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수선화
무거운 짐을 진 자
금토정의 성명서를 녹음하기 위해, 지친 영혼이 녹음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농사꾼으로서 무거운 짐을 진 자가 앉아 있었다. 정의의 배신 속에서 정의의 무거운 짐을 진 자! 그 때, 세상에나! 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그 목소리는 혼을 깨우고 있었다.” 어두운 녹음실, “은신처”에서 영원성의 목소리를 들었다. 너의 영혼은 변형되어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정의는 “정의의 배신”으로 인하여 죽었고, 너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수선화가 낭송되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진 “아이스테시스(aisthesis)” 길 위에서 시풍(詩風)! 그녀가 로고스 이전에 파토스로서 찾아왔다.
“잘 견디는 정신은 그 모든 무거운 짐들을 짊어진다. 짐을 싣고 사막으로 서둘러가는 낙타처럼, 그렇게 정신은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간다. 그러나 가장 외로운 그 사막에서 두 번째의 변용이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은 사자가 되고 그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고, 자기 자신의 사막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여기에서 정신은 자신의 최후의 주인을 찾는다. 정신은 자신의 최후의 주인, 자신의 최후의 신의 적이 되고자 하며, 승리를 위해 그 거대한 용과 싸우려 하는 것이다. 그 거대한 용은 너는 해야만 한다. 라고 불린다. 그리고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 싶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말해보라! 나의 형제여, 사자도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어떻게 어린아이가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어째서 약탈하는 사자가 이번에는 어린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이며,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움직임이며,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나의 형제여, 신성한 긍정이 필요한 것이다.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읽어버리는 자는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는 것이다. “
그녀는 나를 시낭송으로 이끌었다. 시낭송의 바람이 바다로 이끌었다. “나는 육지를 버렸고 이미 출항했다.” 뒤에 남겨진 다리조차 불태워 버렸다. 삶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하는 일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느냐 하는 것이다. 마땅히 어떻게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무거운 짐을 진 농사꾼의 삶은 시낭송의 역동성으로 인해 성명서의 집착을 버렸다.
그 집착은 삶의 일시적인 국면이었고 시낭송은 영원한 국면이었다. 모든 것이 상실되었던 내 삶의 관계는 결코 상실되지 않는 어떤 것과 스스로를 동일시함으로써, 그 상실감을 상쇄시켰다. 그 상실되지 않는 어떤 것이란 삶의 온갖 것들을 벗어버리는 집착 없는 공감이다.
그 녀는 나를 이미시 문화서원으로 초대하였다. 영혼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이름에 대해 응답한다. 그 곳은 영혼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 영혼이 들어있는 상자이다. 이미시란 영혼의 표시이기 때문에 그 곳은 하나의 영혼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시낭송이 영혼의 목소리로서 그 곳에서 울릴 때, 마치 주술이 풀리듯, 이미시 마술 상자는 봉인이 제거되고 삶의 양도할 수 없는 생명이 흘러나와 빛나기 시작한다.
이미시는 시낭송 예술 아카데미가 열리는 곳이다. 시낭송 예술 아카데미가 열리던 날, 그 곳에서 시낭송은 영혼을 입고 생명이 된다. 시 낭송가는 솔로몬을 불러내고, 태양과 땅을 동시에 찾아내며, 마침내 그 속에서 모든 모순을 포괄하는 자기의 본질을 발견해 낸다. 자기의 본질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운 것들과 같은 개별적인 사례들과는 구별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것 자체(auto to Kalon)"가 따로 있다. ”아름다운 것 자체“는 이미시에서 시낭송가 들이다.
시풍, 공혜경은 아름다운 것 자체를 길러내고 가꾼다. 산솔, 마들렌, 미엔느, 갈매숲, 시담등이 있다. 그 녀들은 육안 아닌 시안으로 보는, 혼이 순수해지면, 그 자체가 지닌 능력인 지성과 열정에 의해서 아름다움의 형상을 본다. “이데아”를 본다. 놀목, 서봉석, 김철호 교수, 특히 이미시 문화서원의 좌장 한명희 교수가 있다.
