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것의 의미 / 존 버거 / 박범수 옮김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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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와 불가능한 것들
마그리트(1898~1967.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는 한 가지 특정 회화 언어를 받아들이고 사용한다. 그 회화 언어는 5백년 이상된 것으로서, 그것을 최초로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사람은 반 에이크(1395~1441, 플랑드의 화가. 그의 사실주의적 화법은 유럽 전역의 회화에 영향을 미쳤다)였다. 그 언어는 진리라는 것을 외양에서 찾아낼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며, 따라서 표현되는 것에 의해 보존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 언어는 공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시간에 있어서의 연속성도 상징한다. 그것은 가장 자연스럽게 대상물들 (가구 - 유리잔 - 피륙 - 주택과 같은)을 다루는 언어이다. 그것은 정신적 경험을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이지만 언제나 구체적인 배경 안에 존재하며, 언제나 어떤 일정한 정적 물질성(그것에 등장하는 인물상들은 기적을 행하는 힘을 가진 조각상들과도 같다)에 의해 한계가 정해져 있다. 물질성의 이러한 가치는 만져서 알 수 있는 것이라는 환상에 의해 표현되었다. 나는 여기서 그 언어가 5세기 동안에 걸쳐 겪게 되었던 변형 과정을 추적해 낼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것들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으며,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시각예술 작품에서 보게 되기를 예상하고 있는 것들 (유사성, 외양의 재현, 특정 사건과 그것의 배경이 되는 것의 묘사 등과 같은)의 일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마그리트는 자신이 말해야 했던 것을 표현하는 것에 이 언어가 적합한 것인지에 대하여 한번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처럼 그의 미술에서는 모호한 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명백하게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보다 훨씬 그 기교가 덜 원숙한 때인 그의 초기 작품에 있어서조차도 그러하다. (내가 '읽어낼 수 있는'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은유적인 것이다. 그의 언어는 문자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 시각적인 것이며, 언어이긴 하지만 그것은 그것 자체가 아닌 다른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가 말해야만 했던 것은 그가 사용한 언어의 존재 이유를 파괴하는 것인데, 즉 그의 그림 대부분은 보여지지 않는 것, 발생하지 않을 사건,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몇몇 초기의 예가 되는 작품들 가운데서 <위험에 처한 자객>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그 자객은 축음기로 레코드를 들으면서 서 있다. 사복 형사 두 명이 모퉁에 뒤에서 그를 체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한 여자가 죽어 넘어져 있다. 창문을 통해서 남자 셋이 그 살인자의 등을 노려본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보여졌으며, 또한 아무것도 보여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사건을 그것의 구체적인 배경 속에서 보게 되지만, 모든 것은 (저질러진 살인, 앞으로 있을 체포, 창문을 통해서 노려보고 있는 세 남자의 등장처럼) 불가사의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묘사된 순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레코드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이며, 이것은 그것이 바로 그림의 특성이듯이 우리가 들을 수 없는 것이다. (마그리트는 시각적인 것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설명해 주는 주석으로서 소리라는 착상을 이용한다.)
또 하나의 초기 작품인 <찾아낼 수 없는 여자>를 보자, 그 그림은 시멘트에 박혀 있는 다수의 불규칙한 돌들을 보여 준다. 이 돌들은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한 여인을 둘러싸고 있으며, 커다란 손 네 개가 그 여자를 더듬어 찾고 있다. 이 그림은 만져서 알 수 있게 됨을 강조한다. 하지만 비록 그 손들이 돌들의 위로 더듬어 나갈 수는 있지만, 그 여자는 그 손들을 피한다.
세번째의 초기 작품은 <어느 날 밤의 박물관>이다. 그것은 찬장 선반 네 개를 묘사하고 있다. 선반 하나에는 사과가 한 개 놓여 있고, 두번째 선반에는 잘린 손 한 개, 세번째 선반에는 납덩이 하나가 놓여 있다. 네번째 선반 위로 나 있는 들창은 가위로 구멍을 낸 분홍색 종이가 발라져 있다. 그 구멍을 통해서 우리는 단지 어둠만을 보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네번째 선반에 있는 종이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밤의 의미심장하며, 모든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전시품을 상정하게 된다.
1년 후, 마그리트는 담배 파이프를 하나 그리고는 그 파이프 아래쪽의 화포에 이렇게 썼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그는 두 개의 언어(시각적인 것과 말로 되어 있는)가 서로를 무효화시키도록 만들고 있다.
이러한 끊임없는 무효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마그리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을 상징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수수께끼를 낭만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신은 자신의 그림이 "생각의 자유에 대한 물질적 기호로서" 여겨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자유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정의를 내렸다. "삶, 우주, 무한한 공간 등은 생각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경우에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한다. 그것에 대하여 가치를 지니는 유일한 것은 의미, 즉 불가능한 것들이라는 정신적 개념이다."
