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8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러시아 크림대교 폭발 12명 사망 49명 부상
러시아 본토와 크림반도 사이 핵심 보급로인 크림대교가 폭발했다
폭발은 이날 새벽 크림대교를 건너는 트럭 한 대가 폭발하면서 화재가 발생해 시작됐다. 불은 철도 구간까지 번져 화물열차의 연료탱크 7량으로 옮겨붙었으며 12명이 사망하고 49명이 부상을 당했다. 폭발 직후 양방향 모두 통제됐던 크림대교는 현재 무너진 구간을 제외한 나머지 차량용 교량 운행은 통행이 부분 재개됐다. 완전 복구에는 여러 달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고로 러시아가 군수물자 보급에 큰 타격을 입었다
2022년 북한 전투기 150대 동시 출격 대규모 항공훈련
2021년 도쿄 규모 5.6 지진 발생
2014년 언론인 성유보 심장마비로 세상 떠남(71세)
2014년 검찰 '박근혜 대통령 사생활 의혹' 보도한 산케이 전 서울지국장 기소
2011년 美 '대통령의 피아니스트' 로저 윌리엄스 별세
미국의 피아니스트 로저 윌리엄스(87)가 2011년10월8일(현지 시각)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췌장암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클래식부터 재즈까지 다양한 음악을 연주한 그는 '대통령을 위한 피아니스트'로 불렸다. 33대 해리 트루먼부터 41대 조지 부시 시절까지 백악관에 초청받아 피아노를 쳤다. 생일(10월 1일)이 같은 친구였던 39대 지미 카터를 위해서는 둘의 80세 생일 때 애틀랜타에 있는 지미 카터 도서관·박물관에서 12시간이나 마라톤 연주를 했다. 40대 로널드 레이건과는 60년 넘게 우정을 이어갔다. 2008년 영부인 로라 부시를 위한 연주를 끝으로 그의 백악관 방문은 막을 내렸다.
1924년 네브래스카 오마하에서 태어나 1950년 줄리아드 음대에 들어가 테디 윌슨에게서 재즈 피아노를 배웠다. 1955년 음반 '고엽(Autumn Leaves)'이 피아노 연주 사상 처음으로 빌보드 팝 차트 싱글 1위에 4주간 이름을 올렸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새긴 첫 피아니스트이다.
2010년 중국 반체제 인권운동가 류샤오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
중국의 반체제 인사이자 인권운동가인 류샤오보(劉曉波)가 2010년 10월 8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이번 결정으로 그는 최초의 중국 국적 노벨상 수상자이자, 최초로 옥중에서 노벨상 수상이 결정된 인물이 되었다.
1995년 지리성 장춘에서 태어난 그는 전형적인 학자의 길을 걷다가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해 20개월간 수감됐으며, 1996년부터 3년간 '사회질서교란죄'로 3년간의 노동교화형으로 복역하였다. 이후 유엔 인권 선언 60주년인 2008년 12월 인권 개선과 일당 독재 종식, 언론 자유 등을 골자로 한 '08 헌장' 작성에 참여하여 체포됐다. 이때 국가권력 전복 선동죄로 징역 11년을 선고 받아, 수상자 선정 발표 당시 동북부 랴오닝(遼寧)성 감옥에서 복역 중이었다.
수상 결정에 대해 중국 공안 당국은 보도통제 등을 통해 국내에 수상 소식 자체를 숨겼으며, 노벨평화상 수상자에 대한 독일과 프랑스 등 국외의 류사오보에 대한 석방요구 및 인권개선 요구에 직면했다. 이에 중국 정부는 노벨위원회가 수감 중인 인물을 선정하여 명예를 실추하였고, 노벨평화상을 '반중(反中)'의 도구로 삼았다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홍콩·대만·싱가포르 등 중화권 언론은 그의 수상 사실을 속보로 보도하며 축하하였다. 또한, 중국 내에서도 네티즌들이 보도통제를 뚫고 수상 사실을 전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인도·파키스탄 대지진 발생
파키스탄 북동부 인도 국경 지방에서 2005년 10월8일 오전 8시 50분쯤(현지시각) 리히터 규모 7.6의 강진이 발생, 수 만명이 다치거나 사망했다.
