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과 질료
아래 그림은 라파엘로가 교황의 청을 받고 그린 그림으로 인간의 철학을 상징하는 ‘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이다. 왼쪽 계단 밑에는 피타고라스가 열심히 수학 문제를 풀고 있고, 그 반대편에는 유클리드가 땅바닥을 가리키며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계단의 한가운데는 희대의 견유학파(犬儒學派)인 디오게네스가 개처럼 누워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림의 왼편에서 사람들과 논쟁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를 고르라면 누가 뭐래도 정중앙에서 열띠게 대화하고 있는 두 철학자일 것이다. 백발마저 벗겨진 늙은 노인은 손가락 끝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그 옆에 제자처럼 보이는 남성은 손바닥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다. 이 두 사람은 누구일까? 늙은 사람은 플라톤이고, 제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이 가리키는 하늘과 땅의 의미는 무엇일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 어떤 사상을 지녔는지 알아보자.
플라톤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는 존재하며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 진리를 모사한 것
이라고 한다. 이 진리의 세계를 이데아(Idea)라 부른다. 현실 세계는 진짜 세계인 이데아를 모방한 것이라 하였다. 플라톤은 절대적 진리인 이데아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에 반대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주장하는 절대적이고 불변하며 보편적인 진리, 즉 이데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은 이데아를 탐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나무로 만든 책상, 철로 만든 책상 등을 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플라톤은 “이것들은 책상이라는 절대적 진리가 될 수는 없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책상의 진짜가 아니고, 이데아에 있는 책상의 모방품이라고 말한다. 그 옆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나무로 만들어졌든 쇠로 만들어졌든, 이것들이 책상이
라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라고. 현실 세계에 있는 책상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 플라톤이 절대적이고 불변하며 보편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동안, 아리스토텔레스는 개개의 특성은 다를지라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진리는 절대적인 것인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는 상대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가 질료(質料)와 형상(形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질료와 형상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심 개념이다. 형상은 각 사물이 지닌 본질이다. 나무를 나무이게 하는 것, 개를 개이게 하는 것이 바로 형상이다. 나무 책상은 나무로 되어 있고, 유리잔은 유리로 되어 있다. 이렇게 실체를 구성하는 물질을 질료라고 한다. 나무는 책상의 질료이고, 유리는 유리잔의 질료가 된다. 책상은 책상이라는 본질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책상이란 본질은 형상이다. 유리잔은 유리잔이라는 본질을 갖고 있다. 유리잔이란 본질 그것은 형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라는 궁극적 세계를 성정하고 현실을 그것의 모방으로 여기는 스승 플라톤의 이상주의에 반기를 든 것이다. 현실의 모습을 긍정하기 위해 질료와 형상이라는 설명방식을 도입했다. 현실은 질료와 형상의 결합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자였다.
이것이 바로 위 그림에서 보이는 두 사람의 손 방향이 다른 차이다. 플라톤이 진리 세계인 이데아가 현실 세계 밖에 있다고 하여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이데아의 세계는 별도로 없다고 하여 땅을 가리키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 형상과 질료가 함께 있을 뿐이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란 형상의 일부이며 형상은 질료의 집합체라 생각했다. 두 개의 개념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모든 것을 초월한 ‘책상’이라는 단 하나의 이데아를 추구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기에는 나무나 철판과 같은 질료 없이는 책상이라는 형상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을 질료와 형상으로 구분하면서, 질료가 형상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형상이 질료가 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나무를 질료로 한 책상이란 형상도, 가구라는 형상의 질료로 존재할 수 있다. 가구는 또 집이라는 더 거대한 형상의 질료가 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끝없이 질료를 추구한다면 궁극적인 질료에 닿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이를 제일질료라고 불렀다. 어떤 형상도 갖지 않은 최초의 질료다. 또한 계속해서 형상을 추구한다면 궁극적인 형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어떠한 질료도 가지지 않은 형상만 존재하는 것을 순수형상이라 한다. 즉 플라톤이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하나의 진리를 추구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 존재하는 상대적인 질료와 형상을 추구했다. 이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심을 두는 것은 순수형상이다. 질료 없이 순수하게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최후의 현실태는 무엇일까? 그러한 순수형상은 결국 ‘신’이다. 신이라는 형상에는 질료가 없다. 온 세상은 결국 신이라는 형상을 추구하면서 질료와 형상으로 결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