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창작 2009년 봄호 신인문학상 당선작 심사평 (수필부문)
▶ 수필도 문학적 형상화가 중요하다
근래 수필창작 입문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그 추세 또한 놀랄만한 일이다. 일인칭 화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그냥 풀어쓰는 글이라고 잘못이해하기에 누구나 수필쓰기에 쉽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현대는 가히 수필의 대중화 시대라 할 만하다. 그러다보니 작품의 질적 수준이 전체적으로 저하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 문학의 다른 장르와 비교해 볼 때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수필창작이다. 그러나 ‘좋은’ 수필을 쓰기까지는 치열한 태도로 창작에 임해야 하고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창작훈련을 통해서 내공을 쌓아야 한다. 수필에서의 작가적 역량이란 감각의 미세한 상태, 즉 사회적 동기들을 문학적 동기에 관여시키므로 결말의 카타르시를 얻어내도록 하는 것이다. 즉, 깨어 있는 의식에 접목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수필이 갖는 자전의 객관화다. 그래서 수필에도 문학적 형상화가 중요한 것이다.
여러 응모작품 중 손경아의 <엄지예찬>을 당선작으로 選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구성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였고 화제를 짜임새 있게 배열했다. 엄지손가락의 중요성과 삶의 상처를 연결하려는 수사학적 흐름도 평가할 만하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창작능력이다. 그러나 묘사나 절제되지 못한 언어구사로 말미암아 주제를 뚜렷하게 부각시키지 못한 것이 아쉽다. 수필의 문학성이란 단순히 체험의 서술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반드시 의미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것에 충실해야 ‘좋은’수필이 될 것이다. 등단은 완성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출발이다. 불광불급의 자세로 정진하여 훌륭한 수필가의 길을 열기를 기대한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우영규]
당선작-엄지예찬
손경아
무릇 다섯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에겐 안 아픈 손가락이 하나 있으니 바로 엄지다. 내가 아는 엄지란 무릇, 볼품없이 크기만 커서는 넷째 손가락처럼 반지가 들어가는 것도 아니며, 중지처럼 그 흔한 욕 한마디도 시원하게 내지르지도 못하는 덩치만 큰 바보다. 검지처럼 날렵해서 콧구멍의 코딱지를 상큼하게 파주지도 못하며, 게다가 새끼처럼 귀엽기라도 해서 사람들의 환심을 사거나 약속의 상징으로 손쉽게 걸 수 있는 주제도 못된다.
사정이 이런데도 엄지는 늘 VIP 취급을 받는다. 여러모로 쓰임도 많고 할 일도 많은 나머지 네 개의 손가락은 좋으나 싫으나 울며 겨자 먹기로 옹기종기 모여 붙어 다녀야 할 기막힌 운명을 타고났는데 말이다. 단적인 예로, 악기를 연주할 때 엄지는 늘 뒤편 구석진 곳에 특석이 마련되어 있다. 장갑들도 엄지만큼은 따로 떼어서 큼직하게 만들어 들고 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해둔다. 아예 벙어리장갑은 네 손가락의 개성을 완전 무시한 채 엄지 이외의 손가락을 구분없이 하나로 묶는 참담함의 극치를 보여주지 않는가.
연필을 쥐거나 젓가락을 쥘 때도 엄지의 후안무치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일단 엄지는 항상 나머지 손가락을 내리누르는 형상이거나 그냥 연필이나 젓가락 위에 얹어진 채 묻어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다. 나머지 4개의 손가락은 옹이가 박히는 아픔과 굳은살의 압박을 견디며 헥헥거리면서 불철주야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느라 강행군을 하는 시기에 말이다.
생각해보라. 심지어 컴퓨터의 자판을 칠 때도 나머지 여덟 개의 손가락이 자판 위를 춤추며 이리저리 왔다갔다 미친 듯이 움직이는 사이에도 엄지는 중간 중간 게으름뱅이 마냥 한 번씩 잊을 만하면 넓적한 space bar를 튕겨주는 것이 고작 아닌가 말이다.
