게 됐다. 한강 인도교는 장안의 명물로 떠오르지만, 이곳에서 투신자살하는 이들이 생긴 후 '잠깐 참고 기다리라'는 푯말이 세워지기도 한다.
1910년 일제 이완용 등 조선귀족 75명에 귀족작위 수여,
1894년 미국의 의학자 겸 문필가 올리버 웬델 홈스 사망
1886년 미국 선교사 스크랜튼, 서울에 병원 개설
1879년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성립
1849년 ‘검은 고양이’ 원작자 에드거 앨런 포 사망
추리소설의 창시자이자 상상력의 천재로 일세를 풍미했던 ‘검은 고양이’의 작가 에드거 앨런 포가 1849년 10월 7일 사망했다. 그의 재능은 비단 일반 작가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탐정소설의 원조이자 아름다운 연시 ‘애너벨 리’를 지은 시인이었고, 그리고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문학이론을 펼쳐보인 비평가였다.
그러나 살아생전 그는 궁핍, 음주, 도박, 광기, 마약, 우울증 등으로 매우 불운한 삶을 살았다. 그의 천재성이 알려진 것도 모국인 미국에서 보다 보들레르와 말라르메 같은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들의 손에 의해서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양부모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지만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첫 애인 엘미라 로이스터와의 약혼은 파경을 맞았고, 학자금 마련을 위해 도박에 손을 댔다 막대한 부채만 걸머지고 11개월 만에 버지니아 대학교를 퇴학해야했다. 그러던 1836년 사촌동생이었던 14세의 버지니아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에게 드디어 평온한 삶이 찾아오는 듯 했다. 그러나 1847년 버지니아마저 폐결핵으로 그의 곁을 떠났다. 2년 후 그는 미망인이 된 첫 애인 엘미라 로이스터와 약혼하기로 하고, 숙모 클렘을 약혼식에 초청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 볼티모어에서 술에 만취돼 의식불명인 채 거리에 쓰러져 병원에 옮겨졌으나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다 이날 사망했다.
그는 볼티모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 묘지에 묻혔고, 사후 100년 후인 1949년부터 매년 1월 19일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인물이 그의 무덤에 헌화해오고 있다.
1789(조선 정조 10) 사도세자의 무덤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으로 옮김
1747년 프린스턴 대학교의 초대 총장 디킨슨 사망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신성동맹 함대, 이슬람 함대 격파
그리스도교 함대와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함대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대규모 해전을 벌였다. 1571년 10월 7일 지중해 레판토 해역에서의 이른바 `레판토 해전`이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교황 피우스 5세의 끈질긴 노력으로 1571년 5월에 신성동맹을 결성, 전투에 참여했다. 신성동맹에는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가톨릭 국가 거의 전부가 참여했다.
전투 결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사생아인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이끄는 그리스도교 함대가 알리 파샤 휘하의 투르크 주력 함대를 격파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레판토 해전에서의 승리로 지중해가 더 이상 이슬람교도들의 호수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실제로 레판토 해전에서의 패배 이후로 어느 술탄도 더 이상 지중해의 해상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레판토 해전으로 에스파냐와 이탈리아의 최정예 병사 8,000여명이 전사했고, 부상자의 수는 그 두배에 달했다. 투르크와 이들을 도운 알제리 함대의 전사자 수는 적어도 그보다 3배는 넘었다. 그리고 약 1만 2,000명에 달하는 그리스도교 노예들이 투르크 갤리선에서 해방되었다. 이슬람 함대를 지휘한 알리 파샤는 살해돼 바다에 던져졌다.
쌍방은 수적으로나 용맹성에 있어서 용호상박(龍虎相搏)이었지만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것은 무기와 리더십의 우열에 있었다. 이슬람 군대의 갤리선에 맞선 신성동맹 함대의 갈레아스선이라는 신병기와 돈 후안의 리더십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돈 키호테의 작가 `세르반데스`도 이 전쟁에 참여해 왼쪽팔을 잃는 부상을 당했다.
1504(조선 연산 10) 성리학자 김굉필 세상 떠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