불가능한 것들에 대하여 상상해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그리트는 이 점을 알고 있었다. "삶의 평범한 순간들과 평범하지 않은 순간들 양쪽 모두에 있어서, 우리의 생각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최대한의 범위에 이르기까지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은 쉴새없이 위협을 받거나, 또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연루되어 있다. 그것은 그것을 규제하는 수많은 것들과 동시에 일어난다. 이러한 동시 발생은 거의 영구적인 것이다." 그 점은 거의 그러하지만, 그것으로부터 탈출한다는 경험은 대부분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언젠가는 자연스럽고 간단하게 일어난다.
첫번째로, 마그리트의 작품을 그가 목표하는 바에 비추어 판단해 보기로 하자. 이것은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우연히 발생하는 것들과 동시에 발생하는 것들로부터 그가 얼마나 솜씨 있게 도망쳐 왔는지를 우리가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초현실주의 운동과의 유대 관계, 그리고 그 운동이 무의식과 자동적인 것에 상당히 막연하게 호소하고 있다는 점은 앞서 이 문제를 혼란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왔다.
마그리트가 그린 그림들 중에는 꿈에서, 또는 의식이 명료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것들을 나타내는 느낌의 표현이라는 것을 넘어서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러한 느낌은 동시에 발생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격리시키게 되지만,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지는 않는다. 거대한 사과가 방전체를 꽉 채우고 있는 그의 그림(<엿듣기 위한 방>), 또는 인물들이나 장면 전체가 돌로 변해 버린 것으로 묘사된 1960년대 초기의 많은 그림들을 나는 그러한 예들로서 열거하겠다. 그와 대조적으로, 그가 충분히 성공을 거둔 작품들은 그 안에서 불가능한 것들이 파악되고 평가되어, 특정한 배경의 특정한 사건들을 묘사하기 위하여 원래 특별히 개발된 언어로 이루어진 진술 속에서의 부재(不在)로 끼워넣어진 것들이다. 그러한 그림들(<빨간 모델>-<여행자>-<자유의 한계>)은 마그리트의 의미가 거둔 승리이며, 불가능한 것들이라는 정신적 개념의 승리인 것이다.
만약 마그리트의 그림이 우리가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들을 확증해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의 기준에 의하면 실패한 것이며, 만약에 그것이 일시적으로 그러한 경험을 파괴한다면, 그것은 성공을 거둔 것이 된다. (이러한 파괴는 그의 예술에 있어서 유일하게 두려움을 주는 것이다.) 그의 예술과 그의 통찰력이 갖고 있는 역설적인 면은 친숙한 것들을 나타내는 언어를 사용하는 데 필요한 친숙한 경험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대부분 화가들과는 달리 그는 이국적인 것을 경멸한다. 그는 친숙하고 평범한 것들에 대하여 등을 돌릴 정도로 그것들을 지나치게 증오한다.
그의 목표는 정당한 것이었는가? 그의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그것이 갖는 가치는 무엇인가?
맥스 라파엘은 모든 예술이 목표하는 바는 "사물로 이루어진 세계를 취소시켜 버리고" 가치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마르쿠제는 예술을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위대한 거부'라고 설명했다. 예술이 당연히 존재하는 것과 소망하는 것 사이를 중재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말해 왔던 견해이다. 하지만 과거의 위대한 작품들은, 그것들의 과거 상태에 저항하여 하나의 언어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고, 확립된 한 벌의 가치들에 대하여 설명해 낼 수 있었다. 과거의 상태와 생각될 수도 있었던 것 사이의 모순은 아직 능가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작품 속에서 통일성이 성취되는 것이다. 실로 불균형을 이루는 현실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우리가 피에로나 렘브란트, 푸생 또는 세잔을 생각하건 어쩌건간에) 언제나 보다 탁월한, 그리고 보다 의미심장한 통일성을 대리하는 것이었다. 20세기 들어서서 (그리고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1941년 이래로) 그러한 모순은 능가할 수 없는 것이 되어 왔고, 작품 속에서의 통일성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되어 왔다. 자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확장되고, 자유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감소한다. 불가능한 것들에 해한 정신적 개념이 비롯되는 것은 이것으로부터이다. 맞물려 있는 억압 체제 사이로 이따금씩 생겨나는 틈새를 통해서만 우리는 그것의 불가능성, 즉 이들 체제 내에서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것이 적절치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고무시키게 되는 하나의 불가능성이 그렇지 않게 됨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게 된다.
