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6일 오늘의 역사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 연장 결정에 반발해 재판 거부 선언, 변호인단 전원 사임
2014년 국보법 폐지와 양심수석방 촉구하는 민가협 목요집회 천 번째 열림
2014년 서울고법이 2014학년도 수능 세계지리 8번 문항 출제오류 인정 판결, 재채점 결과 1만 명 가까운 수험생의 세계지리 등급 오름, 이 문제로 피해 본 수험생들은 정원 외로 대학 입학 길 열림
2013년 이란에서 마약밀매혐의로 사형 집행(교수형)된 알리레자 엠(37세) 다음날 다시 살아남
알리레자 엠은 마약밀매 혐의로 교수형이 집행 되었다 알리레자는 당시 12분 동안 교수대에 목이 매달려 있었으며 이후 의사의 사망진단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튿날 알리레자의 주검을 찾으러 시체안치소로 간 가족들은 그가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알리레자는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무장경호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입원했다 이란정부는 사형이 집행 뒤 다시 살아난 마약사범 알리레자 엠(37)이 다시 교수형에 처해질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2011년 최나연 LPGA투어 말레이시아 사임 다비 우승(15언더파 269타)으로 한국(계) 선수들 미국여자프로골프 투어 100승 달성
2000년 한-미 미사일협상 타결로 사(射)거리 300Km 미사일 생산 가능
한국과 미국 간의 미사일 협상이 5년만에 타결됐다. 양국 대표단은 2000년 10월 16일 미 국무부에서 미사일 회담을 열어, 한국이 앞으로 사거리 300Km, 탄두중량 500Kg까지의 미사일 개발과 생산, 배치를 할 수 있고, 사거리 300-500Km의 미사일은 순수 연구-개발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협상안에 합의했다.
이로써 한국은 300Km 이상 미사일 연구개발시 시험발사도 필요할 경우 가능하게 됐으나 10회까지만 우리나라 단독으로 연구 및 시험발사하며 그 이후부터는 미국의 감독을 받는다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어 미국은 한국의 미사일 연구-생산-개발 전 과정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검증장치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협상과정에서 당초 컴퓨터를 이용한 가상 발사시험까지 만을 허용하려 했던 미국을 설득, 시험발사를 포함한 실질적인 연구개발이 가능하도록 타결한 것은 대표적인 성과중 하나로 평가됐다.
1999년 이미자,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수생활 40년 기념공연
가수 이미자의 데뷔 40년을 기념하는 ‘이미자 노래 40년’ 콘서트가 1999년 10월 16~17일 양일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조선일보가 ‘가요 여왕’ 이미자씨 데뷔 40년을 기념해 주최한 이 공연은 연일 4000여명이 객석을 가득 메우는 열띤 분위기 속에서 펼쳐졌다.
이씨는 대표곡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부터 가곡 ‘그리운 금강산’까지 20여곡을 2시간동안 열창해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이씨는 이날 무대에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으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전달받았다.
1941년 서울 한남동에서 태어난 이미자는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했다.낭랑하고 애조어린 목소리와 타고난 가창력으로 톱스타 대열에 올라선 그녀는 1964년 ‘동백아가씨’로 정상에 올랐다. ‘동백아가씨’ 음반은 금지곡이 되기전까지 짧은 기간동안 무려 10만장 넘게 팔렸다. 작곡가 박춘석과 손을 잡은 1960년대 중반부터는 ‘이미자 시대’였다. 한해 10여장씩 음반을 발표, 데뷔 10년만인 1969년 ‘1000곡 돌파 기념 리사이틀’을 가졌다.
지금까지 취입한 노래는 국내 가수 중 가장 많은 2000여곡. 음반으로 치면 200장이 넘는다. ‘엘레지의 여왕’ 애칭은 1967년 박춘석 작곡 ‘엘레지의 여왕’이 히트하며 얻었다. 1989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30주년 기념공연을 가진바 있으며 1995년에는 화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1999년 평화유지군 상록수부대 선발대 동티모르 도착
한국군 상록수부대 선발대 150명이 1999년10월16일 동티모르에 처음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평화유지 활동에 착수했다.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에서 독립한 이후 혼란상태를 겪자 국제연합은 다국적군을 파견하기로 결의하고 한국도 이에 따랐다
호주 타운즈빌에서 현지적응 훈련을 받아온 선발대는 호주 공군 C-130 수송기 세 대에 편승, 오전 6시 타운즈빌을 출발해 낮 12시쯤 동티모르 바우카오에 도착, 한국에서 갖고 간 전투식량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이어 3개 제대로 나눠 1제대는 오후 1시 다국적군의 CH-53 대형 헬기 세 대에 나눠 타고 평화유지 활동을 벌이게 될 동티모르 최동단 로스팔로스로 떠나 본대(본대)가 묵을 막사 등을 준비했다.