시는 기존의 말로는 표현될 수 없는 낯선 상처 혹은 어떤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시는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해 과거와는 다른 느낌으로 세계를 보고 그에 따라 삶을 새롭게 영위하는 힘을 얻을 수 있게 한다. 반면 철학은 개념들을 창조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엮음으로서 새로운 사유체계를 만드는 학문이다. 철학은 새로움을 창조하는 학문이다. 철학자가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고, 그것을 엮는 이유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유문법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무언가가 자신의 그물코를 지나쳤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기 때문이다.
시와 철학은 우리 삶에 충격 혹은 자극을 준다. 일어버린 길 위에서 새로운 실천, 새로운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유와 새로운 정서가 불가피하다. 아름다움 자체를 추구하는 그 녀들을 위하여 나는 사유를 이곳에 펼친다.
목소리
시가 소리가 될 때 그 시는 날개를 단다. 이미지화 된다. 목소리라는 행위의 접촉은 초 감성적인 존재와 구별되는 감성적 제한성을 지닌 존재자임을 규정한다. 몸도 목소리도 없는 천사들은 소위 “내적인 말” 이라는 것을 이용해 대화한다. 단테는 이것을 가리켜 천사들은 명상 속에서 소통한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인간의 소통은 허파라는 기관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 오직 공기를 자신들에게 받아들이는 존재만이 목소리를 소유한다. “공기의 충격은 목소리를 성립케 한다.” 즉 의미나 말은 “목소리라는 버팀목” 없이는 결코 표현의 장에 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문자에 의해 대리보충(supplement)되기 이전에, 목소리에 의해 대리보충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목소리는 일종의 의미를 가진 소리이지, 기침과 같은 단순한 새어나온 공기가 아니다.”(데 아니마,420b) 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장이래, 서양 전통은 목소리와 로고스를 서로 불가분의 것으로 결합시키고, 이에 대해 이차적이고 열등한 것으로서 문자의 지위를 규정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목소리는 “분절(articulation)"이라는 고유한 표현성에 주목한다. 오로지 그 목소리만을 통해서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다.
로고스나 언어에 의존하지 않은 목소리 자체만의 고유한 표현성은 미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가장 잘 드러날 것이다. “목소리는 언어 이전에 이미 미학화 한다.” 왜냐하면 목소리의 아름다움은 분절이나 어떤 형식이 아니라 목소리라는 “질료 자체”에서 오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어떤 형식 없이도 미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감각 속에서, 즉 아이스테시스(aisthesis)속에서의 이 길 읽어버림(egarement)이 미감적 효과를 일으킨다.”
감성계 안에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 바로 신적인 것과 구별되는 유한한 존재자의 특성이며, 또한 “미학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미학의 대상인 감성적 세계는 오로지 인간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 고유의 세계이다.”
질료와의 마찰이라는 목소리의 근본적인 존립 방식, 즉 감성적 한계 안에 제한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목소리의 운명이 바로 목소리를 미적인 것으로 만들어준다.
예술로서의 시낭송
“우리는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서도 알 수 있다. 예술 덕분에 자신의 세계를 넘어 세계가 증식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술의 힘을 빌렸을 때만 삶은 폐쇄적인 늪 속으로 함몰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또한 예술의 저변에는 ”아름다움“을 보는 철학적 이성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놓여있다.
니체는 호메로스의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신화에서 비극의 탄생, 다시 말해서 예술의 출현과 인간의 심미적 요소의 가장 완벽한 발현은 신들이 상대적으로 구현했고, 구체화했던, 두 원리들 간의 결합의 결과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적 가치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라는 그리스의 두 신들에 제각기 표현되는 두 개의 원리 사이의 혼합에서 비롯된다.