눈치 챘겠지만 사실 내가 엄지를 폄하하게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쩌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엄지와 나의 사이는 애증 관계로 얽혀 있었던 듯도 하다. 우리 엄마는 보기 드문 큰 엄지손가락과 손톱을 가진 분이시다. 엄지손톱이 크면 시원해 뵈고 좋지 무엇이 문제냐고 지적하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르는 말씀. 우리 엄마의 엄지는 세로가 아니라 가로방향으로 넓적하다. 마치 못난이 네모공주 얼굴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더욱 가관인 것은 정작 엄지손가락 자체의 길이는 남들보다 반 마디 정도 짧고 굵어서 가끔 내가 봐도 엄마의 엄지 앞에서는 ‘풋’하고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하긴, 웃을 일이 아니다. 바로 내가 그 자랑스러운 엄지 유전 형질을 고대로 물려받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집 4형제 중에서 하필 나만 그 모양의 엄지다.
엄마는 아직도 나에게 물려준 유전형질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인지, 계면쩍음인지 이런 말로 귀 얇은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곤 한다.
“예부터 어른들이 요런 모양 엄지를 갖고 태어나면 손이 야물어서 손재주가 있고, 일머리가 있어서 재물 복이 저절로 따라온다 했으니 걱정 말아라”라고.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다. 나이 서른의 나는 이미 나와 똑같은 엄지손톱의 운명을 타고난 엄마가 젊은 시절 월급쟁이 아빠를 만나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팬티까지 기워 입는 무지 군색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이미 봐버렸기 때문이다. 즉, 그 어떤 말도 내 엄지에 대한 위로는 되지 못했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엄지로 인해 겪은 수모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어릴 적 시작한 피아노.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불철주야 피아노 연주에 매진하여 쭉쭉 진도를 빼던 나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체르니 40번을 배우며 천재성을 꽃피우려는 나에게 늘 곤란한 표정의 피아노 원장님은,
“보통 도에서 높은 미는 기본적으로 닿고, 높은 솔까지는 손이 닿아야 곡을 칠 텐데…너는 엄지가 유난히 짧다. 얘…”
콰르릉. 어린 나에게 처음 못난 엄지로 인한 상처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초등학교 다니는 6년 내내 담임선생님들은,
“어머, 넌 엄지가 크고 살이 많아서 단소랑 리코더 구멍을 잘 막겠다. 야∼”라며 또 한 번 상처에 잊지 않고 굵은 소금을 뿌려주곤 하셨다. 거의 매년, 매일.
나이가 들어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학 때 들었던 ‘배구’수업에서 토스를 위해 엄지 두 개를 나란히 모으면, 제로게임을 할 때처럼 참 신기한 엄지도 다 보았다는 듯 으레 묘한 눈웃음이 담긴 시선으로 여기저기 작은 웅성거림이 들리며 친구들이 나를 곁눈질로 흘끔흘끔 쳐다보기 마련이었다. 조금이라도 길게 보이고자 손톱을 길러보기도 했지만, 역시 날아오는 비웃음을 피할 길은 없었다.
성인이 되어 클래식기타를 배울 때에도 6번째 기타 줄을 퉁기거나, 코드를 잡을 때 내 짤막한 엄지는 선생님의 웃음 샘을 자극하는 단골메뉴가 되었다. 내가 기타를 치는 것이 그들에게는 네 손가락 희아의 피아노 연주를 보는 듯 신기한 표정들이었다. 나이 서른의 여자들이라면 한 달에 적어도 한번은 꼭꼭 들른다는 네일숍에서도, “어머! 언니 여기 이 엄지손톱 좀 봐요, 난 네일하면서 처음보네”라는 네일 아티스트 언니의 말을 들은 뒤로는 발을 끊었다.
최근에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내 짧은 엄지가 보여주는 빛과 같은 속도의 잰 움직임을 마치 동춘 서커스를 보듯이 구경하는 인파도 생겨났다. 거의 매일 곁에서 내 엄지를 봐왔던 우리 언니들조차도 여전히, 오늘날까지도 내 엄지를 놀림의 표적으로 삼는다. 지치지도 않는지.
이런 나였기에 사실 엄지에게 깊은 사랑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간혹 손톱을 깎고 다듬을 때도 늘 엄지를 마지막에 손보면서 세모눈으로 흘겨보곤 했었다. 그래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제스처는 터미네이터의 마지막 장면 엄지를 치켜세우는 동작이었고, 최고를 뜻할 때의 엄지 세리머니 따위도 절대 즐기지 않았다. 물론, 내 엄지의 특이성을 지적하며 “그런데… 엄지손가락이 참 특이하시네요.” 따위의 말을 지껄이는 눈치 없는 완벽외모의 킹왕짱 소개팅 남을 발로 뻥 차버린 것도 여러 번이다.
