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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스크랩 홍길동 (洪吉同) 실존인물 (1440~1510)
나비우스 추천 0 조회 1,097 17.11.21 20: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리가 소설로 알고있는 홍길동!은 실존인물일까요?

 

홍길동 (洪吉同) 실존인물 (1440~1510)

 

홍길동 (洪吉同)

1440년

(세종 25년)경에 출생해

1510년

(중종 5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

 

요약

홍길동은 조선 연산군 때 충청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도적떼의 우두머리다. 선조 때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의 모델이 되었는데 임꺽정,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3대 도적’으로 손꼽힌다.

 

우리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부조리한 제도와 권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임진왜란의 참화가 전 국토를 휩쓸고 지나간 조선 광해군대에 지배계층이었던 양반사대부들은 도탄에 빠진 민생을 살피기는커녕 치열한 권력다툼 속에서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영속시키는 데 전념했다. 이와 같은 현실을 직시한 허균은 불합리한 서얼 차별과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취, 국방에 대한 부실 등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국왕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로지 백성뿐이라고 역설했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백성을 현실에 순응하는 항민(恒民), 불만이 쌓인 원민(怨民), 사회를 바꾸기 위해 직접 나서는 호민(豪民)의 세 부류로 구분한 다음, 호민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 원민들이 소리만 듣고도 저절로 모여들고 항민들도 살기를 구해 따라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을 통해 호민의 대표로 홍길동이란 인물을 형상화했다.

홍길동전

그런데 홍길동은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연산군대에 얼자의 신분으로 도적떼의 두령이 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존인물이었다. 인조대의 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그를 장길산, 임꺽정과 함께 조선 시대의 3대 도적으로 꼽기도 했다.

말년에 서얼들과 함께 혁명을 꿈꾸다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허균이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으로 그의 이름을 차용했다는 것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해 보인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홍길동에 대하여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핍박받는 서민들을 위해 싸운 의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는 그가 의적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민중들은 부정한 체제, 무자비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원동력으로서 치열한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실존인물 홍길동

성종에서 연산군으로 이어지던 시기에 조선은 《경국대전》으로 법률체계를 완비하고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았다. 그 무렵 조정에서는 세조대부터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훈구파와 성리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체계를 꿈꾸며 출사한 사림파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와 같은 고관대작들의 정쟁에 편승한 지방의 수령과 이속들이 한통속이 되어 가렴주구를 일삼자 수많은 양민들이 터전을 잃고 고향을 떠났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도적떼로 변신하여 자신들을 핍박했던 양반가나 관청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그때 가장 강성했던 도적떼의 두령이 바로 충청도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홍길동이었다.

1986년에 발표된 박종현의 논문 〈실존 홍길동 연구〉에 따르면 홍길동은 본관이 남양으로 경성절제사를 지낸 홍상직의 아들이었다. 홍상직은 정처인 남평 문씨로부터 귀동(貴童)과 일동(逸童) 두 아들을 얻은 뒤 관기 출신의 비첩 옥영향으로부터 셋째아들 길동(吉童)을 얻었다. 그런데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도적 홍길동의 한자명은 길동(吉同)이라 양자가 실제로 동일인인지는 분명치 않다.

홍상직은 《홍길동전》에 나오는 홍판서보다는 낮은 벼슬을 지냈지만 고위 관료 출신임에는 분명하다. 실록에는 그의 내력이 소략하나마 전해지고 있다. 그는 1420년(세종 2년) 10월 24일 경성절제사에 제수되었는데, 2년 뒤인 1422년(세종 4년) 12월 1일 직분을 게을리 하고 백성들을 핍박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야인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백성들에게 목책을 보호하라고 명했지만 듣지 않자 부하를 시켜 그들의 집을 불태웠고, 어떤 사람이 남도의 병선이 습격할 것이라는 거짓으로 고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자 백성과 서리들이 소란을 피웠다. 이에 따라 의금부에 끌려온 그는 제조 유정현이 자신에게 뇌물을 요구했는데 거절하여 옥에 갇힌 것이라고 항변했다. 의금부에서는 그의 죄상이 참형에 해당되었지만 무고죄만 적용시켜 경상도 동래로 귀양을 보냈다.

