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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를 부르심(막3:13-19)
◈ 원문강해 ◈
제자들을 양육하시는 그리스도
본문에는 예수 사역의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가 기술되고 있다. 예수님이 친히 동행하면서 양육할 제자들을 선택한 것이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심을 통하여, 생전에는 함께하셨고, 승천 후에는 보내어 증인들로 삼으셨다(E.Best).
1. 부르심과 나아옴(13절)
예수의 지상 사역의 대부분이 제자들을 양육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본문 중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계신다.
1) 예수의 부르심
(Kai; ajnabaivne eij" to; o[ro" kai; proskalei'tai ou}" h[qelen aujtov", kai; ajph'lqon pro;" aujtovn. 카이 아나바이네이 에이스 토 오로스 카이 프로스칼레이타이 후스 에델렌 아우토스 카이 아펠돈 프로스 아우톤 ;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3a절)
'산'(to; o[ro"토 오로스)에 정관사를 붙여 지칭하였다. '그 산'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당시 사람들이 잘 알던 산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E.Gould). 그러나 신학적으로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있던 산을 '그 산'으로 묘사하고 있고, 그곳은 하나님과 가까운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었다(W.Grundmann, W.L.Lane, R.Pesch). 지리적으로는 갈릴리 북쪽의 구릉 지대를 뜻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C.E.B.Cranfield, V.Taylor).
자기의 원하는 자들(h[qelen aujtov",에델렌아우노스)에서 에델렌은 3인칭단수 미완료과거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과거에 한 번만 원했던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원하셨음을 보여 준다. 아우토스라는 3인칭대명사는 강조적 용법으로 덧붙여 쓰여졌다(E.Gould).
'부르시니'(proskalei'tai프로스칼레이타이)는 프로스칼레오마이(proskalevomai자기에게 부르다)의 현재 중간태로서 예수께서 자신을 위하여 또는 자신에게 부르심을 암시한다(F.Reinecker). 원래 이 동사의 의미는 설교나 가르침을 위해서 모은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기에게로 나아오게 하셨다는 뜻에서의 '불러주심'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R.A.Guelich).
2) 제자들의 나아옴
(Kai; ajph'lqon pro;" aujtovn. ; 카이 아펠돈 프로스 아우톤 ;나아온지라, 13b절)
'나아온지라'(ajph'lqon;아펠돈)는 그 이전의 삶의 방식을 떠나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나아온다는 말이다. 즉 이 단어를 통해서 단순히 나아오는 것을 묘사하기보다는 실존적이고 결단적인 응답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간파할 수 있다(J.Gnilka, Lagrange, G.Sohmahl). 또한 개역성경에서는 프로스 아우톤(pro;" aujtovn그에게로)이 생략되어 있다. 이 말은 바로 그(예수)가 그들의 새롭고도 유일한 삷의 지향점과 목표가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Lagrange, G.Schmahl).
2. 제자 세우신 목적(14,15절)
제자들을 세우신 목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동행함으로 양육하시고 내어 보내어 전도하게 하신 것이다.
1) 전도의 사명
(kai ejpoivhsen dwvdeka... i{na w\sin met j aujtou' kai; i{na ajpostevllh aujtou;" khruvssein ; 카이 에포이에센 도데카...히나 오신 메트 아우투 카이 히나 아포스텔레 아우투스 케뤼세인 ;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4절)
'세우셨으니'(ejpoivhsen; 에포이에센)는 단순과거시제로서 단 한 번 일회적으로 세우셨음을 의미한다(A.H.Chase).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우신 목적으로는 두 가지가 나온다. 그 하나는 '함께 있게 하시고'(i{na w\sin히나오신)이며, 다른 하나는 '보내사'(i{na ajpostevllh/히나 아포스텔레)이다. 이 중 전자는 육체적인 존재나 사물 혹은 인물과의 동행 내지는 동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예수가 사역을 하면서 실제로 함께 데리고 다님을 의미하며, 열두 제자들의 특별한 위치를 나타내주고 있다(E.Best, K.Stock). 후자는 다시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진다. 그 중의 하나는 14절에 '전도도 하며'(khruvssein케륏세인)이다. 이때 '전도한다'는 동사의 원 의미는 전투에서 전령으로 행동하도록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W.Bauer).