그랬던 내 엄지에게 그만 엊그제 대참사가 일어났다. 레몬슬라이스를 내기 위해 날카로운 칼날 위로 레몬을 쥐고 슥슥 생각 없이 밀다가 재미를 붙여 그만 무아지경으로 미친 듯이 속도를 내다가 ‘엇’ 하는 사이에 아뿔싸! 내 엄지손가락 살점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레몬 위에 살포시 초밥위의 회 인양 한 점이 얹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앗’ 소리와 함께 엄지로부터 그야말로 ‘콸콸’ 선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쏟아지기 시작했다. 막상 일을 당한 직후에는 너무 큰 아픔 때문에 머리가 다 어지럽고, 상처부위가 아프다 못해 아려 와서 장차 내 앞에 닥칠 시련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감히 이제 와 말하건대, 엄지는 손가락의 지존이었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내가 위에서 말한 엄지에 대한 험담은 단언컨대 어리석은 나의 무모함이었음 또한 고백하고 싶다.
대일밴드와 거즈로 칭칭 감은 오른쪽 엄지의 부상 정도는 매우 심각했다. 엄지 상처부위에 무엇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머리털이 몽땅 빠질 듯 아찔하고, 큰 식은땀 한 방울이 등줄기로 주룩 흐르고, 팔까지 그 여파로 인하여 저릿저릿하면서 심할 때는 온몸이 다 덜덜 떨릴 지경이었던 것이다.
고로 나는 물건을 쥘 수가 없게 되었다. 또한, 내가 세상에서 즐겨라 하는 것 중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연필로 글씨쓰기”가 불가능해졌다. 엄지가 힘으로 받쳐주지 못하면 제아무리 명 연필이라도 글씨가 괴발새발 난리 브루스가 된다는 것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돈을 셀 수도 없었다. 돈을 차곡차곡 정리해서 탁탁 두어 번 치고 왼손으로 돈의 허리를 살짝 꺾어 잡고, 바야흐로 오른손으로 신나게 새려는 찰나! 과연 침을 어디에 발라야 할지 몰라 망연자실해하며 바보같이 남아있는 다른 손가락들로 겨우 지폐 한 장 한 장을 따로 떼어 놓으면서 셈을 헤아릴 수밖에 없었다.
검지나 중지 따위가 대신하자니 어줍고, 바보 같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속도도 배나 걸렸다. 힘주어 스테플러 찍기, 칼질하기, 병 따기, 된장 고추장 병, 스파게티 소스 뚜껑 열기 등은 힘을 줄 수 있는 포인트였던 엄지를 잃으면서 더 이상 ‘누워서 떡 먹는 일’ 이 아니라 안간힘을 써야지 겨우 해낼 수 있는 ‘가장 곤란한 일’이 되어 버렸다.
휴대폰 문자 하나를 보내려 해도 왼손으로 띄엄띄엄 거의 5-6배의 시간이 필요해짐으로써 가뜩이나 좁던 인간관계마저도 붕괴위기에 처했다. 기가 막히게도 슬라이드 폰인 나의 경우 전화가 와도 오른손 엄지를 못 쓰니 꼭 왼손으로 바꿔서 받아 올려야 했다. 그러다 실수로 여러 번 홀랑 전화를 끊어 괜한 오해를 삼은 물론 생뚱맞은 버튼을 눌러 엉뚱한 집에 전화하는 어이없는 실수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출근을 위해서는 더욱 몸 개그스러운 상황이 벌어진다.
머리를 감을 때 시원하게 머리 밑을 긁어주는 것도 엄지였고, 저녁에 퇴근하고 와서 씻을 때 렌즈를 빼는 손가락중의 핵심멤버가 엄지였다. 또한 양말을 신거나 브래지어의 버클을 채우는 것도 엄지 없이 하기에는 정말이지 바쁜 아침에 욕이 절로 나오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 TV전원을 누르거나 음량을 줄였다 켰다 하는 것도 그동안 무책임하게 엄지에게만 일임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리모컨을 부둥켜안은 채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또 매번 문을 닫고, 열고, 잠글 때 열쇠를 구멍에 끼우고 돌리는 역할을 하는 것도 엄지가 그 핵심동작을 책임지고 있었다는 것도 집안 열쇠를 잠글 때마다, 문을 열 때마다 절절히 깨달았다. 하다못해 식사할 때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 해서 눈물을 머금고 포크를 사용해야 했고, 직장 내 화장실에서 엄지가 힘을 쓰지 못해 휴지로 뒤처리를 깔끔하게 하지 못한 찝찝함에 하루 종일 시달려야 했다. 지퍼를 올리는 일도 검지는 단지 도우미일 뿐 바보가 된 엄지가 전문가이므로 힘 있게 끝까지 ‘주욱’ 올리지 못했다. 결국, 찔끔찔끔 ‘지직지직’ 올리다보니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다가 덜 올라간 지퍼가 힘없이 내려앉아 남대문이 그야말로 활짝 열려진 것을 발견하고 창피함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겨우 망사팬티를 입고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지경이었다.
