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전주역에 도착하니 밤 9시가 다 됐는데 스파라쿠아 찜질방으로 가는 버스가 없다.
전주지역 버스노조가 파업 중이다. 걸어갈까 생각하고 거리를 물어보니 완전 반대쪽 끝이라
15km는 족히 넘을 것이라고 한다. 피 같은 돈 내고 택시를 탄다. 식당에서 저녁 먹고 택시 타고
오늘 현금지출이 너무 크다. 중화산동 스파라쿠아 앞에 내리며 만 원짜리 건네는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운전기사가 보았을 것이다.
스파라쿠아는 서울에서도 보기 힘든 시설이다. 운치나 격조가 있는 형태는 아니지만
현대적이고 고급스런 시설을 자랑하는 특급 찜찔방이다. 목하 전주를 평정하고 있는 곳이라고
소문났다. 그렇다고 대놓고 가격을 비싸게 받아 다소 짜증스럽다. 인터넷에서 본 가격이
그새 또 올랐다. 너무 속이 보여 오래 가긴 힘들겠다. 유명할수록 다소곳하게 겸양을 좀 떨면
더 있어 보여 심리적으로 충성도가 커지기 마련인데 주인이 공부 좀 해야겠다.
PC방 가서 디카 필름 메모리 비우고 내일 갈 길 검색하고 나니 자정이 훌쩍 넘었다.
따로 수면실은 없지만 잘 공간은 여기저기 많다. 자정이 넘었는데도 사람들이 넘쳐나고 어수선해서
어디서든 잠을 청하기가 쉽지 않다. 출출하기도 할 뿐 더러 식곤증을 이용해 잠을 청해볼 요량으로
라면 하나 먹고 피씨방에서 여행자료 30분쯤 더 뒤지다 자리를 잡고 누웠는데 여전히 소란스러워
도통 잠이 오질 않는다. 서너 살 된 꼬맹이들이 새벽 3시가 넘도록 발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통에
결국 잠을 설치고 말았다. 비몽사몽을 헤매다 7시경 일어나니 몸이 식어 좀 어슬어슬하다.
바로 탕에 내려가 몸을 데우고 컨디션 조절하는데 개운치가 않다.
시설은 특급인데 잠자기에는 좀 부적합하다. 찜방 선택에 참고할 요건을 또 하나 챙기게 됐다.
오늘은 트레킹이 아니고 모악산 산행이다.
스파라쿠아에서 중앙시장까지 5km 걸어가서 모악산 입구 행 버스를 타기로 한다.
물어 물어 중앙시장에 도착하니 버스정거장에서 한 아저씨가 파업 중이라 버스가 없다고 한다.
난감하다. 덕진공원을 포함해서 전주숨길 트레킹으로 바꿀까 아니면 내일 행선지로 바로
옮겨 버릴까 전전긍긍 하던 차에 관광버스가 중인리 팻말을 붙이고 나타난다.
운전기사에게 물어보니 중인리 모악산 입구에 간단다. 흘긋 돌아보니 아까 그 아저씨가 머리를 긁적이며
저만큼 멀어져 가고 있다. 실없는 아저씨인지? 훼방꾼인지? 왜 도망은 가고 난린지?
쓸데없이 나서서 아는 척 하는 사람의 최후가 다 그렇다.
버스 속이 소란스럽다. 파업이 벌써 한 달째란다. 관광버스협회에서 시민을 위해 임시로 노선을
정해 주요 구간만 운행하고 있단다. 시민들의 볼멘소리에 기사가 맞장구를 치며 달랜다.
버스업주들이 시에서 준 보조금을 착복하고 운전기사들에게 주지 않은 게 발단이었는데
그 와중에 또 무슨 사연이 복잡하게 얽힌 모양이다. 버스 속에서 갑론을박이 백분토론보다
더 치열하게 전개된다. 종점이 가까워지면서 혼자 남게 되서야 비로소 조용해진다.
배낭을 챙겨 버스에서 내리니 기사아저씨가 출입구 문 앞에 서있다 나를 쳐다보며 금강사로
넘어갈 거냐고 묻는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그 코스가 산 좀 타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길이라 넘겨 짚었다고 한다. 내 행색을 보며 멋있다며 부럽단다. 불쑥 뻘쭘해진다.
산행 들머리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오뎅 두 꼬치를 먹으며 따뜻한 국물을 충분히 섭취한다.