2) 축사의 권세
(kai; e[cein ejxousivan ejkbavllein ta; daimovnia: 카이 에케인 엑수시안 엑크발레인 타 다이모니아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15절)
15절의 처음에 나오는 에케인(e[cein)은 에코(e[cw있다, 가지다)의 현재부정사로서 '있게 하기 위하여'이며, '전도도 하며'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으로서 '보내사'라는 주동사에 연결된다. 즉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이유가 두 가지인데, 그 첫째 이유는 전도하게 하시기 위함이고 나머지 이유는 귀신을 쫓는 권세를 갖게 하시기 위해서 보내시는 것이다. 즉 그들을 보냄은 예수의 권세에서 멀어지는 것을 의미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냄으로써 권세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을 우리는 보게 된다. 전도와 귀신을 쫓는 권세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전도하는 것이 이 세상의 권세잡은 사단을 더 큰 하나님의 권세로 쫓아냄이라는 결론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다(Lohmeyer, K.Reploh).
3. 열둘의 이름과 별명(16-19절)
구체적인 제자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또 한 몇몇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친히 붙여 주신 이름들이 나오고 있다. 본문은 요1:42와 눅6:14-16에 병행한다.
1) 시몬 베드로
(팳ai; ejpoivhsen tou;" dwvdeka], kai ejpevqhken o[noma tw/' Sivmwni Pevtron, 카이 에포이에센 투스 도데카 카이 에페데켄 오노마 토 시모니 페트론 ;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6절)
시몬에게는 베드로(Pevtron페트론)라는 이름을 더하셨다. 보통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의미라고 해석되어 진다. 베드로의 헬라어인 페트로스(Pevtro"), 셈족 계통의 언어에서 가지는 의미가 바위(rock)라기보다는 돌(stone)에 더 가깝다(R.Lampe).
2) 우레의 아들인 보아네게와 가룟 유다
(ejpevqhken aujtoi'" ojnovma퍁a] Boanhrgev" o{ ejstin UiJoi Bronth'":...o}" kai; parevdwken aujtovn ; 에페데켄 아우토이스 오노마 타 보아네르게스 호 에스틴 휘오이 브론테스...호스 카이 파레도켄 아우톤 ;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 17-19절)
다른 제자들의 이름들은 그냥 단순히 서술되고 잇다. 그러나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그의 형제인 요한에게는 특별히 별명을 주신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즉 우레의 아들이라는 명칭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의 그 어디에도 다시 이 이름들이 나오지 않는다.
베드로와는 달리 다시 그들의 별명들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명칭으로 사용하기 위한 별명이기보다는 그들의 성격적 묘사를 위해 사용된 별명인 것으로 추정된다(O.Betz, C.E.B.
Cranfield).
우리가 이 구절들을 볼 때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는 단어가 또 하나 있다. 개역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가룟 유다를 설명하면서 '이는 예수를 판 자라'(o{" kai; parevdwken ajuvtovn.호스 카이 파레도켄 아우톤)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직역하면 '그를 또한 판 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왜 '또한'이라는 뜻의 단어가 예수를 팔았다는 설명 앞에 붙어있는 것일까? 누가 예수를 같이 팔았단 말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제자들도 예수를 나중에 부인하고 도망쳤었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R.A. Horsley, J.S.Hanson).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 문단의 열두 제자의 이름들 목록은 다른 곳의 목록들(마10:2-4눅6:14-16행1:13)과 비교할 때 많은 어려움과 자료에 대한 의혹을 가져 온다. 그러나 사소한 차이들은 모든 목록들이 매우 초기에 확정된 전승을 자기 식으로 고쳐 말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공관 복음서의 열둘의 목록이 예수와 가까이 있었으나 숫자로는 열둘 이상이었을 제자들의 느슨한 연합체들이었던 것을 어느 정도까지 드러내는 것 같다(C.S.Mann). 열두 제자의 기능적 역할도 행15장의사도들과 장로들의 기능과는 많이 다르다.
이러한 질문들 외에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첫째, 예수는 제자들 중의 핵심적인 자들을 택해서 전도자로서의 특별하고 구분되는 일을 맡겼고, 이 위임은 열둘로 상징되는 영적 이스라엘 역사의 새 시대를 암시한다. 둘째, 스승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선택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보편적인 일이었다. 셋째, 열둘에 관하여 서신서들이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은 본 단락의 사실성에 큰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본 설화의 단순성은 그 자체로 열두 제자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된다. 이 목록 자체가 더 오래된 전승이 소개하지 않았던 특징들을 갖고 있다. 넷째, 마태복음의 기록과의 대조는 매우 특징적이다.