파키스탄-인도 간 분쟁 지역인 카슈미르와 산간 마을들은 산사태 등으로 완전 초토화되면서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고,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는 아파트와 상가 건물 등이 무너지면서 엄청난 인명 피해를 냈다.
이번 지진으로 파키스탄 내 사망자가 1만 8000명에 이르며, 부상자는 4만 1000명에 달하는 가운데 사망자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보도했다.
파키스탄 북동부는 2001년 인도 구자라트주 대지진(1만 4000여명 사망) 등 여러 차례 강진이 발생한 지역이다. 학자들이 말하는 이 일대 진지 원인은 ‘판구조론’의 ‘지각충돌’에 따른 것. 판구조론은 지구의 표층인 지각을 형성하는 13개의 판이 맨틀 위를 매우 느린 속도로 떠다니면서 서로 충돌하거나 하나의 판이 다른 판 아래로 들어가 솟아오르면서 지진·화산 등의 현상을 일으킨다는 이론이다. 즉 이번 강진은 인도·파키스탄이 위치한 ‘인도판’이 북쪽으로 이동, ‘유라시아판’과 충돌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2004년 아프라카 케냐 환경운동가 왕가리 마타이 아프리카 여성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
2002년 황해도 송죽리 고분서 새 벽화 발굴
무덤을 지키는 흰둥이와 누렁개, 말 탄 자세에서 상체를 돌려 활을 자유자재로 쏘며 (파르티안 슛·partian shoot) 호랑이를 쫓는 호방한 무사들….
한민족의 가장 찬란한 문화유산 중 하나인 고구려 고분 벽화가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목록을 새로 추가했다. 1600여년 만에 제 모습을 드러낸 황해북도 연탄군 송죽리 고구려 고분 벽화는 일부 떨어져 나간 부분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앞 방과 현실(玄室·시신을 안치한 방) 두 방 구조로 이뤄진 이 무덤은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까지의 길이가 8m에 이르고 있어, 전체 봉분의 직경은 30m에 이르는 왕릉급으로 추정된다.
도굴 당한 채 옥수수밭에 방치된 상태였으며, 머리 뒤에 꽂는 은제 뒤꽂이 3점, 은으로 장식한 관 못 등이 발굴됐다. 발굴단은 4~5세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벽화는 석회를 바른 뒤 돌 등을 빻아 만든 자연 안료로 그렸다.
이같은 사실은 발굴에 참여한 일본 고구려회 나가시마 기미치카 회장이 8일 부산대에서 열린 ‘북한 고고학의 최신 성과’ 세미나에서 처음 국내에 공개했다.
나가시마 회장은 “섬세한 선과 아름다운 색채로 그린 고구려인의 얼굴이나 비늘갑옷(찰갑·찰갑)을 입은 무사상의 세부 묘사 등에서 고구려인들의 뛰어난 미의식을 느낄 수 있다”며 “공동 조사한 북한 연구자들조차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아름다운 벽화’라고 평했다”고 전했다.
2002년 단말기 보조금 3년간 금지하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 국무회의서 의결
2001년 밀입국하려던 중국 동포 등 25명 시신 수장(水葬)
중국동포 11명과 중국인 등 60명이 한국 어선에 숨어 국내로 밀입국하려다 선상에서 25명이 집단 질식사한 사고가 발생했다. 이들의 시체는 모두 바다에 버려진 것으로 확인됐고, 나머지 35명은 여수 부근 대경도와 돌산도 등에 상륙했다가 2001년 10월 8일 전원 검거되어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로 신병이 인도됐다.
