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을 통해 주지 스님과 어렵게 통화를 하고서야 가게 된 문경 청화산 원적사. 외부인에겐 부처님오신날 한 번 개방하는 곳이기에 고맙고 미안할 뿐이었다. 생전 서암 전 종정 스님을 뵈었던 인연으로 발을 들여놓은 도량은 봉암사만큼이나 정진대중 중심이다. 달마상, 부도, 방선시간의 스님들, 서암스님 탑비, 시대를 알 수 없는 원효스님 진영 등이 그렇다. |
산중을 벗어나 살다보면 늘 산중이 그립다. 산사순례 겸해서 산중을 찾아가면, 큰 절은 커서 좋고, 작은 절은 작아서 좋다. 옛날 느낌이 그대로 있으면 더 정겹다.
하지만, 세상도 변하고 절집도 변한다. 그렇더라도 담쟁이가 여름에는 초록으로 예쁘고, 가을에는 빨강으로 예쁘듯이, 절집도 그렇게 담쟁이 단풍들듯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면서 변화해 갔으면 좋겠다.
노 스님께서 서울에 볼 일이 있으셔서, 기차를 타시면 꼭 무궁화호를 타셨단다. 상좌 스님들이 새마을호를 타시면 좋겠다고 여러 번 말씀드려도 “무궁화호는 좌석이 딱딱해서 참선하기 좋아” 하시면서 좋은 차를 극구 사양하셨단다.
법회 참석자가 조촐하여 주지스님이 송구스러워 하면 “일당백이다. 한사람이 깨달으면 만 중생을 제도한다. 그 한사람이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 하시며 법당에 대중이 꽉 들어찬 것처럼 법문을 하셨단다.
마음속에 교만심이 가득 찬 신도가 대중들 앞에서 스님께 질문을 하였다. “불법의 대의가 무엇입니까?” 스님 왈 “다 알면서 묻나…?”
재밌는 일화도 있다. 스님들 셋이서 노 스님을 모시고 토굴에서 정진하는데 한번은 노 스님께서 국수를 탁발해 오셔서는 “64로 끓여라”라고 하셔서 한참만에야 ‘팔팔 끓이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었다는 얘기도 있다.
전쟁이 끝나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스님이 탁발을 하면, 염불을 지극정성으로 하여서 그랬는지 다른 스님들 보다 탁발을 잘 하였단다. 거지들도 스님을 따라다니면서 동냥을 얻었는데, 한번은 스님이 훽 돌아서며 거지들을 향하여 목탁을 쳤다. 거지들은 순간 의아해 하다가 웃으며 자기들 바가지에 담긴 먹을 것을 스님께 내 놓았다. 그 거지들의 환한 미소를 잊지 못하겠다고 가끔 말씀하셨다고 한다.
해제법문 때 그러셨는지? 기자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말씀하셨는지? 한 말씀 부탁드린다고 했더니 “무슨 한 말씀이 있것나? 있다면 장타령 아리랑 타령이나 있것지”라고 알 듯 말 듯한 말씀도 하셨다 한다.
돌아가시기 전에 상좌 스님들이 스님의 열반송을 물으니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 노 스님이 서암(西庵) 큰스님이시다. 문경 원적사에 스님의 승탑과 비가 모셔져 있다. 원적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세웠다. 언제 모셨는지 모르는 원효스님의 진영(眞影)도 모셔져 있다.
원적사를 들어가려면 쉽지 않다. 1년에 한번, 초파일에만 문을 열기 때문이다. 종무소 전화도 잘 안 받는다. 동네 이장을 통해서 주지 스님과 어렵게 통화를 하였다.
주지 스님께 “노 스님이 봉암사에 계실 때 가끔 찾 뵙고, 인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스님들의 정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노 스님의 승탑에 참배만 할 테니, 문을 좀 열어달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전화 목소리 너머로 주저하는 주지 스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렵게 허락을 얻었다.
마침, 소임을 마치고 대여섯 분의 스님들이 차담시간을 갖고 있었다. “정진 중에 대중 스님들을 뇌고롭게 해드려서 참회합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고 보니, 대부분 안면이 있는 스님들이었다. 특히, 15년 전 봉암사 겨울 동안거 때, 함께 정진했던 도반 스님을 만났다.
당연히 그 때 그 시절 기억들을 들춰가며 얘기를 나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나는 일이 있다. 마침 용맹정진을 앞두고 정진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일곱 명의 스님들이 특별한 이벤트를 하기로 했다. 너무 위험해서 출입이 통제된 관음전 코스로 희양산 산행을 하기로 했다.
이 코스에는 3가지 난코스가 있는데, 첫 번째가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바위로 올라서야 하고, 두 번째는 바위 끝에 나있는 아주 작은 홈을 밟고 바위를 지나가야 하고, 세 번째 난관은 경사가 약간 심한 바위를 횡으로 건너가야 한다. 문제는 세 번째 난관에 살얼음이 어른 걸음으로 한걸음 정도 얼어 있었다. 다들 잘 건너갔다.
그러나 평소에 운동신경이 발달해서 아무런 걱정이 없던 도반 스님이 여기서 미끄러졌다. 밑에 있던 다른 스님이 도반스님을 잡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철렁하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 뒤로 도반 스님은 그 일을 잘 관조(觀照)했다고 한다.
뭔가 가벼운 마음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면서, 그 후로는 어떤 일 앞에서도 더 하심(下心)하고 신중하게 처신하며, 그 때 그 깨우침을 늘 간직하며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만면에 웃음 가득한 소탈한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오랜만에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스님들은 옛 모습 그대로 다들 동안(童顔)인데, 나만 나이 들어가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쩌랴.
원적사 법당 뒤에는 큰 바위가 있다. 학바위라 불리기도 하고 말바위라고도 한다.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형국이기도 하고, 잘 달리는 말의 안장이 올려진 바위 같기도 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관직에 나아가려는 사람들이나 큰 꿈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이 조용히 참배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님들은 산문 닫고 오직 정진만 한다.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꿈은 무엇일까? 명예도 스러지기 쉽고, 재물도 다하기 마련이다. 노 스님께 물어보면 뭐라고 답하실까? 매 맞기 전에 달아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