마태복음은 열둘에 관하여 이미 인정받는 동료로 말하는데, 눅10:1의 위임을 권위의 대리임명이다. 마가복음의 기록이 예수께서 첫 제자들과 열두 제자들을 선택하시면서 사역을 시작하는 것은 누가복음과 일치한다(C.S.Mann).
1. 부름과 위임(13-15절)
13절에서 부름받은 자들의 자격에 관하여는 언급된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의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사역의 처음부터 예수와 함께있어 왔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원하시는 자들이 부름받았다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 자신들이 원해서 될 수 있지만, 그분의 사역자로서 세움받는 것은 주님이 원하실 때 가능함을 보여 준다. 마가가 자주 사용하는 '부르시니'라는 단어는 제자들, 군중들 그리고 빌라도가 백부장을 부를 때(막15;44)사용되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열둘을 택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열둘의 택함 이전에 산에서 기도하였다고 기록했다(C.S.Mann). 예수와의 친밀한 교제 이에, 열둘의 기능은 전도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병자를 고치며'라는 문구가 권세를 언급한 뒤에 있다고 몇몇 사본은 말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마10:1에 맞추려던 사본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전도하며 귀신을 쫓는 권세 위임을 받고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막6:7까지 유보된다. 이것은 선교 활동 이전에 예수와의 긴밀한 교제의 시간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마가의 의도를 보여 준다.
본문의 14,16절에 '세우셨으니'라는 구절이 있으나 몇몇 사본들은 두 번째 경우를 생략함으로 문맥 이해가 복잡해지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원본이 없거나 이제 부패되어서 회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C.S.Mann).
2. 열한 제자(16-18절)
16절의 본문은 불명확이다. 어떤 사본들은 '그리고 그가 열둘을 임명하고'로 되어 있으나, 다른 사본들은 '그가 첫째로 시몬을 임명하고'로 되어 있고 또다른 것들은 더 많은 도입부를 생략하고 있다. 그러나 필사자들은 목록에 대한 서론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아마도 원문은 14절의 처음 부분을 삽입하는 듯하다. 이 경우에 마가복음의 편집자는 두 가지의 목적을 설명하는 구절을 삽입했다. 이 결과 후대의 필사자들은 16절도 갑자기 시작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S.E.Johmson).
이름들의 목록들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는 재미가 가장 떨어진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이름들의 목록보다 더 흥미있고 긴장되는 것은 없다. 신문사의 편집자는 이름들의 목록들이 흥미롭지 않다는 환상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이름-졸업생의 목록들, 전쟁 때와 평화시의 사상자 명단들, 현재 있는 사람들 중의 모든 다양한 명부들-을 세밀히 적는다. 왜냐하면 이름들은 특정인들을 매료시키고 그들의 영광을 드러낸다. 본 단락의 이름들은 예수의 부름을 받은 자들로서, 이들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뜻이 구체화 된다(G.A.Buttrick).
3. 가룟 유다(19절)
가룟 유다의 가룟은 케리옷 사람이나 이스카 족속이라는 뜻이 아니고, 아마도 시카리우스(암살자)의 의미인 것 같다. 이 이름은 A.D.66-70년 동안에 로마에 대항하여 전진을 할 때에 열심당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본래의 이름은 유다인데, 그 당시 유대인에게는 흔한 이름이었다.
가룟이란 이름은 별명으로서 그가 예수를 배반한 반역의 사건 후에 붙였을 것이다(S.E.Johmson). 가룟 유다의 신비는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해석이 가장 참된 것 같다. 한편 가룟( jIskariwthn이스카리오텐)은 히브리어로 이쉬 케리요트(twyrqvya)로서 '케리욧트의 사람'이란 뜻으로 보기도 한다. 즉 그는 유다의 한 마을 케리요트의 주민으로 명명되어진다는 것이다(E.Gould).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도록 미리 정하여진 것이 아니다. 그가 부름을 받았을 때는 배반할 가능성도 진지한 모습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배반이라는 어둠의 길을 택했다(G.A.Buttrick).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본 문단은 예수께서 제자들 중에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 내용(13,14절)이다. 열두 제자들의 목록을 마10:2-4눅6:14-16행1:13의 목록과 비교할 때 작은 예외가 있지만 거이 일치하고 있다.
마가복음은 열두 제자들을 부르는 이야기를 첨가하고 있는데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생략되어 있다. 눅6:13에서는 큰 제자 무리에서 열둘을 택해 사도로서 세웠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제자를 부른 목적인 제자도를 강조하면서 제자들의 이름 목록을 위한 상황을 제시한다(R.A.Guelich).