이들 밀입국자들은 지난 1일 오후 8시쯤 중국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에서 100t급 중국 어선을 타고 출항, 6일 오전 1시쯤 제주도 남방 동중국해 공해상에서 태창호로 옮겨 탔다. 처음 갑판에서 머물던 이들은 해안이 가까워지자 7일 오전10시쯤 배 뒤편 물탱크와 그물(어구) 창고에 35명, 25명씩 나눠 숨었다. 그러나 고기 창고로도 사용되는 그물 창고는 높이 3m, 넓이 3평 남짓한 크기인데다 어구 등으로 입구를 완전히 덮는 바람에 이곳에 숨었던 25명은 불과 3시간 뒤인 7일 오후 1시쯤 선원들에 의해 숨진 채 발견됐다. 선장 이씨 등은 8일 오전 3시30분쯤 가막만 등대 부근에서 생존자 35명을 한국 어선에 인계했고, 운반책 여모(52)씨에게서 핸드폰으로 수장 지시를 받고 소리도 앞 해상으로 나가 오전 6시쯤 숨진 밀입국자들을 바다에 던졌다.
2001년 배리 본즈, 박찬호로부터 미 프로야구 사상 최다 홈런 수립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배리 본즈(Barry Bonds)가 2001년 10월 8일 LA다저스와 벌인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1회말 상대 투수 데니스 스프링어로부터 오른쪽 담장을 넘기는 한 점짜리 홈런을 날려 미국 메이저리그 시즌 최다 홈런인 73호를 수립했다.
이에 앞서 6일 본즈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벌어진 LA 다저스와의 경기서 1회와 3회 박찬호로부터 연타석 솔로 홈런을 뽑아내 시즌 71호-72호를 기록했었다. 경기 1회말 2사 후 주자 없는 상황 때 등장, 볼카운트 원 볼에서 박찬호의 바깥쪽 낮은 공을 잡아당겨 오른쪽 담장을 넘기는 135m짜리 홈런으로 연결했다. 전광판엔 `71`이란 숫자가 새겨졌다. 미 프로야구(MLB) 최다 홈런 기록이 바뀌었음이 전세계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본즈는 이로써 1998년 마크 맥과이어가 수립했던 70개의 종전기록을 3년 만에 갈아치웠다. 이어 3회말 선두타자로 나와 다시 박찬호에게서 123m짜리 중월 솔로 홈런을 터뜨렸다. 72홈런이었다.
1999년 영국 런던법원 전 칠레 독재자 피노체트의 스페인 인도 허용
1998년 원로 삽화가 김영주씨 별세
원로삽화가 김영주(金榮注)씨가 8일 오후 10시 강원 원주기독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0세.
1919년 강원 양양에서 태어난 김씨는 고향에서 일본인 가와하라 다케오로부터 그림을 배운 뒤 40년대 선전(鮮展)에 두번 입선했다.
1950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정비석의 소설 ‘청춘산맥’의 삽화를 시작으로 김래성의 ‘애인’(54), 박계주의 ‘구원의 정화’(54), 이무영의 ‘창’(55) 등을 그렸다.
1998년 조세 사라마구 노벨문학상 수상
포르투갈 작가 조세 사라마구(75)가 1998년 10월 8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상상력과 열정, 절묘한 아이러니로 뒷받침된 우화. 이는 조세 사라마구의 작품세계를 나타내주는 키워드들이다. 그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독창적인 상상력과 우화적 기법으로 녹여내는 작가다.
그는 1922년 포르투갈 리바테조 지방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먹고살기 위해 학교를 중퇴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에서 자라난 그는 25세 때 도덕적 위기에 빠진 농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죄악의 나라`라는 첫 소설을 발표하지만 별로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는 이후 문학보다는 우파 독재자 안토니오 살라자르에게 맞서는 공산주의 활동에 전념했다.
그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유물론은 이때 형성된 것이다. 1974년 군사 쿠데타로 살라자르 정권이 무너진 뒤 소설쓰기를 재개한다. 1977년 발표한 `회화와 글쓰기에 관한 지침서`에서는 전통을 따르는 것에 싫증을 느끼게 된 한 작가의 내면 고백 형식을 통해 글쓰기와 문학창작에 깃든 창조성의 문제를 파고들면서 그의 궁극적 관심이 `예술`에 있음을 내비쳤다.
