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 노포 ② 열차집 (서울시 종로구 종로7길 47, 공평동 130-1)
창업주 안덕인은 전쟁 중이던 1950년 광화문 일대에서 맷돌과 번철을 놓고 빈대떡을 팔았다
휴전 후 1954년 지금의 교보빌딩 인근 세종로 뒷길(한옥가 골목길) 담벼락 밑 양쪽을 판자로 막아 자리를 편 모양이 기차간 같다고 해서 '기차집'이라 고 불렀다
1960년께 지금의 르미에르빌딩에 자리를 잡으면서 사업자등록을 '열차집'으로 했다
열차집 근처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던 우제인 부부는 안덕인에게 장사 노하우를 전수받아 1976년 가게를 인수받아 2대 운영주가 되었다
2010년부터 종각사거리 제일은행(현 SC제일은행) 본점 뒤로 자리를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현 운영 주는 3대 윤상건이다)
전국 막걸리 다 있다
대한민보사 터 (서울시 종로구 삼봉로 71, 수송동 156)
대한민보는 대한제국의 국운이 다해가던 시기에 애국계몽 세력이 국민의 계몽으로 독립을 이루기 위해 발행한 신문이다
그래서 이 신문에는 계몽과 저항의 의지가 곳곳에 드러나 1년여 남짓 되는 짧은 기간 발행되었던 신문이지만, 당시의 생활상과 의식, 계몽운동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값어치가 크다
♤ 대한민보(大韓民報)
대한협회가 1908년부터 월간으로 발행하던 <대한협회회보>는 1909넌에 발행 중지되었고, 1909년 6월 2일에 일간신문 <대한민보>가 창간 되었다
이 신문은 1910년 경술국치(한일병합조약 체결) 직후 8월 30일자(제356호)부터는 ‘대한(大韓)’ 이라는 글자를 떼어내고 <민보>로 제호를 바꾸어 하루 발간한 뒤 8월31일에 폐간되었다
(단 하루 발행)
사장은 개화파 출신의 천도교지도자 오세창이 맡았고, 윤효정, 정운복 등이 참여하였다
1909년 6월 2일 <대한민보> 창간호에서 한국 최초로 화가 이도영(李道榮)이 그린 시사만화를 ‘삽화’(揷畫)라는 이름으로게재하였다
인쇄를 이우승(李愚升)이 조각한 목판화로 하였기 때문에 선명도는 떨어졌다
이것은 또한 한국 최초의 만화이기도 하다
그 시사만화는 압제에 대한 투쟁 수단으로서 비롯 하였으며, 금방 눈에 띄는 제1면 중앙에 위치하였고 <대한민보>가 폐간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당시 시사만화의 성격은 초보적이며 계몽적이었고, 그 내용은 주로 일제 침략의 야만성과 친일 먀국노 들을 규탄하는 내용이었고, 그밖에 계몽적인 내용이 더해졌다
'대국의 간형' : 국가 정세를 바르게 이해하고
'한혼의 단취' : 한민족의 혼을 통합하여
'민성의 기관' : 백성의 목소리를 모아
'보도의 이채' : 보도의 내용을 다채롭게 하겠다
1908년부터 일제는 사후 탄압의 한 방법으로 기사 삭제를 강요했다
1909년 12월 14일 자 <대한민보>의 벽돌 지면은 특정 기사를 삭제하라는 일제의 사전 검열제에 대한 항거의 표시였다
수송공원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80-7)
♤ 용동궁 터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살았던 궁이다
이 궁은 1557년(명종 12)에 세자로 책봉되어 살았으므로 속칭 순회세자궁이라고도 하였다
순회세자는 11살에 윤옥의 딸 덕빈 윤씨와 결혼했는데, 2년 후에 후사도 없이 1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자의 죽음으로 궁을 나오게 된 덕빈이 이곳에 머물렀다
영조 때 사도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궁이 되었고, 순조 때 효명세자빈 신정왕후의 속궁이 되 이때 용동궁이 박동(礴洞)으로 옮겨져 ‘박동궁(礴洞宮)’ 으로도 불렸다
고종 때에는 명성황후의 친정에 양자로 들어온 민승호의 동생 민겸호의 소유가 되었다
민겸호는 1882년 6월 임오군란 때 난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1905년 이후로 용동궁은 주인 없는 궁이였다가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후귀비 엄씨의 소유가 되었다
엄 귀비와 그녀의 친정 엄씨 가문은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아, 숙명여학교 외에 진명여학교와 양정학교도 설립하였다
♤ 숙명여학교 터
엄귀비는 용동궁에 1906년 명신여학교를 설립 했는데(엄귀비가 하사한 땅에 이정숙이 설립) 명신여학교는 1910년 숙명여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 순헌황후 엄귀비(純獻皇后 嚴貴妃)
나이 8세 때에 궁녀가 되어 입궐하였고, 경복궁의 나인으로 배치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당시 명성황후가 실종되자 그녀는 고종을 지극 정성으로 보필하여 그 공으로 지밀상궁이 되었다
이후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었으며 명성황후 생전인 1885년 32세에 고종의 성은을 입었다가 명성황후에게 발각되면서 궁궐에서 쫓겨났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다시 입궐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아관파천때는 고종을 모시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같이 생활했으며, 1897년 황자 은(垠, 의민태자 - 영친왕)을 낳고 이틀 후 정식으로 귀인에 봉작되었 다
이후 순빈(純賓), 순비(純妃)로 차례로 진봉되었고, 나중에는 황귀비(皇貴妃)로 봉해졌다