디오니소스는 삶의 역동적인 흐름의 상징, 어떠한 구속요소나 장벽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모든 한계들을 거부한다. 디오니소스의 숭배자들은 명정(酩酊)의 흥분상태로 빠져 들어가 이를 통해 거대한 삶의 바다 속에서 주체성을 해소한다. 반면 아폴론은 질서와 구속과 형식을 상징한다. 디오니소스적 태도가 가장 훌륭하게 표현된 것이 몇 가지 형태의 음악에서의 체념의 감각이라면, 아폴론적인 형식 부과의 힘은 그리스 조각에서 가장 훌륭하게 표현된다.
인간 개체성이 좀 더 넓은 생명력의 실재 속에 동화되는 삶과 인간의 합일을 상징하는 것이 디오니소스라면, 아폴론은 “개체화의 원리” 상징이며 그 개별화 힘은 정형화된 예술이나 세련된 인간성을 창조하기 위해 삶의 역동적 과정을 통제하며 구속한다. 디오닌 소스적인 것은 부정적이며 파괴적 영혼의 어두운 힘을 보여준다. 그 힘은 통제되지 않을 때, 전형적인 “저 혐오스러운 욕정과 잔인함의 혼합”속에서 정점을 이룬다. 대조적으로 아폴론적인 것은 생명력의 강력한 쇄도를 조절하는 힘이기에 파괴적인 힘들을 동력으로 삼아 창조적 행위로 인도하는 힘을 나타낸다.
그리스 비극은 위대한 예술작품이다. 그것은 아폴론에 의한 디오니소스의 정복이며, 예술은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 사이의 선택에 직면하지 않는다. 그러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조차도 인간 조건의 참된 본성을 오해하는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그리스 비극이 제시해 주는 것은 충동과 본능과 격정의 홍수 속에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충동적인 힘들이 예술 작품의 창조를 위한 기회가 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예술은 디오니소스적 자극 없이 발생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은 예술의 행위는 디오니소스적 요소와 아폴론적 요소의 결합, 심미적 현상으로 변형될 수 있다.
그리스에서 최초의 시낭송이 있었다. 그것은 비극이라 불리는 삶의 무대였다. 배우가 시를 낭송하면 관객도 시를 낭송으로 화답했다. 그것은 “이미시”에서도 행해졌다. 그것은 니체가 말한 비극의 탄생, 즉 예술의 창조란 병든 디오니소스적 광포의 도전에 대한 인간의 건강한 요소, 즉 아폴론적인 것의 응전이었다.
시낭송과 시낭송가
시는 어떻게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가? 침묵했던 시가 열리는 놀라운 사건은 어떻게 벌어지는가? 낭송되는 시는 주제를 담고 있다. 시의 주제는 인식되기 위하여 글로 표현된다.
“시의 주제는 물론 시 언어와 연결되어 있지만 시낭송은 그 언어 안에 머무를 수는 없다” 가령 사랑의 주제에 대한 시를 낭송할 때, 사랑의 목소리로서 밖으로 뿜어져 나오게 하는 원천인 사랑의 시낭송은 그 사랑의 시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낭송이 시를 통해 “아름다움 자체”를 지각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감성의 강제성”이다. 존재자로서 시낭송가는 “은신처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에서 성립한다. 시낭송가가 존재자로서 성립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근본 요건은 “동일성”이다. 그리고 동일성은 “자기(soi)에 대한 자아(moi)의 피할 수 없는 연관(enchainement)의 구조로 나타난다. 인간학적으로 표현하면, 자아가 자기를 지배하는 존재자로서 시낭송가는 존속되며, 즉 동일성을 유지한다.
