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곤 쉴레, 욕망으로 그린 그림'이 에곤 쉴레와 얽힌 네 여인을 다루었듯
백석과 인연이 닿았던 다섯 여인들 두고 영화 한편이 나올 법하다.
첫여인은 친구의 소개로 알게된 이화여전에 다니던 박경련인데
무척 예쁘다는 솔깃한 말에 기대가 부푼 백석은 친구와 함께 통영행을 한다.
하지만 인연이 닿지 않을려고 그랬는지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한 채
백석은 아쉽고 그리운 마음을 품은 채 남도를 좀 어슬렁거린다.
구마산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가깝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삼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는데
명정(明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쳐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통영 / 백석
(이화여전에 댜니던 통영 유학생 박경련)
'명정골 산다는 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는
그 내사람이 바로 박경련인데, 굳이 박경련이 아니라 해도
'난'은 만나보지 못한,갖어보지 못한 그래서 더 그리울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의미인 구원의 여인이기도하다.
더구나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도,난(蘭)도
"무지 예쁘다"는 소릴 동행 친구로부터 들었지 않았나.
'통영'의 100년 전 싯적 배경이나 시어들은 예스럽고 생경스럽기도하지먄
당대의 시에 비겨 모던하고 세련됐는데 읽노라니 그맛이 그저그만이다.
마치,100년 전에 그려진 '에곤쉴레'의 그림에서 느꼈던 모던하고 세련됐으며 멋지게 느껴지던
그 감흥과 비슷한데 둘이 미남이란 점, 천재라는 점,동시대 예술가였다는 거마저 겹쳐 그런지 멋졌다.
백석이 본래의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 여행은 '남도시초'라는 시리즈 속 몇편의 시를 남긴다.
(백석과 김진향,후에 백석으로부터 자야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 후 상경한 백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진향이란 기생과 사귀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자야,김영한 여사다
조선일보 기자와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를 했던 백석을 따라 자야도
경성과 함흥을 오가며 살림을 나듯 동거하는데 그사이 백석은 두번의 결혼을 한다.
그때문에 백석과 자야가 두번 결별하는데 동행을 거부한 자야를 두고
백석이 만주행을 하는 세번째의 이별이 영영 생이별이 된다.
아들 하나를 둔 첫부인 장정옥은 아들만 데리고 동란 전 38선을 넘으며
"당신, 남한으론 오지마~!" 란 저주를 퍼부었는데 자야의 존재를 몰랐을리 없었다.
두번째 부인 문경옥도 딴 여자에게 마음이 가있는 백석과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고
슬하의 자녀도 없었는데 셋째 부인 이윤희와 사이에는 3남 2녀를 두었다.
자녀 수효랑 금슬이 비례하지 않지만 5남매씩이나 둔 함경도 숙청생활이 길기도 해서
그무렵 백석의 시는 더 씌여지지 않는다.
다섯 아이를 키우며 범상한 날을 무심히 지나며 더 이상 시를 짓지 않는 백석,
詩作이 고통일 시인은 눈으로 보면 백석이 비로소 행복했을 거라고도 한다.
(함경도 삼수군 집단농장 (양목장)에서 유배 생활 할 때. 백석의 공민증 사진과 가족)
3남 중 몇째인지 아들은 젊은 날의 백석 같고, 장녀인지 딸도 예쁘게 잘 생겼다.
나이는 들었지만 3혼 부인도 서구적인 마스크에 미모가 출중하다.
그런데 백석은 많이 쓸쓸해 보인다.
부부가 각자 살짝 벌어진 채로 포즈를 취한 것도 이채롭다
백석이 저러고 지낼 때 자야는 백석의 생사 여부조차 내내 모르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생각이 많았을 것인데 반해 백석의 자야에 대한 마음은 알 길이 없다.
자야여사가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을 넘기고 사망하기 직전인가 한 방송 인터뷰에서
“백석의 시는 내게 있어 적막에 잠기지 않게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에요”
“내가 기부한 몇천억?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요.
다시 태어나면 나도 그 사람을 위한 시를 쓸거에요...”
자야 여사는 1997년 창작과 비평사에 2억 원을 기부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했는데 불과 그 1년 전에 백석이 타계한다.
이어 천억 대의 재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니
그녀의 법명 길상화를 딴 길상사가 그것이다.
“없는 것을 만들어서 드려야 하는데,
있는 것을 내놓는 것이니 큰 의미가 없다” 그녀의 말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내린다.
나타샤는 사랑을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했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 백석
(마지막 정통 기생였던 진향. 가무와 문예에도 일가견을 갖었다.)
" 만약에 내가 그때 만주로 함께 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진작 그곳 생활이 지겨워진 나의 성화에 못이겨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함께 살았을 것이다.
그를 만주에서 온갖 고생을 하게 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한 것도 나였고,
국토가 둘로 쪼개어져 그를 다시는 북에서 서울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도
모두 내가 미욱했던 탓이다."
백석의 생사조차 모른 채 회한에 찬 만년의 자야여사의 고백이나 저 나타샤가 바로 자신임은 알았다.
만주에서 해방된 조국땅으로 건너 왔지만 백석의 생활은 팍팍했다.아래가 그의 마지막 시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삭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게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여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내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석
백석을 향한 자야 여사의 사랑도 실은 특별할 까닭이 없다.모든 사랑은 다 특별하니까...
하지만 자야여사의 사랑은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가 되어 우리들에게 남았다.
첫댓글 형님
기구한 일생의
시인 그래서
글이 나오나봐요
우리 향님
대단하셔~~
잘도 모셔왔어요
올해 추석즈음
꽃무릇도보고
백석과 자야의 흔적 찾아
길상사를
삭제된 댓글 입니다.
이두 연인을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언니 덕에 폭넓은 지식을 얻습니다~^^
추석즈음 가봅시다
@소엽 네 언니
꽃무릇 필 즈음에요
백석이 멋진 남자였나?
팔남봉꾼 인것도 같고요.
ㅎㅎ
자야의 순애보
지금 천억넘는 재산을
법정스님에게 시주
@소엽
그러게요 법정스님
한태 반해서...ㅎ
@인혜
그랬을까요 ㅡㅋ
@인혜
그분이 참 남자 보는
눈이 높은듯...
팔남봉꾼 아니예요.
집안에서 기생인 김영한 자야를 떼어 놓으려 강제 결혼 시킨거지요
오직 백석은 자야뿐
@인혜 아니예요
애도 없고 살만큼 살고
법정스님의 무소유 글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요
법정스님에게 시주할때
이값어치는
백석의 시 한줄만큼의 값어치가 없다 했지요
이미 백석이 북한에서 죽었음을 알아차린후 결심
소엽언니께서
역사 공부를
다시금 하게 해주셨어요.ㅎㅎ
우리 부모시대에
이런 사랑을 했다는게
아름답지요
아이돌 수준급 외모
명석한 두뇌 백석.
자야의 사랑은 눈물겹지요
법정 스님이 물었습니다
ㅡ요부분 제가 글로 남겨드릴게요
글을 많이 올려야 읽을거리가 있으니
성북동 길상사 이야기 풀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