마그리트는 말했다. "나는 결정론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연을 신뢰하는 것 또한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정확하게 우연, 또는 결정론 그 어느쪽을 통한 세상에 대한 설명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에 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한 책임이 없다. 내가 책임이 없다는 것을 결정하는 것조차도 내가 아니며, 이런 식으로 무한히 계속되고, 나는 믿지 않을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출발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진술은 (마그리트가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그것이 가지고 있는 명쾌함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의 한 부분이다. 어쩌면 그것은 산업화된 국가들에 있어서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내리고 있는 결론일 수도 있다. 언젠가 이러한 태도의 비타협적인 무력함을 한 번이라도 강요받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던가? 그러나 화가 마그리트는 그 진술이 끝나는 부분에서 다시 계속한다. 부조리로가 아닌 자유로의 환원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 마그리트의 그림들 중 가장 뛰어나고, 가장 설득력 있는 작품들은 이러한 환원에 대한 것들이다. <빨간 모텔>은 나무로 된 벽 앞의 땅바닥에 놓여 있으며, 발가락이 들어가는 부분이 인간의 발가락으로 변해 버린 한 컬레의 장화를 보여 주고 있다. 나는 마그리트의 작품들 중 그 어느것에 대해서도 단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 있지만, 절반쯤이 인간의 변해 버린 장화를 창안해 내는 것이 이 그림이 나타내고자 하는 진의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이것은 그가 증오했던, 수수께끼를 위한 수수께끼가 될 것이다. 그 진의는 어떤 가능성/불가능성이 그러한 창안을 해내도록 제안하는가? 하는 점이다. 땅바닥에 놓아둔 평범한 장화 한 결레라면 단순히 누군가가 그것을 벗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게 될 뿐이리라. 잘린 두 발은 폭력을 암시하게 될 것이고, 하지만 버려져 있는, 절반쯤 인간의 발로 변해 버린 장화 한 컬레는 그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피부에서 빠져 나와 버린 자아라는 개념을 제안하게 된다. 그 그림은 부재에 관한 것이며, 부재인 자유에 관한 것이다.
<유클리트의 산책>은 한 도시를 굽어보고 있는 창문을 보여 준다. 창문 앞에는 그 위에 화포가 얹혀져 있는 화가(畵架)가 자리잡고 있다. 화포에 그려져 있는 것은 도시의 경치에서 그 화포가 가리고 있는 부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한 시각적 익살이 또 하나 있다. 화포에 그려진(아니면 그것에 의해 가려진?) 한 조각의 풍경에 지평선까지 곧게 뻗어 있는 도로와 그 곁에 서 있는 첨탑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원근법에 의한 도로와 탑은 동일한 크기, 색채, 그리고 뾰족한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러한 시각적 익살의 목적은 삼차원적인 것으로 이차원적인 것을, 내용으로 외면을 혼란시키는 것이 얼마나 손쉬운 것인지를 증명해 보이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국 그러한 주장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 화가(畵架)는 돌리면 화포가 내려가거나 올라가게 되는 손잡이가 달려 있다. 마그리트는 이 손잡이를 아주 분명하게 강조하여 그렸던 것이다. 그것을 돌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화포가 움직이면 그 화포가 원래 있던 부분의 너머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풍경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무, 텅 빈 여백이라는 것이 가능/불가능할까? <망원경>이라는 또 다른 그림에서도 똑같은 것이 주장되고 있다. 우리는 한쪽 창틀이 꽉 닫혀지기 않은 이중창을 보게 된다. 그 창문들의 유리면에, 또는 유리를 통하여 보이는 것은 햇빛이 비치고 있는 바다와 하늘이라는 전통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바다와 하늘이 나타나고 있는 이면의 틈새를 통하여 우리는 자유롭고 불가능한 공허함을 어렴풋이 보게 된다.
<영원한 증거>라는 그림을 보자. 이 한 작품에는 동일한 한 여성의 손, 양쪽 젖가슴, 배와 성기, 두 무릎, 두 발을 확대하여 각각 묘사하고 있으며, 별개의 것으로 표구되어 있는 다섯 개의 화포들이 그려져 있다. 그것들은 함께 그녀의 신체와 신체적 근접성의 명백한 증거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러한 증거는 그 가치가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러한 부분들 중 어느 하나를 없애 버리거나, 아니면 그것들을 다른 순서로 다시 배열해 볼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레스 엑스텐사res extensa)은 한 벌의 불연속적이며 움직일 수 있는 부분들로 볼 수도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부분들 뒤쪽에, 그리고 그것들에 나 있는 틈을 통하여 우리는 불가능한 자유로움을 상상한다.
<자유의 문턱에서>라는 그의 그림에서는, 대포가 발사될 때 외면 세계를 그린 화판들은 쓰러지게 될 것이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깊은 사회 - 문화적인 위기감에서 파생되는 것이며, 그러한 위기감은 어쩌면 몇 가지 혁명에 이르지 않고도 그 어떤 통일성을 갖춘 미술이건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패배주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그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술지상주의, 또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것 중 한 가지에 대한 예찬으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있는 그대로의 현재로부터 후퇴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가 화가로서 창조해 내야만 했던 것을 그는 현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왜 많은 사람들이 마그리트의 작품에서 다른 방식으로는 현재 속에 존재할 여지가 없는 것이 될 자신들의 한 부분, 즉 그들 삶의 나머지 부분과는 일치할 수 없는 부분, 불가능한 것의 정신적 개념을 반박할 수 없는 부분, 다른 부분에 가해진 폭력의 산물인 부분을 인식하게 되는지의 이유이다.
(196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