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나다를 꿈꾸시는 분들게 조금 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행이나, 생존에 관한 이야기들... 캐나다에서 저는 살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관광 비자 홍기의 캐나다 10개월.
캐나다나…가 볼까…???
워킹홀리데이로 호주도 갈수있었지만…난3가지 이유로 캐나다가 좋았다.
1.로키가 있어…산을 자주 갈수 있을거 같았다.
2.겨울에는 보드를 즐길수 있을거 같았다.
3.미국식영어를 쓰는 캐나다가 왠지 호주보다 끌렸다.
한 가지 더 이유를 들자면 자연이었다. 길 옆에서 사슴을 보는건 쉬운일이고 너무나도 자연을 사랑하는 나라라고 들었다.
요즘 흔한 유학생 친구,혹은 어학연수하는 친구가 캐나다의 어딘가에 있었던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척이 있거나 어떤식으로도 아는사람이 이 넓은 캐나다에 한명도 있지않았었다.
지금은 …조금 있다. 좋은 인연들 몇명이있다.
지금까지 사기를 당해 보거나 사람으로 인한 시련은 없었으며 너무 좋은 사람들을 캐나다에서 만났다. 대부분은 캐나다 현지인 들이었다.
역시 인연이란 정말 소중한가 보다.
난 준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데…난 많은걸 그들로 부터 받기만 했다.
지금은 어떻게 받은걸 되돌려줄지 모르겠다.
워킹홀리데이가 됐다는 가정하에 난 ….4월입국후 벤프에서 3달을 일하고 하이킹하며 보내고 동부 여행 또는 농장에서 11월까지 보내고 다시 벤프로 돌아와 보드를 타며 2월까지 지내는게 계획이었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돈은 오카나간 벨리에서 벌면 될거라고 생각하고... 들어오기 전부터 오카나간 경험자님께 여러가지 질문들을 했었었다.
돈 떨어지면 또 농장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 그 모은 돈으로 또 여행하고.
정말 가능하다면 유콘을 거쳐… 옐로우 나이프 까지 또 정말 가능하다면 이콸루잇을 가는게 목적이 었다. 아직도 내가 있는 큰도시 토론토는 별로 흥미가 없다. 내가 흥미있는것을 못찾아서 그런것일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지금은 3가지다 해보지 못했다.
단지 메니토바의 처칠을 갔다가 왔을뿐이다.
처음 계획데로 모든것이 다 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후회같은건 하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것들을 내가 결정해 지금 까지 했다고 생각하고 나쁜 기억 보다는 좋은 기억들이 내 경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거면 충분하다. 어차피 계획데로 다 실행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캐나다 들어오기전... 비행기표를 사기전 그 순간까지도 나는 고민을 많이 했다… 확실한 미래 없이 건너 간다는 것에 대해. 하지만...나는 비행기표를 샀고. 결국에는 4월18일에 들어왔다… 영어를 정말 못했지만. 지금도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어학원을 다녀야한다는 생각도 하지않는 정말 무대포였던거 같다. 아무도 아는사람없는 다른나라를 결국에는 왔다. 처음부터 도전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 입국심사를 받을때... 비행기안에서 쓰는 서류(입국신고서)가... 뭔지도 모르고... 뒤에 있는 우리나라 아줌마한테 물으니...저번에 들어올때는 안썼다면서 쓰지않아도 되는거라고... 해서 쓰지도 않고... 입국심사관에게는 대답이라고는 이름밖에 말하지 못하고 "뭐라고?""뭐라고?"만 연발하다가 결국에는 입국자사무실로 향해야 했다...
여러 깻잎분들의, 친형의 영어에 대한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었고 첫 관문부터 난 벽에 부딪혔었다. 처음 부터 농장으로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난 벤쿠버에서 2달 정도의 어학연수로 계획을 수정했다. 처음부터 혼자서 시작해야했다. 의지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의지할 사람도 없엇다.
유스호스텔에서 1주일 정도 머물면서…방부터 찾아보려고 했고 학원몇군데를 트라이얼 수업을 받으러 다녔다. 벤쿠버에서 방을 찾기는 매우 어려웠었다. 왜 그리도 벤쿠버는 방이 찾아지지 않던지... 초보였던 나의 한계였던거 같다. 오죽하면 다운타운의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의 어깨를 두두려 물어봤을까…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쉐어를 주로 찾았었는데… 모두들 5월 1일을 입주로 생각하고 있었었다. 나는 즉시 입주를 원했었다.
집을 찾던중… 30대 중반의 우리나라분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영어를 하고 싶다면 우리나라사람 많은 벤쿠버에 있지말고 Kelowna, Kamloops로 작은 도시로 가는게 좋다고 충고를 해주셨다. 그때는 아는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난 좋다고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아무 어학원을 들려… Kelowna에 대해 물어보니… 돈많은 캐나다 부자들이 은퇴후 사는 도시가 그Kelowna이기 때문에 많이 보수적인도시라 동양인이 가게되면 멸시를 당할거라고 가지말라고 했다(실제로 은퇴후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많은 동양인이 있었다. 오히려 흑인들을 볼수 없는 도시였다.)
하지만 난 그 분을 믿었고 다른 유학원을 찾아 입학신청서만 유학원에서 쓰고 결정은 로키의 3박 4일 여행중 하기로하고 로키 3박4일의 페키지 투어의 돌아오는 길의 휴게소에서 내려 캘로나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벤쿠버로 돌아가지않았다.
모든것이 모험이었고 믿는건 나 자신 뿐이었다. 만약 잘 못된 길이라도 갈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가방이 가벼워 이동은 쉬웠다.
Kelowna의 3개월
캘로나는 좋았다. 홈스테이 부터 동네 분위기까지…딱 내가 좋은 하는 곳이었다.
작은 도시에 사람들 친절하고 날씨(비 안오고 항상 맑기만 하고)좋고 … 나의 이상이었다.
좋은 홈스테이를 만나고 학교에서 좋은 인연들을 만나고 즐거웠고 난 그렇게 3달을 켈로나에서 보냈다. 비가 자주오지않는 지역이라 우산걱정은 하지 않는 동네였다.
7월엔 다른 학생들과 차를 빌려 캘거리 스탬피드 축제와 로키를 다녀오기도 했다.
전교생은 항상 10명 정도로 유지가 되었었고 영어에 관계없이 모두가 친구였었다.
멕시코에서 온친구들…스위스에서 온 친구.또 일본에서 온 친구들…국적이 큰도시 보다 다양하진 않았지만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학교 수업후는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어울렸던거 같다. 학교 가까이에 호수가 있고 공원이 있어 주로 공원에서 테니스…배드민턴…볼링…가끔은…윙 데이때 맥주를 먹고나서 공원에서 석양을 보며 하루를 마감하기도 했다. 매주 수요일은 치킨 윙데이라서 친구들과 자주 갔던거 같다.(아닌가???)
그때는 그게 큰도시보다 지루한 삶일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토론토의 생활과 비교하자면 그때의 나날들이 훨 즐거운 시간이었다.
인구 20만 이하인 캘로나…항상 행사들로 가득했다. 특시 올드카쇼(클래식카)는 거짓말 조금 보태면 매주했었던거 같다.
미국번호판을 가진차들도 있었던 거로 봐서 작은 동네 축제 만은 아닌거 같았다.
캘로나 뿐만 아니라 아래쪽으로 피칠랜드…펜틱턴 같은 도시들도 그런 행사를 가지고 있었다.
오카나간은 집값이 비교적 비싼지역이다.
호수옆에 집이 있다면 그 집들은 쉽게 2,3밀리언을 넘어간다.
