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악산 백련사 (紺岳山 白蓮寺)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명암로5길 414, 백련사
제천 백련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堤川白蓮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17호
이 불상의 복장(腹臟) 조사를 통하여 복장유물로 「조상기(彫像記)」와 「대불정능엄신주(大佛頂楞嚴神呪)」다라니가 수습되었다.
조상기에 의하여 이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이 1736년(영조 2)에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불상은 본래 단양군 서면 금수산에 있는 조계사 극락전에 봉안되었던 아미타삼존불상의 본존불이었는데,
후대 백련사로 이관되었다 한다.
복장유물 중 「대불정능엄신주」다라니는 목판본으로 판심제가 불분명하고 사주단변(四周單邊)에 계선이 있다.
각 판면 계선 하단 지름 7㎝의 원 안에 ‘卍(만)’자를 새겼는데, ‘卍’자를 새기는 점은 동일한 불상양식을 보여 주고 있는
제천 정방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다라니에서 나타나고 있어 서로 관련성이 있다.
특히 책의 끝에 “乙亥九月二十一日改刊(을해구월이십일일개간)”이라는 간기(刊記)가 있어 서지학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662년(문무왕 2)에 의상(義湘)이 백련지(白蓮池) 동쪽에 소암자로 창건하고 백련암(白蓮庵)이라 하였다.
692년(효소왕 1)에 큰 비가 와서 산사태로 백련지가 파묻히고 암자가 매몰되었고, 819년(헌덕왕 11)에 무착(無着)이
옛터를 찾아 중창하였다. 1358년(공민왕 7)에는 나옹(懶翁)이 여주 신륵사(神勒寺)를 창건한 뒤 이 절을 중수하였고,
1587년(선조 20)에는 벽운(碧雲)이 중수하였으며 1624년(인조 2)에 학린(學璘)이 중수하였다.
1798년(정조 22)에는 처봉(處峰)이 중수한 뒤 절 뒷산의 이름을 따서 감악사(紺岳寺)라 개칭하였다.
1910년 욱일(旭日)이 중수하였으나 1916년 화재로 전소되었고, 같은 해 10월에 주지 윤인선(尹仁善)이 산성 안인 현 위치로
옮겨 중창하고 백련사라 개칭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절의 일부가 파손되었으며, 그 뒤 1959년과 1962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강당·삼성각(三聖閣)·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내에는 높이 75㎝의 목조아미타불좌상을 비롯하여 석고로 만든 아미타좌상과 후불탱화(後佛幀畵)·
신중탱화(神衆幀畵)가 봉안되어 있고, 삼성각 내에는 칠성(七星)·산신(山神)·독성(獨聖)의 탱화와 산신상·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대웅전 내에 있는 범종과 절의 동남쪽 병풍바위 위에 있는 부도 1기가 있다.
부도는 중창주 무착의 부도라고 하나, 그 양식이 전형적인 석종형(石鐘型) 부도로서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므로
무착의 부도라는 설은 신빙성이 없다. 전성기에는 이 절의 말사로서 인근에 미륵사(彌勒寺)·신흥사(新興寺)·천수암(天壽庵)·
은적암(隱寂庵)·청련암(淸蓮庵) 등이 있었다 하나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또 절 남쪽의 백련지에는 예로부터 백련이 자생하였다고 하며, 절 뒷쪽 석굴에는 금수탕(金水蕩)이라는 약수가 있고,
삼성각 밑에는 구세정(救世井)이라고 불리는 은수탕(銀水蕩)이 있는데,
이와 같은 약수의 명칭은 물탕 속에 늘 금분과 은분이 깔려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큰 가뭄이 있을 때면 은수탕에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하며, 영험이 있다고 하여 많은 병자들이 절에 머물면서 기도하며 약수를 마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