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팔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으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읽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품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문태준 시집, <맨발> 창비 2004 -
이 시처럼, 우리의 삶은 결국 맨발이다. 맨발로 와서, 맨발로 걷다, 맨발로 간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삶이다. 이 시를 처음 대면한 순간 나는 가슴이 서느했다. 명품양말과 명품구두와 명품운동화로 칭칭 감고 사는 내 발을 보았기 때문이다. 문태준 시인은 그런 나를, 다음과 같은 말로 점잖게 타이르고 있었다.
"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그런데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딘 적이 있었던가. 이 시가 절묘한 것은, 그리고 (보편적) 설득력을 얻고있는 것은 삶의 기승전결을 불교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붓다의 삶을 몰랐다면 시인은 결코 이처럼 탁월한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문태준 시인은 어느날 시장에 갔다가 어물전에서 속살을 내밀고 있는 개조개를 보았다. 그리고 그 개조개가 밖으로 내민 속살을 보고 붓다의 마지막 삶인 '곽시쌍부(槨示雙趺)'를 떠올렸다. 곽시쌍부는 붓다가 열반에 들었을 때 6일 늦게 도착한 마하가섭이 붓다의 법구도 보지 못한 채 관을 붙들고 슬피 울자 붓다가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밀어 가섭에게 마음을 전한 사건을 말한다.
불교에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는 것이 있다. 선종계열에서 붓다가 세 번에 걸쳐 가섭에게 마음(법맥)을 전한 이야기(사건)을 말한다.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坐)와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捻花), 니련하반곽시쌍부(泥連河畔槨示雙趺)가 그것이다. 다자탑전분반좌는 붓다가 급고독원에서 설법을 하는데 가섭이 헤진 옷을 입고 늦게 도착하자 앉은 자리의 반을 내주며 옆에 앉으라고한 사건이다. 영산회상거염화는 붓다가 영산회상에서 금색 바라화(波羅花)를 올리자 오직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빙그레 웃은 사건을 말한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위에 언급한 니련하반곽시쌍부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맨발이었을까. 이것은 평생을 길 없는 길 위에서 맨발로 보낸 붓다의 삶을 상징한다. 또한 무소유를 상징하기도 한다. 붓다는 성(城)을 넘어 출가할 때 금,은 신발을 다 벗어 던지고 맨발로 출가했다. 그리고 80 평생을 길 위에서 맨발로 돌아다니며 걸식했다.
이 시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속도다. "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맞다. 속도는 탐욕에 비례한다. 속도가 빠른 사람은 탐욕도 크다. 그러나 속도가 느린 저속(低速)의 삶은 작은 것에도 만족한 지족(知足)의 삶을 산다.
피에르 쌍소가 느림의 삶을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삶을 행운의 기회로 여기는 까닭은 매순간 살아 있는 존재로서 아침마다 햇살을, 저녁마다 어두움을 맞이하는 행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만물이 탄생할 때의 그 빛을 여전히 잃지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미소나 불만스런 표정의 시작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속도가 빠른 삶은 '매순간 살아있는 존재'로서 아침 햇살과 어두움이 주는 '저녁의 행복'을 찾아낼 수 없다. '매순간 살아있는 아침 햇살을 만나고 '어두운 저녁의 행복'을 맞이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미소'를 발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선 느린 저속의 삶이 필요하다.
그 속에 바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이 있다. 자유로운 삶, 정직한 삶, 온전한 삶이 있다. 붓다의 삶은 물론 예수와 간디의 삶도 모두 맨발이었다. 그들 모두 맨발로 태어나, 맨발로 걷다, 맨발로 갔다. 맨발은 또 인욕(忍辱)의 삶을 뜻하기도 한다. 맨발은 아프다. 맨발로는 오래 걸을 수 없다. 금방 상처가 난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우리가 운동화를 신고 구두를 신는 것도 결국은 오래 멀리 상처없이 빨리 걷고 싶어서다. 그럴수록 더 맛있는 밥, 더 좋은 밥, 더 값비싼 양식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끼 밥은 다 똑같다. 밥은 누구에게나 평등하지 않은가.
오늘 다시 내 발을 생각해본다. 나는 지금 얼마만큼 맨발의 삶을 살고 있는가.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와 캄캄한 것들의 허기와 울음을 달래주고 있는가. 어느 겨울날 서울 종각 지하철역에서 보았던 맨발이 생각난다. 종이박스 밖으로 삐져나온 어느 노숙자의 맨발이. 그 노숙자는 지금 맨발의 삶을 살고 있을까. 내 주변 어디에든 맨발의 삶은 존재하고 있다. 맨발의 삶을 잊지 않아야겠다.
승한 스님 불교문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