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청진지구 유구 유적
♤ 유구유적 (서울시 종로구 종로3길 17, 청진동 246)
높은 빌딩 숲이 들어선 도시 한복판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한 듯 과거 서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로 유명한 광화문 D타워 주변은 과거 왕실과 국가 의례의 수요품을 공급하는 상점인 어용 상설 시장이 있던 자리로,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D타워의 전면과 후면, 중앙 통로에는 15~17세기 건물지 3기와 우물지 1기가 보존되어 있다
조선 시대 19세기 문화층에서 노출된 청진동 262번지 우물은 도로 상에 위치해 공용 우물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지며, 청진 1~3지구의 옛 지명인 개정동이라는 명칭이 이 우물과 관련되어 유래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랑서울 타워 아래에는 조선 시대 운종가(사람과 물화가 구름처럼 몰려드는 경제 중심지)를 발굴한 도시문화복원소가 자리 잡고 있으며, 무기 등 주요 제품을 수리하던 수리 공방에서 출토된 총통을 보유하고 있다
조선 시대 전략 무기인 총통이 과거 민가에서 많이 출토된 것은 맞은편에 의금부가 자리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한다
♤ 서울지구 병사구사령부 터 (서울시 종로구 청진동 128)
우리나라 병무행정(병무청)이 처음 시작된 곳이다
♤ 노포 ① 청진옥 (서울시 종로구 종로3길 32, 청진동 183-1)
1937년 피맛골 해장국 골목(청진동 89번지 일대) 시장에서 손맛 좋기로 소문한 이간난 할머니가 작은 솥을 하나 걸어놓고 국밥을 말아 팔던 것이 시초다
이후 가게가 생긴 후에는 잠시 ‘평화관’이란 이름 으로 불리다 한국전쟁 직후 지금의 '청진옥'으로 상호를 바꿨다
산업화 과정과 종로 일대 재개발사업을 거치면서 거대 오피스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귀퉁이로 자리를 옮겼지만 명목을 견고히 유지해 나갔다
2017년 이곳으로 이전하여 3대째 운영(운영자 최준용)하고 있다
이곳의 해장국은 소내장과 우골, 선지를 우려낸 맑은 국물이 특징이며, 서민 음식문화를 잘 보여주는 곳으로 식문화사 측면에서 보존가치가 높은 곳이다
청진공원 (서울시 종로구 청진동 146-3)
♤ 곡성 사과나무
♤ 신채호 가옥 모과나무
♤ 종로홍보관
육의전 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 33, 청진동 70)
종로1가 54번지와 종로2가 14번지 일대는 조선시대 시전(市廛)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육의전이 있었다
일명 육주비전(六注比廛), 육부전(六部廛) 등으로 불린 육의전은 일반적으로 비단을 파는 선전(縇廛), 무명을 파는 면포전(綿布廛), 명주를 파는 면주전 (綿紬廛), 종이를 파는 지전(紙廛), 모시와 베를 파는 저포전(苧布廛), 생선을 파는 어물전(魚物廛) 등을 일컫는데 고종 때는 백목전(白木廛)이 추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 육의전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무상 으로 조달하여 주는 대신 난전(亂廛)을 금할 수 있는 특권 등을 부여받아 그 권한이 막강하였다
♤ 피맛(避馬)골에 관한 설(說)
설 1)
조선시대에 서민들이 큰 길을 지나다가 벼슬아치를 만나면 엎드려 절을 해야만 했다
이런 일이 빈번해지자 서민들은 마차를 피해서 뒤편의 좁은 길로 다니게 되었다
이 좁은 길을 따라 주점이나 국밥집 등이 생겨났고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다
말을 피하는 골목이라 피맛(避馬)골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설 2)
지금의 세종로는 조선시대 한양의 중심 도로로 주로 남들에게 피마(避馬)할 필요가 없는 고관대작들이 지나다녔다
왕이나 고관대작의 행차에는 '휘이 물럿거라~ ㅇㅇ대감 행차시다~'라며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거덜꾼들이 있었고, 이 거덜 행렬과 만나면 아랫계급 사람들은 피마 예법에 맞취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했다
그러다 보니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관리들은 이 거덜행렬과 만날 때마다 말에서 내려야 해서 지각하기 일쑤였다