1998년 칠레의 전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영국경찰에 전격 체포
칠레의 전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82)가 신병 치료차 머물던 런던에서 1998년 10월 16일 영국 경찰에 전격 체포됐다. 영국 경찰의 피노체트 체포는 스페인 사법 당국의 특별 요청에 따른 것으로 1973년부터 1990년까지 칠레를 철권 통치했던 피노체트가 집권기간 중 칠레의 스페인 국민들을 살해했다며 영국당국에 피노체트 체포를 요청했었다.
피노체트 독재 정권하에서 정치적 이유로 살해된 희생자는 3천명 이상이며 1천2백여명이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칠레 정부는 17일 영국 정부의 피노체트 체포를 공식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런던 경찰의 피노체트 상원 의원 체포는 외교 면책특권을 무시한 것’이라고 항의했다. 피노체트는 자신의 군사정권 시절 통과된 헌법에 따라 3월 논란 속에 종신상원의원직에 취임했으며, 통상 면책 특권이 부여되는 외교 여권을 갖고 영국에 입국했었다.
영국 언론들과 정치평론가들은 이번 피노체트 체포 결정이 ‘노동당 정부의 윤리적 외교정책의 결과’라고 강조했다. 스페인 정부는 영국에서 체포된 칠레의 전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신병을 인수받으려는 스페인 사법 당국의 움직임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1998년 북아일랜드의 존 흄-데이비드 트림블, 노벨평화상 수상
1997년 3200톤급 한국형구축함 을지문덕함 진수
1995년 전파법시행령 개정
1994년 헬무트 콜, 독일 총리로 재 선임
1994년 10월 16일 실시된 독일 총선에서 콜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성향의 연립여당(기민당-기사당-자민당)이 승리했다. 64세인 콜은 이번 재집권으로 서독의 마지막 총리 역임, 통일 독일의 첫 재상이라는 경력에 4선이라는 금세기 최장 재임기록을 덧붙였다. 지난 1982년 총리에 취임한 콜은 비스마르크(19년)에는 못미치지만 이번 재집권으로 아데나워 전 총리가 세운 14년 재임기록을 2년 갱신하게 됐다.
라인강변의 소도시 루트비히스하펜에서 세무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콜은 프랑크푸르트대와 하이델베르크대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을 전공했다. 16세 때 기민당에 가입을 시작으로 29세에 주의회 의원, 33세에 주당위원장, 39세에 주총리, 44세에 기민당 전국위원장으로 입신하면서 정치력을 발휘해왔다.
그는 독일통일 과정에서 진가를 발휘, 무모할 정도의 추진력으로 통일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1m94㎝ 키에 113㎏이라는 몸무게의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어눌하고 우유부단한 언행 때문에 그를 주인공으로 한 유머시리즈가 유행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스타일은 이른바 ‘아나콘더 사냥법’으로 비유된다. 아나콘더란 몸집만 크고 독이 없는 뱀의 일종으로 일단 먹이를 발견하면 끝까지 추격, 막다른 길에 몰아놓고는 상대가 기진해서 쓰러질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린다.
1994년 장한나, 로스트로포비치 첼로콩쿠르에서 최우수상 수상
1992년 과테말라 출신의 민권운동가인 리고베르타 멘추, 노벨평화상 수상
1990년 제2차 남북고위급회담, 평양서 개최
1989년 박영식 연대 총장 소련 모스크바대 방문 학술교류협정 체결
1988년 유전무죄 무전유죄-미결수 탈주범 4명 인질극 벌임
지강헌 등 미결수들이 호송차 빼앗아 탈주 9일간 연쇄강도 끝에 서울 서대문 민가에서 경찰과 대치 중 스스로 목숨 끊음
1984년 남아공의 흑인종교지도자 데스몬드 엠필로 투투 주교, 노벨평화상 수상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영국 국교회 투투주교가 1984년 10월 16일 노벨평화상 수상자에 선정됐다. 투투주교는 12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행해진 시상식에서 `노벨상은 고뇌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민중에게 수여해야 할 것`이라고 연설했다.
