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곡성인문학기행 답사기
글/사진 김경식
■ 곡성인문학기행의 의미
- 태안사, 조태일시문학관, 심청한옥마을을 중심으로
곡성군은 전라남도의 동북쪽에 위치한 고을이다. 동쪽은 구례군, 서쪽은 담양군, 화순군, 남쪽은 순천시, 북쪽은 전북의 남원시와 순창군에 인접하고 있다. 지리산 자락에서 이어지는 구릉성 산지들이 산재하고 있으며, 섬진강이 곡성군의 동북부를 관통하여 비옥한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압록 인근에서 섬진강과 보성강이 합류하여 구례로 흘러간다. 보성강의 다른 이름은 대황강이며, 곡성군의 지명은 신라 경덕왕 때에 처음 불리어 졌으니 그 지명만큼 아득한 역사를 지닌 고을이다.
태안사 가는 길
곡성군 출신의 인물 중에 현대 시인으로 조태일 시인이 있다.
조태일 시인은 전남 곡성 태안사(泰安寺)에서 1941년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랜 역사를 지닌 태안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란 조태일은 한국전쟁 직전에 이곳을 떠나 광주로 이사한다. 섬진강의 지류인 보성강과 봉두산의 정기를 받고 자란 그가 다시 태안사를 찾았을 때는 일주문과 능파각을 제외하고 모든 전각이 불에 타고 없었다.
그 상처를 삭이며 시인이 되었으며, 그곳에 그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는 문학관이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호남의 강들은 대부분 수탈 물자를 나르는 통로였다.
섬진강과 보성강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무와 양곡을 수탈당한 일제강점기 곡성의 농민들의 삶은 비참했다. 해방과 전쟁의 격동과 삶과 죽음의 현장에서 조태일은 동학농민혁명과 한 많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생각했다. 국토의 사랑이 더욱 깊어졌다. 우리나라 국토속에 스며 있는 피와 땀과 눈물의 자국들은 그에게 저항 정신을 심어 주었다.
문학에 남다른 재주를 보여주었기에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문단에 등단한 그가 서른도 되기 전에 한 일은 시 전문 잡지를 창간한 일이다. 그 잡지는 김지하, 김준태, 양성우 같은 당시 저항시인들을 발굴하고 폐간된 <시인>지다.
청년 시기에 그의 삶은 예리한 칼처럼 날카로웠지만 마음만은 따스하고 품이 넓었다. 태안사로 가는 길목을 지나 올라가다 보면 우측에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소나무, 단풍나무, 참나무로 이루러진 숲길 약 3km는 우측에 개울소리가 들리는 운치있고, 아름다운 흙길을 걷는다.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동리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태안사는 통일신라시대인 742년(경덕왕1년)에 창건된 사찰이다.
<심청한옥마을>은 곡성읍에서 섬진강변 길 국도 17호선을 따라 10㎞쯤 달려가다가 우측 산길로 올라가면 나타나는 마을이다. 무릉도원 같은 한옥 마을에서 효의 근원을 생각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심청 이야기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 원홍장의 고향이 전남 곡성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이곳을 <심청한옥마을>로 조성하였습니다. 아름답게 조성된 마을에는 심청이가 몸을 던진 인당수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심봉사의 조형물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 태안사
태안사는 742년(경덕왕1년)에 창건되었던 사찰로 고려 초기에 광자대사 윤다(允多)가 중창하였다. 이 무렵에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중심사찰로 부흥한다.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지만 당시에는 화엄사가 태안사의 말사였을 정도로 그 기세가 당당했던 사찰이었다.
대안사라고도 불렸던 태안사는 동리산파를 형성시킨 혜철국사의 업적은 대단했다. 이곳에 윤다(864~945)가 132칸의 당우를 짓고 대사찰을 이룩하니 호남 제일 사찰이 될 수 있었다. 고려 초에는 송광사, 화엄사 등 현재 전남의 대부분의 사찰이 태안사의 말사였다.
允多(윤다)는 신라의 승려로 자는 법신(法信)으로 8세에 집을 떠나 승려가 되었다. 시호는 광자(廣慈)이고, 태안사에서 82세 입적하였다. 태안사는 조선시대에 효령대군(1396∼1486)의 지극한 관심으로 조정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1737년(영조13년)에 능파각(凌波閣)을 건축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대웅전을 비롯한
15채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태안사는 이후에 다시 중창하여 대웅전을 비롯한 천불보전, 만세루(萬歲樓), 해회당(海會堂), 선원, 능파각, 일주문 등이 있다. 해회당은 네모형태로 연결된 매우 큰 건축물이며, 대웅전은 1969년에 복원되었다. 태안사에는 4개의 보물이 있다. 적인선사조륜청정탑, 광자대사탑, 광자대사비, 대바라등이다. <적인선사조륜청정탑>은 혜철선사의 부도로 보물 제273호이다. 광자대사탑은 윤다의 부도로 보물 제275호다.