가장 날 충격에 빠뜨린 것은 겨우 이 작은 상처하나가 나를 이토록 절망에 빠져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시름을 잊고자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할 때도, 주소창에 주소하나 치는데도 독수리가 되어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드래그&드롭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무의미한 스크롤링만 ‘드륵드륵’ 할 수밖에 없는 내가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간혹 살다 보면 그렇게 느낄 때가 있다. 늘 곁에 있어서 소중한 걸 모르다가 사라지거나, 죽거나, 잃어버리거나, 손상되거나, 상처 입었을 때 비로소 후회가 밀려오는 순간 말이다.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 것은 왜 항상 요 모양 요 꼴로 생겼느냐고 구박만 받던 나의 엄지에 그것도 오른쪽 엄지의 아주 작은 부분에 상처가 났을 뿐인데 왜 이렇게 나는 뿌리째 흔들리는가. 그동안의 나는 얼마나 못되고 어리석었었는가.
못났다. 부끄럽다. 모진 구박과 핍박, 비웃음, 조롱, 학대, 방치, 무관심 속에서 그 서러움을 먹고 묵묵히 견디며 자신을 괴롭히는 대상을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맡아왔던 나의 소중한 엄지여. 항상 화려한 움직임과 멋을 뽐내는 네 손가락의 경망스러운 몸놀림과 자기 자랑에도 굴하지 않고 일인자로서의 면모를 발휘하며 뒤를 받쳐줄 줄 알았던 겸손한 엄지여.
나이 서른, 엄지에 생긴 작은 상처가 내 마음을 온통 뒤흔든다. 상처가 이렇게 아픈 것은 아마도 어리석었던 내 삶에 대한 뼈아픈 후회 때문이리라. 짧다면 짧았던 내 나이 서른 해 동안 나는 과연 엄지처럼 드러내지 않으면서 겸손하게 내 자리를 지킬 줄 아는 성실한 사람이었는지 돌아본다. 항상 곁에 있어서 더 소홀하고, 함부로 대했던 사람들이 내 인생을 이처럼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소중한 주춧돌이 아니었는지 생각해본다. 잘난 것 하나 없으면서 내 잣대로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무턱대고 미워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본다.
올여름, 엄지로 인해 불편했던 일주일이 지났다. 상처도 많이 아물었다. 빨강 딱지가 앉은 엄지를 달래가며 조심조심 글도 쓰고 세수도 하고, 손톱 발톱도 깎는다. 평소에는 귀찮기만 하던 일들이 다 하나같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걷고, 말을 할 때처럼 설렌다.
살고마니 젓가락도 쥐어본다.
사알짝 컴퓨터 자판도 쳐본다.
조심조심 브래지어도 채워본다.
풀어진 운동화 끝 리본도 살포시 매본다.
상처가 아물어 가는지 땅기기는 하지만 할 수 있다. 이 기쁨을 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제 곧 머리도 혼자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나이가 들더라도 이렇게 순수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할 텐데··· 엄지가 지켜본다. 왠지 뜨끔하다.
비마누라 실종사건
손경아
‘이상하다. 분명히 여기 어디 있을 텐데···’
벌써 5분 째 끊임없이 궁시렁거리면서 별로 넓지도 않은 집 신발장 안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도저히 어디에 팽개쳐두었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설마 발 냄새를 좋아하는 악취미를 가진 변태 도둑이 아니고서야, 훔쳐갈 항목들이 백 만 개도 넘는데 굳이 다 떨어져서 뒤축 천이 나달나달하고 빛바랜 그 헐어터진 운동화를 훔쳐 갔을 리 만무하다. 결국 나는 나 스스로의 바보스러움에 두 손 두 발 다 들면서 화를 버럭 내고야만다.
