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것의 의미 / 존 버거 / 박범수 옮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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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베이컨과 월트 디즈니
피로 얼룩이 진 인물이 침대에 누워 있다. 여기저기 부목을 댄 사람의 몸체. 담배를 피우면서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 한 사람이 그의 그림을 마치 그것이 거대한 공공 시설이라도 되는 것처럼 걸어서 지나친다. 앉아 있는 의자를 회전시키고 있는 남자. 면도날을 든 남자. 똥을 누고 있는 남자.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사건들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림 속의 이 인물들은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의 존재나 곤경에 대해서는 아주 무관심하다. 우리가 그 인물들을 보며 걸어 지나치면서,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인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는 모습인 베이컨의 사진은 그의 팔뚝이 그가 그린 수많은 사람들의 팔뚝과 아주 닮아가는 것을 보여 준다. 한 여자가 어린아이처럼 레일을 따라 기어가고 있다. <코레상스 테자르>(예술의 인식)라는 잡지에 따르면, 1971년 베이컨은 생존해 있는 가장 중요한 10명의 화가들 가운데 첫째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 남자가 벌거벗은 채 앉아 있고, 찢어진 신문지가 그의 두 발 주위에 놓여 있다. 한 남자는 햇볕가리개 끈을 노려보고 있다. 조끼를 입은 남자는 붉은 얼룩이 진 침상에 비스듬히 뒤로 기대고 누워 있다. 움직이는 많은 얼굴들은 움직이면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것과 아주 같은 그림은 일찍이 없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하여 말한다. 하지만 어떻게 말인가?
우선 몇 가지 사실들을 들어보자
1) 프랜시스 베이컨은 20세기 들어 국제적인 영향력을 얻어온 유일한 영국 화가이다.
2) 그의 작품은 최초의 그림들에서 가장 최근의 것에 이르기까지 놀라울 정도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충분히 명료하게 표현된 세계관에 직면하게 된다.
3) 베이건은 비범한 기교를 지닌 화가이자 대가이다. 유화로 회화적 표현을 해내야 하는 것의 문제점들에 익숙한 그 누구도 그가 내세우는 해결책에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함부로 찾아볼 수 없는 그러한 정통함은 이 매체에 대한 엄청난 헌신과 극도의 평정이 가져온 결과인 것이다.
4) 베이컨의 작품에 대한 해석은 제대로 이루어져 왔다. 베이비드 실베스터 - 미셀 레리스, 그리고 로렌스 고윙과 같은 비평가들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바에 대하여 뛰어난 능변으로 논의해 왔다. '본질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내가 의미하는 바는 그것 자체의 표현 안에 들어 있는 그것 자체의 주장을 함축한다는 뜻이다.
베이컨의 작품은 인간의 몸체에 집중되어 있다. 그 몸체는 개개 뒤틀려 있는 반면, 그 몸체에 입혀져 있는 옷이나 그 몸체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비교적 뒤틀려 있지가 않다. 비옷과 몸통, 우산과 팔, 담배꽁초와 입을 비교해 보라. 베이컨 자신에 의하면, 얼굴이나 몸이 겪게 되는 뒤틀림은 그가 안료를 '신경 계통과 직접 만나게' 만드는 방법을 찾으면서 얻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되풀이 해서 그는 화가와 관객의 신경 계통에 대해 언급한다. 그에게 있어서 신경 계통이라는 것은 두뇌와는 독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두뇌에 호소하는 그러한 종류의 회화적 표현이 도해나 마찬가지이며, 지루한 것임을 알게 된다.
나는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한 사물을 직접적이고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게 되길 바랐으며, 아마도 어떤 한 가지 사물을 직접
적으로 마주치게 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운 것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신경 계통에 직접 말을 거는 이러한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베이컨은 그가 '사고(事故)'라 부르는 것에 크게 의존한다. "내 경우, 나는 그것이 무엇이건 내가 좋아했던 것이라면, 그것은 그것에서부터 내가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인 하나의 사고가 가져온 결과였다고 느낍니다."