시낭송가에 대한 자아의 “지배력”이 자아와 시낭송가 사이의 관계, 즉 ”동일성“의 원천을 이룬다. 자아가 외부로부터 ”감성 가운데 주어지는 것“을 시낭송가가 통제하지 못할 때, 시낭송가의 ”존재 유지“는 위기에 봉착한다. 자아가 햇볕을 쬐고 바람을 쐬며 물 한 모금 마시면 오로지 시낭송가가 즐거운 것이지 다른 누가 그 즐거움을 얻어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자아와 시낭송가 사이의 관계는 다른 무엇의 개입도 허용하지 않는 배타적인 것이다. 존재자로서 시낭송가는 조개껍질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자아와 시낭송가의 관계라는 은신처 속에 숨어 있으며, 이 절대 이기적인 은신처 속에서만 존재자로서 성립한다.
그런데 은신처속에 숨어있던 시낭송가는 자아의 지배력을 벗어나는 어떤 것, 어떤 “정서”와 마주치는 일이 벌어진다. 시낭송가는 감성 안에 “정서”가 주어질 때, 수동적으로 노출(exposition)된다. 감성 안에 주어진 이 “정서”는 “동일자 안의 타자”로서 감성 안에 다 들어오지 않는 “위협적인” 대상처럼 이 “정서”는 시낭송가의 능력을 초과한다. 감성을 초과하는 이것은 “무한”이라 불릴 만하다. “현재를 넘어선 초과는 무한의 삶이다” 이렇게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면서도, 감성이 거머쥘 수 없는, 철저히 동일자로 흡수되지 않는, “동일자 안에 들어온 타자”가 언급될 수 있는 맥락을 우리 삶에서 찾자면 바로 “상처받음(트라우마, traumatism)"이다.
그런 극심한 상처는 감성을 촉발하는 것이면서, 감성을 초과하는 양면성을 지닌다. 이 감성적인 것을 지배할 수 없는 이상 시낭송가는 자아의 필요에 따라 이것에 대해 능동적으로 다가갈 수 없고, 수동적으로 “볼모(otage)"의 입장이 된다. 그리하여 이 볼모가 된 시낭송가는 여러 가지 행위를 표현한다. 시낭송가의 시낭송 차원은 어떨까?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시낭송가의 영감(inspiration)"이다. ”시낭송가가 자기 자신을 내가 낭송하고 있는 것의 저자로 만드는 무한의 계획을 영감이라 부른다.“ ”영감 속에서 시낭송가는 자기가 낭송하는 것의 통역자가 된다.“
우리는 앞에서 시낭송가의 성립조건을 은신처의 가능성에서 찾았다. 이 은신처는 자아가 감성을 통해 외부에서 주어진 것에 대해, 자기의 필요에 따라 “거리”를 취할 수 있는 시낭송가의 능력을 표현한다. “자아는 주어진 것을 소유한다. 그러나 자아는 이 소유물에 의해서 매몰되어버리지 않는다. 자아는 대상에 대해 거리를 유지한다.” 이 “거리두기”의 힘이 시에 대해 지배력을 행사하는 시낭송가의 근본을 이룬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 어떤 감성적인 것에 대해서 시낭송가는 자기를 숨기지 못하고 “노출”시킨다. 극심한 슬픔이나 수치같이 시낭송가가 제어할 수 없는 정서가 있다. 시낭송가는 이런 정서에 대해 마치 “수동적으로 볼모가 된 듯”, 평정의 가면 뒤에 숨지 못하고 흐느낌과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통해 자기를 액면 그대로 드러내고 만다.
그리스인이 남긴 중요한 문헌도 이러한 볼모로 만드는 정서를 사실로서 증언하고 있다. 플라톤의 대화록 “파이돈”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 죽음에 대해 초연해진 소크라테스의 영혼에 대한 이야기다. 이 대화록 속에서도 정서의 초과가 도사리고 있다.