“쟈기! 혹시 비마누라 못 봤어요? 아무리 찾아도 없단 말이에요”
내가 아까부터 꼼지락꼼지락 뭔가를 찾는데도 주방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설거지만 하는 신랑에게 부러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신경질을 부려본다. 물소리 때문인지 듣고 싶지 않음인지 신랑은 듣는 둥 마는 둥 반응이 없다. 그 행동에 더욱 화가 난 나는 퉁퉁 발소리를 크게 내면서 트집을 잡기위해 신랑에게 다가간다.
“쟈기, 내 비, 마, 누, 라 못 봤냐니까요!”
울상이 된 채 빽 소리를 지르는 나를 보고 나서야 일의 심각성을 깨달은 울 신랑은 그제야 사태파악을 한다.
“못 봤는데요. 잘 찾아봐요 운동화가 저 혼자 걸어갔을 리는 없잖아요?”
그걸 지금 충고라고 하느냐고 울컥 마음이 상했지만 어차피 신랑의 잘못도 아닌데 괜한 트집을 잡는 것 같아 한편 면구스러워졌다.
거의 매일 영하 10도 이하의 춥고 바람 부는 모진 날씨가 계속되다가 겨우 해가 반짝 나고 따뜻해진 주말 아침, 운동화를 신고 모처럼 산책을 즐기려던 나의 계획은 그렇게 흐지부지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포기는 이르다. 나는 ‘비마누라’를 포기할 수 없다. 절대로···
도움이 될까 싶어 비마누라를 샀던 때부터 지금까지를 연대기 순으로 찬찬히 탐정인 냥 눈을 번뜩이며 되짚어 본다. 언제 무슨 일을 마지막으로 그 아이가 내 손에서 사라졌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의아하겠지만 ‘비마누라’라는 애칭에 빛나는 이 물건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애장품 중에 하나인 평범한 운동화이다. 이 아이와 처음 만난 것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하던 해 3월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직장 동료들이 40kg대의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머리를 둔기로 두드려 맞은 듯 충격에 휩싸인 나는 첫 월급을 받고 득달같이 헬스클럽으로 달려갔다. 헬스클럽 관장님은 나의 늘어진 뱃살과 축구선수 다리 인 양 굵고 근육이 울룩불룩한 허벅지 앞에서 순간 망연자실 해 하셨지만 이렇게 충고하면서 나를 고무시켰다.
“아무래도 지금 신고 있는 단화 비스무레 한 운동화로는 조금 운동에 무리가 있으니까 이참에 가볍고 쿠션감이 좋은 조깅 화를 하나 구입하시면…”
나는 관장님의 뒷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흘려듣고는 얼른 인근 운동화 매장으로 향했다. 흔히들 잘 알고 있는 아디다*, 나이*, 퓨* 등등의 유명 브랜드를 차례로 돌면서 나는 나만의 운동화 찾기 삼매경에 푹 빠졌다.
그렇다고 내가 운동화라면 환장하며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어릴 적 부유하지 않았던 우리 집은 딸 셋의 운동화를 철철이 새것으로 세 개씩 사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늘 운동화 사이즈가 비슷한 형제들이 신다가 남은 것을 내가 신어야 했다. 그런데 가장 슬픈 것은 위로 둘 있는 언니들의 신발사이즈가 220-230사이로 매우 작아서 발이 245나 되는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결국 나는 비극적이게도 바로 위에 있는 오빠의 운동화를 물려받아야 했다. 지금에야 오빠의 발이 280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성장발육이 나보다 뒤처졌던 오빠의 신발이 초등학생인 내가 신기에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친구들이 저마다 초 절정의 분홍포스를 뽐내며 저마다 각양각색의 예쁘고 깜찍한 여성스런 운동화를 신고 운동장을 누빌 때, 나는 남자의 것이 분명한 퍼런빛의 무늬 없고 밋밋한 헐어터지고 뒤축이 빗면모양으로 달아빠진 냄새나는 오빠 신발을 들키지 않기 위해 체육복바지를 더 길게 내려 입거나 운동장에서 미친 듯이 뛰어서 발이 보이지 않도록 나름의 방편을 강구하기 위해 고심해야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커서 얼마든지 새 운동화를 사서 신을 수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윤택해졌음에도 운동화에 선뜻 마음이 가질 않았다. 그래서 내 신발장에는 한풀이라도 하듯이 색색의 굽 높은 고가의 불편하기 짝이 없는 부츠와 하이힐들이 빼곡히 자리하게 되었다. 운동이나 산책을 위해 편한 단화를 살 때도 운동화처럼 생겼으나 키높이 깔창이 되어있어 딱딱하지만 모양이 아주 세련된 그런 신발을 구입하여 신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순수하게 운동을 하기 위한 목적의 ‘운동화다운 운동화’를 구입해야한다는 압박이 강했다. 발품을 거의 2시간씩 일주일 넘게 팔아봤지만 나는 마음에 쏙 드는 나만의 운동화를 발견하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돌잔치에 가기위해 아기 옷을 사러 아울렛매장에 갔다가 밝은 빛의 아우라를 뿜어내는 스포츠용품 매장을 발견했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인 듯 나는 왠지 모를 이끌림에 그곳 매장으로 가서 다짜고짜 내 시야를 압박하며 위용을 뽐내던 운동화를 조급하게 가리키며,