이로 인해 업무상 차질이 심해지자 결국 조정에서 하급관리들이 바로 내달릴 수 있는 길을 만들었고 이 길 이름이 피맛길이 된 것이다
설 3)
말과 소달구지가 지나가는 종로대로는 말똥과 소똥이 너무 많아 걷기에 적합한 길이 아니었다
특히 비가오는 날이면 오물투성이라 악취도 심하고 걷기엔 최악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로대로가 아닌 뒷길로 다녔고 피맛길이 된 것이다
의금부 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 47, 공평동 100)
조선시대 의금부(義禁府)는 원래 순군부(巡軍府)였던 것을 태종 때 순금사(巡禁司)로 했다가 다시 이를 개편하여 만든 것으로, 임금의 명을 받들어 추국(推鞫)을 관장하던 기관이었다
이곳에서는 주로 왕족에 관한 범죄, 국사범(國事犯) 과 강상죄(綱常罪)에 관한 처결, 사헌부 등 다른 기관에서 판결이 지연되는 사건 등을 다루었다
근대시기에 이르러 갑오개혁을 통해 의금부는 폐지되고 그 자리에는 자연스레 사법기관이 들어서면서 고등재판소가 터를 잡게 되었는데, 역대 사법제도의 변천과 관련하여 최고재판소의 명칭을 간추려보면 ‘재판소구성법’ 제정 이후 고등재판소 (高等裁判所; 1895. 4. 1) → 평리원(平理院; 1899. 5. 30) → 대심원(大審院; 1908. 1. 1; 8.1일 개청) → 고등법원(高等法院; 1909. 11. 1)의 순서 로 바뀌었다
1898년 5월 29일(양력 7월 18일)에 고등재판소 에서 해월과 황만기, 박윤대, 송일회 등 4명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는데 해월은 교수형, 나머지 3명은 태형과 징역형에 처해졌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는 고등법원이 1911년12월에 서소문동으로 먼저 자리를 옮겨가고 옛 평리원 터에는 지방법원과 복심법원이 남았다가 1928년에 ‘경성삼법원’ 청사(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 건물)의 완공과 더불어 그곳으로 이전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 이후 이곳에는 한성전기회사 터에 자리하고 있던 종로경찰서(鐘路警察署, 1929.9~1943.10)가 옮겨왔다
이렇게 보면 옛 의금부 터는 국권침탈기 이후 재판소와 경찰서의 용도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바로 이 자리는 무수한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겪게 만든 현장이었던 셈이다
♤ 천주교 순교 터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면 지도급 천주교인 (주교, 신부, 그리고 유명한 신도 지도자들)을 국사범, 반역모반 죄인으로 엄하게 다스려 대부분 이곳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의금부에서 추국을 받은 천주교인으로는
a. 1801년 신유박해 때의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비롯하여 이승훈 베드로, 이가환, 이기양, 강이천, 황사영 알렉시오
b. 1839년 기해박해 때의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정하상 바오로, 조신철 가롤로 및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
c. 1866년 병인박해 때의
남종삼 요한, 홍봉주 토마스 등이 있다
또한 이곳은 1597년 4월 1일 충무공 이순신이 선조의 명을 받고 출옥하여 백의 종군길을 떠난 출발지이다
백의종군로는 충무공 이순신이 한양(서울)을 출발하여 초계(합천 율곡)까지 간 행적로와 동년 8월 3일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재 임명되기 전 까지의 행적로이다
♤ 신신백화점(신신아케이드)
신신백화점은 중앙에 통로가 있는 아케이드 형식의 상가로, 통로 상부에 비를 막을 수 있는 지붕이 있어 요즘의 재래시장과 비슷한 형태였다
시민회관과 국제극장의 건축가였던 이천승이 설계한 신신백화점은 국제극장과 마찬가지로 정식 건축허가를 받지 않은 가건물이었다
당시에는 보기 드문 커튼월 구조에, 중앙통로에 분수대도 설치하는 등 여러 가지로 신경을 많이 쓴 건물이었다
화신백화점과 함께 1960~70년대 서울 시민들이 자주 찾는 쇼핑의 명소였던 신신백화점은 모기업이었던 화신그룹의 부도로 제일은행(현 SC제일은행)에 매각되었고 83년 철거되고 만다
1987년 10월 5일 제일은행(현 SC제일은행) 본점이 신축하여 이전하여 왔다
첫댓글 청진옥 해장국 한그릇에 소주한잔 생각남니다.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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