이상하게 주위에 김밥 파는 곳이 없다. 서울 주변의 산행 들머리에는 김밥집이 널렸는데
이곳에는 만두 파는 집이 하나 있을 뿐 김밥집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지방마다 산행 행동식이 다른 모양이다. 대신 막걸리를 한 통 산다. 정상에서 김밥 대신할
요량이다. 아직 담배는 물론 술도 입에 안 댔는데 정상에서 기분 좋게 한잔 하는 막걸리는
술이 아니라 음식에 속한다. 내심 바라고 있지만 금연금주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내가 좋아할 것 같다.
산행 안내도를 보니 모악산 마실길이란 코스도 있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전주 숨길 등이 있듯이 이곳은 마실길이다. 전주 양반들의 품세가
느껴지는 이름이다. 천편일률적인 것 보다 이렇게 지방의 특색과 향기가 배어나는 이름이 좋다.
잠시 갈등을 때리다 마실길을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원래 생각했던 대로 모악산 정상을 오르는
산행만 하기로 한다.
'핸드드립 커피하우스 칼디'라고 쓰여진 큼지막한 배너가 고목에 걸려있다.
요즘 산행 들머리에 간간이 보이는 핸드드립 커피가 이곳까지 파고 들었다.
산행과 커피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이제는 나를 세뇌시켰다. 마실길과 커피는 더더욱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최근 들어 동생 덕에 나도 신선한 핸드드립의 맛과 향기에 푹 빠져 있다.
커피는 향기를 잘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향기를 잘 만들어가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
산길로 접어들기 직전에 허름한 집 벽에 팻말이 두 개 나란히 붙어있다.
왼쪽 팻말에는 귀여운 강아지 사진에 ‘강아지 분양. 010-xxxx-xxxx’이라고 적혀있고
바로 옆에 있는 오른쪽 팻말에는 ‘끓여 먹인 토종개. 상담 후 잡아 드립니다.’라고 적혀있는데
핸드폰 번호가 같다. 개를 잘 키워서 분양하면서 또 취향대로 먹기 좋게 잡아도 준다는 건데
참 모순돼 보이면서 웃음을 자아낸다. 개를 팔아 먹는 것과 잡아 먹는 것이 같은 개념인가
하고 잠시 헷갈린다. 두 가지 팻말을 함께 붙여놓은 사람의 심보가 참 대담하다.
계곡을 치고 올라가는 초입부터 빙판길이다. 아이젠을 챙긴다는 것을 깜빡 했다.
얼음 사이로 눈꼽만한 돌 표면만 보여도 발을 딛고 올라선다. 바위에 짝짝 붙는다는 캠프라인의
명성을 확인한다. 그렇지만 돌이 전혀 안 보이는 곳이 더 많다. 내려올 때가 걱정된다.
월요일 오전 10시 모악산에는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다. 긴장된다.
빙판길을 낑낑대며 30분쯤 오르니 반대편에서 두 사람이 아이젠 소리를 내며 내려온다.
사람을 만나니 반갑고 아이젠을 보니 부럽다. 재차 내려올 때가 걱정된다. 문득 지금 되돌아가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약한 마음이 생긴다. 극기를 위한 여행이란 생각을 애써 해가며
앞으로 계속 전진한다.
한 시간여를 오르니 휴게소가 나온다. 60 중반은 됐음직한 아저씨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김제 쪽 금강사로 가는 길을 물으니 정상 가기 전에 오른 쪽으로 빠지는 길이 있단다.
아이젠도 하지 않았는데 그 길은 무리라며 걱정이 태산이다. 갑자기 혼란스럽다.
지난 이틀간 산행과 트레킹을 포함 45km를 진행한 다리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진다. 흔들리지 말자.
정상 1km 팻말이 나온다. 땀이 식어 체온이 내려가는 것을 피하려 쉬지 않고 올라왔더니
왼쪽 골반 부근에 다소 무리가 오는 느낌이다. 배낭을 풀고 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쉰다.
반대편에서 아저씨 한 분이 나타나서 혹시 구이 쪽에서 올라왔느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한다.
그 쪽 길은 좀 녹았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구정에 그 쪽으로 산행을 했는데 중턱 이하는
햇볕을 받아 좀 녹았더라고 한다. 하산코스를 바꿔야 할 것 같다.
정상에 가까워 오니 어김없이 깔딱 고개가 나타난다. 빙판길이라 더 힘들다.