“아폴로도스는 다른 어떤 자들보다 많이 운다. 그는 한도를 넘어서 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맞닥 드린 아폴로도스에게선 이러한 정서가 노출되어 망가진 태엽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시낭송가라고 불리는 자! 그것은 “노출”이다. “트라우마”와 마주친 시낭송가의 시낭송에서 일어나는 일도 바로 이러한 노출이다. 시낭송은 시낭송가를 어떤 방식으로든 노출시킨다. 일상적 삶 안에서 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시낭송을 통해, 그리고 심지어 목소리 자체를 통해, 시낭송가가 어떤 유의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 일, “시낭송은 시낭송가를 노출시킨다.”는 진실을 경험적으로 확인해 준다. 시낭송가를 노출시킨다는 점에서 시낭송은 늘 자신을 위험에 던지는 일이다. 이런 시낭송을 통한 노출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저 시낭송가는 천사와 같군.”하고 그의 정체를 파악하게 된다.
기게스는 누구인가?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지진으로 갈라진 땅 속에서 반지 하나를 얻었는데, 이 반지는 그 주인을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를 숨겨주는 이 반지를 이용해 기게스는 왕비를 범하고 왕을 살해하여 리디아의 왕까지 되었다. 이것은 플라톤이 이 기게스 반지를 윤리와 대립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은 인간이 자기를 숨길 수 있는 힘인 기게스의 반지를 가졌건 가지지 않았건 간에 “올바름”을 행해야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몰두하고 있는 시낭송의 비밀에 관한 해명은 어떤 의미에서 플라톤이 제시한 이 대립관계, 즉 기게스의 반지가 마련해 주는 “은신처”와 “올바름” 사이의 대립에 대한 하나의 주석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시낭송가는 기게스의 반지를 소유하기나 한 듯 은신처에 숨어들 수 있다. 그런데 시낭송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바로 기게스의 비밀로부터 시낭송가를 단절시키고, 보이지 않게 숨어 있던 시낭송가를 노출시키는 사건이다.
“보여 지지 않고 본 기게스의 반지와 반대로, 여기서 시낭송가는 보지 않고 보여 진다”
이러한 노출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아폴로도로스의 예가 보여주듯 타인이 겪는 고통은 시낭송가의 감성에 주어진 트라우마로서, 시낭송가의 은신처를 불태워버리고 그를 노출시킨다. 이 트라우마에 대한 “응답” 또는 노출의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무엇인가? 그 응답은 시낭송가를 비가시성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그의 책임성이 그 속에서 도망칠 수 있는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트라우마에 대한 응답으로서 시낭송 한다는 것은 , 그 트라우마와 관련하여 자기를 도망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 은신처로 숨어들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시낭송 속에서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은 트라우마에 대한 응답에 대해 책임지는 자로 자신을 세우는 것이다. 응답(response)할 수 있다(abilite)는 것, 그것은 곧 응답에 상응하는 말함에 대해 책임(response-abilite)이 있다는 것 외에 그 무엇도 의미하지 않는다. (393p)
시낭송이 아름다움의 본질이고, 그 본질을 육화하는 주문이 바로 시낭송이라면 ,구원이라는 말뜻에 담긴 시낭송 역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어떤 점에선 플라톤적 생각이지만, 지금의 황폐화된 세계 안에선 도무지 짐작조차 못할 그 본질은 감추어져 있다.
그러한 본질이 신을 뜻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사실이 뜻하는 바는 시낭송 속에서는 신을 완전하게 아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는 너무 넓어서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갈 뿐이다” 초월이라는 말 뜻, 구원은 시낭송을 넘어서 있다. 그렇다면 시낭송은 무의미한가? 그저 공허한 변명들이란 말인가? 인식의 관점에서 자신의 마개가 열리고 향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결코 허락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떤 영역에서 다시 이 마개를 열어보려고 시도해 볼 수 있겠는가? 바로 “실천”의 영역이다. 헐벗은 이웃의 환대와 책임이라는 실천 속에서만 구원이란 신은 자신들의 마개가 열리는 것을 허락한다.
타자에 대해서, “타자를 위하여” 시낭송이 사용된다면, 타자를 “환대”할 때에 시낭송이 행해진다면,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숙고치 않으면 안 된다. ”환대의 구원“은 유일무이한, 다른 무엇과도 교환 불가능하며, 어떤 것에도 귀속되지 않는 고유한 자로서 타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전제한다.