1998년 프로야구선수 타이론 우즈, 첫 외국인선수 MVP에 선정
OB의 외국인 선수 타이론 우즈(29)가 98시즌 프로야구 최고 선수로 뽑혔다. 우즈는 1998년 10월 8일 열린 98프로야구 최우수선수(MVP) 투표에서 LG 김용수(38)를 누르고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외국인선수 MVP가 됐다.
우즈는 1차투표에서 26표를 얻어 1위를 했으나 과반수 득표(38표)에 실패, 24표를 얻은 2위 김용수와 2차투표에서 29표를 얻어 영예를 안았다. 이로써 OB는 프로야구 원년(1982년)의 박철순과 95년 김상호에 이어 3번째 시즌 MVP를 배출했다. 이날 우즈는 홈런 신기록(42개)에 시즌 MVP까지 경사가 한꺼번에 겹쳤다. 신인왕에는 현대의 김수경 선수가 선정됐다.
1997년 김정일 당총비서직 공식승계 발표
1994년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완간
소설가 박경리가 1969년 6월부터 집필한 장편 대하소설 ‘토지’가 1994년 10월8일 전 5부 16권으로 완간 되었다
경남 하동군 평사리와 간도 용정, 진주 등을 배경으로 동학혁명, 일제강점기, 해방에 이르기 까지 우리민족의 한 많은 근현대사를 폭 넓게 그려낸 ‘토지’는 한 지주 가문을 통해 한민족이 겪은 고난을 생생하게 형상화 함은 물론 다양한 군상들의 근원적인 면을 치열하게 담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얻었다
1992년 빌리 브란트 전(前) 독일 총리 사망
동방정책을 추진, 독일통일의 초석을 마련했던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가 1992년 10월 8일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브란트는 서독의 국부인 아데나워와 함께 오늘의 통일 독일이 있기까지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1913년 12월 18일 독일북부의 뤼벡에서 여점원의 사생아로 태어난 브란트는 어린시절 가난한 생활을 통해 일찍부터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다.
서베를린에서 정치생활을 시작한 그는 서베를린 시장(1957년), 사민당 당수(1964년) 등을 거쳐 1966년 대연정(大聯政)을 구성, 부총리겸 외무장관으로 재직했다. 1969년 사민당 출신으론 전후(戰後) 처음으로 독일 총리에 취임했으나, 1974년 보좌관 귄터 귀욤의 스파이 활동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브란트 전 총리의 이름이 국제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1년 베를린장벽이 설치될 때 아데나워 당시 총리가 소극적인 대응을 보인데 반해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적극적으로 나선데 따른 것이다. 브란트가 `독일에 필요한 것은 서(西)에 대한 맹목적인 의존이 아니라 동(東)에 대한 화해의 몸짓`이라는 신념을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부터였다.
1969년 10월 총리로 선출된 브란트는 곧바로 오스폴리티크(동방정책)라는 이름의 대화합정책에 착수했다. 이 정책의 성공적인 수행을 인정받아 브란트는 197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동서독은 1972년 양국간 통행협정과 동서독 기본조약체결, 1973년 유엔동시가입 등으로 공존과 통일을 향한 장도에 접어들었다.
브란트는 ‘과거의 적’에 대해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데 있어서도 주저하지 않았다. 브란트가 1970년 폴란드를 방문, 바르샤바 유태인 거주지에서 무릎을 꿇고 나치에 의해 희생된 영령에 대해 참배하는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1992년 세인트루시아의 시인 데레크 월코트, 노벨문학상 수상
영국 연방 세인트 루시아 출신의 시인 데레크 월코트(62)가 1992년 10월 8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월코트는 1930년 영국계 아버지와 아프리카 노예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사회사업가인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교육받았으며, 1953년 트리니다드로 이사했다.
1948년 첫 시집 `25편의 시`를 출간했고, 1962년 런던에서 `초록빛 밤 속에서`를 펴내 일약 카리브해 문학의 획기적인 시인으로 부상했다. 이 시집은 과거의 시와는 달리 단순한 영문학의 모방이 아니라, 카리브해의 매혹적인 정서를 현지인의 어법으로 생생하게 표현해보려 했다.