1년 뒤인 1423년(세종 5년) 12월 9일,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홍상직은 향리인 경기도 파주군 적성에서 요양했다. 그러나 국청에서의 가혹한 추국과 유배지에서 얻은 장독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인 1424년(세종 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홍길동은 이듬해인 1425년(세종 7년)에 파주가 아니라 전라도 장성현 아곡리 아치실 마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조선 후기의 학자 황윤석의 《증보해동이적 해중서생》에 실린 기사를 근거로 하고 있다.

‘옛적에 듣자니 국조 중종 이전에 홍길동이란 자가 있었는데 이는 상신 일동의 얼제로 장성 아차곡에서 살았다. 재기를 믿고 스스로 뽐내고 있었는데 국법이 벼슬이나 청현직에 나아갈 수 없도록 함에 얽매어 하루아침에 갑자기 도망쳤다.’

《증보해동이적 해중서생》, 황윤석

그렇다면 홍상직이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한동안 장성에 머물며 관기 옥영향을 취하여 길동을 얻었고, 실록에 있는 그의 거주지나 사망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겠다.

1428년(세종 10년) 10월 28일 예조에서 전국의 효자(孝子)·순손(順孫)·절부(節婦)를 보고하는 그의 정처인 남평 문씨가 남편의 무덤 곁에 여막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리면서 삼년상을 치렀고, 이후에도 삭망과 속절에 제사지냈다고 보고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1444년(세종 26년) 7월 22일에는 홍길동의 생모인 기녀 옥영향의 진술을 토대로 함길도 도관찰사에게 재직시 비행에 대해 추문하여 핵실하도록 명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에는 그의 이복형 홍일동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는 조카 단종을 몰아낸 조의 쿠데타에 참여하여 원종공신 2등훈에 책록되었고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성품이 천진하여 겉치레를 하지 않았고 사부(詞賦)에 능했는데 거문고를 잘 탔고 취하면 풀잎으로 피리소리를 냈다. 거구에다 대주가에 대식가였던 그는 언젠가 진관사에서 놀 때 떡 한 그릇, 국수 세 주발, 밥 세 바릿대, 두부국 아홉 주발을 먹었다. 그런데, 산 밑에 이르러 대접하는 자가 있자 또 찐 닭 두 마리, 물고기국 세 주발, 생선회 한 쟁반, 술 마흔 잔을 마셨다. 세조가 그 일을 듣고 감탄하면서 장사(壯士)라고 탄복했다. 하지만 그는 평소 미숫가루와 술을 마셨을 뿐 밥은 먹지 않았는데 훗날 홍주에서 폭음한 다음 갑자기 죽었다.

이런 홍일동의 성정으로 미루어 이복동생 홍길동 역시 호탕하고 대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정통 관료 가문의 후예였지만 조선의 강력한 신분제도에 따라 비천한 얼자로써 앞날에 희망이 보이지 않자 조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리와 유랑민들을 끌어모아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길동의 최후

홍길동의 주요 근거지는 충청도 충주 일대였는데, 일반 도적들처럼 산 속에 근거지를 두지 않고 마음껏 여항을 활보하면서 위세를 떨쳤다. 당시 그는 사욕을 품은 관리와 이속을 포섭하여 각종 정보를 취합한 다음 조직적으로 강도짓을 일삼았다. 그가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 차림으로 무기를 소지한 채 무리를 이끌고 관가를 들락거렸지만 지방의 권농이나 이정, 유향소의 좌수, 별감 등이 감히 제어하지 못했다. 하지만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는 법, 1500년(연산군 6년) 10월 22일, 영의정 한치형, 좌의정 성준, 우의정 이극균이 도적 홍길동의 체포 사실을 임금에게 고했다.

 

‘듣건대,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

그달 28일에는 의금부에서는 홍길동을 도와주었던 전 평안도 우후 엄귀손을 추포한 다음 곤장 1백대에 3천리 밖으로 유배하고 고신(告身)을 회수하겠다고 상주했다. 그러나 윤필상, 어세겸, 한치형 등은 홍길동의 문초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그의 처결이 끝난 뒤에 엄귀손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자고 건의했다.

그때 당상관이었던 엄귀손은 홍길동으로부터 음식물을 받았고, 가옥을 구입해 주었으며, 산업까지 경영해주었음이 밝혀졌다. 홍길동의 무리가 도적질하여 얻은 재물로 상계에도 진출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엄귀손은 본래 가난하여 노복과 재산이 없었는데, 체포 당시 서울과 지방에 집을 사두고 곡식을 3,4천 석이나 가지고 있었다. 그 후 홍길동에 대한 처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행위를 방조한 권농과 이정, 유향소의 품관들이 모조리 변방으로 쫓겨났다는 기록에 비추어 사형을 당했으리라 짐작된다.