춤과 기쁨의 시낭송
춤을 몸이 담겨 있던 진정한 요람, 몸의 본질이 구현되는 장소로 본 것은 그리스이다.
그러니까 아테네 여신에게 봉헌된 신전의 벽에 가장 뛰어난 석공들이 축제에 따라나선 처녀들을 새겨 넣던 시절부터이다. 플라톤은 말년 저작 “법률”에서, 이집트에 전해내려 오는 아주 오래된 선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오랜 세월 보존되어 온 선율이 있는데, 여신 이시스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니 내가 이전에 말했듯, 만일 어떤 정도로든, 고유하게 올바른 그 선율을 발견하면, 우리는 걱정 없이 그것을 음악의 법칙과 체계로 편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신식의 음악적 감각을 끊임없이 열망하는 기분에 대한 흥미가, 이 춤 예술을 진부한 것이라 비웃는 다해서.......이 춤 예술을 붕괴시킬 수 있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어쨌든 이집트에서 그 춤 예술이 붕괴되는 일이 효력을 가진 적은 결코 없으며, 오히려 정반대이다.”(법률, 657b)
이처럼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선율, 신성한 춤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들에겐 “춤”이 그들의 생명과 함께 주어진 가장 근본적인 운동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근원적인 상태, “이상적인 상태로의 회복”은 바로 춤을 통해서 노릴 수가 있다고 플라톤은 말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어린아이를 잠재우려고 할 때, 팔 안에 아이를 안고 규칙적으로 흔들며 가락을 불러준다. 어머니는 아이를 조용히 눕혀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흔든다.
“디오니소스 신의 여 사제는 미친 자를 회복시킬 때 춤과 노래로 마술을 거는 치료를 한다.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흔드는 것과 같은 유의 마술인 것이다.”(법률, 790d~90e)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훌륭히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사람이다.(법률, 816d)
물론 플라톤이 어떤 춤에나 이렇게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용모 아름다운 신체와 고귀한 정신의 춤”과 “시민에게 적합하지 않은 춤”을 구별하는데, 오로지 전자만이 이시스 여신의 오래된 선율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시민에게 적합하지 않은 춤”을 가짜 시인을 추방하듯 쫓아버려야 한다고 소리 높였을 지라도, 그는 때로는 희한하게도, 미친 듯한 “코리반트”의 춤마저 찬양하기도 한다. 코리반트가 누구인가? 키벨레 여신의 축제를 주관하는 사제로, 광적인 춤과 폭음으로 유명한 자가 아닌가? 그 요란스럽기 짝이 없는 춤추는 모습은 코리반틱(corybantic, 소란한 음악과 춤으로 법석을 떠는), 코리반트(corybant, 술 마시고 떠드는 사람) 등의 불명예스러운 뜻으로 쓰이고 있다. 심지어 플라톤은 “미친 듯 춤추며”(향연, 215e), 무아지경 속에서 춤을 위한 피리소리 외에는 듣지 못하고 귀머거리가 되어 버리는 이 코리반트를, 정의의 목소리 외에는 귀 기울이지 못하는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와 같은 부류로 취급하기도 한다.(크리톤, 54d)
그러나 시나이 산에서 내려오던 모세가 춤추는 백성들에게 격분하여 계약의 증거판을 내던진 이래 춤은 신이 만든 초월적 법에 대해 반역하는 자들의 “위험천만한 놀이”가 되어 버렸다. 춤에 대한 플라톤의 존중은 기독교 세계가 도래하며 쓸쓸한 황혼을 맞이한다. 왜 춤은 이처럼 사악한 것이 되었을까? 도대체 춤을 출 때 우리를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음악 소리에 맞춘 걸음걸이 또는 춤의 특별한 자동성(automatisme)은 무의식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의 양태이다. 오히려 이 존재의 양태에 있어선 자신의 자유 속에서 마비된 의식이 놀이하며, 완전히 이 놀이 속에 흡수되어 버린다.”(레비나스)