그의 그림에서 이러한 '사고'는 그가 화포에 '무의식중에 본의 아닌 표시들'을 하게 될 때 생겨난다. 그렇게 되면 그의 '본능'은 이러한 표시들에서 이미지로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개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이미지는 사실에 입각한 것이라면서 신경 계통에 암시를 주는 것, 두 가지 모두가 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의 사물이 가능한 한 사실에 입각한 것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림을 그릴
때 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단순이 대상을 도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깊은 암시를 주는 것이거나, 또는 감각의 영역을 깊은 곳까지
열리게 하는 것을 그려내는 것이 아닌가요? 그것이 예술이 추구하는 전부가 아닌가요?
베이컨에게 대상을 '열리게 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몸체이다. 그의 그림에서 다른 사물들(의자들, 신발들, 햇볕가리개들, 전등스위치들, 신문지들)은 단순히 도해된 것들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사물들을 그 외양을 훨씬 넘어서까지 뒤틀어 놓는 것이지만, 그 뒤틀어 놓기는 외양의 기록이라는 것을 다
시 상기시켜 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과정을 이해했으니 이제 우리는 이것이 다음과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어떤 몸체의 외양은, 그 위에 찍혀진 무의식중에 이루어진 본의 아닌 표시들이라는 사고를 겪는다. 그것의 뒤틀린 이미지는, 그 다음 그것이 가지고 있는 표시를 통하여, 또는 그 표시의 아래에 감처진 몸체의 외양을 재발견해 내는 관람자(또는 화가)의 신경 계통과 직접 마주치게 된다.
그리면서 우연히 가해진 표시들과는 별개의 것으로서, 때로는 몸체나 매트리스에 그려진 표시들 또한 존재한다. 어느 정도 눈에 띄게 채액의 흔적들 (피, 정액, 어쩌면 대변과 같은)이 존재한다. 그런 일이 생겨나면 화포에 나타난 얼룩들은 실제로 그 몸체와 맞닿아 있는 표면에 생긴 얼룩과 같이 되는 것이다.
베이컨이 자신의 그림에 대하여 말할 때면 언제나 사용하는 낱말들(사고, 있는 그대로임, 표시들)의 이중적인 의미, 그리고 어쩌면 그 자신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이중의 의미조차도 몰두의 어휘이자, 어쩌면 그의 자의식이 시작된 곳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일 수도 있는 경험의 어휘의 일부로 여겨진다. 베이컨의 세계에 제공되는 대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빠져 나갈 길이라곤 없다. 시간이나 변화에 대한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베이컨은 사진에서 얻어낸 이미지로부터 한 점의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시작하는 경우가 흔하다. 사진은 하나의 순간에 대한 기록이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베이컨은 그 순간을 모든 순간으로 바꿔놓게 될 사고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체에 있어서 이전과 이후의 모든 순간들을 몰아내는 순간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고통의 순간인 경우가 가장 흔하다. 그리고 고통이라는 것은 베이컨의 집착이 열망하고 있는 이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의 내용이 되는 것, 즉 그 그림이 가지고 있는 호소력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고통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이다. 흔히 그러하듯 그러한 집착은 하나의 기분전환이며 진짜 알맹이는 엉뚱한 곳에 들어 있는 것이다.