깔딱 고개를 넘으니 정상 150미터 전방에 햇살 따스한 쉼터가 나온다.
아저씨 한 분이 빵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아까 휴게소에서 봤던 분이다.
아이젠도 없이 어떻게 산행을 하려 하느냐고 걱정해 주시던 분이다. 60대가 아니라 70 초반이란다.
정말 정정하시다. 산은 사람을 젊고 건강하게 만드는 보약이다. 귤을 한 개 주시며
눈 앞에 보이는 정상에서 구이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그래도 좀 녹았을 거라고 같은 말씀을 하며
꼭 그 쪽으로 가라고 당부한다. 산에서는 모두가 살가운 동료다.
모악산 정상은 정말 멋대가리 없다. 송신탑이 어지럽게 널려있고 대형벙커를 연상케 하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정상 봉우리를 차지해 그 옥상이 모악산 정상이 되어있다.
콘크리트 정상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 그 위에 '모악산 정상 793.6m'이란 팻말이 놓여있다.
낯선 모습이다. 그렇지만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완산군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 없다.
전주를 둘러싸고 있는 완산군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경기도와 같은 형국이다.
산과 산 사이에 전답이 펼쳐지고 군데군데 촌락이 형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한국의 평화로운
농촌 모습이다. 마음이 푸근해진다. 빙판길과 씨름하며 정상에 올라온 보상이 짭짤하다.
예상대로 하산 길은 사투다. 시작부터 40~50도씩 되는 가파른 경사길이 완전히 얼어 붙었다.
스틱을 사용하지만 역부족이다. 철삭에 들러붙어 바둥거리며 한걸음 한걸음 어렵게 발걸음을 뗀다.
경사가 좀 덜 해서 철삭을 해놓지 않은 곳은 아예 죽음이다. 아이젠을 하고 옆을 지나는 아저씨가
철삭에 매달린 내 모습이 안타까운 듯 쳐다보는데 민망하다. 복장은 전문산악인인데
산 타는 모습은 영 아니라는 듯 눈을 흘기며 지나가는 것 같다. 그 시선을 의식하다 결국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많이 아프다.
엉덩방아를 한번 더 찧고 나서야 눈이 녹은 중턱에 다다른다. 땅바닥에 흙이 보이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철삭과 스틱에 얼마나 매달렸는지 양팔과 가슴 부위가 뻐근하다.
내일 아침에 몰려올 통증이 벌써 느껴지는 듯 하다. 정자가 있는 쉼터에서 배낭을 부리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김밥을 사이에 놓고 젊은 여성 둘이 수다 중이다. 등산화를 제대로 갖춰
신은 걸 보니 상습적으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다. 둘 다 산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미모다.
김제동이 여자 연예인들에게 산행을 장려해 붐이 일면서 몸매관리 차 산을 타는 여성들이
많아졌다는 얘기가 농담은 아닌 것 같다. 두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다 방금 전 빙판길을
하산하느라 죽을 고생한 사실을 까마득히 잊었다. 미모는 고통스런 기억을 망각시키는 힘을 가졌다.
하산 종착지를 약 1km 남기고 길을 잘못 들었다. 무심코 따라가다 보니 계곡을 낀 빙판길이
다시 나와 혹시 하고 되돌아가니 절 안으로 들어가서 연결되는 길이 따로 있다.
표지판이 없어 처음 오는 사람은 길을 놓치기가 십상이겠다. 이렇게 결정적인 포스트에
표지판이 없다는 사실이 참 어설프다. 디테일이 꼼꼼해야 완성도가 높아진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구이 쪽 산행입구는 중인동보다 훨씬 정비가 잘 되어있고 상가지역도 무척 크다.
아스팔트 길과 주차장이 시원하게 구획되어 있고 주위로 음식점과 상점들이 즐비하다.
마음에 드는 음식점에 들어가 메뉴를 고르려 하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청국장을 권한다.
흔쾌히 좋다하고 휴대폰 충전을 부탁하니 넙죽 받아가신다. 더러 생색을 내는 곳도 있는데
이 집은 인심이 시원시원하다. 음식이 기대된다.
상이 차려진 걸 보곤 호남지방이란 생각을, 그것도 전주지역이란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두부김치까지 곁들인 반찬 진용이 하도 좋아서 입을 못 다물겠다. 게다가 1인용 청국장 뚝배기는
또 어찌나 큰지 서울에서는 2인용으로 쓰고도 남겠다. 해물을 잔뜩 넣었고 시금치도 들었다.