1905년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을, 1906년 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와 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고등학교)를 세웠다
1911년 7월 장티푸스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 7월 20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향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후 순종에게 사시격인 '순헌'이란 시호를 받았다
♤ 신흥대학 터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이회영 일가 등이 가산을 모두
정리하고 만주 서간도로 이주하여 설립한 대표적인 국외 독립군양성학교였다
해방 후 1947년에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에 당시 부통령이자 첫 설립자인 이시영이 재개교하여 신흥전문학원으로 출범하게 되었으며, 1949년에는 대학으로 인가받아 신흥초급대학으로 출범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부산시로 캠퍼스를 옮겨 피난하게 되었고, 이후 재정난에 휩싸이게 되자 1951년 5월 18일 조영식이 인수하고, 1955년 3월 초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1960년에 경희궁에서 이름을 따와 경희대학교로 개칭했다
♤ 중동학교 터
중동학교는 1906년 4월 관립 한성한어학교(漢城漢語學校) 내(현 우정총국 자리)에 교실 3칸을 빌려, 당시 한어학교 교관이던 오규신(吳圭信), 유광렬(柳光烈), 김원배(金元培) 등 3인이 한어 (漢語)와 산술 두 과목을 가르치는 야학으로 설립 되었다
이듬해인 1907년 1월 학부대신의 인준을 얻어 이 야학교를 중동야학교라 칭하고, 일어과목을 증설 하고 오세창(吳世昌)이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후 1909년 5월 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에 의하여 학부(學部) 지정으로 사립중동학교 설립인 가를 받았다
그러던중 1914년 2월 학교의 차용지가 매각되어 학교가 폐교의 위기에 있을 때, 백농(白儂) 최규동(崔奎東)이 학교의 경영을 인수하여 현 위치인 수송동(壽松洞) 85번지에 사유가옥 일부를 차용하여 교사를 이전하고, 그 이듬해인 1915년 9월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중동학교는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 보성사 터
보성사는 1906년 대한제국 말기 고종의 측근이었 던 이용익이 러시아어(아어俄語)학교 자리에 보성 중학교를 설립하면서 학교 교재 출판을 위해 학교 구내에 설치한 인쇄소였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인하여 1910년 천도교로 경영권이 넘어가게 되면서 최린이 보성고보의 교장을, 이종일이 보성사 사장을 맡았다
그 후 중앙교당의 인쇄소인 창신사와 병합하여 그 명칭을 그대로 보성사라 하였다
보성사는 30평 정도의 2층 기와 벽돌집으로 한국 최초의 인쇄소였다
최남선이 설립한 광문회의 신문관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를 주도하였다
3.1운동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던 1919년 2월 26일,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신문관에서 조판된 뒤 보성사로 넘겨졌다
같은 달 27일, 보성사의 사장 이종일은 공장 감독 김홍규, 총무 장효근과 함께 극비리에 총 2만 1000매의 독립선언서를 성공적으로 인쇄하였다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서면자들의 연고지인 서울, 평양, 청주, 용강, 해주, 선천, 원산, 의주 등지로 철도편을 통해 전달되었다
♤ 이종일 동상
이종일(1858.12.10 ~ 1925. 8.31)은 충남 태안의 양반가에서 출생한 뒤 과거에 급제했 한 후 1882년 수신사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와 메이지유신의 영향을 직접 목도한 뒤, 국내에서 개화운동에 매진했다
독립협회에서 활동할 때는 독립신문과 황성신문 집필진의 일원이었다
1898년에는 순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해 계층에 구애없이 접할 수 있는 언론으로 개화와 계몽을 추구했고, <황성신문>, <만세보>, <대한민보>에도 참여했다
이후 1905년 12월,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으며,『천도교회월보』의 월보과장으로 월보를 발행, 집필하며 천도교계 인쇄소인 보성사의 사장으로 천도교관계 각종 서적을 간행했다
이곳에서 3.1운동에 사용되었던 2만 1천 부의 독립선언서가 인쇄됐다
2월 16일 오세창으로부터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의뢰받고 동의하였으며, 2월 26일 밤 오세창으로 부터 조판한 것을 건네받았다
그는 자신도 민족대표로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보성사 직원 신영구(申永求)와 김홍규(金弘奎)에게 극비에 인쇄할 것을 지시하여 2월 27일 2만 1천매 를 인쇄하였다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오세창의 책임 아래 배포되었 는데, 그는 배포 실무를 담당하였다
인쇄소를 폐쇄하고 작업을 실행했으나 한인 억질 경찰 신승희(신철)에게 선언문 제작이 발각됐다