똑같은 규모의 집이 사스케츄완이나 메니토바에 있다면 그 값은 5분의 1이하로 줄어든다고 한다. 터미네이터의 아놀드형의 별장도 캘로나에 있다고 하고 캐나다의 인기있는 하키선수들의 별장도 여기 캘로나 또는 오카나간에 하나씩은 있다고 한다. 생각보다 부자들이 많은 동네고… 그 사람들은 주로 보트를 1,2대 씩은 소유하고 있어 주말을 주로 보트에서 보내는 그런 동네였다.
물론…부자 아닌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곳 토론토까지와서 캐나다 사람들에게 캘로나에서 왔다고 하면 많이들 부러워한다. 캘로나는 캐나다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도시인가 보다.
e농장으로의 이동과 우프생활
영어는 많이 늘진 않았지만 처음…does와 did가 뭔지도 몰랐던 나는 그것들이 무었인지는 알게 되었고 다시 이동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초보지만 그때 역시도 초보였다.
내가 가져간돈 $5000(우리나라에서 건설 현장 일꾼으로 벌었던…)은 3개월후 학원수업료,홈스테이,약간의 용돈들…결국 $50이 되었다.켈로나에서 올리버로의 버스요금은 $17였고 난 결국 $30이 남게 되었다.
오소유스에서 학원에서 만난 우프를 하고 있던 관광깻잎 친구에게 텐트를 빌리기로 되었있었기에 올리버에서 농장일을 찾고 그 다음 그 친구를 만나는게 그날 나의 계획이었다. 물론 일을 찾는것도…
하지만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직업 소개소는 문이 닫혀있었었다. 왜 그땐 그걸 몰랐을까… 토요일이란걸… 또 직업소개소의 문에 걸려있던 일들은 하나 ,둘뿐이었고 마땅한건 없었다. 돈도 별로 되지 않는 일들이었다. 경험자님 말씀데로 그때는 체리가 끝나고 다른 수확을 기다리는 방학같은때였다. 난 걸어다니며 집집마다 방문을 해 일자리를 물어보기로 생각하고 먼저 그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그 친구에게서 텐트를 받고…이것저것 그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결국은 그 친구의 우프로 들어가 1주일 정도 있으며 돈이 되는 다른 일자리를 구하면 다시 이동하기로 생각을 바꿨다. 우프에서 2일정도 일을 하고 우프아저씨께서, 일을 조금 더 하고 한달에 $1000정도의 돈을 받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아저씨는 우리나라사람이나 일본 사람몇명을 그런식으로 일을 시키신적이 있으시다며 보통의 우퍼들 몇명보다는 @@같은 사람 1명이 훨씬 효과적이라며… 내게 그런 제안을 하신거였다.(죄송합니다…부끄럽습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건 더 힘들게 일하고 한달 $2000을 통장에 저금 시키는게 계획이었기에 정중히 제안을 거절했었다.
오전에 우프에서 일을하고 오후 쉬는 시간에 난 히치하이킹으로 Osoyoos와 Keremeos를 다니며 일을 알아봤다.
하지만 역시 사과를 따기 전까지는 특별히 일이없었다.
결국 난 우프아저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오후 5시 부터 9시까지 더 일하고 1주일에 $250정도의 돈을 받게 되었다. 그때는 해가 길어 9시까지도 밝아서 일을 할수 있었다. 일은 밭에서 트렉터를 이용해 돌을 줍는 거였다. 한마디로 쓰지 못하는 밭을 돌을 주워내고 사용 할 수 있는 밭을 만드는 거였다.
우리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신다. 그래서 나도 자연히 농장에서 쓰는 장비들을 사용할줄을 안다. 그 우프농장에서 난 트렉터로 일을 하며…그들의 아들이 되었던거 같다.
아저씨는 날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셨었고(아줌마도)… 가끔은 부담이 되기도했다.
하지만 못해서 욕먹는것 보다는 좋은 일이었고… 그냥 우리집에서 하던데로 했다. 그들은 30대의 젊은 사람들이었고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다. 9살 6살 하는 딸과 아들도 착했다. 애들 역시 좋은 영어 선생님이 되어주었다.
아저씨께서는 가끔 내가 시키는 방법데로 하지않고 내 방식데로 하더라도 결과가 같다면 내 방식을 존중해 주셨었다. 가끔은 내게 농사에 대해 물어보시기도 했다.
우퍼들의 의견도 존중해 주시는 분이었다.
우퍼들의 영어욕심을 아시는 아저씨는 가끔 영어 수업시간을 밤에 가지기도 하셨다.
책에서 배울수 없는 캐나다 영어의 특징이라던지… 미국 영어와의 다른점 또 평소에 자주쓰는 슬랭 같은것들도 아저씨를 통해 배웠었다.
난 좋은 우프에서 좋은 주인들과 다른 좋은 우퍼들을 만난 1달을 즐겁게 보냈다.
많은 캐나다 사람들은 마리화나를 쉽게 피우는거 같다. 같이 지내던 캐나다 우퍼나 주위 사람들의 충혈된 눈을 쉽게 볼수 있었고 냄새도 쉽게 맡을 수 있었다.
담배를 안피우는 나는 그런 방향으론 호기심도 가진 않았지만…누군가가 구하려고 한다면 정말 쉽게 구할수 있는게 마리화나 인거 같다.
아… 하루 2번씩은 항상 수영을 했다. 가끔은 사슴이 시냇물을 가로 지르기도 했고 저녁 노을 ,석양은 아름다웠으며 밤은 춥지 않아 캐나다의 여름은 아름 다웠다.
자주 밤마다 다른 우퍼들과 맥주를 마시며 누워서 별동별을 보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캐나다의 여름은 정말 별들의 전쟁이었다. 수만은 별동별들…
하지만 난 돈 욕심이 있었기에 중간 중간 아저씨께. 다른 농장으로의 이동에 대해 여쭈었었다. 아저씨도 20대에 세계일주(?)를 하시며 나 처럼 돈없을때는 농장(호주)에서 일하며 여행하셨다며 나의 심정을 이해해 주셨었다.
하지만 그때도 일은 없었다.(있었겠지만 내손에 들어 오지는 안았었다)
8월말 사과가 익어가고 있었었고, 8월31일 아저씨가 배달하시는 길에 함께 직업소개소에 들려 사과농장 하나를 결국 찾을수 있었다.
그때도 전화영어는 내게 부담이었고 아저씨께서 대신 전화를 해주셨다.
전화 대화의 분위기는 상당히 좋았었고 아저씨는 가끔 웃으시며 좋은 결과를 내게 암시하는것 같았다.
e돈지급에 관한…
우프에서는 아저씨께서 2주일을 일하고 $500을 현금으로 주셨다. 중간에 원인 모를 트렉터의 펑크로 나의 돈을 받는 일은 중단되었다. 갑자기 정지중인 트렉터의 타이어가 불어나더니 펑~하고 터져버렸다. 미스테리한 일이다. 트랙터 없이 할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그날 부터 오전에만 일하고 오후엔…잤다.
사과 과수원에서도 결국은 현금을 받았다. 하지만 매일 받은건 아니었다. 처음 사과농장에서는 내가 당연히 워킹 비자가 있는지 알았다. 그래서 처음 10일 동안은 내게 묻지를 않았었다. 내 생각은 우프아저씨가 먼저 이야기 했다고 생각했었다.
사과같은 경우는 워낙 큰돈을 만지는 수확이기에 현금 지급이 힘들다고 했다.
모든 수확을 정부에 신고를 해야하고 그래서 지불은 체크로만 한다고… 결국 사과 주인 아저씨는 우프아저씨께 지불 방법에 대해 전화를 하셨고… 난 다른 방법으로 현금을 받았다. 적게 $500정도면 현금 지불이 가능할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한번 받을때 $1000이상씩을 받았었다.
사과 주인 아저씨는 같이 일했던 다른 퀘벡 커플들에게 체크로 내가 일한시간까지 더해 지불을 하셨고 그 퀘벡 커플들은 그들이 받은 체크를 바로 은행에서 교환해 내게 현금을 주었다. 한마디로 돈세탁이었다.