베이컨의 작품은 서유럽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뇌에 찬 외로움의 표현이라고들 말한다. 그의 인물들은 유리상자 속에, 순수한 색채로 되어 있는 투기장 속에, 익명의 방들 속에, 또는 바로 그들 자신의 내부에서까도 고립되어 있다. 그들의 소외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관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다. (각각의 인물이 그 스스로가 차지하고 있는 화포 내부에 고립되어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그들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3부작 형식의 작품은 그러한 사실에 대한 징후가 된다.) 그의 인물들은 혼자이지만, 그들은 전적으로 남의 눈을 피할 수가 없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표시들, 그들의 상처들은 스스로 자초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그것들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개인에 의한 것이 아닌 인간이라는 종에 의한 것인데, 그 까닭은 그토록 보편적인 고독함이라는 조건하에서는 개인과 종 사이의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베이컨은 최악의 것을 있음직한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세계 종말과 같은 것을 그려내는 화가와는 정반대에 있다. 베이컨에게 그러한 최악의 것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일어나고 있었던 그러한 최악의 것은 피나 얼룩들 - 내장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 최악의 것은 인간이 생각없는 존재로 여겨지게 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 최악의 것은 1944년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음>이라는 작품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붕대와 비명은 이미 제자리를 잡고 있으며, 이상적인 고통을 향한 열망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목들은 입에서 끝난다. 얼굴의 위쪽 절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개골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뒤에 오게 되면, 그 최악의 것은 보다 미묘하게 불러일으켜진다. 인간의 해부학적 구조는 그대로 남겨져 있고, 심사숙고하는 것에 대한 인간의 무능함은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의해서와 그의 표정, 또는 표정이 없는 것에 의해 암시되고 있다. 친구들, 혹은 교황이 들어가 있는 유리 상자들은 동물의 행동 양식을 연구하는 데 사용되는 유리 상자들을 생각나게 해주는 것들이다. 소도구들, 매달린 의자들, 난간들, 끈들은 그 우리 안에 설치되는 것들과 같은 것들이다. 인간은 불행한 원숭이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는 불행하지 않다. 따라서 인간이 그 사실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불행한 원숭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불행한 원숭이인 것이다. 인간과 원숭이 두 종을 분리시켜 놓고 있는 것은 두뇌가 아니라 지각하는 힘인 것이다. 이것이 베이컨의 작품이 기초하고 있는 공리가 되는 것이다.
1950년대초, 베이컨은 얼굴 표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가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그 얼굴 표정이 표현하고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공포보다는 그 공포로 인해 지르게 되는 비명을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무엇이 누군가로 하여금 비명을 지르게 만드는 것(비명을 지르게 만드는 공포와 같은)인가에 대해 진정으로 생각을 해왔다면, 그것은 내가 그려내려 했던 비명을 보다 성공적으로 그려내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원래 입과 입의 형태, 이들의 움직임에 의해 내가 언제나 아주 감동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통해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입에서 나오는 반짝임과 색조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모래가 그려냈던 해지는 풍경과도 같은 입을 그려낼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자벨 로스돈과 같은 자기 친구들의 초상화, 또는 그가 새로 그린 일부 자화상에서, 우리는 한쪽 눈에, 때로는 두 눈에 들어 있는 표정과 대면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 표현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그것들을 해석해 보라. 그 중 어느것도 스스로에 대하여 숙고하고 있는 눈이 아니다. 그 눈들은 그것들이 처한 상황에서, 그저 멍청하게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것들이 보여 주고 있는 신랄함은 그것들의 무지함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에 더하여 그것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들 얼굴의 나머지 부분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닌 표정으로 일그러진 것이 되어 왔는데, 그것은 실로 젼혀 표정이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그 얼굴들 이면에는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화가와의 충돌에서 우연히 생겨난 사건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적으로 우연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유사함은 남아 있는 것이며, 그 유사함에서 베이컨은 그의 완성된 모든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사함은 성격을 규정하고, 인간에 있어서 성격이라는 것은 정신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 초상화들 중 어떤 것들은 미술사에서 그 유례가 없는 것이며, 비록 절대로 비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이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격이라는 것을 결여된 의식의 비어 있는 거푸집으로 여기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최악의 것은 있어 왔다. 살아 있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생각이 없는 망령이 되어 온 것이다.
한 명 이상의 사람이 등장하는 좀더 큰 규모의 인물 구성 작품들에서 표정의 부재는 전적으로 다른 인물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의해 조화를 이룬다. 그들은 모두 계속해서 서로를 탐색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어던 표정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찌푸린 표정만이 남아 있게 된다.