홍길동의 전례는 그 후 조정의 조세 정책까지 영향을 끼쳤다. 1513년(중종 8년) 8월 29일 호조에서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양전(量田)을 건의하면서 ‘충청도는 홍길동이 도둑질한 뒤로 유망이 또한 회복되지 못하여 양전을 오래도록 하지 않았으므로 세를 거두기가 실로 어렵다.’고 보고했다. 그때까지 충청도에 홍길동과 같은 도적떼들이 남아있어 유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 기사는 그때까지 현지의 수령들이 민생치안에 전념하고 있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소설 속의 홍길동

도적 홍길동이 관군에게 체포되어 비참한 최후를 마친 반면 소설 속의 의적 홍길동은 신분의 벽을 무너뜨리고 병조판서가 된 다음 율도국이라는 이상향으로 건너가 부귀영화를 누린다. 허균의 신념과 상상력으로 재탄생한 가상인물 홍길동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홍길동은 세종 때 서울에 살고 있던 홍판서의 시비 춘섬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길동은 천민의 신분인 얼자(?子)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그는 병법과 도술을 익혀 큰 인물이 되고자 했지만 천한 신분 때문에 과거를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등 온갖 설움을 감내해야 했다. 더군다나 그의 비범한 재주를 시기하던 소실 곡산댁이 자객을 시켜 죽여 없애려 한다.

가까스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길동은 부모님께 하직하고 방랑길에 나섰다가 도적떼의 두목이 된다. 그때부터 길동은 기이한 도술과 계책으로 해인사의 보물을 탈취하는 등 본격적인 도적활동에 나선다. 그는 자신의 무리를 활빈당이라 이름 짓고 팔도 수령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 나누어준다. 그로 인해 홍길동은 의적으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에게 감영의 재물을 빼앗긴 함경감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그를 고발한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좌·우포청에 명하여 그의 체포하게 했다. 하지만 신출귀몰한 길동의 활약에 관군은 매번 헛수고만 되풀이한다. 우포장 이흡은 그를 잡으려다 신기막측한 도술에 휘말려 우롱당하기까지 한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아버지 홍판서와 형 인형을 시켜 그를 회유했다.

결국 길동은 서울에 올라와 병조판서가 됨으로써 한을 풀어낸 다음 무리를 이끌고 중국의 남경으로 가던 도중 경치가 수려한 율도국에서 요괴를 퇴치하고 두 미녀를 아내로 맞이한다. 얼마 후 홍판서의 부음을 듣고 조선으로 돌아와 삼년상을 마친 그는 다시 율도국으로 돌아가 국왕이 되어 평생 부귀영화를 누린다.

 

홍길동은 오키나와로 갔다

유구,琉球(오키나와)에 해상왕국을 건설한 실존

홍길동은 소설의 주인공이었으며 역사상 실존인물이기도 하다.

역사에서는 반역자, 또는 도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소설에서는 봉건제도에 맞서 만민평등의 이념으로 활빈당을 이끌고 이상국(오키나와의 율도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고증에 의하면 홍길동은 조선초 15세기 중엽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신분이 첩의 자식이라 관리등용을 제한하는 국법 때문에 출세의 길이 막혔다. 좌절과 울분 속에 양반으로부터 차별받던 민중을 규합 활빈당을 결성한 후,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

홍길동은 1460~1500년대 조선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인물이었지만 그의 마지막 행적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유구(琉球: 일본 오키나와의 옛 이름)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노력했던 한 일본인 연구가에 의해 새로운 단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홍길동의 오키나와로의 탈출 가능성에 대한 사학적인 연구를 한 사람은 일본인이었다. 그것도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닌, 일본 오키나와 현립도서관 사서로 일했던 가데나 쇼도쿠(嘉手納宗德)씨였다.