중간에서 일어날수 있는 나쁜일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고 모든일은 좋은 방식으로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현금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퀘벡커플들은 세금을 2~3%내야했고(더 내는 건가?) 그걸 미리 아셨던 사과주인 아저씨는 내게도 그 세금을 분담하기를 요청하셨다. 내겐 선택권이 없었고 난 그렇게 했다. 그러나 퀘벡커플들은 나로 인해 자신들은 겨울에 일하지 않고 (내가 일한 시간이 그들이 일한 시간처럼 되었으므로 ) 국가에서 연금같은것을 받을수 있다며 내게 더 적은 세금을 요구했고(그게 그들에게는 훨씬이득이기에) 난 결국$50이 아닌 $30정도의 세금을 냈다.세금으로 $30을 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풀을 뽑았던 일은 사과주인아저씨가 따로 현금으로 내게 지불해 주셨다.
고맙다며 나중에 캐나다 다시오면 들리라는 말씀과 함께.\
우프에서 $750을 받고, 사과를따서 $2800정도를 받고 9월 텐트생활에서 $300정도를 생활비로 쓰고(오직 먹는것에만 돈이 들어갔다 ) 9월 30일쯤 홈스테이 집에 들려 인사를 하려고 켈로나를 다시 들어왔을때 통장에는 $10이 아닌 $3400정도의 돈이 다시 채워졌었다.2달 만에 340배로 불렸다.
처음 목표 $4000이 통장에 있었던건 아니지만 얼추 목표는 채워져있었고 꿈의 멕시코를 갈수 있었다. Cancun 해변은 내 눈앞에 있었었다.(어차피 가야했다)
Work zone 회원되기
우프와 사과는 7월 30일쯤 부터 시작했지만 그전 부터 Kelowna,Okanaga valley에 있었던 나는 학원친구들(우리나라 누나 동생들)과 소풍 비슷한 사전답사를 6월에 했었었다. 금요일 오후 차를 빌려 미국 국경이 있는 Osoyoos까지 다니며 오카나간의 사전 답사를 했다.
처음 Oliver의 Work Zone에 들려 현재진행 상태와 정말 일을 할수 있는가에 대해 물었는데 시설이용과 정보는 회원가입후에 얻을 수있다고 했다.
학원 친구 G.H양과 S.J.양과 나는 모두 관광깻잎이었고 Sin No.가 없었다. 하지만 그곳의 직원들은 작은 목소리로 없어도 상관 없다며 카드사 직원처럼 회원 불리기가 목적인듯 대충 적으라고 했고, 우리는 대충 적고 회원번호를 받았다.
Work Zone는 국가에서 운영하기때문에 철저 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한마디로 관광깻잎도 회원이 될수 있고 회원이 된 후는 모든 시설과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또 세계여행자들도 가끔은 볼수있다. 또 많은 퀘벡 친구들이 있다. 길에서 아니면 빨래방에서 물어보고 그들이 일하는 농장에서 일을 할수도 있다.
꼭Work zone의 회원이 아니어도 일은 할수 있고 찾을수 있다. .하지만 Work Zone의 회원은 돈이 드는것도 아니기에 꼭 회원이 되라고 하고싶다. 인터넷도 무료 사용할수 있다.
오카나간에6곳이있다. Princeton,Osoyoos,Oliver,Keremeos,Penticton,Summerland(이건 확실치 않다…죄송합니다.) 인터넷 사이트도 있다.검색하면 나온다. 전화번호도 있다. 전화해서 먼저 일있는지 확인후 이동하는게 더 좋은 방법일듯하다.
e히치하이킹 이야기
7월30일(혹은 31일)부터 히치하이킹을 했다.
우프를 하고 있던 친구를 만나기위해 올리버에서 오소유스까지 20분을 기다려 첫번째 히치하이킹을 안전하게했다.
홈스테이 아줌마는 가기전 내가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할거라는 말에 절대 하지말라며 많은 걱정을 해주셨었다.(우리집으로 전화할거라는 듣기 좋은 협박(?)을 하셨었다)좋은 사람도 있지만 나쁜사람들도 있다고…
하지만 난 그 최소한의 차비도 없었었고… 가능할거 같아… 많은 히치하이킹을 했다.
땡볕에서 차를 잡으며 3시간을 물없이 걸어본적도있고, 퀘백에서 온 사람들의 차도 많이 이용했
고, 때로는 짧은 시간내에 성공하기도 했다. 퀘벡에서 온 사람들은 가끔은 나를 기다려 태워주기도 했다. 정말 많은 퀘벡커들이 오카나간에 있다.
그중 기억에 남는건… 마지막 히치하이킹이다.
오소유스에서 켈로나까지 3번에 걸쳐 도착했는데 처음 탔던차를 이야기 하려한다.
2시간을 기다려 결국에는 20대 중반의 2명의 젊은 친구들이 타고 있는 차를 잡았다. 나에게 접근을 할때, 내게 돌진을 했고 급정거를 했다.처음에는 장난만 하고 안태워줄거라 생각했지만 나를 태우려고 장난한거 였다.
그들은 켈로나(2시간 소요)가 아닌 펜틱턴 까지 30분 정도만 가는것이었지만 난 그거라도 좋았다.그들은 운전중 뒷자석에 앉아있던 내게 맥주를 꺼내 줄것을 요구했고 난 건내주었다.난 조수석에 앉아 있는 친구만 먹을 줄 알았지만 그들은 2개를 요구했고 난 건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씩이 아닌 2개 3개를 차례로 마셨다.그들은 나도 먹으라고 말했고, 난 2번에 걸쳐 거절하고 결국에는 캔 1개를 먹었다.정말 시원한 맥주였던거 같다.
문제는 없었다.그들은 갑자기 차를 세워 고속도로 옆에서 노상방뇨를 했고…난 잠깐 그들을 기다렸고…뭐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경찰이었다.
펜틱턴을 진입하려고 신호등을 만났는데 그들은 직각 교차로의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렸다.경찰은 우리를 따라왔고…우리는 차를 세워야만했다.
나도 살짝 긴장은 했었다.맥주를 먹었기에…경찰왈…”너희들 속도 위반했어”
놀랐다.웃겼다.맥주를 마신건 경찰이 몰랐던 건지…알면서도 모른척했던건지 모르지만….결국은 속도위반만이 문제였다.
나는 살짝 내려…트렁크에서 가방을 꺼내고…살며시…작별 인사를 하고…경찰이 내가 누구냐고 묻길래…그들은 그냥 당순한 히치하이커라고 말하고… 히치하이킹도 불법이라고 들었기에 문제가 될듯했으나…문제 없었다.
그렇게 현장(?)을 빠져 나왔다.
난 죽음의 질주(?)를 그들과 했다~~~~~~~~~~~!
그리고 오카나간의 작은 마을들은 서로가 이웃이었다.우리나라도 그런것처럼… 가끔 우프 아저씨와 아줌마의 이름을 이야기하면 다 이웃이라며 안부를 전해 달라고 내게 말하기도 했다. 일하는 곳의 현지인을 안다는건 이것 저것 좋은점이 많았다.
e $100로 퀘벡까지 이동하기(제가 한건 아닙니다.)
1.오카나간 밸리에는 정말 많은 퀘벡사람들이 있다.그들은 봄에 오카나간으로 와서 추워지는 10월 혹은 더 빨리, 더 늦게 다시 퀘벡으로 이동을 한다.