그는 조국의 비참한 상황을 호소하는 내용의 설교를 주로 했으며 남아공의 소수백인지배자는 물론 남아공에 대해 아무런 제제조치도 취하진 않는 서방국가까지도 규탄해 왔다. 특히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건설적 개입`에 대해 강한 분노를 나타내며 "우리 흑인들은 워싱턴이 나치스이래 최악의 인종차별정책을 취하고 있는 남아공의 현 정권에 협력하고 지지하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노벨상 수상 후 투투주교는 흑인 최초로 요하네스버그 주교가 되었고 그 2년후에는 케이프타운 대주교에 임명돼 남아공 영국 국교회의 전체 지도자가 됐다.
1984년 통신종합센터 준공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결성(의장 문익환 목사)
1982년 수하르토 인도 대통령 방한
1982년 우룽건 중국 공군대위 미그 19기 몰고 망명, 나중에 대만행
1981년 동서고속도로(대전~광주 175km)기공, 후에 올림픽고속도로로 개명
1981년 모세 다얀 이스라엘 국방장관 세상 떠남, 아랍과의 6일전쟁 승리 주역
1979년 부마항쟁 발생
1979년 서울 성수대교 개통
서울 성동구 성수동 뚝섬 수원지앞∼강남구 압구정동 간을 잇는 한강의 11번째 다리인 성수대교가 1979년 10월 16일 개통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의 강남북을 잇는 성수대교 준공식에 참석, 인근주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개통테이프를 끊고 시공업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총공사비 1백16억원을 들여 지난 1977년 4월에 착공, 2년6개월 만에 완공된 것으로 길이는 1천1백60m, 너비 19.4m의 4차선 규모이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시도된 트러스 공법에 의한 다리였으며 당시 한강다리로서는 가장 긴 것이었다. 성수대교의 남-북단 진입로에는 6∼8m 폭의 입체교차로를 각각 설치, 교통흐름을 원활하게 했다.
1994년 10월 21일, 다리의 5번째와 6번째 교각이 내려앉아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는 참사가 있어 기존의 다리를 허물고 1997년 새로운 성수대교를 건설하여 통과하중이 1등급으로 향상됐다.
1979년 이광요 싱가포르 수상 내한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 제265대 교황으로 즉위
재위 34일 만에 심장병으로 돌연사한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1세의 후계자를 선출하는 바티칸 추기경회의에서 폴란드인인 카롤 보이티 추기경이 제265대 로마 교황으로 1978년 10월 16일 선출됐다.
비(非)이탈리아인이 로마교황에 선출된 것은 1522년 이후 456년 만의 일이었다. 공산권인 폴란드에서 교황이 선출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는 점에서는 두번째였다. 58세라는 나이는 1846년 교황선출 이래 가장 젊은 나이였다. 또 요한 바오르2세는 제2차 세계대전중 반(反)나치의 레지스탕스 운동에도 참여할 정도로 정치경험도 풍부하고 7개국어에 능통했다.
다음날 로마 시스티나 성당에서 열린 취임축하 미사에서 새로운 교황은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고 약자구제에만 중점을 두겠다"고 연설했다. 신임교황은 자신을 요한 바오로 2세로 명명, 인권옹호를 다짐했다
1975년 스페인령 사하라서 모로코 35만명 평화행진
1974년 경주 98호 고분서 신라순금고배(高杯) 출토
1972년 자유학습의 날 실시
1969년 통일혁명당 재건 간첩 사건
1967년 경북 금릉서 관광버스 전복 사망 42명 부상 12명
1965년 파월 맹호부대 본대 부산항 출발
1965년 2월 비둘기부대의 베트남 파병 이후, 월남공화국 정부로부터 2차례에 걸친 전투부대 파병요청이 있었다. 이에 정부는 동년 8월 15일 제52회 임시국회 제11차 본회의에 전투부대 파병안을 상정하여 동의를 얻었으며, 수도사단을 제1진으로 선정하여, 동년 10월 12일 여의도에서 결단 및 환송식을 거행함으로써, 건국 이후 최초로 전투부대를 해외에 파병하게 되었다.