(신승희는 손병희에게 5,000원을 받고서 거사계획 을 누설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후 가문의 족보로 위장하여 선언서를 운반하던 중, 일본경찰의 불심검문을 겪었으나 거리가 정전 되어 단속을 넘길 수 있었다
3·1운동 당일 날 태화관에서 33인을 대표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것, 선언문을 인쇄한 것 등으로 민족대표인 오세창, 이승훈, 한용운 등과 함께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옥고를 치를 당시 이미 60이 넘은 노인이었으나, 고문과 옥살이로 변절한 일부 민족대표들과 다르게 2년 6개월만의 가출옥 이후에도 제 2의 3.1운동을 계획하는 등 끝까지 독립을 위해 싸웠다
노령의 나이에도 끊임없이 일제에 맞섰던 이종일은 일경의 감시속에 1925년 8월 31일 68세의 나이로 초가 거적 위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 화가 고희동과 안중식
♤ 대한매일신보 창립사옥 터
1902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온 영국 기자 어니스트 베델[Bethell, E. T. 한국 성명은 배설(裵說)]이 양기탁 등 민족계몽 계열 독랍운동가 들의 지원을 받아 1904년 7월 18일 창간한 신문이 다
영문판 제호는 '더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였다
당시 주요 논설진이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 아주 쟁쟁한 당대의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신문은 항일 논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야욕을 폭로하며 항일 논조를 견지했다
조선 민중들의 민족의식을 드높여 신교육과 애국계몽 운동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고종의 친서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으며,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의 부당성, 그 외의 일제의 야만적 침략 행위들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는 등 끊임없이 신문지상에서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한국의 침탈에 관한 기사를 썼지만 그가 몸 담고 있던 <런던 데일리 뉴스>는 친일 성향이 있어서 베델의 기사는 퇴짜를 맞았다)
민족 신문들의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통감부가 신문지법을 제정하고 이를 빌미로 사주인 베델을 1907년과 1908년 2번에 걸쳐 재판에 회부 했다
또한 실질적인 경영주인 양기탁도 국채 보상 성금의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양기탁은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지 만 핵심 인사 두 명의 이탈로 대한매일신보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재판에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일제는 영국정부 를 직접 압박해 베델을 상해로 강제 소환시켜 6개월 형을 받게 만들었고, 안타깝게 1909년 5월 베델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1908년 5월 발행인이 영국인 만함(萬咸, Alfred W. Marnham)으로 교체되었고 1910년 6월에는 이장훈으로 다시 변경되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의 일본어판 기관지 경성일보에 인수되었고, 제호에서 '대한'이 떨어진 채 1910년 8월 30일자 신문부터 총독부의 조선어판 기관지로 전락하였다
해방 후에는 사원자치위원회가 운영했으나, 좌파 성향을 띤 이들이 미군정과 갈등을 빚은 끝에 1945년 11월 10일 정간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오세창, 하경덕, 이관구, 홍기문 등이 주도하여 경영진과 필진을 새로 구성하고 <서울신문>이라는 제호로 변경하여 1945년 11월 23일 속간했다
<서울신문>은 1998년 11월 6일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제호를 <대한매일> 로 변경하고 지령도 <대한매일신보>기간을 합산하 여 발행하다가, 2004년 1월 다시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했다
월암근린공원 안에 있는 어니스트 베델집 터
♤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Ernest Thomas Bethell), 한국명 배설(裵說)
1872.11. 3 영국 브리스틀에서 출생
1904. 3.10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 자격으로 대한제국에 왔다
1094. 7.18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조선의 항일운동 발생에 영향을 주었다
1909. 5. 1 심장비대증으로 상해에서 사망하여 합정역 근처 양화진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묘지번호 A02)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는 어니스트 베델(한국명 배설)의 묘비에 ‘대한매일신보사장대영국인배설지묘’라고 각인돼 있다 - 옆 비문에는 장지연이 약술한 베델의 삶이 쓰여져 있다
♤ 목은 이색의 영정을 모신 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