1985년부터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오메로스` (1990)로 199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장엄한 서사시는 `복합적 혈통과 카리브 해에게서 얻은 감각과 리듬으로 카리브 해 현실과 풍광 속에 세계 문화의 모든 조류를 용해시킨`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2년 현승종 제24대 국무총리 취임
1990년 무용가 한영숙 사망
1988년 탈옥수 지강헌 사건 발생
서울 영등포 교도소에서 대전과 공주 교도소로 이감 중이던 지강헌 등 미결수 12명이 1988년 10월 8일 오전9시30분경 중부고속도로 일죽 인터체인지 3km 전방에서 호송버스를 탈취해 달아났다. 지강헌 등 7명은 16일 새벽 4시30분경 자살유혈극이 끝날때까지 서울시내 전역을 누비고 다녔다.
마지막으로 서대문구 북가좌동 민가에 들어가 인질극을 벌리고 자수를 권하는 가족과 보도진을 향해 `돈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옥살이를 하지 않고 돈 없는 사람만 감옥에 남아 있다`는 뜻으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을 남기고 안광술 등 2명은 자살하고 지강헌은 사살당했다.
1985년 남북체육회담, IOC주재로 로잔에서 열림
1985년 IMF(국제통화기금)와 IBRD(세계은행) 합동총회 서울서 열림
1984년 삼성반도체 256KD램 개발
1983년 중공, 신학대 개설
1983년 창경원 동물가족,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사 시작
1983년 전두환 대통령 서남아, 대양주 6개국 순방 등정
1982년 폴란드 자유노조 해체
1980년 서울지검, 처음으로 순회법률상담제 실시
1978년 미국, 크루즈미사일 실험성공 발표
1977년 예비군, `쌍용 작전` 개시
1977년 김정용 서울대 교수 바이러스성 B형간염 예방백신 개발
1975년 살인마 김대두 검거
55일 동안 전남 경기 서울 일대를 누비며 8회에 걸쳐 17명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마 김대두가 1975년 10월 8일 검거됐다. 그는 이날 오전 수상한 청년이 피 묻은 청바지를 맡기고 갔다는 서울시 소재 세탁소 주인 아들의 신고로 검거됐다.
그는 폭력전과 2범으로 김영태 등의 별명을 사용하며 고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나이에 비해 앳되보이는 얼굴에 차림새도 멀쩡한 그는 “교도소에 있다가 사회에 나오니까 할 일도 없고 배운 기술도 없었다. 친척이나 친구들도 전과자라고 해서 냉대를 했다. 남보다 끝발나게 살고싶었는데 집에서는 도와줄 형편이 못돼 일을 저질렀다”고 어처구니없는 범행동기를 밝혔다.
5월 17일 수원교도소를 나온 김대두는 8월 13일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전남 광산군의 민가에 복면을 하고 침입, 살인행각을 시작했다. 경기도 시흥에서는 생후 3개월 된 어린이와 어머니를 살해하는 등 이날 검거될 때까지 칼과 망치, 심지어 돌로도 살인을 일삼았다. 그가 빼앗은 금품은 현금 2만6천원과 여자 손목시계 등이 전부였다.
결국 11월 27일 그는 강도, 살인과 미수, 강간죄 등이 적용돼 공범 김회운과 함께 사형이 선고되었고 1976년 12월 28일 사형이 집행됐다
1975년 김옥선 의원 파동
신민당의 김옥선 의원이 1975년 10월 8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유신헌법 옹호를 목적으로 하는 궐기대회가 너무 잦다며 `관제안보`라고 강경 비판하자 집권당인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이 모두 퇴장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집권당은 회의를 거듭한 끝에 김 의원의 발언을 `반 국가적인 언동`으로 규정, 김의원을 징계, 제명키로 결정하고 10월 10일 국회 법사위를 긴급 소집해 신민당 의원들의 반대 속에 김의원의 제명징계안을 가결시켰다. 김의원을 구제하려는 신민당의 노력이 무산되자 김의원은 10월 13일 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신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당초의 제명 방침을 바꿔 참석의원 1백53명 전원의 찬성으로 사퇴서를 수리하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1973년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 사망
1970년 프랑스 소설가 장 지오노 사망
20세기 프랑스 소설사에서 전원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장 지오노가 1970년 10월 8일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지오노는 프랑스 남부 오트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 마노스크에서 태어나 평생 고향을 지키며 창작의 밭을 일궜던 지방 작가였다.