1. 제자를 부름(13-15절)
13절의 자기의 원하는 자들은 제자들이 예수의 메시야 사역 활동에 필요한 자들인 것을 드러내는데, 특히 자기는 강조형으로 예수의 주권적 권위를 강조한다(R.H.Gundry).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를 부르는 모습(막1:16-202:14)을 보충 설명하는 효과를 보여 주는데, 열두 제자라는 것은 적어도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열두 지파를 세우신 것의 모형을 보여 준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가 되는 것은 인간의 자기 결심이기보다는 오히려 응답의 특징이 더 두드러진다.
물론 이차적으로는 인간이 과거와 단절하는 것(떠남)이 제자 부름에 대한 응답을 수반한다(막1:15-202:15). 본 절에서도 '나아온다'라는 표현은 이전의 생활에서 떠나 예수를 인생의 터전과 목표로 삼는 것을 보여 준다.
14절에서 열둘을 임명하는 것은 앞 절의 부름의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마가복음은 그들의 임명보다는 그들이 임명된 목적에 중점을 둔다. 임명의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그들은 예수와 함께하며, 그의 동료로서 그의 삶과 일에 동참하기 위해 부름받았다. 이들의 함께함은 막5:18,19에서 거라사인 지방의 귀신들렸다 놓임을 입은 자가 예수와 함께 있기를 청했다가 거절당하는 것과 비교할 때에 큰 특권인 것을 보여 준다. 결국 예수와의 개인적 연합은 열둘에게 특별한 것이었다.
둘째, 그들은 선교의 현장으로 보냄받기 위해 부름받았다. 예수의 삶과 사역에 동참하는 것은 막6:7-13이 보여 주듯이 같은 사역을 위해 보내지는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열둘을 임명한 것은 메시야 사역에 핵심적인 자들로 삼은 것인데, 역사적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활동의 연속성을 보여 주는 동시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의 혈통적 계승과 연관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상징으로서 역사적 이스라엘과 구분되는 종말론적 불연속성도 보여 준다(R.A.Guelich).
2. 열두 제자(16-19절)
열두 제자의 이름은 신약성경에서 이곳 외에도(마10:2-4눅6:14-16행1:13) 각각의 경우 네 명씩 세 단위로 분류된다. 서로 목록들을 비교할 때에 이름들이 서로 틀린 경우가 잇는데 이것은 그들이 서로 다른 두 개 이사의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레위는 회심 후 마태라는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다(E.T.Thompson, Rawlimson, W.Hendriksen).
16절의 시몬은 요한 또는 요나의 아들이었다. 그는 어부였고, 그의 형제 안드레와 벱세다와 살았고(요1:44), 후에는 가버나움에(1;21,29) 거주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에게 베드로란 이름을 주었다. 이것은 그의 사랑의 행위(W.Hendriksen)이자 권위 있는 행위(W.L.Blackley)였다. 17절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은 그들의 불같은 성격으로 인해 '우뢰의 아들'이란 뜻의 보아너게라는 이름이 덧붙여졌다.
18절의 안드레는 어부로서 그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께 데려왔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소개했다. 오병이어의 사건 때에 예수의 질문에 부정적 대답을 하기도 했다.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란 뜻인데, 요한 복음의 나다나엘로 여겨진다. 마태는 전에 세리의 직업을 가졌던 레위였다. 모다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예수께 고백을 한 의심많은 제자였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마가복음에서 작은 야고보라 불렸다(막15:40). 그러나 작다는 의미가 나이가 어리다는 것인지 체격이 작다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다대오는 요14:22의 갸룟이 아닌 유다인것 같다. 가나안인 시몬은 눅6:15에서는 셀롯이라하는 시몬으로 나타난다. 가나안인은 아람어로 열심당을 의미했다. 가룟 유다는 일반적으로 남쪽 유대의 한 지역인 게리옷 사람 유다로 해석된다. 복음서는 그를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는 그를 배신한 유다, 열둘 중 하나 유다,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로 지칭된다(W.Hendriksen).