춤에 대한 이 짧은 구절은 서로 양립하기 힘들 것처럼 보이는 개념들을 나란히 병치시키고 있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까다롭다. 춤출 때의 동작들은 의지적이고 의도된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반사 신경의 작동에 가까운 것이다. 춤을 출 때 이렇게 “몸에 대한 의식의 의도된 지배”가 무력하게 된다는 점에서, “마비된 의식의 놀이”라는 명칭은 춤에 걸맞다. 의식은 자기 의지대로 몸의 동작들을 창조해내기보다는, 자기 외부에서 도래한 리듬의 규칙성에 자신을 위탁한다. 의식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은” 동작들을 산출하기 위해 리듬에 거스르고자 한다면 춤은 성립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의식은 이 리듬의 놀이 속에 흡수되어 버린다고 일컬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마비된 의식을 가리켜 왜 “무의식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일까? 의식이 리듬에 종속되어 버리는 의식의 마비상태, 즉 의식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는 무의식이라 칭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의식의 힘은, 깨어 있음이 아니라 바로 “깨어 있지 않음”이라는 무의식으로부터 성립하는 것이다. 가령 내가 잠을 자려 해도 잘 수 없는 불면의 상태는 분명 깨어 있는 의식적 상태이다. 그러나 이때 나의 의식은 철저히 예속적인 상태, 바로 의식의 깨어 있음 자체에 대해 예속적이다. 자려 해도 잘 수 없는 상황은 분명 깨어 있는 상태지만,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의식의 자발적 면모는 찾아볼 수 없는 예속의 상태에 불과하다.
의식은 원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 거리를 두고 한 걸음 물러나 “무의식”에, 바로 잠에 빠져들 수 있는데서 자신의 자발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의식은 소멸할 수 있는 힘, 잠 잘 수 있는 힘, 무의식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의식이 몰두하고 있는 대상, 그것이 알코올이든 마약이든 또는 의식의 깨어 있음 자체이든, 원할 때 언제든 “거리를 둘 수 있는 힘”, 그것이 모든 중독과 예속 상태를 이겨낸 자율적인 존재의 의식인 것이다.
그런데 춤을 출 때, 자기 자신으로부터 동작을 산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리듬의 자동성에 흡수된 상태에서 동작을 만들어 내는 의식은 리듬 안에서 마비된 채 리듬의 규칙성에 지배받는 의식이다. 모든 원시 종교의 제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단적 광란의 춤 속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춤은 리듬에 거스르고 또 리듬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허용치 않는다. 춤을 통해 발생하는 의식의 이러한 독특한 상태를 “도취”와 “광란”과 “최면”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도취 상태가 생겨나는데, 그것은 나른함에서 광란으로, 일종의 최면적 방기에서 일종의 분노로 옮아가게 한다. 춤의 상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코리반트의 의무를 모면할 수 있는 가능성”, 즉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미친 듯 춤추는 일 같은 “의식의 마비”를 끝장낼 수 있는 가능성인 주체의 “자발성”은 춤 안에서 사라져버린다. “춤추는 자는 그 리듬 속에 사로잡히고 또 휩쓸려버린다. 리듬의 고유한 표상의 일부가 된다. 리듬 안에는 더 이상 ”자기“가 없고, 자기로부터 익명으로의 이행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춤 안에서 주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오로지 리듬 속에 예속된 마비된 의식, 리듬(대상)과 맞서지 못하는, 따라서 주체성이 사라진 익면적 상태만 남는다. 이것은 기독교 전통이 왜 신의 명령에 대한 가장 위험한 적수로 춤을 지목하고 있는지가 명확해진다. 