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것의 의미 / 존 버거 / 박범수 옮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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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오와 파리 근교
"가장 어두운 암흑 속에서 모든 것을 잊은 채, 그림을 그리는 바보인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정말 행복해했었다." 이것은 조르드 루오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했던 여러 가지 언급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외견상 단순해 보이며, 사실 모순된 것(어떻게 가장 어두운 암흑 속에서 모든 것을 잊으면서 행복할 수가 있겠는가?)이고, 절망적임을 나타내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는 5피트 6인치의 작은 키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그린 광대 그림들 가운데 몇 점에서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그의 얼굴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루오의 얼굴은 그가 그린 광대들의 얼굴보다 얇은 살갗을 가지고 있으며, 보다 감수성이 풍부한 것이고, 보다 심술궂은 것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한다. 그것은 야행성 동물 같은 고독한 얼굴이다. 우리는 그의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는 그가 나방에 심취해 있는 괴짜 곤충학자였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정부군이 입성하여 대학살을 시작하기 직전, 정부군의 포격을 받고 있었던 파리에서 1871년 5월 출생했다. 그의 부친은 가구장이였다. 그가 성장했던 파리 근교는 그에게 그의 대다수 그림과 동판화의 무대와 분위기를 제공하게 되어 있었다. 파리 근교에는 여러가지 상이한 측면들과, 그것들을 살펴보는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한다. 루오에게 있어서의 파리 근교는 인상파 화가들이나 위트릴로에게 있어서의 파리 근교와는 별 관계가 없는 것이다. 루오의 파리 근교는 우리를 먼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길이 나 있는 근교이고, 황혼 무렵 희미한 가로등이 켜지는 근교이며, 외로운 행상인이 떠돌고 있는 근교이고, 도시에서의 생활에 실패했음에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억지로 그 언저리에서 맴돌아야 하는 사람들의 근교인 것이다. 루오의 그림에서 이들 근교들에 대한 정확한 경계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정신적인 분위기 (아마도 그 자신이 젊은 시절에 느끼고 있었던 그 지역의 분위기)이다. 그 스스로도 그러한 작품 중 하나를 <긴 고통의 근교>라고 불렀다.
14세의 나이에 그는 한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자의 도제가 되었고, 저녁에는 미술학교에 다녔다. 비평가들은 특히 그가 사용한 화려했던 색채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 사용된 납과도 같은 굵고 검은 윤곽선을 예로 들면서, 그의 미술 작품에서 스테인드글라스가 끼친 영향을 중요하게 취급했다. 그러한 유사한 점은 실로 밀접한 것이지만, 그것은 그다지 많은 것을 설명해 내지 못한다는 것이 내 견해이다. 루오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본질은 그 양식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다.
그가 19세였을 때, 그는 귀스타브 모로의 제자가 되었고, 렘브란트가 보여 줬던 선례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19세기의 낭만적 방식으로 어둡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풍경화들과 종교적인 것들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것들, 즉 그림들은 묵직하게 드리워져 있는 커튼의 주름 속에서 상상된 것과 같은 이미지를 주는 것이었다. 제자와 스승은 서로에 대하여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가엾은 루오, 난 자네의 미래를 읽을 수 있어. 절대적으로 한 가지에만 전념하는 자네의 마음씨, 작품에 대하여 자네가 가지고 있는 열정, 그림의 구조에 있어서 평범하지 않은 것을 애호하는 마음 (사실상 자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본질적인 특성들)으로 인해서 자네는 점점 더 독창적인 인물이 될 걸세."
1888년 모로가 세상을 떠났다. 그 충격과 그에 뒤따르는 고독같은, 격앙되어 거의 제정신이 아닌 루오를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창조적 시기에 돌입하게 만들었다.
스승 모로의 죽음에 대하여 내가 느끼는 감정은 마음이 찢어질듯 아픈 것이었지만, 처음 완전히 당황하게 되었던 상태가 지나고 나서 나는 그러한 감정을 곧 극복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극도로 심한 내적 변화였다. 나는 얼마 전 살롱전(해마다 파리에서 개최되는 현대 미술전람회)에서 입상했고, 공직 사회에서도 아주 편안한 위치를 이를 수 있었다. 나는 또한 모로의 찬양자들과 꾸준히 접촉해 오고 있다.
하지만 나 혼자 힘으로 고생하면서 깨달아야 한다고 스승께서 늘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내게는 전혀 가치가 없는 일이었으며,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미술관에서 봤던 작품들 중 내가 마음에 들어했던 모든 것에 대하여 일부러 잊어버리고자 하지 않고도, 나는 점차 보다 객관적인 통찰력에 의해 넋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가장 격렬했던 도덕적 위기를 넘긴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말로 옮길 수 없는 일들을 경험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사물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기괴한 서정성을 가진 그림들을 그려내는 일에 착수했던 것이다.