예수가 그의 주위로 불러 모은 열두 제자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첫째, 예수는 그의 사역을 위해 주로 검증된 훈련받은 일꾼을 불렀다. 대부분 그들은 세례 요한의 선포를 듣고 그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로 그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즉 예수께서는 초보자를 우선으로 제자로 삼지는 않으신 것이다. 둘째, 열두 제자는 사전에 신학적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육은 받았지만 전문적인 교육은 받지 않았다. 셋째, 부름받은 그들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알았지만 경건했다. 베드로와 도마를 비교해 볼 때, 전자는 열성적이고 믿음이 잇고 의심할 줄 몰랐던 반면, 후자는 사랑이 많았으나 계속해서 의심하고 우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종류의 사람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신다. 그러한 다양한 사람들이 사도로, 선교사로, 목사로, 교사로 쓰임받는 것이다. 넷째, 그들은 예수의 계속된 교육과 그와의 동거하는 삶 속에서 부름받은 일에 합당한 자들로 만들어졌다. 처음부터 예수의 사역에 합당한 자들이 아니었다.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열두 제자의 의미
1. 구속사적 의미
'12'라는 숫자는 명백한 구속적 -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다. '12'는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백성들의 새로운 형태를 나타낸다. 열두 제자의 선택을 통하여 예수님은 전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통치 의지를 확고히 나타내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12'라는 수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적 혹은 종말론적인 전망을 통하여 볼 때, '12'라는 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창조행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메시야 공동체의 최종적인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즉 열두 제자의 선택을 통하여 예수님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창조의 구속사적 최종 목표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훗날 겨룟 유다의 배신으로 인하여 열두 제자에 결원이 생기게 되었을 때, 이를 채우는 것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d해해야 한다. 특히 눅22:30에 따르면 열두 제자는 예수의 왕국이 임할 때,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다스리게 된다고 선언한 것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2. 구원론적 의미
예수는 자신의 스스로의 선택에 의하여 열두 제자를 뽑았다. 이것은 신적 권위의 표현이며, 선택에 있어서의 무차별성을 나타낸다. 다만 뽑힌 그들에게는 특별한 목적이 주어졌지만, 적어도 그들의 선택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었다. 그러나 후에 사도들이 맛디아를 선택함에 있어서는 그 차원이 달라진다. 맛디아는 ①하나님과 동행하는 자②부활을 증거하는 자③칭찬듣는 자④제비뽑힌 자 즉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행1:21-26)라는 요건을 구비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런 자격 요건이 사도직의 충분 조건이 아님은 명백하다.
3. 전투적 의미
열두 제자의 선택은 예수님이 사단과의 일전을 앞에 두고 전투 태세를 완비하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주신 일에서 밝히 드러난다. 훗날 맛디아를 뽑았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였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교회는 새로운 전투 태세를 완비한 것과 같았다. 이후 사도행전의 기록은 사탄의 패배사이다.
당시 교육의 목적(3:13-19)
◈ 세계배경 문화사 ◈
교육이란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모든 행위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며 수단이다. 서구에 있어서 고대에서부터 중세까지 교육의 목적은 개인을 지배하는 집단 전체의 권위와 이익,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동양 중국 중국의 교육은 고대 주(周)나라에서 시초를 찾아볼 수 있다. 제왕학 등 일부 특권 지배자의 치국론(治國論)을 중심한 교육이 사가(私家)에서 시작된다.
한(漢)대에 들어와 유교가 발전하자, 교육의 대상이 넓어지고, 국가 주도의 교육이 시행된다. 한 대의 국학인 대학(大學)은 국가적 요청에 기인한 관리 양성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유가 사상의 적극적 의미인 인성의 함양이라는 목적은 아직까지 당시 중국의 국학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또한「예기」의 '내측'편을 보면 어린이에 대한 교육과 그 어린이가 장성하여 사회에서 어떤 책임을 지는가를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즉 교육의 목적은 한 개인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며,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는 데 있다.
한국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처음 나타나는 단군조선의 건국 신화는 고조선의 사회상뿐만 아니라 교육의 방향까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주목할 것은 근본 목적인 홍익인간의 개념이다. 이는 보다 나은 생활을 추구하던 당대인의 교육 목적이 담겨져 있다. 삼국 시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학교 교육이 실시된다. 소수림왕 2년에설립된 고구려의 태학(太學)과 신라의 화랑도, 국학(國學) 등이 그것이다. 삼국 교육의 목적은 지배층의 계급적 지위와 학문적 교양의 수련에 기본 목적이 있고, 또 조국을 위해 용맹한 장군과 병사의 양성이 그 목적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근동 유대 당시 팔레스틴 지역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로마의 교육법을 주로 따랐다. 그러나 내용은 로마와는 달리 종교적인 것으로 토라를 배웠으며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유다 테마(Judah.Tema)는 교육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아이가 5살이 되면 성경을 배울 수 있고, 10살이면 미쉬나를, 13살이면 율법을 지킬 수 있고, 15살에는 탈무드를, 18살에는 결혼을, 20살에는 무역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소년들은 교육의 정도나 빈부의 차이를 떠나서 모든 무역을 배워야 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유대의 교육 목적은 특히 탈무드를 통한 교육의 목적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데 있었다.