그는 유구사를 새롭게 고찰하면서 홍길동의 유구행 가능성을 최초로 인정했다. 그렇다면 홍길동의 집단은 남해의 유배지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조선에서는 - ‘도적’이며 ‘반역자

오키나와에서는 - ‘이상국을 건설한 전설적 영웅’

홍길동의 출생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이복 형 홍일동은 1419(세종1년)에 태어났다. 또한 일본 오키나와 이시가키지마(석원도) 야에야마 박물관에 소장된 장전대주(홍길동의 처남)의 족보에는 홍길동이 정통(正統) 8년 즉 1443년(세종 25년)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 야에야마 박물관에 소장된 장전대주 가문의 족보 이 족보에는 김씨, 나씨,

윤씨 성을 가진 조선인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오키나와에 진출한 홍길동 일행이 대규모 집단이었음을 반영하고있다

 

홍길동은 고려왕조 외척이며 명문세도가였던 남양 홍(洪)씨 집안의 서자로 태어났다.

 

 

밀직부사였던 홍길동의 할아버지 홍징은 이성계와 더불어 서해안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무찔렀으며, 동북명의 오랑캐(여진족)가 소란을 피우자 정몽주와 함께 사태를 진압하는 등 많은 공적을 세운 사람이었다. 공민왕과는 동서지간이며 문하시중을 지낸 파주염씨 중시조인 염제신의 맏사위이기도 했다.

남양 홍씨 남양군파 족보,

서자인 길동을 삭제 하고, 홍상직의 아들로 일동과 귀동 만을 기록하고 있다.

 

 

고려 우왕 14년(1388년) 최영과 이성계가 홍징의 처남 염흥방을 모반사건의 주모자로 내몰아 1000 여명의 신하들이 죽임을 다하는「무진참화」가 일어났다. 이때에 염흥방의 매부인 홍징은 친척이라는 이유로 연좌되어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고려말의 충신이자 명문세도가였던 파주염씨와 남양홍씨는 위기를 피해 전남 장성, 나주, 전북 고창 등지에 내려와 정착하게 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명문가의 족보들을 모아 성씨별로 주요 인물만을 기록한것으로,

1920년경 편찬되었다. 만성대동보에 홍길동은 형 일동과 함께

홍상직의 아들로 올라 있으며. "도술을 부렸던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탐관오리들로 인해

고통받던 백성이 많았기에

홍길동의 인기는 오히려 높아졌다고 해요

 

하지만 1500년

결국 홍길동 일당은 체포되어

역사 속 홍길동의 기록도 끝이 났다고 합니다.

 

이후 홍길동의 이야기는

후대 사람들에게까지 전달됐고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에서

재탄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이라고 하네요~

 

 

홍길동의 고향, 아치곡

홍길동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1리 아치실(아치곡)에서는 몇 백년은 됨직한 아름드리 감나무와 시누대(山竹)에 둘러 쌓인 생가 터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또 30여m 아래 계곡(암탉골)에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는 '길동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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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344번지 홍길동 생가터

 

황윤석이 쓴 증보해동이적에는, “옛적에 듣자니, 국조 중엽 이전에 홍길동(洪吉童)이란 자가 있었는데 재상 홍일동의 서자 동생이다. (홍일동은 장성(長城)의 아차곡에 살았다.) 재기를 믿고 스스로 호탕해 하였으나 과거를 보아 청훈과 현직을 맡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국법에 구속되어 하루아침에 홀연히 도망갔었다”라고 기술됨.

홍길동의 어머니는 관기(官妓)출신 옥영향(玉英香)으로 홍상직이 총애하는 여인이었다. 배가 다른 홍길동의 두 형(귀동,일동)의 어머니는 남평 문씨이다. 소설에서 길동의 어머니는 춘섬(春蟾)인데, 이는 홍길동전의 작가인 허균이 자신의 애첩 이름이 추섬(秋蟾)인데서 착안하여 명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홍길동은 결혼하여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으며 부인의 이름은 ‘고을노’로 후일 조선에서 미질이 좋은 신품종의 볍씨(쌀)를 오키나와로 가져갔다. 오키나와 일대에는 이미 안남미(安南米)라는 남방계의 쌀이 있었으나 질이 좋지 않았다.

