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 노포 ③ 이문설렁탕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38-13, 견지동 88)
1904년(1902년 또는 1907년) 가게를 처음 연 곳은 피맛골 근처 이문이라고 불리던 초소 옆이었다
YMCA 뒤편 야트막한 언덕을 이문고개라 불렀고 여기서 '이문'을 따왔다
처음 상호는 '이문옥(里門屋)'으로 창업주 홍씨가 영업하다가
1920년대에 2대 사장 양씨가 공평동 46번지로 자리를 옮겼고, 1960년 3대 사장 유원석으로 바뀌었으며, 2002년 유원석의 사망으로 그녀의 아들 전성근이 4대 사장이 되었으며,
2011년 공평동 재개발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115년을 이어오고 있다
(이문옥'에서 '이문식당', '이문설농탕'으로 언제 상호가 바뀌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으로, 건국 후 서울시 음식점 허가 1호이기도 하다
♤ 마나
소의 비장인 지라늘 마나라고 하는데, 이 부위는 특유의 비릿한 향과 멀컹한 식감 때문에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는 부위이다
조선중앙일보사 터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38, 견지동 111)
NH농협은행 종로금융센터 건물은 1926년 7월 5일, 지하1층, 지상2층의 철골구조로 준공된 건물로 일제강점기 민간 3대 신문 중 하나였던 조선중앙 일보가 1933년 6월 18일 이전하여와 1937년 일제에 의해 폐간당할 때까지 사옥으로 사용했다
1947년에는 한국화재보험의 사옥으로 사용되었고 1970년부터 NH농협중앙회에서 사옥으로 사용해 오다가 2002년에 근대건축물로 지정(서울시 고시 제 2002-27호)되었다
크고 작은 증축과 보수를 지나왔으나 건립 당시의 모습이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어 건축사적 으로 보존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 전신)’는 1926년에 창간한 ‘중외일보’의 판권과 신문호수를 이어받아 1931년 11월 27일 경성부 견지동 60번지(현재 우정국로 45, 견지동 59-1)에서 창간되었다
1933년 2월, 여운형(呂運亨)은 사장에 취임한 후 3월부터『중앙일보』의 제호를 바꾸어 1933년 3월 7일 발행하였다
편집인 겸 발행인은 최선익(崔善益), 사장은 여운형이었으나 1935년 5월 31일부터는 출자자인 최선익이 물러가고 새 출자자인 윤희중(尹希重)과 함께 경영을 담당하였다
이 신문의 계보는『중외일보(中外日報)』(1∼1492호) →『중앙일보』(1493∼1871호) →『조선중앙일보 (1872∼3059호)로서 모두 제호를 바꾸어 인수하기 전의 호수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1936년 8월 13일자 신문에 베를린 올림픽 대회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사진에서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워버린 것이 문제 되어, 같은 해 9월 5일부터 일제의 압력에 못이겨 자진휴간에 들어갔다(→ 일장기말소사건)
그뒤 조선총독부가 사장 여운형에게 사임을 강요 하여 발행을 못하다가 1937년 11월 5일 발행허가 가 자연적으로 상실되어 폐간되었다
♤ 일장기 말소사건
1936년 8월 13일자『조선중앙일보』4면과『동아일보』지방판 조간 2면 및 1936년 8월 25일자『동아일보』 2면에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孫基禎)선수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없애버린 사건이다
처음(양 신문사 8월 13일자) 말소된 사진이 게재 됐을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없으나, (인쇄기술이 열악하여 잉크가 번진것으로 판단하였다) 2차(동아일보 8월 25일자) 말소된 사진이 게재되자 총독부에서 고의성을 인지하여 동아일보 관계자 10여 명을 체포하였다
손기정은 1936년 10월 8일 여의도 비행장 귀국하 여 일본 경관과 사복형사에게 붙잡혀 범인 취급받 듯이 끌려나갔다
일본은 손기정의 우승 쾌거가 조선민족의 민족감정 에 불을 지펴 반일 시위와 독립운동으로 확산될 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축하연도 없었다)
동아일보는 청원서와 서약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폐간을 면하였다
해방 후 동아일보는 복건되었지만 조선중앙일보는 되살아나지 못하고 맥이 끊겨버린 데다가 여운형이 암살당하고 '빨갱이' 취급을 당하면서, 일장기 말소 사건은 동아일보가 독점하게 되었으며, 만리동에 있는 손기정 기념관에도 조선중앙일보와 여운형 에게 대한 내용은 전혀 없다
(2022년 12월 14일 추기)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26, 공평동 5-1)
공평동 일대는 1678년 '공평구역 도심재개발지구' 로 총 19개 지구가 지정되었고 2010년까지 6개 지구의 재개발사업이 완료되었다
