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함께
십 여 년 전에 제가 CLC (그리스도 생활 공동체)라는 예수회 영성을 따르는 평신도들 모임의 지도 신부를 한 적이 있지요. 당시 CLC에서 매월 회보를 내고 있었는데 타이틀이 ‘여럿이 함께’였어요. 저는 참 좋은 표제를 골랐다고 생각했어요. 그 후 지도 신부를 그만두고 제가 다시 공부하러 미국에 가 있을 때, 당시 의장이던 분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몇몇 회원이 회보의 표제를 ‘여럿이 함께’에서 ‘바람을 거슬러’로 바꾸자고 하는데 그것이 적절한 표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제 의견을 묻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어떤 답을 했겠습니까? 두 표제를 두고 여러분들이 받는 느낌은 어떠세요? 바람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이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희랍말로 바람과 성령은 같은 단어이지요. ‘바람을 거슬러’라는 말은 즉시 ‘성령을 거슬러’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지요. 제가 그런 이유로 ‘바람을 거슬러’라는 표제는 좋지 않고, ‘여럿이 함께’가 CLC가 추구하는 이미지에 적절하니 바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의 답장을 보냈지요.
‘바람을 거슬러’로 하자고 의견을 낸 회원들의 주장은 그것이 이냐시오 영성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당시 제가 박사과정에서 이냐시오 영성을 공부하고 있던 때라 이냐시오 영성에 관한 책은 거의 다 읽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냐시오 영성에서 전혀 나오지 않는 표현을 도대체 어디서 찾아서 회보의 표제로 삼으려고 할까를 생각해 보니 성 이냐시오의 전기 작가 중의 한 사람이 성 이냐시오를 가리켜서 ‘시대의 조류’를 거슬러 싸운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잘못 해석한 결과가 아닐까 짐작했지요.
제가 CLC 지도 신부로 있을 때, CLC 창단 회원으로 오랫동안 마치 대부처럼 뒤에서 막강한 힘으로 모든 것을 조정을 하는 친구와 그 친구의 추종자 몇 사람이 있었는데 제가 이들과 갈등이 생겼었지요. 저는 CLC가 더 커 나가고 좀더 ‘여럿이 함께’하고 열린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폭 넓게 회원을 받아들이자는 의견을 냈고, 서약할 회원을 결정하면서 조금 부족하게 느껴지는 회원도 격려해 주면서 받아들이자고 하자, 지도 신부가 간섭을 한다고 해서 제가 CLC 지도 신부 직에서 쫓겨나는 형국이 되었지요. 하하. 그런지 일년 뒤에 당시 의장이지만 그 대부의 추종자가 아닌 사람에게서 제 의견을 묻는 편지를 받은 것이지요.
‘바람을 거슬러'라는 표제는 그 대부와 그 추종자들이 낸 의견이었지요. 그때 제가 그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 곧 성령을 거스르는 일과 참 기가 막히게 맞는 표제를 골랐다는 생각과 더불어 이것은 CLC의 운명과 연관하여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으며 참 마음이 아팠어요. 저는 정말 CLC에 대해 큰 애정을 지니고 있고 CLC가 한국에서 ’여럿이 함께‘하고 보다 열려 있는 공동체로 커 나가기를 바랐는데 결국 ’바람을 거스르는‘ 공동체가 되는 표징으로 느껴졌으니까요. 당시 의장은 참 좋은 분이었지만 제 의견을 수용할 힘이 없었고, 그 후 CLC에서도 탈퇴하게 되었지요. 따라서 제가 염려했던 대로 회보의 표제는 ’바람을 거슬러‘로 정해졌고, CLC에서 그 대부와 그 추종자들은 계속 성령을 거슬러 당시 예수회 지도 신부 뿐만 아니라 예수회 전체를 적대시하고 아주 커다란 상처를 주었지요.
‘여럿이 함께’는 신영복 선생님이 감옥에서 나오신 후에 처음으로 쓰신 붓글씨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어느 강연에서 오래 전, 프랜시스 골튼이라는 통계학자이자 유전학자가 겪은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분이 어느 날 시골 장터에 갔답니다. 그랬더니 황소 한 마리를 무대에 올려놓고 그 소의 몸무게를 맞추는 퀴즈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돈을 얼마씩 낸 뒤, 각자 소의 몸무게를 종이에 적어 통에 넣고 제일 가깝게 맞춘 사람이 각자가 낸 돈을 모두 가져가는 것입니다.
프랜시스 골튼이 지켜보던 날은 800명이 이 행사에 참가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소의 몸무게를 얼마나 맞출 수 있을까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아마 아무도 못 맞출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통을 열어 확인해보니 정말 맞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걸 조사해보니 13명은 무엇을 적었는지 판독이 불가능했습니다. 그걸 빼면 787장이 남는데, 거기에 적힌 숫자들을 다 더해서 다시 787로 나눴더니 1197파운드라는 숫자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소의 몸무게가 얼마였는지 아세요? 1198파운드였습니다.
어쩌면 소의 몸무게가 정확하게 1197파운드였는지도 모르지요. 저울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을 보고 프랜시스 골튼은 크게 깨달았답니다. 단 한 사람도 맞추지 못 했지만, 여러 사람의 판단이 모이니까 정확한 몸무게를 맞출 수 있었던 것이죠. 말하자면, 한 사람의 날카로운 눈보다 ‘여럿이 함께’보는 눈이 정확한 것이지요.
신영복 선생님이 감옥에서 나와서 붓글씨로 처음 쓴 내용인 "여럿이 함께"를 다들 참 좋다고 하더랍니다. 당시에는 한글 액자가 별로 없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이 잘 아는 후배 교수 한 사람이 여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답니다. "여럿이 함께"라는 말에는 방법만 있고 목표가 없다는 것이지요. "여럿이 함께 어디로 가자는 거냐. 그건 방법이지 목표가 없지 않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선생님이 글씨 아래에 방서를 쓰기 시작했답니다.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난다."라고요. 선생님은 여럿이 함께 가야 할 목표는 이렇게 생겨난 길 위에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답니다.
우리에게는 길이 따로 필요 없지요. 바로 주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여럿이 함께 그분만을 따라 가면 되지요. “나, 또는 우리만 옳다.”라는 생각이 얼만 큰 독선이고 오류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늘 여럿이 함께 마음을 모으고 서로 부족한 것은 채워주면서 서로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저는 제가 당시나 지금이나 CLC에서 대부 노릇을 하던 분이나 그 추종자들에게 아무런 사적인 적대 감정이 없고 서로에 대한 이해 부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깊은 연민을 지니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도 한국에서 CLC가 성령께 의탁 드리며 그분 안에서 지난 과거의 갈등과 상처를 씻고 보다 열려 있는 공동체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
첫댓글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난다." 여럿이 함께 가고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기쁨의 미소를 지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안에 머무르면서...길이요,생명이며,진리이신, 성령께서 우리안에서 자유롭게 춤을 덩실 덩실 추실수있게 마음의 자리를 마련해드려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