그런데 오늘날 춤 안에서 우리가 마주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러한 부정적인 국면뿐인가? 춤에 대한 기독교적 지평 바깥 또한 건너다보려고 한다. 초월적 세계로부터 진리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을 때, 참된 예언자들의 위장된 목소리가 세계를 채울 때, 도대체 내재적인 세계 안에서 구원을 찾을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훌륭한 춤꾼이 그가 섭취하는 자양분에서 바라는 것은 비만이 아닌 부드러움과 힘이다. 그리고 나는 철학자의 정신이 훌륭한 춤꾼 그 이상 무엇이 되고자 바라는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춤은 철학자의 이상이며 그의 예술이고, 궁극적으로 또한 그의 유일한 신앙이며 ”신에 대한 그의 봉사“이기 때문이다.”(니체, 즐거운 학문)
“춤은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전환시키고, 웃음은 고통을 기쁨으로 전환시킨다. 디오니소스와 관련된 춤, 웃음, 놀이는 반성과 발전의 긍정적인 힘들이다.” 이러한 춤은 어디에서 성립하는가? “디오니소스는 춤추고 변신한다. 그는 무수한 기쁨의 신으로 불린다.” 바로 “변신(metamorphose)"에서 그 춤은 성립한다. ”디오니소스는 변신한다. 디오니소스는 개별화의 고통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변신이란 바로 ”개별화의 고통“과 반대편에 선다. 기쁨의 신인 디오니소스의 춤은 ”개별화된 인격적 주체“와 대립하고 있다.(니체, 즐거운 학문)
왜 “인격적 개별성”은 “기쁨”의 신이 추는 춤과 먼 거리에 자리 잡고 있을까? 바로 “슬픔”의 정서는 “인격적 개별성”이란 주체의 개념을 전제하고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가책과 죄의식이라는 슬픈 정서의 뿌리를 이루는 개별적 인격의 동일성 대신에, 이런 슬픈 정서와 무관한 비인격적 익명성이 바로 예술이 주장하는 그 춤인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야생의 모든 춤들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댄스는 비개인적인 것이며, 신성하고, 추잡하다. 남근이 경직되어 발기가 되어도 그것은 ”개인적인 발기“가 아니라, 종족적 발기인 것이다. 그것은 한 여자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그 종족 전 여성에 대한 종교적 발기인 것이다.” 헨리 밀러의 말이다. 이 구절은 춤이 개인의 “인격적 개별성”과 전혀 무관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미 플라톤은 춤이라는 말이 지닌 숨은 뜻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우리의 술잔치에서 우리의 동반자인 신들은 리듬과 선율을 알아듣고 즐길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었다. 이런 즐기는 감각을 통해 신들은 우리를 움직이며 우리 춤을 이끄는 자가 된다. 신들은 우리가 노래하고 춤추게 한다. 그들은 이를 춤(xopoc)이라 부르도록 했는데, 이 춤이란 말은 신들이 자연스럽게 선물한 기쁨(xopoc)이란 낱말에 따라 지어진 이름이다.”(법률, 654a)
결국 기쁨이란 단어의 그 외형에 새기고 있는 춤이라는 말 자체가 춤의 비밀을 들여다보기 위한 가장 정확한 열쇄구멍이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길 위에서
시낭송은 환대의 구원이다. 시낭송은 노출이다. 시낭송은 영감을 부른다. 시낭송은 트라우마를 치료한다. “시낭송공연예술원”의 공혜경 원장은 잃어버린 길 위에서 만난 아름다움이며 기쁨이다.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들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길 위의 길로 찾아온다.
그러하니 “시낭송가 여!”
지금 그대가 시를 낭송하고자 하는 시낭송가 라고 하면, 아테네의 축제를 따라나선 처녀들처럼 리듬과 운율의 신을 쫒아서 몸을 움직여 보라! 어느새 창살 높은 마음의 감옥은 사라지고, 영혼의 축제와도 같은 기쁨으로 빛나는 율동이 찾아오리라!
“공혜경 원장님! 그리고 이미시의 쌤 들! 아름다운 추억으로 이 글을 씁니다.”
2015/4/11일에 쓴 것을 2015/8/10일 다시 쓰다
첫댓글 부라보! 우리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