2014-15년 재개발사업 시행에 따른 문화재 발굴조사가 제1.2.4지구에서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4개의 시대별 문화층에서 건물지와 도로 등 유구와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그중 유구의 상태가 가장 온전히 남아있는 IV문화 층(16-17세기) 유구를 전시관 내부로이전하여 복원하였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도심 정비 사업에서 벌굴되 는 매장문화재를 최대한 '원위치 전면 보존' 한다는 룰'을 적용한 첫 사례이다
민영환 자결 터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5길 41, 공평동 1)
참정대신·외무대신을 역임하고 다시 시종무관장이 되었고 같은 해 11월 을사보호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원임의정대신 조병세를 대표로 백관(百官)들과 상소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비답(批答)이 있기도 전에 일본 헌병에 의해 조병세는 구금되고 백관들이 해산 당하자 자신이 대표가 되어 다시 백관들을 거느리고 두 차례나 상소를 올리고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알고 11월 30일 새벽 6시 전동(典洞) 자기집 청기지인 이완식의 집(현 공평동2번지)에서 국민과 외교사절, 고종황제 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 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喆),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김봉학(金奉學)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아버지 민겸호(閔謙鎬)는 선혜청 제조 겸 병조판서 로 재직 중 1881년 4월 일본 육군소위 호리모도 (堀本禮造)를 초빙해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 을 창설했다
그러나 차별대우 받던 구식 군인의 급료 지급을 미루다가 14개월만에 지급했는데 모래섞인 쌀을 급여로 지급하여 군인들의 불만을 야기, 임오군란 때 난병에 의해 살해되었다
♤ 명함에 쓰여진 민영환의 유서
민영환은 자결하기 전에 총 3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한 통은 2천만 동포에게 고하는 유서였고(명함)
다른 한 통은 미국공사관에 있는 친지(親知: 서로 잘 알고 친근하게 지내는 사람)에게 보내는 유서었으며 (두루마리)
마지막 한 통은 고종황제에게 올리는 유서였다
(고종 황제에게 올린 유서는 제대로 보존이 안 되었는지 안타깝게도 현재 실물은 물론 그 내용마저 전해지지 못한 실정이다)
민영환이 사망한 직후 선혈이 낭자했던 그의 의복과 단도는 따로 수습돼 민영환의 자택 내 침실 뒤의 협실에 보관되었다
그런데 약 8개월 뒤인 1906년 7월,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민영환의 의복과 단도를 보관했던 그 협실의 마룻바닥에서 대나무 4줄기가 돋아난 것이다
민영환이 자결한 곳은 조계사 경내에 있는 자택이었 다는 설과 의관 이완식의 집이었다는 설로 나뉜다
현재는 이완식의 집이라는 것이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거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순화궁 터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94-39)
평산 신씨의 5녀인 인헌왕후(인조의 생모)가 태어났으며선조의 5남 정원군(定遠君 - 후에 원종元宗)과 혼인하여정원군부인이 되었다가 계운궁, 인헌왕후가 되었다
정원군은 능양군(인조), 능원군, 능창군을 두었는데 능양군은 외가인 이곳에서 지낼 때 장난치다가 늘 못 속에 빠졌다고 한다
능양군이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인조가 되면서 장난치다가 빠진 이 연못을 ‘잠룡지’라고 불렀다
그리고 인조는 생부를 ‘원종’, 생모를 ‘인헌왕후’ 외조부 구사맹은 능안부원군에 추봉했다
이후 철종과 헌종 때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던 안동김씨 세도 정치의 핵심 인물 김조순의 조카 김흥근이 이곳을 차지했다
헌종과 경빈 김씨는 1년 8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을 함께했다
헌종이 죽자 경빈 김씨는 궁궐을 나와 김흥근의 집에 머물렀다
이때부터 이곳은 ‘순화궁’이라 불리게 된다
경빈 김씨는 1907년(고종 43년) 세상을 떠났고, 이곳에 사당이 설치되었다
순종은 1911년 장석주에게 서부 반송방에 있는 순화궁 토지 가옥을 하사하고 순화궁을 북부 관광방 간동에 있는 전 호위대 영사로 이전하도록 명했다
이때 사당은 묘소로 옮겨졌고 순화궁은 이름 없이 사라졌다
당시 이완용의 집은 약현에 있었는데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시위대의 방화로 불타버렸다
이후 이완용은 통감(이토 히로부미)의 알선으로 잠시 왜성구락부에서 살다가 고종이 남녕위궁을 내려주어 그곳에서 잠시 살았다