수년 동안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던가 하는 점에 대하여 궁금히 여긴다. 품위 있는 것이었지만 효과가 없었던 항의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나를 깎아내렸다. 사람들은 내게 편지로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때야말로 내 스승의 말씀을 되새겨봐야 할 때였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자네는 최소한 가능한 한 늦게까지 성공을 거두지 못한 화가로 남아 있다. 그렇게 해서 자네는 제약을 받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보다 완전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 몇몇 작품들으르보게 될 때면, 나는 그 그림을 그린 것이 진정 나였던가? 하고 스스로 묻게 된다. 그게 사실일 수가 있을까? 내가 해놓은 일을 보면 무서워진다.
그가 해놓은 일은 무엇인가? 죽음은 삶을 진정한 것으로 만들어 왔지만, 동시에 그에게 증오스러운 것이 되기도 했다 그는 거리 - 불모지 - 법정 - 카바레 - 파리 시내의 공공 시설들로 나가서 그곳에서 본 것들을 그렸다. 그는 행상인들 - 판사들 - 매춘부들 - 집세 징수원들 - 미식가들 -교사들 - 서커스 곡예사들 - 부인들 - 푸줏간 주인들 - 변호사들 - 범죄자들 - 설교자들 - 장인(匠人)들을 그렸다. 그가 증오했던 몇몇 부류의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때문이었다. 그가 증오심을 갖도록 만든 피해자들은 자기 스스로를 부당하게 취급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는 종이 조각에 수채화 물감, 구아슈, 파스텔, 유화 물감, 잉크 등 별난 재료들이 혼합물로 그림을 그렸다. 처움에 이것은 그의 가난함에 기인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는 것으로서, 그는 손에 쉽게 넣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이용해야 했지만, 그의 무절제한, 재료 위에 재료를 더하는 재료 사용 방식은 또한 그의 통찰력이 가지고 있는 발작적인 성격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지옥과도 같다고 생각했던 것 속으로 떨어지게 될 정도로 타락했다. 그에게 지옥과도 같다는 것은 거기서 그가 마주치게 되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서로가 서로를 이기적인 목적에 이용하는 것에 의해 확실하게 입중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타협하지 않는 태도에 대한 자각과 그 자신과 증오가 가지고 있는 힘에 의해서도 확실하게 입증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 안에 빠져 있었던 무도함과 죄악이 속속들이 배어 있는 여느 때의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숭배했던 보를레르와는 달리, 그는 결코 자신을 또 다른 위치에 놓을 수가 없었다. 루오는 기록을 남기고 비난하는 사람으로 언제나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예컨대 거울 앞에 앉아 있는 매춘부를 그린 그림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를 위해 자세를 취해 준 그러한 매춘부들을 묘사하면서, 루오는 그들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입맞춤을 결코 다시는 받지 못하게 될 두꺼운 아교질의 살덩어리들, 출렁이는 알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오늘날 이들 그림들은 육욕의 덧없음, 나이가 들어간다는 씁쓸한 사실, 상대를 가리지 않는 성행위가 주는 삭막함을 예증하고 있는 것으로 언급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좀더 조심스럽게 그림을 들여다본다면, 그것은 아주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증거가 된다. 거기 앉아 있는 여성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은 루오가 그녀의 윤곽을 나타내고, 해석해 내는 데 사용한 검은색 선들이다. 양젖가슴 사이에 내리그은 선들, 불에 탄 구멍과도 같은 두 눈. 상상 속에서 이러한 검은색으로 된 자국들을 없애 보라. 그렇게 되면 벌거벗은 상태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매력이 아주 없지만은 않은 여인의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여전히 루오의 눈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이지만, 당신이 보는 것은 그가 글로 묘사한 혐오스러움과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 것이 되는데, 그 까닭은 당신이 그가 찍어 놓은 인간 혐오의 낙인을 지워 버렸고, 당신은 그가 이미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입맞춤이 결코 다시는 그녀의 몸에 찍히지 않을 것이라고 결정해 놓지 않았었을 경우에 그가 그녀를 인지했을 것과 같은 그 여성의 모습을 보고 있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는 새상에 대한 자기 자신의 판단을 그녀의 벌거벗은 상태에 찍어 놓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것과 같은 작품은 선험적으로 세상을 비난하는 통찰력의 산물이다. 그 판단은 그것이 보여 주고 있은 것으로부터 생겨가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 판단을 확증하기 위하여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화가로서의 루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작업을 했는데, 왜냐하면 이들 이미지들은 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편견이 없는 시각으로 본다면, 그것들 자체의 동기에 대한 진실을 드러내 보여 주기 때문이다. 1905년에서 1912년 사이의 기간 동안 그 어떤 화가도 로오처럼 순전히 인간 혐오에 관한 그러한 양의 작품을 그린 적이 없다. 이들 그림들은 그것들 자체의 통찰이 지니고 있는 비극적인 면을 기록하고 있다. 채찍질을 당한 그리스도의 머리를 마주 대하면서 당신은 그것들 자체의 잔인함을 고백하고 있는, 그가 물감으로 그려넣은 선들과 벤 자국, 그리고 검은색 표시들을 보게 된다.