파병부대로 지정된 수도사단은 국본 일반명령(육) 제30호(1965.8.28)에 의거 부대편성에 착수하는 한편, 4주간의 교육훈련을 완료하였다. 이어서 동년 9월 15일에는 계획단이, 9월 25일에는 선발대가 출국하고, 10월 16일에는 1개 연대를 결한 본대가 부산항을 출발하여 10월 22일 베트남의 중남부 항구도시인 퀴논(Qui Nhon)에 상륙하였다. 한편 후속부대인 제26연대는 1966년 4월 6일 부산항을 출항하여 동년 4월 16일 퀴논에 상륙함으로써, 수도사단은 완전 편성된 사단편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본격적인 작전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1965 경기도 파주 대장간에서 포탄분해 중 폭발 사망 14명 부상 23명
1964년 중국, 첫 원자폭탄 실험 성공
1964년 10월 16일 중국이 처음으로 원자폭탄 실험을 실시했다고 발표했다. 이날 발표된 성명서에서는 실험이 북경시간 오후 3시에 실시됐다고 밝혔다. 실험 장소에 관한 언급은 없었으나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 서쪽의 신강성으로 확인됐다.
성명서는 중국의 핵무기 개발계획 목적이 미국이 핵전쟁을 일으킬 경우 위협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는데 있다고 밝혔다. 또한 현재 적재관계에 있는 소련과 중국이 마르크스-레닌주위와 무산계급 민족주의의 기초 위에서 하나로 뭉칠 것을 요구했다. 한편 핵무기의 완전파괴와 완전금지를 위해 세계 모든 나라의 정상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의했다.
이로써 중국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5번째 핵 보유국이 됐다.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 박정희 당선
1963년 서독 아데나워 수상 사임, 후임에 부수상 에르하르트 취임
1962년 콩고 중앙정부군과 북부 카당가의 카당가군 휴전협정 조인
1962년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문학이론가 가스통 바슐라르 사망
구조주의의 선구자이며 시론·이미지론으로 유명한 가스통 바슐라르가 1962년 10월 16일 사망했다. 프랑스 현대 사상사의 독보적 존재로 평가받는 가스통 바슐라르는 과학적 진리의 객관성을 강조하는 실증주의적 과학관을 부정하고, 과학적 진리가 인간 이성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는 `능동적 이상주의`를 내세워 과학인식론에 혁명을 가져온 과학철학자다.
바슐라르는 1938년 `불의 정신분석`을 출간, 과학적 인식론에서 출발해 문학에 관한 연구로 접어들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책을 경계로 바슐라르는 과학적 이성에서 시적 상상력으로 관심을 옮겨 상상력의 역동성과 창조성에 주목한다.
그는 이후 문학상상력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불리는 연구서들을 잇따라 발표하며 현대문학비평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바슐라르의 후기 저술에 속하는 `공기와 꿈-운동에 관한 상상력`은 그 대표적인 저서이다. 이외에도 `공간의 시학` `물과 꿈` `몽상의 시학` `불의 정신분석` 등의 저서가 있다.
1962년 한국-사우디아라비아, 국교수립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시작(케네디 보고)
1960년 작곡가 현제명 별세
“해는 져서 어두운데...”(고향생각) “배를 저어가자 험한...”(희망의 나라로)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그 집앞). 이처럼 친숙한 곡을 우리에게 남긴 작곡가 현제명이 1960년 10월16일 향년 58세로 숨을 거뒀다.
그는 홍난파와 더불어 서양음악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한 제1세대 음악인이었다. 개신교 출신에 미국 유학 더구나 친일경력까지도 닮은 꼴이었던 홍난파가 1941년에 죽자 현제명은 빈 자리를 대신했다. 홍난파가 광복이전의 근대 음악계의 대부였다면 현제명은 현대까지도 아우른 우리 음악계의 큰 별이다.