이리저리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완용은 1911년 형 이윤용이 살다가 이사 간 집(순화궁)을 매입하여 이사했고 1913년에 인왕산 아래 옥인동에 서양식 2층 저택을 지어 옮겼다
그러면서 순화궁에는 명월관이 들어온다
원래 명월관은 궁내부에서 궁중 요리를 하던 안순환이 1909년 현 세종로 동아일보 자리에 2층 양옥으로 지은 기생관이었다
그러나 1918년경 화재로 이완용의 순화궁으로 옮기면서 분점격인 태화관을 차렸다
이때 태화의 한자는 처음에는 太和였다가 太華로 바뀌었고, 다시 泰和로 바뀌었다
현재 태화빌딩의 주인은 ‘사회복지법인 감리회 태화복지재단’이고 하나로빌딩은 ‘재단법인 기독교 대한감리회유지재단 및 여러 공유자’로 되어 있으며 상층은 중앙교회가 사용하고 있다
즉, 순화궁은 이완용에게서 남감리회 태화여자관이 되었고, 태화사회관 관장 사택이던 동측을 중앙교회에서 매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효순공주와 능원위가 살던 동측(태화정)은 태화관 선교사 사택에서 중앙교회의 하나로빌딩이 되었고, 구수영의 집으로 인조의 잠저였던 서측(부용당)은 태화사회관에서 태화복지재단의 태화빌딩이 된 것이다
♤ 태화라는 이름의 유래
세조 때 능원부원군 구수영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집안에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운 후 그 이름을 '태화정'이라 부른것이 '태화'라는 이름의 첫 시작이 었다
♤ 별유천지
태화관의 별관으로 3.1독립선언을 한 장소이다
민족대표 33인 중 종교별로는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이다
선언서 낭독자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며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등 4인은 약속장소에 나타 나지 않았고 후에 박희도, 정춘수, 최린 3인은 변절 하였다
♤ 왜 탑골공원에 나타나지 않고 태화관에서 선언문을 발표했나?
1) 탑골공원에서 낭독하면 그곳에 모인 군중들이 흥분하여 폭력시위를 할 것이며,
2) 그렇게 되면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시작 될 것이며,
3) 다른 나라에서도 우리를 좋게 생각하지 않을것이다
4) 결론적으로 일제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보다 타협하는게 좋을것 같다
재판을 받으면서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는 “사의 천박한 학생과 군중이 모였으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박희도는 “무식한 자들이 불온한 일을 할 것 같아서” 장소를 변경했다고 법정에서 말했다
(여러분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
서울의 중심석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5길 25, 인사동 194-4)
옛날 4대문 안을 서울로 치던 시절인 1896년(건양 원년)에 세워진 '서울의 중심석'으로 하나로빌딩 1층 로비에 전시되어 있다
서울시에서 펴낸 '역사문화 유적을 찾아'라는 책에는 이 표석이 " 당시 서울의 한복판 중심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전국 지번(地番)의 중심지점이 되는 곳이었 다"고 수록되어 있다
현재의 서울의 중심점은 남산에 있다
♤ 우리나라 중심점
우리나라 헌법 제3조에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중심점을 계산할 때에는 육지뿐 만 아니라 섬까지 감안하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극동(極東)인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 동단, 극서(極西)인 평안북도 용천군 용천면 마안도 서단, 극남(極南)인 제주도 서귀포시 마라도 남단, 극북(極北)인 함경북도 온성군 유포면 북단을 기준으로 하여, 중앙경선과 중앙위선의 교차하는 지점이 우리나라의 정중앙 지점이다
즉 독도 동단의 경도와 마안도 서단의 경도의 평균값을 경도로 하고, 마라도 남단의 위도와 유포면 북단의 위도의 평균값을 위도로 하는 점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계산한 결과, 우리나라의 중심점은 강원도 양구군 남면 도촌리 산48번지 (동경 128도 02분 02.5초, 북위 38도 03분 37.5초)로 나타났다(이는 2002년 공식 확인된 사실이다)
그리고 섬을 제외하고 육지만을 놓고 산출하면, 한반도의 중심점은 북한에 위치한 강원도 회양군 현리 인근(북위 38도 39분 00초, 동경 127도 28분 55초)이다
좀 더 상세기준을 적용해보면 우리나라(남한)의 면적 중심점은 충청북도 옥천군 청성면이다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일명 중앙탑)은 신라 제38대 원성왕 때 통일신라 전국토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사람이 동시에 출발하여 같은 보폭으로 걸어 만난 국토의 중앙지점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