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의 수행법
부처님의 참된 법(法)은 언어 이전이요 생각 이전입니다.
생각으로 헤아리고 말로써 설명하려 하면 다 틀려버립니다.
그렇지만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남에게 알릴 수가 있겠습니까?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는 자기 손에 물을 묻혀야지,
물을 묻히지 않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실제로 부처님의 참된 법은 꽉 차 있습니다.
어느 때나 어느 곳에나 꽉 차 있는 것이 불법입니다.
그런데 말하지 않으면 아무리 가득 차 있는 법일지라도 이해를 시킬 수가 없습니다.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는 수 없이 법 그 자체가 아닌 말을 억지로 하여
중생들에게 법을 깨우쳐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요
방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참된 불법을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조주 스님의 ‘무(無)’ 자를 예로 들겠습니다.
한 스님이 조주 스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무(無, 없다).”
이 무자 화두를 드는 사람 중에는 ‘무’에 집착하여 ‘무(無)’ 자를 염(念)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무!’ 하는 화두를 들면서
“조주 스님이 ‘무’라고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머리에 떨어지지 않고. ‘무’에도 떨어지지 않아야 참된 법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실로 법을 보는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일념(一念)이 되어 관(觀)-하게 되면 모든 일을 다 알게 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만 꿰뚫어 온전히 알면 법 전체를 다 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에 이르는 수행법에는
참선법도 있고 염불법도 있고 주력법도 있고 간경법(看經法)도 있습니다.
이 수행법에는 우위가 없습니다.
‘참선법은 최상이요 염불(念佛)법은 최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 좋고 훌륭한 법입니다.
그 법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지. 법이 나빠서 공부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염불만 해도 성취할 수 있고, 참선해도 성취할 수 있고, 경을 읽고서도 잘 성취할 수 있습니다.
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법은 하나입니다.
법이 하나이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무슨 수행법을 실천하든 불법을 증득(證得)할 수 있습니다.
참선하던, 염불하던 경을 보든, 내가 일념(一念)에 들어가면 진리와 통하게 됩니다.
우리가 한평생을 살다가 갈 때, 몸뚱이는 못 가져갑니다.
공부한 그 마음자리밖에 못 가져갑니다.
그러므로 마음공부를 해야 내 것이지, 다른 어떠한 것도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참된 내 것은 마음 도리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공부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돈 안 벌고 공부만 하고 있으면 굶어 죽을 것 같지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니면서 버는 것보다 먹을 것이 더 많아집니다. 그런 이치가 있습니다.
공부만 제대로 되면 오히려 복이 더 넘쳐납니다.
나도 굶고 식솔들도 굶어 죽을 것 같지만, 하나도 굶어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일념이 되도록 공부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일념이 바로 한량없는 겁이요, 무량하고 영원한 겁이 곧 일념이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이것을 목표로 삼아 일념이 되도록 한결같이 나아가면 반드시 도를 증득(證得)할 날이 있게 됩니다.
- 청소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