1912년에 있은 루오가 두번째로 겪게 되는 죽음은 그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는데, 이번에는 그의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이승에서 우리 모두는 도망자들이다. 질병으로부터, 권태로움으로부터, 최악의 빈곤으로부터, 아는 사람이나 친구가 없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험담으로부터, 그 무엇보다도 죽음으로부터의 도망자들인 것이다. 우리는 떨리는 손으로 홑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리면서 그 아래에 우리 자신들을 숨기는데, 그 홑이불 밑에 들어가는 그 순간에조차도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은퇴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이탈리아의 보로메아 제도(이탈리아 북부 마조레 호수에 있는 네 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휴양지)에 가서 편안하게 쉬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을.
그의 그림은 차차 변화했다. 그의 주제들 중 일부(광대들-난쟁이들-재판관들)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그린 그림도 그 정신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로 우울한 것이었다. 하지만 색채에 있어서 그것은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었고, 그것이 점점 더 나타내 주게 되는 것은 증오가 들어설 자리는 없으며, 오로지 죄의 뉘우침만이 있는 사제와도 같으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신성한 또 하나의 세계였다. 검은색 선들과 물감으로 칠해진 얼룩들은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변화시켰다. 비난하는 대신 그것들은 정적(靜的)이며, 기꺼이 받아들여지는 고통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것은 마치 루오가 자신의 새로운 작품에서는 교회 안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과도 같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종교화가 아니며, 그것은 또한 가톨릭 교리를 선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밝히고자 하는 요점은 단지 루오 자신의 개인적 심리 전개라는 측면에 대한 것이다. 1941년 이후로 줄곧 그의 그림 대부분은 교회의 제단화로 착상된 이미지들이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190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보였던 것과 같은 성향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지만, 그것들은 어떤 속죄의 정신과도 같은 것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제 교회 안에 혼자 있는 것은 그의 이전 작품들에 대한 속죄를 하기 위해서일까? 라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처럼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처럼 간단한 삶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루오에 관한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은 그 자신이 작품을 창조해 냈던 과거에 대하여 삐둘어져 있고, 죄의식에 시달리는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1917년에 미술품 거래상인 블라르는, 1905년에서 1912년 사이의 기간에 제작된 것이 대부분인 당시 거의 8백 여 점이나 되는 루오의 작품 전체를 사들였다. 루오는 이들 그림들의 대부분이 마무리가 되지 않은 상태라고 주장했고, 그는 블라르에게 그 어떤 작품도 화가인 자신이 그림들이 마무리가 되었음을 밝히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에게 팔지 않겠다는 동의를 받아냈다. 이미 완성된 그림을 자신이 만족할 수 있을 만큼 마무리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어서, 그 이후 30년에 걸쳐 그림을 그리면서 루오는 스스로를 자신의 맺은 게약의 포로라고 여겼다. "자신의 양어깨에 온 세상을 떠매고 있는 아틀라스도 내게 비하면 유치할 정도였다 --- 그것은 피가 마르는 일이다 --- 과거와 현재-미래에 걸친 나의 모든 노력은 앙브루아즈 블라르에 달려 있는 거이다. 그 점이 바로 왜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들을 보내면서 기진맥진하게 되었는지, 왜 내가 몰래 기도를 하는지의 이유이며, 어쩌면 그것은 내가 왜 쓰러지게 될 것인지에 대한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블라르는 1939년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도 루오에게는 전혀 안도감을 주는 것이 되지 못했다. 다시 한번 그는 고통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블라르의 유산 상속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마무리되지 않은 자신의 작품들을 반환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그 소송에서 이겼다. 그의 옛 그림들은 그의 손에 다시 돌아왔다. 1948년 11월 5일, 그는 공개적으로 그의 작품 3백15점을 소각했는데, 그 까닭은 자신이 그것들을 결코 마무리할 수 없으며, 그것들을 결코 자신의 양심과 세상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