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는 독립군장군이며 소련군 대위
대한민국 역사는 자유우파 국민들이 주장하는 역사가 다르고, 친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역사가 다르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자유대한 역사와 공산주의 역사가 따로 있다.
홍범도에 대한 자유우파의 평가는 독립군 장군으로 항일활동한 영웅이지만, 러시아 사주를 받고
우리 독립군을 사지로 몰아넣게 활동한 것도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친북 공산주의자들은 홍범도의 독립군 활동만 내세워 영웅이라고만 하고 있다.
좌익들은 자기들이 보기 싫은 것은 보지 않겠다는 심한 편파 역사의 잣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홍범도는 독립군 장군을 한 것도 맞고, 우리 독립군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죽게 만든 것도 사실인데 무엇이라 해야 하는가?
홍범도는 1920년 봉오동전투(6월)·청산리대첩(10월)의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독립군으로 항일운동을 해서 영웅대접 받는 것도 본질이고, 또 홍범도가 단순히 소련 공산당
가입 활동 이력이 아니라 그가 한국 독립군을 사실상 궤멸시킨 '자유시참변'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국방부가 최근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등 5인의 흉상 이전을 추진하는 것을 두고 정치권에서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1928년 가을 홍범도를 만난 적이 있다는 러시아의 한인 작가 정태는 카자흐스탄에서 발행된
'레닌기치(현 고려일보)' 1968년 8월27일자 기사에 홍범도를 '시넬(러시아식 군복)과 야전가방을 벗지 않았던 농부'로 기억했다.
가방 속에는 레닌에게서 선물로 받은 권총이 들어 있었다.
정태는 "이 홍범도는 시넬과 가방을 벗어놓고는 밥도 못 먹는다고 한다"고 회고했다.
자유시참변은 1921년 6월28일 소련 스보보드니(자유시)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소련이 한국 독립군을 유인해 학살한 사건이다.
소련 적군과 고려혁명군 정의회 산하 고려혁명군(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등 통칭)이
적군 편입과 무장해제를 거부하던 고려공산당 상해파(사할린부대) 한인 독립군을 포위해 무차별 학살한 것이다.
참변이 일어나기 20여 일 전인 6월2일 440명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자유시에 도착한 홍범도는
소련의 무장해제 요구에 순순히 응했고, 홍범도부대는 이후 고려혁명군 제3연대로 편성됐다.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임경석, 역사비평사, 2014)
홍범도가 참변에서 같은 한국 독립군을 공격한 고려혁명군 편에 섰다는 정황이다.
자유시참변 이후 항일 무장 독립군은 시베리아와 만주 벌판 곳곳에서 사살 혹은 체포당하거나 강제노역에 끌려갔다.
대한민국 육군 중장, 외무부 장관을 지낸 김홍일은 자유시참변에서 한국 독립군 700~800명 사망,
부상자 수백 명, 벌목 노동장으로 끌려간 인원이 1000여 명을 넘는다고 기록했다.
(<대륙의 분노노병의 회상기> 김홍일, 문조사, 1972)
자유시참변 이후 한국 독립군은 사실상 '궤멸'됐다.
1945년 연합국의 승리로 한국이 해방될 때까지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와 같은 무장 독립운동 역사를 쓰지 못한 이유다.
반면 홍범도는 참변 이후 휘하 병력 300명을 소련군에 편입시켰고, 그 자신도 소련군 대위로
편입된 뒤 25군단 조선인여단 독립대대 지휘관으로 승진했다.
홍범도가 참변이 발생한 스보보드니(자유시)의 '급수탑' 현장에서 독립군들을 직접 학살하는 데
가담했는지 여부와 관련해서는 여러 논쟁이 따른다.
하지만 ▲레닌이 그를 치하하며 하사품을 내린 점 ▲그가 자유시참변 생존포로 재판에 참여한 점
▲그가 소련군 대위로 편입된 점 ▲참변에서 생존한 사할린부대 출신 김창수·김오남이 그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 등은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특히 소련 정부가 홍범도에게 발급한 복지혜택 인증서는 그가 적군 편에서 자유시참변에
가담했다는 정황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준다 하겠다.
[조선 토론마당/김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