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김병로 집터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26, 공평동 17)
1924년 4월 22일 오후 6시부터 공평동 49번지 김병로 집에서 조선변호사협회 임시총회가 회장 허헌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이미 멸실되었으며 이문설렁탕 앞 주차장으로 사용되다가,
2011년 이문설렁탕은 공평동재개발로 견지동 88번지로 이전하고
지금은 센트로폴리스빌딩이 들어서 있다
지하에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있다
♤ 김병로 창동 집터 (서울시 도봉구 도봉로134길 14, 창동 731-43)
1934년부터 1945년 일제 패망 때까지 13년간을 은둔생활을 하였던 곳이다
김병로가 창동으로 이주하자 홍명희, 정인보, 송진우도 따라 이주해 창동은 독립운동가들의 은거지가 됐다
일제는 이들 ‘요시찰(要視察) 인물’을 감시하기 위해 양주경찰서에 고등계를 설치했을 정도였다
♤ 김병로 생가 (전북 순창군 복흥면 하리길 160, 하리 519)
1888년 이곳에서 아버지 김상희(金相熹)와 어머니 장흥 고씨(長興 髙氏) 사이에서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당초 안채, 사랑채, 문간채로 이루어 졌으나, 헌국전 쟁때 소실되어 옛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으나, 순창군에서 후손들의 고증을 거쳐 안채와 문간채를 2014년 5월에 복원을 완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2대 대법원 장으로 9년 3개월동안 재임했다
♤ 김종인 (경제학자, 관료, 정치인 - 더불어민주당 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미래통합당 총괄선대위원 장)이 김병로의 손자이다
즉 김병로의 둘째 아들 김재열의 외아들이 김동인 이다
김재열이 1944년 병마로 사망하여 할아버지 김병로 슬하에서 자랐다
김종인은 국회의원을 다섯 차례나 역임한 화려한 정치 이력과, 1980년 광주 학살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에 협력했다는 것과, 계절마다 옷 바꿔 입듯 여당과 야당을 수시로 오갔다
화신백화점 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 51, 공평동 70)
화신백화점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몰락하기 시작했고 1979년 소공동에 롯데백화점 본점이 개점하면서 화신의 자금난은 가속화되었고 결국 화신그룹도 무리한 사업확장까지 겹치며 이듬해인 1980년에 해체를 맞았다
이 후 몇몇 사람을 거쳐 1986년에 최종적으로 한보그룹 계열 한보주택이 화신백화점의 주인이 되어 역사성을 감안해서 백화점 전면부만 남기고 신축하는 안까지 논의 했으나
1987년 부지 소유권이 동방생명으로 넘어간 후 마침내 신규 건축 허가가 떨어지면서 화신백화점은 폐업되고 그 해 철거가 시작되었다
삼성생명이 1999년 옛 화신백화점 터에 지은 종로타워는 연면적 6만652㎡ 규모의 오피스 빌딩이다
지하 6층~지상 33층에 높이 133m 건물로 건물 하부와 떨어진 건물 최상부를 기둥 3개가 떠받친 독특한 형태로 주목받았다
(설계는 아르헨티나 출신 라파엘 비뇰리가 맡았고, 국내기업 삼우설계와 함께 공동작업으로 진행되었 다)
종로타워의 구조는 크게 3개이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지상에서 134m 상공에 떠 있는 고급 레스토랑 탑클라우드, 23층 지붕에 조성된 옥상정원, 13층에 돌출된 캐노피로 구분된 저층부와 고층부 이렇게 각각의 형태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상 24층과 레스토랑 탑클라우드가 있는 33층 사이에 약 30m의 공간이 비어 있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 화신백화점
1890년대 말 신태화란 상인이 신행상회란 이름의 귀금속 상점을 열었다가, 1918년 자기 이름의 '화'와 신행상회의 '신'을 따서 상점 이름을 바꾼다
바로 '화신상회'의 시작이었다
박흥식은 지물사업을 기반으로 자신의 사업을 확장하면서 화신상회에도 자금을 대고 있었는데, 화신상회가 주식회사로 전환되자 박흥식은 자신의 주식을 기반으로 1931년 화신상회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원래 목조건물이었던 화신상회를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새롭게 지었다
1932년, 화신상회의 바로 옆에 동아백화점이 세워 지면서 양 업체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으나, 동아백화점이 개점 6개월 만에 화신상회에 인수 합병되어 기존 화신상회 건물과 동아백화점 건물은 서로 연결되어 각각 서관, 동관이 되었다
이제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종로 상권의 패자로서 꾸준히 사업을 확장해 나가던 1935년 1월 27일 저녁 7시 30분, 화신상회는 불이 나 서관 전층이 전소되고 동관은 3, 4층이 피해를 입어 무려 50만 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한국에 119가 에 처음 도입되 는 등, 한반도의 엉성한 소방 행정에 대격변이 일어 났다)
1935년 5월 5일 서관 자리에 조선인 건축가 박길룡의 설계로 르네상스식 건물을 기공하여 1937년 11월 11일에 지하 1층 지상 6층의 신축 서관을 완공하였다
신관이 완성된 1937년 11월, 이제는 그 덩치에 맞지 않는 '상회'라는 이름을 떼어버린 화신백화점은 구관과 신관을 합쳐 연건평 2,500평에 달하는 명실공히 당시 한반도 최대 크기의 백화점 자리에 올랐다
1층 외벽은 화강석을 두르고 크림색 신축 신관에는 15인승 엘리베이터 4대와 2대의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장안의 화재가 되었고, 경성으로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의 견학코스이기도 했다
건물 옥상 정면에는 전광판을 설치해 그날 그날의 뉴스를 내보내는 등 당시 남촌에 밀집한 일본계 백화점들에 전혀 밀리지 않는 편의시설 혹은 볼거리를 갖춰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효과를 노렸다
나아가 12월에는 평안(平安)백화점을 인수하여 화신평양지점을 개설하였다
1945년 8.15 해방이 되면서 종업원들이 좌익성향 자치위원회를 만들어 친일파 박흥식 사장 대신 화신백화점을 장악하였으나 10월 12일 미군정에 의해 자치위원회가 와해되면서 화신백화점은 다시 박흥식에게로 돌아갔다
한국전쟁으로 백화점 내부가 불타고 물자가 부족하여 백화점 직영이 곤란해지자 1956년 10월부터는 일반에게 임대운영하기 시작하였다
1955년 11월 15일에 화신산업은 종로1가 화신백화점 근처에 자매백화점 '신신백화점'을 개점했다
이후 1955년 신신백화점이 올라서고 한국전쟁으로 피해를 본 화신 건물을 복구하지만 최신 시설을 갖춘 백화점들의 등장으로 화신도 힘을 잃었다
결국 백화점 일부를 임대해 사용했던 ㈜신생이 1967년 건물 전체를 인수하면서 백화점의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해방이 다가올 무렵 경성은 전쟁의 헌복판에 있었다
화신 역시 생필품 판매에 주력하거나 전쟁 홍보 전람회를 개최하는 등 전시상황에 부응했고, 1944년 일본군의 군용기를 생산하기 위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렇게 일본에 협력한 일로 해방과 더불어 반만족행위자 체포1호로 검거되어 첫 재판에서 무죄로 방면되었으나 그 후로도 그의 친일 혐의와 관련된 재판들이 몇 번이나 더 이어졌다
박흥식은 1994년 5월 10일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의 손길이 남아 있는 유일한 곳은 서울 관악구의 광신고등학교 뿐이고 그가 세운 기업은 모두 사라졌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흥식을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