그래서 Work zone(직업 소개소)이나 도서관 또는 큰상점의 게시판에는 카풀을 요청하는 사람과 카풀을 제공하는 사람의 광고를 쉽게 찾을수가 있다. 그레이 하운드 버스보다 빠르고 저렴하게 이동할수 있다. 토론토도 지나가는 지점(정확히는 아니지만)에 속하므로 이용할수 있다. 차 주인이나 다른 카풀 하는 사람들이 아는 사람이 될수도 있고 모르는 사람이 될수도 있지만 깻잎분들중 원하신다면 쉽게 찾아서 해보실수 있을듯 합니다. 나는 그걸 9월 말에나 알았고 큰 도시들을 방문해 보는게 목적이었기에 그들과 함께이동 하지는 않았다.
2. 농산물 수송차량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오카나간의 농산물은 멀리는 모르지만 최소한 Calgary까지는 또 Yukon 의 Whitehorse까지는 간다. 그 트렉터(대형 트럭)들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난 이걸 이용하려 했으나 시간이 없었던 나는 날짜가 맞지않아 이용하지 않았다.
담배값 정도면 이용할수있다. 오카나간의 각 시의 농산물 직판장을 찾아가 수송 날짜와 지역, 이용 가능 여부를 확인후 이용하면 된다.
무모한 방법은 아니다… 가능하다. 히치하이킹 보단 안전 할거 같다.
e사과농장의 1달
아저씨는 사과농장 주인이 아는사람이고 나는 내일부터 일할수 있으며 돌아가는 길에 사과농장에 들려 인사를 시켜주시고 사과따는 요령과 이것저것 필요한 정보를 알려 주셨었다. 우프 아저씨도 전성기때는 한참 사과를 따셨다고 했다.
하루에 빈으로 10개를 만드셨고…가끔은 13개 까지도 만드셨다고…살짝은 자랑스러워 하셨다.
우프에서 냄비도 빌려주시고 아이스박스(쿨러)도 빌려 주시고 이것저것 내게 많은것을 빌려주시려고 했었다.
또 가장중요한… 인도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사과농장의 주인도 인도 사람이었다. 우프아저씨도 전에 여러농장에서 인도 사람밑에서 일해 봤지만 역시 계급이 존재하는 인도 사람밑에서 일하는건 내게 좋지 않다고 말해주시고 절대 인도 사람밑에서 일하지 말라고 충고해 주셨다. 밧데리님도 하신 말이다.
하지만…하지만 그 사과농장 주인만큼은 다르다고,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우프 아줌마도 그 사람만큼은 정말 좋은 사람이기에 걱정하지 말라고 내게 긴장할 필요는 없다고 조언해 주셨다.
말씀데로 그 사과농장의 주인들은 좋았고 그들이 차를 마실때는 내게도 차를 주시며 쉬어가며 일할수 있게 해주셨다.9월 20일 부터는 추워졌고 두꺼운 옷이 없었던 내게 옷을 주시기도 하고 나의 텐트 생활의 불편한 점을 물어보시기도 하셨다. 9월 20일쯤 부터는 아침에 입김을 볼수 있을정도로 추워졌었다. 또 냉장고가 없어 자주 시장을 봐야했던 내게 아저씨가 먼저 말씀하시기를 “홍기야 시장볼때는 거리가 머니까 내가 태월줄께” 하셨고 결국 3일에 한번씩 난 아저씨께 요청했고 결국은 해주셨다. 물론 그 시간은 아저씨도 사과를 못따는 거였지만 전혀 싫어 하지 않으셨다.
텐트생활…
난 텐트에서만 2달을 잤다.
우프에서의 텐트생활은 내 텐트가 아닌 우프농장의 텐트였기에 크고 이불도 많고 다른 우퍼들도 있어 심심하지도 않았다. 또 8월이었기에 춥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과농장으로 이동했던9월 부터는 낮은 덥지만 밤으로는 한기를 느낄수 있었다.아무리 캐
나다의 사막이라는 오카나간 밸리도 역시나 캐나다였던 것이다.
이불은 적었으며 전기는 멀리 떨어져 있어. 작은 렌턴으로 모든 생활을 했고 샤워는 깜깜한 밤에 농장(과수원)한가운데서 지하수 찬물로 해야했다. 물론 혼자였다. 새벽 5시 30분에 혼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점심에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매일 밤마다 쌀로 밥을 해먹었다. 모텔의 방을 1달씩 임대해 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겐 과분한 시설들이었다.
아직은 어리고 젊어서 땅바닥에서도 잘 수있었으며 추운것도 결딜만 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텐트문을 열었을땐 사슴이 옆에서 사과를 먹고 있었고 가끔은 벌레가 텐트에 들어오기도 했다. 밤에는 산에서 늑대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가끔은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쁜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9월 28일까지 난 텐트에서만 2달을 생활했다.
텐트생활에서 아쉬웠던것은 다른사람들과 같이 지내지 못했다는 거다.
퀘벡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다른 농장에서 생활을 했고 한곳에 오래정착한 나는 혼자였다. 친구는 있었다. 텐트를 우리 농장에 치고 뛰엄뛰엄 일을하던 마리화나 담배를 피우고 항상 맥주와 사는 홈리스 비슷한 50대 정도의 아저씨가 있었었다.
이가 별로 없어 발음은 좋지 안았지만, 서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그 아저씨가 있어 심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하루 일하고 하루 놀고 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주 볼수는 없었다.
1. 샤워….아 샤워는 도시…근처 작은 도시에서 할수 있다. 난 따뜻한 물을 사용할수 없는 상황에서는 샤워를 포기하기 보다 찬물로 한다. 나의 건강과 피부탄력을 위해 찬물로 매일했다.
어디서 들은적이 있다. 북한의 고위급 장성들의 장수 비결이 냉수마찰이라고…
난 오래 사는게 목적이다. 앞으로도 그런 좋은 기회엔 항상 할거다.
따뜻한 물로하는 샤워는 보통 동전 세탁소에서 할수 있는데…2달러 정도면 충분한 시간의 샤워를 할수있다. 기다리는 사람만 없다면.
Work Zone의 화장실(Oliver)에서도 샤워기가 달린걸로 봐서 할수도 있었던거 같은데… 그건 물어보지 않았다. 난Keremeos에서만 지냈기에 딱 한번 동전 세탁실의 뜨거운 물을 이용했다.
2. 잠은… 모텔의 방을 한달씩 빌려(300~400 혹은 이상)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봤다.
하지만 이동을 자주하고 언제 그만 둘지 몰랐던 나는 텐트가 더 편했다. 물론 돈도 아낄수 있었다.
3. 가끔은 농장 측에서 캐빈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애가 말하기를 ‘Naramata’ 에는 많은 농장들이 캐빈을 가지고 있다며 그곳을 추천하기도 했었다.
Penticton근처의 작은 동네다.
4.친구는… 퀘벡애들은 정말 많다. 영어 발음이 조금 다르다면 대부분은 퀘벡친구들이다. 하지만 듣기로는 일본친구들도 있고 한국친구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인은 본적이 없다고 한다. 그밖에 포루투칼,프랑스,스페인,멕시코,기타등등…
특히 유럽에서 오는 친구들은 세계여행중 떨어진 여행자금은 보충하기위해 이곳으로 많이 온다고 한다.
히치하이킹중 만난 프랑스 친구는 중국에서 왔다고 한다.유럽과 중동 , 아시아 여행은 끝났고 이제는 더이상 돈이 없다고… 오카나간에는 5달전에 왔는데 이제 돈도 모았고 남미로 내려갈거라고 한다. 집은 나온지는 2년이 넘었고.
세계여행의 한 방법인거 같다.
사과의 종류와 임금
난 시간당 돈을 받지 않았다. Bin으로 돈을 받았고 Bin하나에 $22부터 시작해 9월말에는 $25까지 받았다.