 

현재 오키나와 야에야마(八重山)지역에서는 ‘고을노’를 풍요의 여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이는 홍길동 집단이 해외로 떠나면서 오곡의 종자를 항아리에 담아 함께 가져갔음을 의미한다

 

청년기 활동 - 1460년(세조 6년) ~ 1470년(성종 1년)

홍길동은 서얼의 관리등용을 금지하는 경국대전의 반포로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집을 떠나 나주목 관할 장성현 갈재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광주 무등산, 영암 월출산에 본거지를 정하고 주로 탐관오리와 토호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일반 백성에게 나눠주는 의적 활빈 활동을 하였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발행한 호적대장, 직계가족은 물론 외가 처가까지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서얼출신들의 관직등용을 근복적으로 감시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였다.

활빈당은 지리산 근처의 경상도 하동군 화계현 보리암자에 지휘부를 두고 관군과 대항하였으며, 멀리 경상도 진주에까지 세력을 펼쳤다. 그 후, 김천 황악산에 들어가 ‘학조대사’ 에게서 병법과 무술을 배웠다.

장영기(張永己) 라는 이름으로 변성하였으며, 전국 팔도(八道) 시장에 정보원(첩자)을 파견하여 민심을 파악하였다. 그러던 중 1469년(예종 1년) 10월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활동 무대를 서남해안의 섬으로 옮기게 된다.

1469년 11월 중순, 관군에 쫓기던 홍길동집단(활빈당)은 전라도 영광 다경포(현재의 법성포) 근처의 영평곶에서 배를 타고 나주 압해도(현재 신안군 압해면) 쪽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로써 활동범위가 육지에서 바다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훗날 뱃길로 3천리나 떨어진 일본 오키나와에 율도국이라는 해상왕국을 건설하는 계기가 된다. 특히, 이 시기에는 집단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직접 농사도 짓고 염전을 경작하고 어업활동을 했으며 상업활동(시장에서의 장사)까지 영위하면서 부패한 정부와 관료를 상대로 반봉건 투쟁을 벌였다.

1470년에는 관군의 집요한 토벌작전을 피하기 위하여 가짜 홍길동을 내세워 체포당하게 하는 계략을 꾸민 홍길동집단은 남서해안의 여러 섬을 중심으로 생업에 종사하며 평온한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장년기 활동 ? 1471년(성종 2년) ~ 1500년(연산군 6년)

1485년(성종 20년) 11월, 명예욕이 강했던 전라도 도사 ‘한건’이 홍길동집단에 대한 강경진압을 결행하고 관아에 끌고가 매질하여 죽이는 사태가 발생하자 홍길동집단은 생업을 뒤로한 채 재무장하고 투쟁에 나서게 된다.

관군은 1487년(성종 22년)에 홍길동 집단은 물론, 어민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주로 이용하던 거도선(바닥이 평평하고 근거리 이동에 용이함) 이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다. 그 후, 1489년에는 홍길동 집단을 색출하기 위해 바다를 왕래하는 사람을 상대로 ‘해상 통행증’을 발급하여 홍길동 집단의 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관군의 해상 봉쇄 작전으로 고립에 빠진 홍길동 집단은 1490년(성종 25년), 2개조로 나누어 전라도 남해안 광양현(현재의 순천 광양만)으로 상륙을 단행한다.

그러나 또다시 관군에 쫓겨 지리산근처 임실 평당원에서 한동안 종적을 감춘다.

1495년이 되자 충청도 조령, 문경새재를 주요 활동지로 삼고 홍주와 공주를 생활근거지로 삼아 활발하게 충청도 전역으로 세력을 넓혀나갔다.

특히 공주에서는 무성산 정상(614m)에 요새를 쌓고 관군에 대항하며 집단생활을 영위하였으며, 이 시기에는 염귀손 등 조정의 고위직 관리는 물론 지방의 수령, 아전, 유향소의 품관들까지 이들의 활동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1500년(연산군 6년) 10월 22일. 무오사화(1498년)로 인해 상당수의 사림파가 목숨을 잃거나 귀양을 가게되고 수년에 걸친 전국적인 가뭄으로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여 가족과 함께 함경도지방에 가서 살도록 하는 ‘대 사면령’을 내린다.

이로 인해 홍길동 집단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체포되는 형식으로 자수하였는데, 강상죄(고위관직을 사칭하여 관리를 능욕한 죄)로 충청도에서 서울로 압송, 의금부에 감금되었다.

다음 달인 1500년 11월, 홍길동집단(활빈당)은 ‘남해 삼천리 유배형’을 받는다.

