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이숙(6) 살아있으라 하지마세요 순교자의 본을 받아 나의 믿음 지키고 순교자의 신앙 따라 이 복음을 전하세 불과 같은 성령이여 내 맘에 항상 계셔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주여 지켜주옵소서 안이숙의 신앙고백이 진하게 배인 자작곡 찬양이다. 1945년, 8‧15해방의 기쁨은 잠시였다. 소련군의 야만적이고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교회를 핍박하는 공산당은 적그리스도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넘어왔다. 안이숙 모녀도 38선을 넘어서 서울에 이르러 윤원삼 장로의 딸네 집에 머물렀지만 앞일이 막막했다. 그녀의 글이다. “결혼하기도 어려웠다... 피가 부족하고 심장이 약해서 숨쉬기가 힘들고, 기침도 아직 쉴 새 없이 계속 나서 내 몸도 감당하기 힘 드는데, 시집살이는 도저히 가망이 없어 보였다. 돈은 거의 바닥이 나고 살길은 막연했다.” 기도할 곳을 찾았다. 하나님과 의논하고 싶었던 것이다. 종착역이 항구인 목포행 호남선 기차를 탔다. 그 때 이야기가 이렇다. “목포서 가까운 해남海南이라는 섬을 찾아갔다... 해변 가에 있는 큰 바위를 보고 나는 그 위에 가서 앉았다... 밀려드는 물결을 보고 나는 주님 앞에 어떻게 내 가슴에 쌓인 말을 다 고할까하고 한참 바닷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주님을 대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우선 나는 실컷 울었다.” 그 해남이라는 곳이 고하도 어디였던 것 같다. 그녀는 밤새워 기도했다. “하나님... 해방이라는 상급 아래 자유의 몸이 되게 해 주셨을 때 저는 큰 흥분과 감격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쓸어 밀려온 야만인 소련군과 자기만 위하는 공산세계의 탄압에서 살 수 없어 이 산 설고 물선 서울에 오기는 왔지만, 주님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 앞에 살길은 딱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다시 이 땅에 발붙일 곳이 없어졌습니다... 한 국가와 민족이 멸망 자리도 뛰어 들어갈 때, 저는 번제물이 되어서 당신의 음성을 따라... 폐인처럼 되어버린 이 여종에게 주님은 무엇을 더 찾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제가 더 살아 기동해야겠아오면 그 할 길을 마련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렇게 안하시고 저더러 더 살아있으라 하시지 마세요.” 애절하다. 결사적이다. 바다는 아침 햇살에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심령 깊은데서 찬송이 터져 나왔다. ‘살아생전 숨 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 거룩하신 주 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서울로 돌아왔다. 그녀의 삶에 또 다른 사명,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열려지고 있었다. 미국인 필리스 코오(Philis Coe)자매가 찾아온 것이다. “아! 당신은 미국에서 굉장하게 이름이 났는데도 당신 자신이 어떤 이인가를 모르시는군요. 당신은 미국에 가야 하는데…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미국? 왜 그들을 만나야한다는 말인가? 사연이 있었다. 만주에서 의료선교활동을 했던 바이람 선교사가 일제의 강제출국 조치로 귀국했을 때 <죽으면 죽으리라-If I perish, I perish> 라는 책자를 발간해서 가는 곳 마다 돌렸는데, 그 내용은 안이숙이 일본 제국의회에 경고한 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는 내용이었다. 그녀의 에스더 같은 믿음이 미국 교회에 널리 퍼졌던 것이다. 그렇게 미국행을 결정하고 어머니와 헤어진다. . “어머니, 제가 없는 동안에 먼저 천당 가시지 마시고 기다리셔야 합니다. 석 달 후면 꼭 돌아오겠습니다.” 딸의 인사에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얘, 감옥에 갈 때도 천성문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천국 같은 미국을 가면서 뭣 때문에 급하게 돌아오려고 하냐... 천국문에서 만나자꾸나. 내 걱정 마라. 일제 때 배급을 안줘도 살았는데 염려할 것 하나도 없다... 배우고 싶은 것 배워가지고 오려무나.” 그 어머니에 그 딸이다.
목포까지 내려와 눈물로 기도했던 안이숙을 하나님께서는 평생 살아야 할 미국 보내셨다. ‘죽으면 죽으리라’ 일사각오의 사람. 어두운 밤하늘에 별빛처럼 빛나는 ‘한국 교회의 에스더’ 아닌가. -안이숙, 죽으면 죽으리라 기독교문사 1990, 25판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