지오노의 출세작 `언덕`(1928년) 등 30여편의 소설과 희곡, 시나리오 등은 프랑스 문학사의 큰 별들만 수록하는 `플레이야드` 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자연 찬미가였던 그는 프로방스를 무대로 한 풍부하고 다양한 이미지의 작품으로 널리 칭송받았다.
지오노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공이었고, 어머니는 세탁소에서 다리미질을 하면서 어렵게 살림을 꾸려나갔다. 지오노는 열여섯살 때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은행 사환으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유럽 고전들을 섭렵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징집돼 몇 차례 사선을 넘나들면서, 전쟁을 통해 드러난 서구 문명의 야만성에 진저리를 쳤다. 이 체험으로, 작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현대 문명을 비판적으로 성찰했고, `자연 앞에 선 인간`을 형상화하면서 인간과 자연, 무생물이 합일되는 범신론적 생명관을 노래했다.
1970년 소련 작가 솔제니친 노벨문학상 수상
1969년 전북지구 지하간첩단 사건
1968년 법관추천회의, 새 대법원장에 민복기 선출(21일 정식임명)
1967년 영국 정치가 애틀리 사망
1967년 체 게바라 볼리비아 정부군과 전투중 총상 입고 체포
1963년 유엔총회, 월남의 불교도박해 조사단파견 결의
1962년 이승만대통령, 미군의 철수연기를 요구
1959년 정부, 대일통상해제 원칙을 결정
1955년 국회, 한국통일방안 결의
1952년 한국휴전회담서 유엔측 무기한 휴전통고
1951년 한국-미국 재정협정 조인
1951년 휴전회담장소 판문점으로 결정
1951년 역사학자 김성칠 작고
1950년 한국전쟁 중 중국 유엔의 유엔군 38선 통과 결의를 중국안보위협으로 판단 참전 결정
1943년 총독부, 생산증강 노무강화요강 발표
1942년 인도서 반영국소요. 3천명 사상
1932년 법정 스님 출생
1929년 제1회 경ㆍ평축구전
조선일보는 1929년 들어 특히 스포츠 사업에 전력을 다했다. 침체해가는 민족정신을 스포츠로 되살려보자는 취지였다. 전(全)조선여자배구대회, 전조선여자농구대회, 전조선씨름대회 등이 그 해에 처음 열린 대회들이다. 그 가운데 ‘경ㆍ평(京ㆍ平) 축구대항전’은 단연 백미였다.
1929년 10월8일, 제1회 대회 첫 경기가 7000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휘문고보 운동장에 열렸다. 첫 경기는 1대1 무승부였으나 9일ㆍ10일 경기에서 평양팀의 연승으로 첫 대회는 평양팀이 종합전적 2승1무로 경성팀을 앞섰다.
경기는 격투기를 방불케 할 만큼 거칠어 상대지역을 방문하는 선수들은 부상을 각오해야 했다. 응원전도 치열해 경기가 있는 날이면 경ㆍ평을 연결하는 기차는 언제나 응원 인파로 초만원이었다. 평양에서 경기가 있는 날이면 온 시가는 철시했고 경기장 주변은 기생들이 타고온 인력거로 미어터졌다.
이듬해 2회 대회까지 치렀으나 급기야 응원과열과 두팀간의 지나친 승부욕으로 1931년ㆍ1932년 2년간은 경기를 중단해야 했다. 1933년에 재개돼 1935년까지 이어졌으나 결국 판정시비가 불씨가 돼 1935년에 완전 중단됐다. 일제하 조선민족의 큰잔치였다.