미국에서 5년동안 음악공부를 하고 돌아와 연희전문 영어교수로 부임한 그는 귀국 초기에는 독창회를 갖거나 가곡 등을 취입하는 등 주로 성악 활동에 전념했으나 곧 작곡에 힘을 쏟았다.
나라가 없던 망국의 시대에 그의 음악활동은 모두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31년 조선음악가협회를 창립한 것도, 1937년에는 조선문예회에, 1941년에는 조선음악협회에 가입한 것도, 음악보국을 목적으로 한 경성후생실내악단을 결성(1942년)하고 이 악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것도 모두 친일적이었다. 그럼에도 친일로만 낙인찍기에는 광복후 한국에 현대음악의 뿌리를 내리게 한 그의 공로는 크다
1956년 제3세대 프로그래밍 언어 `포트란` 발표
1952년 채플린 영화 `라임 라이트` 개봉
1951년 남원에 공비출현, 기관차 전복시키고 200여명 납치
1951년 이집트, `1936년 조약` 파기를 주장하며 폭동, 반영(反英)감정 고조
1951년 10월 16일, 이집트의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서 `1936년 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시위가 격화되어 폭동으로까지 발전했다. 전날 이집트 의회가 법안파기를 만장일치로 가결한 것이 시위를 촉발시켰다.
이집트는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명목상의 독립일 뿐 사실상 영국의 군사점령하에 놓여있었다. `1936년 조약`이란 외형상으로는 양국간의 우호동맹조약이지만, 수에즈 운하에 대해서 만은 영국에 종속적이었다. 즉 수에즈 운하가 이집트의 영토라해도 운하의 안전보장 책임은 영국에 있다고 명시하고 있어, 운하의 실권이 여전히 영국에 귀속되어 있었다. 이집트 국민들은 이를 이집트에 대한 영국의 실질적인 지배로 인식, 조약파기를 주장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은 10월 13일부로 이집트에 중동방위사령부 설치를 제안했지만, 이집트 정부는 거부했다. 미국은 이집트에 재고를 촉구했고, 이집트의 일방적인 조약파기를 비난했다. 반영감정이 점점 고조되자 영국은 수에즈 운하에 군대를 증강하며 긴급사태에 대비했다.
1946년 2차대전 독일전범 립벤도로프 등 10명 교수형
1945년 이승만 박사 환국
일제하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귀국하기 시작했다. 미 국무부와 불편한 관계였던 이승만 박사가 미군 군복을 입고 김포공항에 내린 것은 1945년 10월 16일 오후 5시였다.
10월 4일 군용기편으로 워싱턴을 출발,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괌을 거쳐 12일 일본에 도착한 그는 일본 체류 중 하지와 회담했으며 맥아더와도 회동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미 군정청은 그를 극진하게 예우했다. 조선호텔의 스위트룸을 배정해주었으며 리무진을 전용 승용차로 내주었고 무장 헌병이 그를 호위하도록 배려해주었다.
중국 상해와 중경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쳐온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도 해방 3개월여 만인 1945년 11월 23일 김규식 부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1942년 인도, 태풍으로 인한 홍수로 4만여명 사망
1939년 제2차세계대전 독일공군 처음으로 영국 영토를 공격
1928년 독립운동가 박용만, 북경에서 피살
1926년 중국 양자강에서 군함 폭발 사망 1,200명
1918년 허영숙(이광수 부인), 총독부시행 의사시험에 여자로서 최초 합격
1916년 2대 총독에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임명
1916년 마거릿 생어, 산아제한클리닉 개소
20세기 초에는 ‘산아제한’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이 금기를 처음 깬 사람이 마거릿 생어다. 11자녀 중 6번째로 태어난 생어가 어머니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은 언제나 배부른 모습 뿐이었다. 결국 48세에 숨진 어머니를 통해 잦은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건강에 끼치는 폐해를 깨달은 생어는 간호사가 돼 피임법의 전도사가 된다. ‘산아제한(birth control)’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도 생어였다.
1914년 3월에 발간된 잡지 ‘여성 반란’은 산아제한운동의 신호탄이었다. 그는 잡지에서 “여성 자신이 육체의 주인”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잡지는 우송 불가물로 판정받고 곧 폐간됐다. 음란출판물을 발행ㆍ배포했다는 혐의였다.
