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DA / 임석재 (전북지부)
심심한 오후다. 딱히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다. 빈둥빈둥 집 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숨어있는 사연을 훔쳐본다. 냉장고 문을 열고 입에 맞을 음료를 골라들었다.
신문에 난 짧은 기사가 생각났다. ‘영화배우 드로이 코처가 장애예술인 특별 전시장을 방문했다.’는 내용이다. 그는 지난 3월, 영화 ‘코다’로 94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고 특히 윤여정이 수어手語로 시상해 화제를 모은 바 있었다. 그 장면을 나도 티브이에서 보았었다.
CODA? 주인공 이름인 줄 알았다. ‘루비 로시,’ 17살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 주인공이다.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천진하게 지내지만 날마다 아버지, 오빠와 함께 저인망 어선으로 고기를 잡는 어부다. 어머니도 청각장애인이다. 그녀가 배에 오르는 것은 그녀만 농인聾人이 아니기 때문에 무전을 받고 경매를 하는데 도와줘야 하기 때문이다. 가계家計를 운영하는 데 꼭 필요한 그가 둥지를 떠나려 한다. 대학 진학을 위해서다.
그녀가 좋아했던 마일스가 합창단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도 신청을 했었다. 음악 선생인 베르나르도 비아로부스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버클리 음대 진학을 위한 레슨을 자청한다. 영화를 보면 대개 주인공의 매력에 빠져들고 그의 스토리를 따라간다. 그러나 나는 이름이 길고 복잡한, 그래서 스스로 ‘미스터 V’라고 부르라는 그의 순박한 매력에 빠졌다.
50대쯤 되었을까. 검은 뿔테 안경에 꺼칠한 짧은 수염이 턱을 덮었다. 긴 머플러로 목을 감싸고 그랜드 피아노에 앉아 반주를 하며 열정적으로 지휘를 한다. 때로는 일어서서 손뼉을 치며 리듬을 이끌고 “breath. breath.”하며 호흡을 강조한다. 자신감이 없는 그녀에게 데이비드 보위가 밥 딜런 노래를 모래와 접착제가 달라붙은 목소리라 했다며 네 목소리는 타고났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로시는 아버지를 돕느라 레슨에 여러 번 늦게 되고 미스터 V는 더 이상 교습을 하지 않기로 한다. 당돌한 로시는 피치 못했던 사정을 설명하는 대신 그를 도와주는 은사恩師에게 대든다. “대학을 가지 않겠다. 버클리 음대를 나온 당신도 선생밖에 아니지 않으냐.”며 스승의 마음을 할퀸다.
이런 제자에게는 회초리가 약이지만 그는 진솔하고 열정적으로 말한다.
“나는 선생의 재능이 있다. 애들을 잘 가르칠 수 있고, 그 일이 좋아서 선생을 한다.”
내가 반한, 그의 인품을 드러낸 가장 아름다운 말이었다. 자기 일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 그는 바로 소명을 다하는 사람이지 않는가.
아직 오디션을 보지 않아 결정된 것도 아니지만 부모는 반대한다. 겨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상에 그나마 조합에서는 가격을 후려쳐 어부의 등을 더 휘게 만든다. 로시가 없는 바다 일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빠는 오디션을 포기한 그녀에게 우리는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일을 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수 있다며 그의 용기를 북돋웠다.
합창단의 가을 연주회가 열렸다. 전날 어머니가 사 온 붉은 드레스를 입은 루비 로시는 합창단의 꽃이었다. 마일스와 듀엣을 부를 때 관객은 일어나 박수로 리듬을 맞추거나 흥겹게 몸을 흔들었다. 홍옥紅玉같이 붉은 청춘의 열정이 용암처럼 흘러넘쳤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두 사람은 주변을 훔쳐보며 상황을 파악하느라 애써야만 했다.
여기서 션 헤이더 감독은 모든 음을 배제했다. 딸의 노래를 들을 수 없는 부모의 입장에서 콘서트를 보게 만든 것이다. 입모양과 몸짓만 있고 소리가 배제된 음악은 모든 게 단절된 시간이었다. 절대 고요. 그러나 무슨 내용인지, 얼마나 잘 부르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삶에서 음성音聲의 중요함을 체험하는 화면이 계속되었다.
음악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바람 좀 쐬고 싶다며 픽업 차에 걸터앉았다. 따라 나온 로시에게 부탁한다.
“오늘 네가 부른 노래를 들려줄 수 있나?”
로시는 잠시 놀랐지만 별을 보며 노래를 부른다. 아버지는 입 모양을 마주 보고 한 손을 로시 목울대에 가만히 가져갔다. 이어서 또 한 손까지. “그대는 내게 필요한 전부.” 마지막 소절을 부를 때 그 노래를 알겠다는 듯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오디션은 그야말로 극적劇的이다. 무대의상도 없이 붉은 거디건에 청바지를 입고 30분이나 늦게 도착해서 어렵사리 무대에 올랐다. 설상가상 오디션 악보를 가져오지 않았고 반주자도 악보를 모른다고 했다. 별 수 없이 아카펠라로 부르려는 순간, ‘미스터 V’가 들어와서 반주를 해준다. 그는 승리의 아이콘이었다. 그 노래는 ‘Both sides now’다. 무엇이든 양면이 있다는 경쾌한 리듬의 노래였다.
“이제는 구름의 양쪽을 보게 됐어…. 이제는 사랑의 양쪽을 보게 됐어…. 이제는 인생의 양쪽을 보게 됐어….”
성인이 되어 자립해야 하는 개인적인 소망과 청각장애 가족에 대한 사랑의 고민을 양면으로 비유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넓어졌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모두의 노력과 그녀의 재능으로 소망이 이루어져 마음이 툭 트이고 흐뭇해졌다. CODA는 ‘Children of deaf adults’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부모의 자녀, 약자略字였다.
대학 기숙사로 떠나는 날, 긴 포옹을 한 가족들을 뒤로하고 가던 차가 멈췄다. 차창 밖으로 로시의 손이 나왔다. 엄지와 검지 새끼손가락을 쭉 펴고 중지 약지를 힘차게 쥔 손을 흔들었다.
소리 없는 진동이 큰 울림이 되어 내 가슴에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