사과도 종류가 여러가지가 있다. 난 겔라(Gala(?),우리나라에서 흔히 먹는 붉은 색의 사과)와 골든(이건 완전히 익어도 녹색이다), 그리고 자주색의 딱딱하고 작은 사과(이름은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딱 보면 안다 보라색이고 작다. 건조해서 작았나?…주먹보다 큰것도 가끔 보였다.) 이렇게 3가지 종류만 땄다. 가격은 겔라가 가장 좋았고 따기도 정말 쉬웠다. 소나무(침엽수) 처럼 곧게 자랐으며 옆으로 사과 줄따라 사다리만 이동하면 되고, 또 사과도 비교적 딱딱해 Bin에 넣을때 조금만 주의하며 사과에 멍이 들지 않았다. 가격 역시 최상이었다. $22. 어떤 농장은 처음부터 $25를 준
다고 했다. 난 주로 이것만 땄다.
첫날은 2시간 또는 2시간 10분에 빈 하나를 채울수 있었다.
첫날은 9시부터 시작해 점심시간 30분(이것도 시간을 절약하려고 사과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었다.)을 제외하고 7시까지 5개의 빈을 채울수 있었고 $110달러를 만들었다. 다음날부터는 2시간에 하나를 만들어 하루 $132를 벌었고 10일이 지나고 난후 빈의 가격도 오르고 속도도 빨라져서(1시간 30분에 빈 하나) $24*7 또는 $25*7으로 잘 벌때는 하루 $175까지 벌었다. 정말 잘 벌때는 시간당 현금으로 $16을 벌었던거 같다. 손크면 정말 유리하다. 나는 키도 크지않고 손도 크지않다. 그래서 한손에는 하나씩 양손에 두개, 아주 가끔 한손에 2개 양손에 4개씩을 땄었다. 하지만 키도 크고 손도 큰 인도출신의 아저씨와 주인 아주머니는 항상 4개씩을 땄으며 가끔은 6개씩 따기도 했다. 정말 따라갈수 없는 놀라운 속도 였다. 손 큰분들은 역시 유리할 것이다.
이틀째 부터 아저씨께 물어 해가 뜨는6시 30분부터 해가 지는 저녁7시30분까지 따는 것을 허락받았다. 허락이란 다른게 아니라 비어있는 빈을 내가 따는 줄에 갔다달라고 하는것이 었다. 비어있는 빈만 있다면 주인이 없어도 내가 언제든 채울수 있는 거였다.
하지만 골든은 활엽수처럼 가지가 넓게 자랐고 그렇기에 사다리를 원을 그리며 이동해야했고 사과도 약해 조금만 방심하면 멍이들어 버려야하기도 했다. 사과는 겔라보다 조금 더 크긴하지만 언제나 조심해야했고 가격은 $15부터 $18이 최상가 였다.난 빈 2개를 5시간이 이상걸려 땃다.포기했다. 같이 땃던 퀘벡여자애도 결국 빈 2개를 따고 포기했다.
마지막 보라색사과 정말 딱딱하다. 키가 작은 나무들은 아저씨가 보지않을때 줄기를 가방에 넣고 훑었다. 그리고 가방이 채워지면 다시 빈에 2차로 넣었다. 금방 따지만 크기가 작아 시간은 겔라와 비슷하게 걸렸고, 돈도 $16정도 수준이었다. 그건 딱 하루만 땄다.
나는 운이 좋게 한 농장에서 거의 한달을 지냈다.
처음에는 3일만 따고 1주일의 공백을 가진후 또 따는 것이었으나3일이 되던날 아침에 아저씨께서 내게 물어보시기를 전날 밤에 잘때 춥지 않았냐며. 전날밤이 추웠다며 추운 날씨 속에 사과가 빨갛게 익어 공백없이 또 다른 1주일을 계속 딸수 있다며 내게 이동없이 계속 딸것을 요청 하셨었다. Gala의 경우…사과는 보통 3번을 따게되면 다 따게 된다.
첫번째가 수확량이 가장 많고 두번째와 세번째 순으로 적어 진다.
세번째 사과를 따게 되면 보통 1~5개 정도의 사과만 한 그루의 나무에 남게 된다.
내겐 좋은 일어었으며 10일후 2일의 공백을 그때 아저씨의 추천으로 다른 인도사람이 주인인 골든을 2빈을 땄었었다. 골든은 정말 꽝이었었다.
23일에 걸쳐 한 농장의 사과를 다땃고 또 다른 농장으로의 추천을 요청했던 내게 아저씨는 무공해 사과의 풀 뽑는 일5일을 내게 주셨다. 이동후 5일을 더 사과따는 것보다 안정적으로 아는 사람밑에서 5일을 마무리 하는게 오히려 좋을거 같았다.
그건 한 줄당(30m(?)정도,하루 6줄씩)) $15였고 나는 결국 했다. 사과보다 무척 힘든일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땐 허리를 펼수 없었고 손은 주먹을 쥘수 없었었다.
손가락이 부어서 손가락을 구부릴수가 없었다. 하지막… 고통을 사랑하는 홍기는 했다. 아저씨도… 내가 돈받고 일하는 일꾼이지만… 힘든일이라며 자신도 알지만 농약을 칠수없는 무공해 사과는 매년 이렇게 해야한다며 나의 고통을 이해하셨고 혼자서는 엄두도 못낼일을(아저씨는 4가지 종류의 사과를 가진 큰 과수원을 가지고 있으셨다, 그래서 무공해 사과도 상당히 가지고 있으셨다.) 같이 해주어서 오히려 내게 고맙다고 말씀해 주셨다. 허리와 손가락은 매우 많이 아팠지만 부러져서 회생 불가능한건 아니었기에 좋게 마무리 할수 있었다. 풀은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뉴스에 나왔던…고속도로 옆에 난 외국풀(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수입한 콩을 고속도로에서 이동중, 풀씨가 같이 들어와 고속도로에 흘리던)들이 우리나라 토종 풀들을 지배하고 있다고 했던 그런 풀들이었다.한마디로 정말 튼튼해서 거짓말 좀 보태면 고래힘줄이었다. 손과 허리는 정말 아팠었다.
풀들아~너희들은 정말 강적이었어.
e처칠(메니토바 주)과 멕시코 이야기.
2005년 8월 10일쯤…나는 선택을 해야했었다. 비자연장인가 …아니면 3국을 거쳐 재입국을 하는것인가…그때 난 $10만 있었고(가끔 우퍼들과 맥주를 먹었으므로 통장 잔고는 내려가기만 했다.)
결국 멕시코로의 3국을 거쳐 재입국을 결정했다. 비자연장에 필요한 통장 잔고가 없었고 또 심지어는 멕시코를 갈수 있는 돈이 있는것도 아니었지만 모험을 하기로 결정했었다.
켈로나 학원에서 만난 멕시코 친구에게 전화를 했고 결국10월말에는 멕시코에서 그 친구들의 집에서 몇일 지내기도 했다.
9월에 사과를 따면서 돈이 모이고 있었고 멕시코가 아닌 어느정도의 다른곳으로의 여행이 가능할거 같았다. 북극권에 관심이 많은 난 처칠의 북극곰이 너무 보고 싶었었다. 가능하면 오로라까지… 9월 30일 홈스테이 집에 인사차 방문을 했을때 아줌마께… 요청은 아니고 내 사정과 계획을 말씀드렸다.
처칠을 가고 싶지만 교통비와 숙박비 체류비등등… 너무 부담(처칠은 북극곰이 북극권으로 올라가는 10월이 성수기다)이 되어 포기하려고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켈로나에 사는 친구중에 처칠에서 살았던 친구가 있으시다며 그 친구에게 물으면 방법에 나올것 같다며 내게 포기하지 말것을 당부하셨었다. 그 친구와의 연결 또 그 친구의 이웃과의 연결은 몇일이 소요되었으며 난 확실한 대답없이 토론토로의 이동을 하게되었다.