서양 그리스 그리스의 도시 국가 스파르타는 도리아인의 정복 국가이다. 정복 국가로 출발한 스파르타는 고도의 정복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교육의 목적을 국가를 소호하는 이상적인 병사의 야성에 두었다.
그 내용으로는 극기와 엄한 규율의 생활을 통해 호전시민(好戰市民)의 야성에 주안점을 두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비해 지혜의 시민을 양성하는 데 교육의 주목적을 두었다. 신체적·군사적·지적·미적 기초를 둔 원만하고 전인적인 인격은 시민의 자격 요건에서 중시되었다. 유아기 때부터 음악 교육과 체육 교육을 통해 시·음악·독서 등과 체조나 운동 경기의 훈련을 받았다.
로마 로마는 초기 정복 국가로 성장할 때 군대 교육에 교육의 주목적을 두었으나, 공화정 시대에 들어오면서 애국적이고 유능한 공민, 착하고 사람다운 사람을 양성하는 것으로 교육의 목적이 변하였다. 제정 시대에는 실제 생활, 즉 정치 생활에 유능한 인간을 양성하는 데 두었다.
성경적 접근 성경에서 교육은 자연을 통한(잠6:6-11) 교육과 질의 응답식 교육(눅2:46)방법을 지시하고 있다. 특히 교육자와 피교육자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함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임을 알게 함에 있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무명의 사람들(3;13-19)
세상에서는 가문을 중시하고 배경을 따지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본인의 능력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이러한 요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선택에서 제외되는 경향이 허다하다.
1. 지명도가 높지 아니함
제자들을 살펴본다면 사회적으로 내세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무명의 사람들, 하부 계층에 속한 서민들이었던 것이다 지명도가 높을수록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가 쉬운 법인데, 그들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귀한 진리를 터득하게 된다. 주의 일은 세상에서의 지명도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일 교회도 지명도가 높은 사람에게만 관심을 집중한다면 옳지 못한 것이다.
2. 사회적인 배경이 없음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배경이란 때로 긴요하며, 곤경을 쉽게 극복하도록 도움을 준다. 주의 일을 할 때에도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는 사회적인 배경이 프러스 알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님은 전혀 그렇지가 못한 사람들만 제자로 선택하셨다. 아무것도 자랑하거나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 사도 그룹이었다. 교회는 사회적인 배경에 의존하여 활동하는 기구가 아님을 보여 준다. 그 유일한 배경은 하나님이시다.
3. 수가 많지 아니함
정치인들은 대부분 사조직을 거느리고 있어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서 대중들의 관심이 자기에게로 향하도록 물밑 작업을 한다 조직이 크면 클소록 그 사람은 보다 유리한 고지에 서는 것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제자들의 경우도 수가 많고 조직이 커야 많은 일을 할 것처럼 여겨지는데, 겨우 12명으로 구성되었다. 주의 일은 수의 많음이나 조직의 비대함으로 진척되는 것이 아니라 주와의 관계가 중요 변수가 된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선택된 사람들(3;13-19)
남다른 조건을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우리가 본문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바로 이 부류에 속한다. 그들은 거룩하신 주님에 의해서 선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1. 주께서 원하심
우리가 어떤 사람을 고용할 때는 마음에 드는 사람,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다. 친구를 사귀든지 배우자를 고르는데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설사 남들이 갖지 못한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해도 원치 않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는 않는다. 주의 제자들은 주께서 원하셔서 가까이 두신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2. 메시지를 부여받음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는데 일꾼을 고용하는 사람은 없다. 일이 있고, 일꾼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용하는 법이며, 주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꾼으로 선택된 사람들에게는 각기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선택하신 주님으로부터 세상에 나가서 전해야 할 메시지를 부여 받았는데, 이것이 그들의 할 일이었다. 모든 우리에게도 주님은 세상에 전할 메시지를 부여하셨으므로 이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겠다.
3. 능력을 부여받음
세상에서 사람을 쓰는 기준은 주로 능력 위주이며 배경 위주이다.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유용한 가를 평가한 뒤에 채용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주님의 인사 관리 지침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그분은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 아니라 전혀 그 반대의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그들이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 오늘날 우리가 기쁨으로 주의 일을 할 수 있음은 주의 이같은 약속에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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