해물, 두부, 시금치가 어우러지는 청국장의 맛이 전주답게 수라의 경지다. 10여 개나 되는
반찬접시와 청국장 뚝배기, 그리고 밥공기를 몽땅 비워버리고 나니 배가 잔뜩 부른데 더부룩하진
않다. 채소 잔치라 그렇다. 주인이 권하는 음식이 답이라는 생각이 옳았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전주시내 가는 버스 편을 물으니 파업 땜에 버스가 없을 거라고 걱정이 태산이다.
주차장 쪽으로 한번 가보라고 권한다. 역시 버스가 없다. 파출소에 들러 시내로 들어갈 방안을 물으니
파업이라 버스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한다. 그래서 온 것이니 어떡하면 좋겠냐고 다그치니
귀찮은 듯 본체만체 하며 콜택시를 부르란다. 뭐 이런 경찰들이 다 있나 싶다.
택시 부르려면 여기 오지도 않았다. 말하는 싸가지도 돼먹지 않았고 근무하는 자세도 딱 짭새다.
온 국민이 경멸하는 짭새 말이다.
참 한심한 경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가 버럭 난다. 지들이 무얼 해야 하는지 조차 모르는
한심한 짭새들이다. 언짢아서 한마디 했더니 그제서야 부산을 떠는데 겉으로만 그렇지
속으로는 여전히 귀찮은 꼬락서니다. 말하는 내용만 봐도 뻔히 들통이 나는데도 가식적으로
노력하는 척하는 모습을 보니 심히 가증스럽다. 경찰이 지금보다 두 배 잘 하면 서민들 살기가
열 배는 더 좋아질 것이다. 부패와 무능으로 얼룩진 대한민국 경찰의 문제는 이제 파국 임계점에
거의 다다른 것 같다.
주차장에 픽업트럭이 시동을 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달려가서 사정 얘기를 하니 타라고 한다.
전주 시내에만 떨어뜨려 주면 된다고 하는데 굳이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버스파업 얘기며 살아가는 얘기하다 보니 그새 터미널이다. 잠깐 사이에 정이 들었는지 고맙다고
인사하자 여행 잘하라고 손까지 흔들어주고 난 뒤에야 핸들을 돌린다.
전주 인심은 경찰이 깎아 먹고 서민이 살린다.
해 떨어질 시간이 되니 날씨가 급격히 추워진다. 편의점에 들러 천 원짜리 커피 한잔 사서
군산 행 버스에 오른다. 따뜻한 커피와 함께 버스 속 훈훈한 공기가 몸을 녹이며 나른해진다.
'봉순이 언니'를 꺼내 들고 아껴 두었던 서평후기를 마저 읽는다. 공지영과 같은 세대에
같은 처지를 겪은 사람이 쓴 글이라 일견 뻔한 얘기 같다. 차 안의 따뜻한 공기가 슬슬 졸음을
몰고 온다. 눈 좀 붙여야겠다.
(계속)
첫댓글 대한민국 찜질방,,,,,,,편의점,,,,남해에서 하동걸쳐 전주까지,,,,,,,,,,,담은 군산이군요,,,,,,혼자걷는 즐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없지만,,홀로 드시는 식사모습은 외로움이 묻어나네요,,,,군산에서는 맛난음식 기다릴께요ㅡㅡㅡㅡㅡㅡㅡㅡ
군산에서 드디어 고기를 먹게되지. 돼지고기.. 큭~
하필 버스 노조가 파업에 급경사 빙판 하산길, 생각만해도 후덜덜... 부러워 들뜨던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되네요. 계속 부럽다~ 좋았겠다~ 모드였으면 회사고 뭐고 다 접고 당장 짐싸서 섬진강으로 갈 뻔 했었는데 말이지요^^*
대신 전주는 음식이 있으니까 섬진강 찍고 전주로 달리세요.^^
전주는 도시 자채가 조용하고 그러면서도 분위기가있는 그런 곳으로 기억하고 있는데...조금은 다른 느낌의 후기내요...그래도 이번글은 전편 섬진강보다 읽을만함니다...그리 유쾌한것이 덜해서 배가 덜 아픔니다 ㅋㅋ...잘 읽고감니다^^
아이젠 없는 빙판길 산행은 자제해야 겠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