1916년 10월16일, 생어는 미국 최초의 ‘산아제한클리닉’을 뉴욕 브루클린에 개소했다. 464명이나 다녀갈 정도로 여성들이 큰 관심을 보이자 열흘째 되는날 경찰이 들이닥쳤다.
생어는 재판에서 30일간의 강제노동 판결을 받았지만 “여성에게 피임기구를 제공할 권한을 의사에게 준다”는 판결을 이끌어내 산아제한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36년에 “의사들이 피임약을 처방할 수 있다”는 연방법원의 판결을 받아낸 것도, 1937년에 미국의학협회가 “의과대에서 피임에 관한 강의를 할 수 있다”는 결의를 끌어낸 것도 생어의 길고 긴 투쟁의 결과였다.
1908년 알바니아 최초의 공산주의자 국가원수인 호자 출생
1907년 지리학자 육지수 출생
1902년 프랑스에서 지문(指紋)이 범죄자 식별법으로 채택
1902년 10월 16일 세계최초로 프랑스에서 지문이 범죄자 식별법으로 채용돼 사건해결에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지문은 손가락 끝마디의 바닥면에 있는 융선이 만드는 무늬로써, 지두를 물체상에 찍어 물체 표면에 남는 이 무늬에 의한 영상을 말하기도 한다. 지문은 BC 800년경에 날인을 대신하는 방법으로 상인들 사이에서 쓰였다고 알려졌으며, 또한 예부터 이집트 ·터키 ·인도 ·중국 그 밖의 나라에서는 지두의 인장을 가지고 유력한 증거로 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과학적인 연구가 실시된 것은 19세기 후반 이후이다.
지문을 과학적으로 처음 연구한것은 1880년 영국인 의사 H.홀즈(Foles)였다. 홀즈는 10월 28일, 네이처(Nature)지에 관련 논문을 게재했다. 같은 해 11월 22일, 인도에서 교도관으로 근무하는 영국인 W.하셀(Hussel)도 그 연구를 같은 잡지에 게재했다.
영국의 인류학자였던 F.골턴(Golton)은 하셀이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 사람의 지문은 모두 다르며 평생 불변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지문을 범죄수사에 처음 채용한 사람은 런던 경찰 헨리(Henry)로, 그는 1901년 헨리식 지문분류법을 확립했다. 프랑스가 채용한 방식은 인류학자로 파리경찰서 감정국장 베르디욘(Berdiyon)이 완성한 베르디욘 방식으로, 이 방법은 과학적수사를 한단계 더 발전시켰다. 또한 지문분류법에는 독일의 함부르크의 경시총감이 된 로셔의 고안에 의한 왼손을 기준으로 하는 로셔법 또는 함부르크법이 있다.
한편, 미국은 헨리식 지문법을 채택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외국인에 대한 지문 날인을 실시했다.
1901년 혜민관 설치
1888년 미국의 극작가 유진 글래드스턴 오닐 출생. 1936년 노벨문학상 수상
1863년 영국의 정치가 오스틴 체임벌린 출생. 1925년 노벨평화상 수상
1854년 아일랜드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 출생
1854년 에르푸르트 강령 기초한 독일 사회사상가 칼 카우츠키 출생
1846 사상 처음으로 마취 후 환자 수술
수술대 위에서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마취술을 처음으로 대중화시킨 건 미국의 치과의사 모턴과 외과의사 워렌. 모턴은 취하기 위해 사용하던 ‘웃음가스’라 불린 아산화질소와 에테르를 치료에 이용하여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20세의 환자 마취시켜 종양제거수술
1793년 프랑스 마리 앙트와네트 단두대 처형
1758년 미국 사전편찬가 웹스터 태어남
1610(조선 광해 2) 사명대사 세상 떠남(음력 8월 26일)
조선 중기의 고승인 유정(惟政, 1544∼1610)을 말함. 풍천 임씨로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이다.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이다. 경상남도 밀양출신이며, 수성(守成)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 금강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상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 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해인사에서 머물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7권과 『분충서난록』1권 등이 있다.
1435년 조선, 월식 발생
1434년 조선, 월식 발생
1426년 조선, 월식 발생
802(신라 애장왕 3) 합천 해인사 창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