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머리와 함께 여행하는 법 6
ㅡ풍경의 그늘
휘 민
불 꺼진 브라운관에 얼굴 하나 떠오른다
리모컨을 손에 든 채 살짝 입꼬리를 올려본다
언제쯤 버릴 수 있을까
폐허 속에서도 웃음을 연습하는
이 지독한 습관의 잔상을
남편은 회사에 출근하고 아이들은 유치원에 등원하고
나는 어두운 거실에 남아 텔레비전을 본다
방송 3사의 아침 드라마를 순례하고
케이블 채널 들락거리며 한물간 막장 드라마를 다시 본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홈드라마의 문법에 코웃음이 나지만
점심때까지는 이 안락한 소파를 지켜낼 것이다
이 먼 길을 오려고 예감도 없이 털레털레 걸어왔던가
비전 없는 환상을 좇으며, 리모컨이 가리키는 대로,
플러스와 마이너스 기호 사이에서 종종걸음을 쳤던가
광고주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는
스티브 잡스도 부럽지 않았던 내가,
잡지 매대에서 내가 쓴 칼럼들을 뒤적일 때는
퓰리처상 수상자도 부럽지 않았던 내가,
차라리 저 무료한 시곗바늘이 자정을 가리키면 좋겠어, 아니 시계 따위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버리면 좋겠어, 비가 내렸으면 좋겠어, 이 게으른 소파 위로, 밥그릇에 말라붙은 점액질의 통증 위로, 시원한 소나기 한바탕 쏟아졌으면 좋겠어, 그래서 내 몸속, 내 모든 신경세포들과 이백여섯 개의 뼛속까지 흠뻑 적셨으면 좋겠어,
나는 이제 진실이 궁금하지 않다
오늘도 유폐당한 기억은 브라운관에서 굴절되고
텅 빈 머릿속에선 쉴 새 없이 사이렌이 울어댄다
모든 것을 정지시켜버리는 이 슬픈 진공관
아무리 초점을 맞춰도 매직아이는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사람도 관계도 사라지고 풍경의 이미지만 남을 것이다
사진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웃고 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을 때에만 아름답던 음소거의 풍경
온종일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막다른 계절의 골목에서
모두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플라스틱 해바라기들
저 흔들리지 않는 풍경 위에 나의 별이 찾아오기까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날들을 견뎌야 할까
—《현대시학》201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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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민 / (본명 박옥순) 1974년 충북 청원 출생. 청주과학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재학 중.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생일 꽃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