 

 

 

 

소설속의 이상향 ‘율도국’과 ‘오키나와’

만민 평등의 이념으로 이상적인 공존사회를 꿈꾸던 홍길동은 그를 따르던 활빈당을 이끌고 유배지 조선 해역을 탈출하여 오키나와의 율도국을 향했다.

1500년 12월 5일, ‘하떼루마지마’(파조간도)에 정착한 홍길동은 그곳에서도 조선에서 처럼 민중의 소리를 대변하여 민권운동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민중의 제왕으로 추앙받는 역사적 인물로 기록되었다.

 

그 동안 홍길동의 역사적 실체가 왜곡되어 왔으나, 이제 홍길동은 소설 속의 허구적 인물에서 역사상 실존인물로, 도적에서 영웅으로 오키나와에 부활하여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그의 실천적 삶의 흔적을 머나먼 뱃길의 끝, 율도국의 역사 속에 고스란히 남기고있다.

 

오키나와에는 ‘민권운동의 선구자 홍길동’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민권 운동의 선구자로 기록된 ‘오야케아카하치(홍가와라)의 추모비’가 조선에서 뱃길로 3000리나 떨어진 머나먼 일본의 최남단 섬 오키나와에 왜 세워져 있는 것일까?

 

홍길동의 추모비가 오키나와에 세워지기 까지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1500년 12월 5일

 

 

하떼루마지마(파조간도)에 정착

 

 

 

1501년 ~ 1503년

이시가키지마(석원도) 오하마무라(대병촌) 후루수토지역에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인근의 지배권을 장악(죽부도, 서표도, 여나국도 등 )

1504년

미야코지마(궁고도)의 추장인 나카소네의 혹독한 압제와 과중한 세금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원주민을 규합하여 전쟁에서 승리, 상비옥산(上比屋山)에 조선 도래인들의 집단주거를 위해 초가집 군락을 조성

1505년 ~ 1508년

구메지마(久米島)에 상륙, 추장을 몰아내고 일본, 유구국, 중국을 상대로 중계무역을 하면서 동중국해의 해상권을 장악, 섬의 요처에 적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선양식의 성(城)을 구축

 

 

1510년

위도왕전(한문본 홍길동전)에서 그의 나이 70세에 사망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1543년

홍길동의 후예들이 해상 무역 활동중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충청도 해안에 상륙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들은 이미 조선인이 아니라 하여 중국(明)에 돌려보냄

1609년

일본 본토의 싸쓰마 번의 유구국 침공으로 오키나와 열도의 지배권이 일본에 넘어감.

 

이로 인해 홍길동이 세운 오키나와 열도의 해상왕국도 복속됨

1612년

홍길동의 후예들이 고국인 조선으로 돌아오기 위해 배를 타고 경상도 앞바다에 도착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일본군의 재침공으로 오인하여 한양(서울) 일대에 비상계엄령을 선포

 

 

홍가와라 추모비 (1953년 건립)

이시가키지마(석원도) 오하마무라 기원(崎原)공원에 세워져 있다

오야케아카하치(赤蜂)는 별명을 홍가와라(洪家王) 아카하치 라고도 칭하였다.

그는 군웅할거 시대에 두각을 나타내어 당시 오호하마촌(大兵村)을 근거지로 집단 생활을 하였으며 민중의 제왕으로 추앙받았다.

 

문명(文明) 18년(서기 1486년) 오키나와 본도 중산왕조의 상진왕은 사신을 야에야마 지역으로 파견하여 이리키야아마리 축제를 음사사교(陰邪邪敎)로 규정하여 금지하였는데 이 신앙탄압에 대하여 섬주민들은 격분하였다. 그리하여 오야케아카하치는 선두에 서서 중산정부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그는 중산에 대한 조공을 3년에 걸쳐 중단하여 중산정부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상진왕은 대리왕자를 대장으로 삼아 구미도의 신녀인 군남풍과 함께 정예부대 3,000여명과 병선 46척을 보내 반란 진압에 나섰다.

 

 

아카하치는 방전분투 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하고 저원(低原)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명응(明應) 9년(서기 1500년) 지금부터 454년 전의 일이다.

아카하치는 봉건제도에 대해 반항하여 자유민권을 주장하고 섬주민들을 위해 용감히 싸운 것이다. 싸움에서는 지고 말았으나 그의 정신과 행동은 길이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여기에 비석을 세움으로써 그의 위업을 기리는 바이다.