“저거 주세요, 발 크기는 245에요”
라고 말해버렸다. 점원은 별 희한한 손님도 다 있다는 듯 245를 가져다가 끈을 매주면서 신어보라고 했다. 나는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은은한 겨자색이 약간 섞인 몸체하며, 새하얀 끈이 멋스럽게 대각선방향으로 디자인된 것 하며, 냄새가 나지 않게 통풍이 되도록 안쪽에 망사를 댄 것 하며, 쿠션감 등 모든 조건이 내가 찾던 바로 그 신발이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직원의 도움을 받아 발을 집어넣었다. 신발의 탄력이 어찌나 좋은지 사방에서 내 발을 확 조여 주는 듯 탄탄한 느낌이 들었다. 신발 자체의 무게도 얼마나 가벼운지 이 신발을 신고라면 부산까지도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이라는 노래가사처럼 나는 매장을 팔짝팔짝 뛰어다니면서 ‘유레카’를 외쳤다. ‘바로 이거야!’ 나는 기쁨에 넘쳐 이 아이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갑 속에서 카드들이 계산을 서로 하겠다고 아우성이다. 초스피드로 3분도 채 되지 않아 상품을 구입한 후, 포장 상자며 쇼핑백 모두 집어던진 채 누가 쫓아오는 양 신발 두 짝을 가슴에 품고 집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 당시 월드 스타가 되기 전 갓 신인 티를 벗으면서 한창 인기를 얻고 있던 ‘비(정지훈)’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나는 그 운동화의 뒷부분에 조그맣게 ‘비마누라’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이후 나는 그 신발을 신고 정말 원 없이 걷고 뛰어다녔다. 비마누라는 나와함께 태국 카오산 뒷동네의 끈적한 과일주스를 밟았고, 이집트의 황량한 사막모래위에서 불가마찜질을 즐겼으며, 히말라야의 구석구석 눈밭에서도 함께 뒹굴었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아직 연인사이였던 나의 신랑과 내가 50km걷기대회에 출전하여 당당하게 완주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우리의 결혼을 앞당기는데도 일조했다. 과연 이 가볍고 편안한 내 몸에 가까운 ‘비마누라’가 없었던 들 그 일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지금은 뒤축도 닳고 입구의 천조각도 해지고 찢어졌다. 어느 새 얼굴도 꼬질꼬질해졌다. 나에겐 너무나 소중한 물건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흥미를 끌만한 물건이 못 된다는 것이다. 되짚어가며 이 생각 저 생각에 골몰해봤지만, 나는 도대체 비마누라가 어떻게 실종되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내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워 침대에 머리를 찧으면서,
“으이그 왠수야, 나이 들면 죽어야 돼. 머릿속에 왕지우개가 있냐. 으이그.”
하면서 넋두리를 했다. 신랑은 그런 나를 부여잡고, 자신이 찾아줄 테니 제발 그만하라며 나를 다독였다.
우리는 그 날부터 그 아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애꿎은 모든 사람을 의심하면서 나의 발 냄새 하나만을 믿고 비과학적 단독 수사에 나섰다. 일단은 내가 자주 가는 나의 친구, 친척, 형제, 자매, 시골 부모님의 집 신발장부터 ‘킁킁’ 코를 벌름거리며 구석구석 뒤져나갔다. 길을 가다가도 비슷한 모양의 신발이 보이면 집요하게 따라가도 보았다. 이러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의 집착을 측은하게 바라보던 신랑이 차라리 똑같은 모델을 새로 구입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최후 협상안을 제시했다. 내가 그 신발을 아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 두 언니들도 그게 좋겠다고 말을 거들었다. 나는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그거라도 위로가 될까 싶어 인근 매장을 방문했다. 그러나 서울 시내 매장을 다 뒤져보아도, 그 모델은 벌써 5년도 더 된 구 모델이어서 유행과 멀어 요즘에는 단종 된 채 생산이 안 된다는 비보만을 접했을 뿐이다.