벤프,캘거리,리자이나… 결국 난 리자이나에서 처칠의 어떤사람의 전화번호를 받게 되었고 난 결국 처칠을 갈수 있게 되었다. 히치 하이킹 처럼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모르는 거나 다름없었다.
위니펙에서 톰슨e처칠 e톰슨 왕복의 기차표를 사($120학생할인,왕복)결국 갔다.
난 식사제공(전혀 모르는 사람의 집에 그것도 공짜로 지내는 것이기에) 까지는 바라지 않았었기에 체류 3박 5일동안 라면만 먹을 생각(처칠의 모든것은 비싸다고 생각했었다)으로 라면을 12개를 샀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너무 좋은 사람들이었고 난 그들의 큰아들방에서 지내고… 툰드라 버기($200 정도)를 타고 다음 날은 아저씨와 아줌마와(홈스테이 아줌마의 친구의 이웃) 트럭을 타고 또 다시 북극곰을 보러 다녔었다. 심지어 그때가 추수감사절이었는데 난 그 집에서 그들의 이웃들과 함께 터키를 먹었다.
인구 1000명 수준의 아주작은 마을 처칠은 모두가 아는 사람이었고 심지어는 집의 문을 잠그지도 않고 사는 곳이었다. 물론 외부로 통하는 도로가 없다. 외부로 나가려면 기차(2,3일에 한번씩 운행.그래서 갈수 있는 날짜와 나오는 날짜가 한정되어있음)비행기 또는 헬리콥터를 이용해야만 하기에 도둑이 존해하기 힘든 마을이었다.
밤에는 오로라를 볼수 있었고 총소리를 들을수도 있었다.(곰이 마을에 들어왔거나 마을 근처까지 접근했고,곰들을 쫓아 내기위해 공포탄을 사용하는 소리)딱~내가 좋아하는 그럼 동네였다.
툰드라의 시작인 곳이고 이누잇들을 볼수 있었으며 북극토끼,여우 등을 볼수 있는 곳이었다. 정말 황량한 곳이지만 나는 그런곳으로의 여행을 도시 여행보다 선호한다. 자연은 항상 다른모습을 내게 보여주기에 자연으로의 여행은 항상 흥분되는 시간이다.
난 라면을 2개만 먹었고 나머지 신라면은 작은 아들이 좋아해서 (맵지만 맛있다며 많이 좋아했었다)다 주고 왔다.
그대신 주인 아저씨는 내게 무스고기를 주었다.
난 아저씨 아들에게 신라면에 라면을 풀어서 주었을뿐이다.
그때 역시 난 준거 하나 없이 받기만 했다. 캐나다에서 너무 좋은 사람들만 만난거 같다. 아…아저씨는 처칠에서 40년이상을 사시면서 오로라의 사진을 찍어 본적이 없으시다고 했다. 오로라를 처음보는 내가 사진을 찍으니 아저씨도 옆에서 처음으로 오로라를 사진기로 찍으셨다. 그들에게 있어 오로라는 더이상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었다.
10월10일쯤…다시 위니펙에서 토론토로 이동중 4월에 벤쿠버 유스호스텔에서 만났던 (그땐 영어를 정말 못해 이름만 말할수 있었었다. 그래서 모든 대화는 전자사전에서 단어를 검색해 말하는것도 아니고 찍어서 화면을 보여주던 때였다)토론토에 사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었다.(벤쿠버 이후 연락을 하지 않았으나 농장에 있을때 그 친구가 먼저 E-mail을 보냈었다.내가 연락을 하고 싶어도 영어로 메일을 보낼수 있는 내 영어실력이 아니었다.) 토론토 역시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었으며 그렇다고 지낼곳이 있었던건 더욱 아니었다.
그 친구에게 전화를 했고 우린 결국 만났다. 나의 조금 늘어난 영어에 그 친구는 반가워 해주었고 토론토 다운타운은 아니었지만 (미시사가 거주)난 그 친구의 집에서 17일 멕시코로의 출국까지 머물수 있었다.
멕시코 여행후 머물곳이 없다면 자기 아파트 쇼파에서라도 자라며 방찾는 걱정은 하지말라는 말과함께.
멕시코는 3주일을 다녀왔다. 켈로나 학원에서만난 친구들을 다시 방문했고 또 다른 인연들을 만들었으며 좋은시간을보내고 11월 7일 다시 돌아왔다.
e재입국 심사
재입국 심사는 태클의 연속이었다/
영어는 처음 입국과는 다르게 나를 설명 할수 있었고 심사관을 말을 이해할수가 있었다. 입국심사관은 또 다시 토론토 동부로의 여행과 보드를 타며 2월에 나갈거라는 나의 말을 믿지 않았으며 관광비자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이것저것 설명과 돌아갈 비행기표,통장 카드,신용카드 비슷한걸 보여주며 어렵게 다시 재입국을 했다. 6개월을 받지는 못했으며 정확히 출국 날짜 까지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토론토 친구의 집으로 향했고…그 친구의 집에서 1달을 (그 친구는 11월 중순 1달동안 호주를 다녀왔음) 그 친구의 어머니와 살다가 1달이 지난후 그 친구가 호주에서 돌아오기 몇일전에 친구 어머니의 친구 집으로 이사를 했고 지금은 그곳에서 살고 있다.
e다시 캐나다에 들어온다면…
난 많은것을 가지고 들어오지 않았다.50L백펙과 그 보다 작은 케리어 하나만 끌고 왔다. 이동은 쉬웠지만 많은 옷이 없어…추울때도 있었다. 그리고 항상 슈퍼맨이다.
항상 같은 옷만 입고 다닌다. 아직도 난…옷 살돈으로 보드를 한번이라도 더 탈생각이고,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한번이라도 더 먹어 볼 생각이다.
다시 캐나다에 들어온다면…몇가지들은 확실히 준비해오고 싶다. 많은 분들이 다 준비를 해오시지만 단지 내가 해오지않은 것들이기도 하다.
1.영어…당연한 건데 난 하지 않았었다.이번에 난 확실히 깨닳았다.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든. 문법책 한권정도 그리고 영한 사전이아닌 영영 사전을 볼수 있을 정도의 영어실력을 가지고 오는것. 혹은 그 이상을 가지고 오는것이 영어의 벽을 좀 더 쉽게 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2.신용카드…난 준비하지 않았었다. 이거 없으면 정말 불편하다. 차를 렌탈할수도 없고 여러가지 대여 하기도 힘들고 심지어 cell폰의 플랜에도 가입하기 힘들다.
선불 요금제도 있지만…플랜에 욕심을 냈었었다.
멕시코갈때는 비행기표를 살때… 상담료라면서 $40+tax를 더 냈다. 인터넷으로 신용카드로 구입했다면 내지 않아도 되는 비용이었다.
신용카드 없어도 살아갈수는 있지만 많은것이 불편하다.
이곳 은행에서도 신용카드를 만들수 있다고 한다… 신용카드는 정말 필수다…이곳 계좌를 이용해 만들수 있다는 그걸 난 늦게 알았다.
3.미국비자…이것도 준비하지 않았었다. 이거 있으면 정말 좋다…
잠깐 미국을 다녀오고 다시 관광비자를 받을 수 있다. 미국 여행하면서 캐나다 보다 더 저렴하게 이것 저것 살수 있다. 등산장비에 관심이 있는 나, 그리고 친형은 많은 것을 사오기를 요구했기에 가격을 비교해봤다. 결국…미국이 싸다.
예를 들어… 내가 새로산 백펙. US$198이고 미국내에서는 배송료 무료.
하지만 같은 상품이 캐나다에서는 CA$300이고 거기에 세금 7%~15%가 붙는다.
아무리 환율계산해도 미국이 싸다. 미국 인터넷 사이트에서 사서 배송받는것은 tax가 붙고 duty가 붙어 비추천이지만 미국에 건너가서 여행도중 산다면 상당한 이득을 보리라 생각한다.
