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항지(寄港地) 1
황동규
걸어서 항구(港口)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 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碇泊) 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 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현대문학』 149호, 1967.6)
[어휘풀이]
-기항지 : 항해 중인 배나 비행중인 항공기가 도중에 들르는 곳
-한지 : 추운 지방
-지전 : 지폐
-용골 : 큰 배 밑바닥의 한가운데를 이물(배의 머리)에서 고물(배의 끝)에 걸쳐 선체를 받치는 길고 큰 목재
[작품해설]
이 시는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차가운 겨울날의 항구 모습과 눈송이를 통해 차분하게 묘사해 낸 작품이다. 화자의 감정이나 사상은 배제되어 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로만 일관하고 있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중심 이미지는 정박해 있는 배이며, 그 배의 앙상함이 주는 쓸쓸함과 겨울밤 흩날리는 눈송이가 주는 황량함이 전체적으로 우울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화자는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도착한 항구는 화자가 머문 곳이자 배가 정박한 곳이다. 항구는 떠나는 배와 도착하는 배가 머무르는 곳으로, 여행의 끝인 돌시에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곳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항구는 화자의 방랑(放浪)과 안주(安住)가 접합된 장소로서의 이중적 역할을 한다. ‘길게 부는 한지의 바람 /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드는 스산한 겨울밤, 마치 눈이라도 내릴 듯 불빛이 낮게 느껴지는 항구에서 화자는 우울한 마음으로 밤 풍경을 바라보며 서 있다.
화자의 막막한 심정은 ‘구겨 넣고’, ‘꺼 버리고’와 같은 소멸의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되어 나타나 있다. 항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던 화자는 이제 ‘조용한 마음으로 /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화자는 그 곳에서 정박 중인 배들이 모두 항구 쪽으로 뱃머리를 향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멀리 바다를 향해하던 배들이 지친 항해를 끝내고 항구로 돌아와서 편안히 안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한 화자는 자신도 오랜 방랑을 끝내고 정박 중인 배처럼 안주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다. 그 때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 개의 눈송이’가 ‘하늘의 새들’과 함께 날아오른다. ‘눈송이’는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부유(浮遊)하는 속성을 가진 것으로 화자의 방황하는 젊음을 표상한다.
그러므로 마지막 구절은 바람에 흩날리며 내리는 눈발을 현란한 이미지로 그려 냄으로써 화자의 암울한 의식을 자극하는 동시에, ‘하강’의 이미지를 ‘상승’의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이룬다. 막연함, 차가움, 덧없음 등의 정서를 환기시키는 소재들과 화자의 우울한 심리가 얽혀 있던 전반부의 황량한 이미지가 후반부에 이르러 정박해 있는 ‘배’로 집중됨으로써 앞의 서성거림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로의 전환을 이룬다. 즉 거대한 용골의 모습으로 정박해서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배의 이미지는 어둡고 암울한 현실을 버텨 이겨내는 견고함의 의미를 화자에게 떠올려 준 것이다. 그로부터 비로소 화자의 암울했던 의식은 하늘을 나는 새를 통해 정화되고 오랜 방황을 끝낼 수 있게 된다.
[작가소개]
황동규(黃東奎)
1938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58년 『현대문학』에 시 「시월」, 「즐거운 편지」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8년 제13회 현대문학상 수상
1980년 한국문학상 수상
1990년 제1회 김종삼문학상 수상
1995년 대산문학상
2001년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 역임
시집 : 『어떤 개인 날』(1961), 『비가(悲歌)』(1965), 『평균율 1』(공저, 1968), 『평균율 2』(공저, 1972),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1975),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열하일기』(1982), 『풍장(風葬)』(1984),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1989), 『몰운대 행(行)』(1991), 『K에게』(1991), 『미시령 큰 바람』(1993), 『외계인』(1997), 『어떤 개인날 악어를 조심하라고』(1998), 『황동규시전집』(1998),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