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가족은 꽃보다 아름답다 - 허정욱, 제주장수복지원장

[포청]

5월, 가족은 꽃보다 아름답다

- 허정옥 제주장수복지연구원장/논설위원

5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을 하고 있다.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모란의 달이다.

그야말로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는 피천득 선생의 5월이, ‘나이를 세어 무엇하랴’ 싶은 신록으로

피어난다. 밀감꽃 향기를 바람에 날리면서 향긋한 아침이 새벽을 깨운다. 

문득 설레는 마음으로 달력을 본다. 어린이·어버이·부부·스승·성년에다 부처님까지 오셨으니, 종합하면 ‘가족의

달’이다. 가족은 혈연·혼인·입양 등으로 한 집안을 이룬 사람들의 집단을 말하지만, 때로는 같은 조직체에 속해

있거나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일컫기도 한다. 

어렸을 적 우리 집은 어머니·아버지, 2남 7녀, 그리고 할머니까지 12명이 대가족을 이루었다. 마루에서 분주하게

아침을 먹을 때면 숟가락들이 누구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때마침 동생 집에 들른 이모님 눈에는

난리 통이 따로 없었다. 궁리 끝에 가장 못 먹어서 키가 작아 보이는 넷째 딸을 데리고 가셨다.

무던하고 착해빠진 언니는 한 학기를 이모님 집에 살다가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밥이 그리워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번에는 다섯째 딸을 데리고 가셨다. 한 달 만에 집으로 와버린 언니는, ‘제발 집에서

밥을 같이 먹게 해 달라’며 울었다. 

다음은 여섯째, 내 차례다. 심각하게 고민하셨는지, 이모님은 방에다 책상을 사다 놓으셨다. 서랍 속에는 십

원짜리도 몇 장 넣으셨다. 라면땅 하나에 십 원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오는 길,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친구들이 그렇게도 부럽던 시절이었다. 이모님은 혼자서 마음껏 먹으라는 듯 상을 차려주시곤 일찌감치

밭으로 가셨다.  보자기를 들추니, 큰 언니가 시집갈 때 처음 먹어 본 계란이 허옇게 웃고 있다.

그런데, 나는 얼른 책보를 껴안고 집으로 내달렸다. 헐레벌떡 마당으로 들어서니, 밥 먹는 소리가 두런두런

정겹다. 얼른 달려들어 한 숟가락 퍼먹는다. 목이 멨는지 눈물이 글썽인다. 어머니가 얼른 된장국을 주신다.

눈물이 핑그르르 도는데, 어머니가 눈가를 훔치신다. 아, 우리는 가족이었다. 

어느덧 102세가 되신 어머니가 이 아침에 물으신다. “이 어멍, 오늘은 무슨 일을 허코 이? 쇠로도 못 나서

제주여자로 나시난, 평생을 쇠추룩 일해수게. 경 허난, 오늘은 꼬딱 말아 쉬십서!” 그러자 본인은 지치게 일한

적 없다고, 본인 어머니 했던 일에 비하면 일도 아니라고 정색하신다.

오늘도 어머니는 커다란 양푼에서 콩고르기를 하신다. 눈에 불을 켜시고 부지런히 양 손을 움직이시는 모양이,

‘그래야만 밥을 먹는다’고 여기시는 눈치다. 마음이 저리다. ‘게민 놀멍 허십서’라는 딸과 ‘이어도 사나’를

부르며 더 속도를 내는 어머니의 눈이 마주친다. “정옥아, 난 니 덕분에 그자 호강시럽게 살암져!”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며 우리를 밭으로 몰아가시던 때가 인생의 전성기였으리라.

2024년 3월 기준 제주도의 100세 이상 인구는 276명으로, 여자 260명, 남자 16명이다. 전국 평균보다 인구

대비 2.4배 많은 수치로, 할머니들이 제주의 장수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죽을 때까지 오몽하며 살던 집에

사시다 돌아가시는 게 소원인 우리 어머니들. 앙끄레 바끄레의 가족문화가 유지되는 한 집에서의 임종은

가능한 일이다.

제주 사회의 장수문화에 대한 연구가 백세시대의 노인정책으로 우선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자식은 효도

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출처: 제주일보 2024. 04.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