1928년 장개석,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
1912년 제1차 발칸전쟁 일어남
1910년 중추원 부의장에 김윤식, 고문에 이완용 등 14명 임명
1909년 이화학당 세운 스크랜튼 여사 사망
1908년 구세군 한국본영 창설
구세군 창설자 윌리엄 부스 대장이 1907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재일 한국 유학생들이 한국에서도 구세군 사업을 전개하여 줄 것을 부스 대장에게 요청했다. 평소 동양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부스 대장은 한국 선교를 결심하고 G.S.레이턴과 J.롤리 두 사관을 한국에 파견, 답사하게 한 후 1908년 10월 1일 호가트 정령, 번윅(한국명 반우거) 참령, 밀턴 기관과 여자 독신사관 등 일행을 한국 개척 사관으로 임명, 서울 서대문에 처음 주재하게 했다.
10월 8일 이들은 구세군 혈화 군기를 서울 중심지인 황토현(현재 광화문 네거리)에 세우고 가로전도(街路傳道)로 구령(救靈)의 포문을 열었다. 이것이 구세군 한국본영의 기원이 됐다. 이색적인 군복을 입은 서양인들이 전하는 복음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큰 희망을 갖게 하였지만 당시 한국 민중들이 구세군에게 기대했던 희망은 영적인 것보다는 민족적인 문제가 우선이었다.
이후 한국 구세군은 포교 7년 만에 선교사관 20여 명과 한국인 사관 수십 명으로 확장하였고, 서울-개성-해주-영동-대구와 전라도 각 지방 등 89처에 전도소를 설치했다.
1895년 명성황후, 일본에 의해 시해(을미사변)
한나라의 국모가 그것도 자신의 궁궐에서 처참하게 살육당하는 천인공노할 사건이 벌어진 것은 1895년 10월8일 이른바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높여가던 일본에게 명성황후는 눈엣가시였다
국제정세에 밝은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하고자 러시아를 적극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조정 곳곳에 자리하고 있던 친일파 들이 축출되었다
다급한 일본은 무인 출신인 미우라로 주한 일본공사를 교체하고 그를 중심으로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이날 새벽 5시께 경복궁의 망루인 동십자각이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일본인 낭인들이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으로 들이닥쳤다
낭인들은 거침없이 명성황후의 침실을 습격하고 잔인하게 살해했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르기도 했다
이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고도 일본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사건이라고 발뺌을 했다
하지만 미국인과 러시아인이 현장에서 목격, 전 세계에 전해졌다
하는 수 없이 일본은 미우라 등을 투옥했으나 이내 증거불충분으로 석방 시켰다
이날의 참변은 고종의 아관파천과 함께 전국적인 항일의병 투쟁의 계기가 되었다
1895년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 출생
1879년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1871년 시카고 대화재
1833년에 겨우 150명에 불과했던 인구가 1870년에는 30만명으로 급증할 만큼 시카고는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그러던 어느날 40년동안 일궈온 모든 것들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든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1871년 10월 8일 저녁 9시에 발생한 불이 다음날 오전까지 계속돼 도시 전체를 삼켜버린 것이다. 화재가 아니라 재앙이었다. 10km에 달하는 시가지는 잿더미로 변해 8만여채의 건물이 불에 타고 10만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죽은 사람만도 300명을 헤아렸다. 정확한 화재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불에 타기 쉬운 소나무로 보도(步道)를 깔았다는 사실 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시카고는 다시 일어섰다. 고대 로마가 불에 탄 뒤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한 것처럼 시카고에도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 1개월 만에 5,000 채의 주택이 세워졌다. 어느덧 시카고는 새로운 건축기술의 경연장이 되었고, 미국 건축의 살아있는 박물관이 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층건물을 짓는데 필수적인 철골 구조 건축이 바로 이곳에서 화재후 10여년 만에 창조됐다는 사실이다. ‘마천루(摩天樓ㆍskyscraper)의 시대’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1869(조선 고종 6) 종로 상가에 큰 불 종각 불탐
1735년 중국 청조 13대 황제 옹정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