나는 절망에 빠졌다. 비마누라 없이는 여행도, 운동도, 산책도, 자전거 타기도 다 심드렁해 졌다. 신발장을 열 때 마다 초점 없는 멍한 눈으로 한 참 신발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서 ‘비마누라가 없어…휴우’하고 깊은 한숨을 쉬는 나를 가족들은 안타깝게 지켜봐야만했다.
그러기를 3개월, 5분 거리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큰언니에게서 생뚱맞은 시간에 전화가 왔다. 화순에 살고 계신 시댁에 내려간다고 한 참 바쁘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 밤중에 무슨 전환가 싶었다.
“넌 지금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알면 나에게 와서 무릎을 꿇게 될 걸.”
잔뜩 으스대며 푸헐헐 큰소리로 과장되게 웃어대는 큰언니의 음성을 듣고 나는 뭘 가지고 또 저러나 싶어 심드렁하게,
“뭔데?”하고 대꾸했다.
“비, 마, 누, 라! 이제 감이 좀 잡히시나?”
나는 순간 수화기를 씹어 먹을 뻔했다. 그 작은 음성 구멍으로 들어가서 당장 언니를 부여잡고 대체 그 아이를 어디서 찾아냈는지 묻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정말? 정말? 그게……진짜지? 딱 기다려…내가 갈게…사랑해!”
나는 평소 잘 하지도 않던 사랑해 소리를 연발하며, 반사적으로 한 손으로는 주섬주섬 겉옷을 챙겨 입었다. 옆에 있던 신랑이 놀라면서,
“뭐래요? 큰 처형 집에 무슨 일 있대요? 설마… 로또당첨?”
하면서 큰 눈이 쏟아질 듯 더 커져서는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나를 막아섰다.
“쟈기야! (심호흡을 하고) 큰 언니가 비마누라를 맡고 있대요.”
기쁨에 가득 차 소리치는 나를 신랑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끌어안았고 우린 서로 얼싸안은 채 콩콩 뛰면서 난리 브루스를 췄다.
나의 사랑하는 운동화 비마누라는 그렇게 발견되었다. 지난 10월 결혼을 앞두고 웨딩촬영을 하면서 큰 언니 차를 잠시 빌려 탔었는데 그때 촬영을 마치고 신기 위해 편안한 신발 하나를 검정 비닐봉투에 묶어서 차 트렁크 안쪽에 실어두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트렁크의 깊숙한 속으로 들어가 박히면서 다른 짐들에 치여 그만 아무도 모르게 실종되었었던 것이다. 다행히 시댁에 가기위해 이것저것 큰 짐들을 싣다보니 구석에 처박혀 있던 비마누라라 기적적으로 언니 눈에 발견된 것이다.
발견 장소를 듣고 나니 그 날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너무나 명확하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아차! 그랬구나. 내가 다른 짐은 다 내리면서 그걸 깜빡했었구나. 그 동안 수많은 사람을 의심했었다. 애꿎은 동네사람들, 형제, 자매, 심지어 신랑까지 용의선상에 올렸었다. 나의 게으르고 꼼꼼하지 못한 덜렁덜렁 습관이 부른 참극이었다.
언니 집에서 돌아온 늦은 밤 현관에 운동화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한 참을 쳐다보다가 손으로 운동화를 한 번 두 번 천천히 쓸어 본다. 그리곤 나의 집착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건 아마도… 추억일거다.
내가 살아왔던 흔적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듯한 허탈감이었던 것 같다. 발로 꼭꼭 밟으며 한 발 한 발 걸어왔던 나의 힘겨웠지만 아름다웠던 20대가 이 운동화와 함께였다. 때로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고 잘못 가 되짚어 오기를 수차례…. 이제와 내 발 밑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낡은 운동화 ‘비마누라’를 본다. 그에게도 지친 인생의 숨고르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겠지. 다 낡고, 헤진 운동화를 보며 여유를 배워본다.
이제 나이 서른. 좀 천천히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