부조리한 것에 대한 베이컨의 견해는 실존주의, 혹은 사뮈엘 베케트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과는 전혀 공통점을 갖고 있지 못하다. 베케트는 절망에 대하여 따지고 드는 것의 결과로서, 전통적으로 그 답이 주어져 있는 언어를 해명해 내려 드는 것의 결과로서 접근한다. 베이컨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따지고 들지 않으며,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해명하지 않는다. 그는 최악의 것이 있어왔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인간의 조건에 대한 그의 견해 내에서 그가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은, 그가 일생 동안 제작해 낸 작품에 있어서 그 어떤 주제와 관련된 발전이 없었다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다. 30년 동안에 걸친 그의 진보라는 것은, 최악의 것에 보다 날카로운 초점을 맞추는 기교적인 것이다. 그는 성공을 거두지만, 동시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기교는그 최악의 것을 보다 덜 신뢰할 만한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것이 그가 가지고 있는 역설적인 면이다. 우리가 그의 그림이 걸려 있는 방들을 하나하나 걸어 지나가면서, 우리는 우리가 최악의 것과 함께 공존할 수 있으며, 그것을 거듭해서 계속 그려낼 수 있으며, 그것을 점점 더 우아한 미술품으로 바꿔 놓을 수 있으며, 그것을 둘레가 벨벳과 금으로 된 액자에 넣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그들이 식사하는 방에 걸어두기 위해 사들이게 되리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베이컨은 협잡꾼일 수도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자신의 집착에 대한 그의 성실함은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역설적인 면이, 비록 그것이 자신이 의도했던 진실은 아닐지라도, 일관성을 가진 진실을 낳도록 보증해 주는 것이 된다.
베이컨의 작품은 사실상 순응주의적인 것이다. 그와 비교되어야만 사는 사람은 고야, 혹은 초기의 에이젠슈테인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월트 디즈니가 되어야 한다. 베이컨과 디즈니 두 사람 모두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소외된 행동에 대한 조건을 제시하며, 그 둘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것 그대로를 인정하도록 권유한다. 디즈니는 소외된 자들의 행동을 우스꽝스럽고 감상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따라서 인정할 수 있는 것이 되게 한다. 베이컨은 그러한 행동을 있을 수 있는 최악의 것이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해석하며, 따라서 그것을 거부하거나 바라는 것 둘 모두 무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놀라울 정도의 형식에 있어서의 유사성(손발이 뒤틀려 있는 방식, 모체의 전반적인 형태, 인물들이 배경 및 다른 인물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관계, 단정한 양복의 이용, 손의 동작, 사용된 색체의 범위)은 두 사람 모두 이 동일한 위기에 대하여 보완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의 결과인 것이다.
디즈니의 세계 또한 시시한 폭력으로 채워져 있다. 최후의 파국은 언제나 가까운 장래에 있다 그의 피조물들은 개성과 침착성이 없는 태도 두 가지 모두를 지니고 있으며,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거의 언제나) 정신이다. 만약 디즈나기 만든 만화의 장면을 보기에 앞서 우리가 그밖의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막을 읽고 그것을 믿는다면, 그 만화영화는 베이컨이 그린 그림만큼이나 소를끼치는 인상을 주게 될 것이다.
베이컨의 그림들은 흔히 그렇게 말해지듯이 외로움 - 고뇌, 혹은 형이상학적 의문점의 그 어떤 실제적 경험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지 않으며, 또한 사회적 관계, 관료주의, 산업사회, 혹은 20세기의 역사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 중 그 어떤 것이건 하기 위해서라면 그것들은 의식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이 되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한 일은 어떤 방식으로 소외가 그것 자체의 절대적인 형식(그것은 생각을 갖고 있지 못함이라는 것이다)에 대한 갈망을 자극하는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이 베이컨의 작품에서 표현되고 있다기보다는 입증되고 있는 일관성 있는 진리인 것인다.
(197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