- 1953년 4월 6일 -

 

‘홍길동’과 ‘오야케아카하치’는 동일 인물?

먼저 오키나와 역사에 등장하는 의문의 인물 홍가와라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조선에서 떠난 홍길동이었다는 사실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홍길동은 하떼루마지마에 정착하면서 “홍가와라”(홍씨성을 가진 왕)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먼저 홍가와라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왕부군을 도와 홍가와라에 맞서 싸운 ‘장전대주'라는 인물의 행적을 통해 홍가와라의 모습을 추정해볼 수 있다.

그는 홍가와라와 마찬가지로 오키나와 최남단의 섬인 하떼루마지마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전해진다. 과연 장전대주와 홍가와라는 실제로 하떼루마지마에서 태어났을까?

 

홍가와라의 탄생기념비

야에야마의 두 영웅인 장전대주와 홍가와라의 탄생기념비가 일본 오끼나와의 최남단

하떼루마지마에 세워져 있다. 이는 두 영웅이 조선에서 건너간 도래인임을 상징적으로 암시해준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일본의 가데나 쇼도쿠씨가 기록이 빈약한 유구의 역사를 조명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을 깊이 연구하던 중, 유구와 조선과의 왕래가 빈번하던 15세기 말 조선에서 의적활동을 하다가 종적을 감춘 홍길동에게 관심을 갖게 된 까닭도, 1500년경 야에잔 군도에서 활약했던 홍가와라, 장전대주 같은 군웅들이 현지인이 아닌 도래인일 것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이같은 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또 다른 단서가 <조선왕조실록>에 들어 있는 제주도 출신 김비을개 일행의 『팔중산 군도 표류기』이다.

성종 10년에 씌어진 『팔중산 군도 표류기』는 제주도 출신 김비을개 일행의 조난과 생활을 기록한 것이다.

오키나와에는 지배자의 거주지, 적군의 침입을 막기위한 요새, 신에게 제사드리는 신성한 구역 등의 역할을 지닌 성들이 무수히 남아있다.

 

그런데 『성(城)』을 일본어로 음독하면 『조』가 되고 훈독하면 『시로』가 되는데, 유독 오키나와에서만 『구수쿠』라고 발음한다. 어떻게 해서 보통명사가 되었는지 학자들 마저도 유래를 규명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고 있다.

구수쿠에 얽힌 비밀은 조선에서 건너간 홍길동을 통하여 쉽게 풀어볼 수 있다. [홍(洪)]을 일본어로 음독하면 『고』 또는 『구』가 된다.

 

『수쿠』는 『소굴(巢窟)』의 일본식 발음으로 『집단 거주지』를 뜻한다. 결국 『구수쿠』는 『홍길동 집단의 거주지 또는 소굴』로서 오랜 시간에 걸쳐 보통명사로 정착되어 버린 것 이다.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지배자의 거주지였던 구수쿠와는 달리 일반 백성들이 사는 곳을 『촌(村)』이라 하는데 구메지마에서는 마을(里)을 『간절(間切)』이라 적고 『마시쓰』또는 『마세쓰』등으로 발음 한다. 우리의 『마을』을 뜻하는 마실과 음이 비슷하다.

 

지금도 충청·전라·경상도 지역의 시골 마을에서는 ‘마실'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어원 분석 외에도 문화적인 동질성의 측면과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오키나와에 전해진 우리나라 문화와 선진기술은 수없이 많다. 축성술(성 쌓는 기술)과 민속놀이(줄다리기, 태껸, 탈춤, 서낭당제, 용왕굿)등이 전수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으며 당시에는 오키나와에 의술을 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의술 역시 조선에서 전수되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홍길동 부인이 가져갔던 볍씨와 무궁화, 대나무등도 전래되었다.

 

홍길동 집단이 가져와 심었던 죽도부의 무궁화

최근 구지천성 발굴 과정에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그리고 조선의 돌(화강암)로 만든 선박용 닻이 발견되었으며, 숙종 때에 주조한 상평통보와 함께 국적 미상의 용봉통보(龍鳳通寶)가 발견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최근 학계에서는 홍길동 집단이 오키나와를 지배하던 기간(1500-1612)에 오키나와 현지에서 주조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홍길동 일대기를 기록한 문헌과 오키나와의 홍길동 유적

 

 

스크랩 원문 : 늡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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