난…아까운 돈 생각하면서도 결국에는 캐나다에서 샀다.
e캐네디언과 친구하기
이게 쉬운 일일까?쉽다면 쉬운일일 수도 있다. 그냥 인사하는 친구는 100명도 이상 만들수 있을테니까…
하지만…어떻게 보면 정말 힘들다… 캐나다를 건너오기 전에는 쉽게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외국까지 나가는데 코쟁이, 양키 친구들을 만나는건 쉬울 거라고… 하지만… 마음만 그렇다.
영어 안되고 그들의 문화 모르는 우리에게 그들은 쉽게 친구가 되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중에는 그런거 이해해 주는 친구들도 있다. 그런친구들을 만날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친구를 만들기 위해선 그들과 어울릴수 있는기회를 만들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공원에 앉아 있는다고 그들이 다가와 친구하자고 하는것은 아닐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깻잎분들이 일을 하고 계시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유스호스텔도 추천한다.
나 같은 경우는… 정말 운이 좋게 좋은 친구를 만났다.
그것도 전에 말했던… 벤쿠버에서 유스호스텔에서 영어 전혀 되지 않을때 만난친구.
토론토에서 한달동안 그 친구집에서 지내기도 했고 지금은 그 친구의 어머니의 남자친구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물론 돈은 낸다.조금 적게 낸다. 하지만 돈보다도 아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건 내게 더 좋은 일이다. 난 튜터가 필요없다. 친구와 친구 어머니 또 그 남자친구도 영어에 대한 나의 질문에 실증을 내지 않으시고 또 심지어 내가 묻지 않아도 오늘의 영어의 문제점은 무엇이냐며 먼저 물어봐 주신다.
일자리도 소개 받았고, 크리스 마스때는 선물도 어머님과 그 친구로 부터 받았다. 심지어 셀폰도 어머님의 또 다른 친구로 부터 받았다. 훨씬 많은것을 난 준것 없이 받았다.
그리 넉넉하게 살지 않는 나를 좋아해 주고 나 역시 넉넉한(부자) 그들은 아니지만 사람이 좋아서 그들을 좋아한다.(돈 많고 적음은 내 관심 분야가 아니다-사람 좋은게 돈보다 좋다.) 사과딸때의 비참(?)했던 사진들과 결국 그 돈으로 다녀온 처칠과 멕시코 사진들을 보고 나를 더 좋아해 주신다. 뭐…건설현장에서 일한 돈으로 건너왔고… 말 안통하고 모국이 아닌곳에서도 살아왔고 또 살아가는 내가 보기 나쁘지 않으신가 보다.
돈이 충분하지 못한 내게 친구는 항상 걱정을 해주며 배수의 진을 쳐준다.
그 친구의 집으로…항상 문은 열려 있으므로 걱정말고 자기 집으로 오라고.그래서 그 친구 아파트의 열쇠는 아직도 내게 있다.
물론 미래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몇명 친한 친구들 많큼이나 좋은 친구를 만났고 난 주는것 없이 많은것들을 받으면서만 살고 있다. 역시 캘로나의 홈스테이 아줌마도….나중에 난 아프리카를 갈것이다. 정말 가보고 싶은 땅이다.
아줌마의 많은 친 동생들이 아직도 아프리카에 있고 다큐멕터리 작가, 헌터,이것 저것…하신다.
우리나라 분중 이런말을 하신분이 있다. “캐나다에서 만난 인연들을 계속 유지하세요. 나중에 정말 유용하게 쓰실수 있을거에요” 인연을 사용을 한다…글쎄…나는 인연들을 이용할 생각은 없다. 인연을 단순하게 이용만한다는 것은 상당히 저질 스런 일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많은것들을 그들로 받고 있지만 정말 내가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할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들을 도와
줄것이다. 비행기 표는 100만원이다. 100만원이 큰돈이지만 인연에 비한다면 아주 작은 돈이다. 나는 100만원이상을 그들로 부터 받았다. 물질적인 돈도 돈이 겠지만 마음으로 많은 것들을 받았다. 나는 100만원의 비행기 표를 그들을 위해 다시 살수도 있다. 그들이 내가 필요하다면.
친구를 만든다는건 쉽지는 않을것이다. 하지만 우선 만날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하고 친해져야 할것이다. 난…단순하게 나를 보여줬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라던지 내가 살아온 나날들. 앞으로의 계획들…등등…
그리고 그들이 내 손을 필요로 할때 난 나의 손을 잠시 빌려주었고 그 빌려준 손은 2배가 되어 돌아와 주었다.
캐네디언도 똑같은 사람이다. 단지 피부색이 다른것 뿐이다. 그들이라고 특별해서 특별하게 사람을 보는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현실이다. 나를 솔직히 보여주면 그들도 그들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알게 되고 인연도 되는것이다.
어렵게 생각할건 없다. 예를 들어…멕시코에서…난…기차에서 어느 중간 도시에서 스톱오버를 하려고 했었다. 옆 좌석에 앉았던 사람과 서로 서툰 영어지만 이것저것 대화를 하게 되었고 그 친구는 호스텔 예약을 하지 않은 내게 그것도 만나지 1시간 밖에 되지 않는 내게 그 친구의 집에서 잘수 있게 또 식사 제공을 해주었다. 물론 그 친구의 자전거로 부모님차로 유명한곳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친구의 부모님들도 정말 잘 해 주셨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그렇게 또 다른 좋은 인연은 만들어 졌다.
나는 또 다시 많은 것을 받기만 했고…단순히 내가 그들에게 준건 조금 가져간 고추장이었다. 그 친구의 어머님이 보리또에 고추장을 발라 먹는 걸 보시고 드셔보시더니 고추장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난 드렸다.
어디를 꼭 간다고 해서 만들어 지는게 인연은 아닌거 같다.. 나 역시 아직도 많이 꺼려지지만 또 다른 인연을 만드는 일은 계속 진행하고 싶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일지, 또는 않좋은 사람 일지는 계속 알아 봐야하는 것이다.
자~~~~알 하면 잘 될것이다.
홍기의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e캐나다에서 일해보기 (우리나라 교민VS. 파란눈의 캐네디언)
우리교민분들 밑에서 일해보시고 또 지금도 그런게 하시는 많은 깻잎 분들이나 유학생분들이 캐나다에 많다고 생각한다. 나도 역시 그랬었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정말 좋은신 교민분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겠지만 가끔은 인터넷 사이트까지 올라오는 그런 좋지 않으신 분들도 있는거 같다. 어떤 이민 10년차 분께선…목표달성(어학연수)했으면 빨리 캐나다를 떠나는게 한국인들로 부터 상처 받지 않는 방법이라며 내게 빨리 캐나다를 떠날것을 주문 하셨었다. 캐나다 한인 사회가 그리 아름답진 않다고…
같은 피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이민오신 몇몇 분들이 좋지 않은 소문을 가지고 있는걸 나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워킹비자가 없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참고 일해야 할것이다. 나도 그 중 하나이고. 나 역시 토론토에서 식당에서 일해보려고 했었었다.
그래도 내가 일했던곳의 교민분들은 그래도 괜찮은 분들이었다. 욕은 하지 않으셨고 돈은 다 주셨다. 하지만… 일은 눈치껏 알아서 뛰어 다녀야하고 당연히 다~ 할줄 알아야 했다. 내가 할일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잠깐 쉬는 5분도 눈치를 봐야하고, 항상 바쁜척 해주어야했다.
장사 안된다는 한탄하는 소리도 내가 들어 주어야하고, 개인적인 일들도 내가 해 주어야했다. 물론 이해한다.. 말도 통하고 같은 한국사람이니까…쉬운일만 찾아서 하면 안되는게 젊음의 철칙일 것이다. 나는 일꾼이고 합법적으로 일하는게 아니니까. 결국 오랫동안 일 할수 없었다.
그래서 난 생각을 바꿨다. 캐나다 사람들로. 물론 캐네디언이라고 하면 파란눈의 코쟁이만 있는건 아니다. 전세계에서 온사람들이 캐네디언이다.
그 친구의(토론토 친구) 같이 접시 닦으며 일하는 아줌마의 아들이 내가 사는 집근처의 세차장에서 일해본적이 있다고 했다. 나역시 그 아줌마의 아들을 아는건 아니지만(나의 친구도 모른다 )나느 그 아줌마를 한번 본적이 있고 인사는 했었다. 나는 무대포로 그 세차장을 찾아가 내 친구(아줌마-이 나라는 나이상관없이 다 친구니까…)의 아들이 여기에서 일해 본적이 있다고 혹시 나도 여기에서 일하수 있냐고 물었다. 사장은 아들을 아냐고 내게 물었고 나는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대답은 Yes였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 아들은 그 사장에게 전화를 해준것도 아니고 나 역시 그 아들을 모른다. 결국엔 나는 끈을 이용했지만 그 끈은 정말 희미했던 것이다.
일하는 사람은 나고 내가 일을 잘 못하면 내가 짤리는 것이다.
나는 요즘 일하고 있다. 몇주 전에 시작했다. 그들은 맑은 날은 항상 바쁘고 학원을 다니는 나는 아무 시간 부터 끝날때까지 매일 일할수 있다.
우리교민분 밑에서 일하는것과 다르다. 바쁠때는 바쁜만큼 한가할때는 한가한만큼 열심히만 일하면 된다. 없는 일 찾아서 바쁜척하지 않아도 되고 눈치 볼 필요도 없다. 분배되어있는 내가 할일만 하면된다. 그리고 우리 나라밑에서 일하는 만큼만 하면 아주 잘 한다고 해준다.
뭐…우니나라 기준으로…그리 깨끗하고 좋은 직업은 아닐것이다. 팁을 주지 않는 우리나라 식당과는 달리 사장님을 제외한 모든 일꾼들이 팁을 받는건 그곳의 철칙이다. .
다시 생각해 본다…캐나다에서 일하기…그냥 100m를 정해놓고 또는 일하고 싶은곳의 목록을 작성해 하나 하나 문열고 일꾼 필요하냐고 물어 보는 것이다. 지칠것이다. 하지만 가능성이 없진 않다.
캐네디언들도 비합법적인 일꾼들을 고용하고 현금거래도 한다. 어차피 물러 설곳이 없다면 시도 해 보는 것이다. 내가 물러 설곳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들을수 있는 최소한의 말은 단순히 No일 뿐이다. 고맙다고 말하고 또는 연락처 하나 주고 다시 옆 가게 문을 열면 되는것이다. 나 역시 그걸 잊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안되는건 없다. 시도해보는게 시도 없이 후회하는것 보단 100배 낫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지만 캐네디언과 일하는것도 여러모로 장점으로 작용할것이다. 선택은 자신이 하는것이다.
e넌 인생을 잘 못 살고 있어.
캐나다를 왜 왔냐는 질문에 나의 솔직한 대답은 “여행 과 보드다” 물론 두가지를 다 100%만족스럽게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나의 캐나다 생활에 대해 나 자신은 만족 하고있다. 우리나라에서 해볼수 없는것을 하고 있기에…영어가 첫번째는 아니며 그렇다고 유학이 첫번째도 아니다. 하지만 교민분들이나 학원에서 만나는 형들이나 누나들은 은근히 무시를 하며 살짝은 비웃으며 좋을때라고 말한다…뭐…현실을 보라고…영어가 무조건 첫째라고…
내가 아직도 현실을 깨닳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영어가 좋은 취업으로 가는 행운의 열쇠일까? 그럼 자신감은 취업과 무슨 연관이있을까?
취업이 목적이라면 …다른 방법도 있지 않을까?
나는 나의 길을 간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결론은 나지 않는다.
당분간은 나의 길을 갈 것이고 또 그게 옳지 않는 방법이라도 크게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만든 미래이기에. 그게 빛이던 어둠이던…
물론 나도 영어공부는 한다. 중요하다는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다 또다른 방법도 찾는중이다. 캐나다에서 바닥에서 부터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워킹 비자가 없을땐 무엇을 할수있을까. 또는 워킹 비자가 있을때 최대한 내가 할수 있는 것은 무었일까. 어떻게 일은 구할수 있을까. 나의 능력을 최대한 이용해서 어떤 것을 할수 있을까 등등…난…캐나다에서 10개월동안 여행, 일,영어를 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같이 공부하고 있다.
나의 영어는 초보라는걸 알기에 삼성의 건희형이 쳐다보지도 않을 거란걸 나는 안다.
그래서 스스로 건희형 말고 다른 방법들을 찾아 보는 중이다.
그렇다고 확실하게 무엇을 찾은건 아니다.
적지만 몇가지 가능성은 발견했다. 물론 더 찾아 볼것이다.
남들이 보는 나의 캐나다 10달은 실패작이다.
물론 내가 사는 이 나날들이 나 자신에게도 실패일수도 있다. 언젠가 미래에는.
좀더 두고 볼뿐이다. 아직은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다.
그래서 난 더 행복하다. 더 많은 실패를 해볼수가 있고 더 많은 시련을 당해 볼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와 시련들은 나를 더 나은 길로 이끌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오늘도 내일도 살아간다.잠시 머무는게 아니라 살아가고 있다. 실패든 성공이든…
성공은 나를 자만심에 빠트릴 것이다. 실패는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것이다.
아직은 성공으로 웃는 시간 보다는 실패로 허탈해 하는 웃음을 더 가지고 싶다.
내게 단지 필요한 두가지는 돈과 사회와의 끈(빽)이 아니라 더 강한 심장과 더 튼튼한 두 다리가 필요할 뿐이다. 앞으로 계속 나아 갈수 있게. 좀더 현명해질수 있는 많은 경험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e끝으로…
캐나다 체험을 끝내고 싶진않다. 다시 와보고 싶은 나라다.꽤 정든 나라다.다시 올수 있기를 욕심 내고 싶다.
오카나간 농장정보,처칠 북극곰사진, 멕시코 정보 조금....혹시라도 구하시거나 제가 도움이 된다면 아는 부분까지는 열심히 도와드리겠습니다.도와드리는 것은 저의 기쁨입니다.
아직도 캐나다를 잘 모르지만...이제는 오카나간에 대해서 조금은…정말 조금은…말할수 있을거 같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쓴글중 제가 잘못 알고 있거나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따끔한 충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캐나다를 제데로 정확히 아는게 저의 목적입니다.
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
첫댓글 길지만^^ 그래서 그 다음엔 무슨 내용이 나올까하는 기대를 가지면서 읽은 글이었습니다. 왠지 마음에 와 닿는군요. 자신에게 떳떳한 삶을 사는 게 최고로 만족하는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잘 읽고 저도 캐나다 꼭 가고 싶군요!
두려움을 알지 못하고서는 용감하지 못하다지요~ 제겐 문득 느껴지는 말이라서...^^;;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조금 긴듯하지만... ^^;;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용감하게 캐나다를 준비하려합니다!! 감사합니다. ^^
정모때 말씀 잘들었습니다..글도 읽었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글 읽었습니다. 많은 도움 되었어요^^ 언제든지 화이팅~!
대단하세요...^^
와~잘 읽었습니다....대단하시다는 말 밖엔...저도 그럴수 있을지...
굿,,,,,대단하십니다. 부럽네요 용기가 ,,,ㅋ
삶에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사신다는 것 자체가 멋지십니다,, 지금은 군인이지만 저도 빨리 이런 날이 오길,,^^
어머~ 이 글을 이제서야 읽었네요~ 용기가 되어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너무너무 멋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