태안사
<대바라>는 효령대군이 시주하여 제작하였으며 둘레 3m 규모로 우리나라에서 최대의 규모다. 천순명동종은 1465년(세조11년)에서 1475년(성종6년) 제작된 종으로 공예 공법이 정교하다.
태안사는 조선시대에 효령대군이 머물렀던 사찰이며, 1925년 최남선은 태안사를 탐방하며 “신라의 유명사찰로 해동에서 선종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라고 말했다. 조태일문학관에서 태안사까지 개울을 따라 올라가는 숲길이 매우 아름답다.
한나절 머물러도 찾아드는 관광객이 그리 많지 않다. 그만큼 오붓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태안사는 신라 말 중국 유학파 스님이 전파한 선종, 참선 중심의 수행도량. 전국 9곳의 선방 사찰 가운데 하나로 '구산선문(九'으로 불린다. 이런 연유로 태안사는 1200년 동안 선방 수좌의 수행터가 됐다. 고려 초까지는 송광사와 화엄사를 말사로 두었다고 한다. 지금은 거꾸로 화엄사의 말사가 됐다.
선종구산(禪宗九山)은 신라에서 고려 태조 때 왕성했던 불교 선종의 구산문(九山門)을 지칭한다.
중국에서 유행했던 달마의 선법을 계승하여 선종의 종풍(宗風)을 일으킨 아홉 산문을 지칭하며, 가지산문, 동리산문, 봉림산문, 사굴산문, 사자산문, 성주산문, 수미산문, 실상산문, 희양산문이다.
9산문은 선적종(禪寂宗)에 속하며, 의천(義天)이 창시한 선종 천태종(天台宗)과 대립하다가 조계종(曹溪宗)으로 개칭된다.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하기 전에 체징(體澄 804-890)은 837년에 당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825년 설악산에서 도의(道義)의 법을 배운 제자였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체징은 840년에 장흥의 가지산(迦智山)에서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한다. 이곳에서 도의의 종풍을 일으켜 가지산문이 최초로 성립된다.
실상산문은 830년에 홍척이 당나라의 지장( 735-814)에게 수학하고, 지리산 실상사(實相寺)에서 실상산문을 개회했다.
희양산문은 도헌(824~882)스님이 준범과 혜은의 법맥을 전수하고, 문경의 봉암사에서 희양산문을 열었다.봉림산문은 현욱(玄昱 787~868)스님과 심희에 의해 창원에 있는 봉림사에서 봉림산문을 열었다.
동리산문은 혜철(785~861)스님이 곡성의 태안사에서 동리산문을 열었다.
성주산문은 무염(800~888)스님이 보령의 성주사에서 성주산문을 열었다.
사자산문은 도윤(798~868)스님이 영월의 흥령사에서 사자산문을 개창했다.
사굴산문은 범일(810~889)스님이 강릉의 굴산사에서 사굴산문이 열었다.
수미산문은 이엄(869~936)이 고려초에 해주의 광조사에서 수미산문이 열렸다.
신라 35대 경덕왕(재위742∼765) 때까지 부흥했던 신라의 불교는 침체기로 접어든다. 이 무렵에 선불교가 중국에서 유입된다.
선풍은 중국에서 독특한 선종으로 성립되었으며, 신라의 승려들이 선법을 배웠다. 신라가 받아들일 당시에 첫 전법자는 도의스님이다. 그는 784년 선덕왕 5년에 당에 유학을 떠나서 지장에게 법을 얻고 39년 만에 귀국한다. 831년 현덕왕 23년에 신라로 돌아와 선법을 일으키고자 노력했지만 무산된다. 악마의 설이라고 신라에서 거부했기 때문이다. 도의는 실망하고 설악산에 은거하며 선법을 제자 염거에게 전하한다. 염거는 체징(804∼880)에게 법을 전수하여 9산선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수미산문을 끝으로 고려 전기에 선종 9산이 완성되었다.
고려 태조는 불교를 종파에 차별을 두지는 않았으며, 선승에게 귀의하면서, 왕사와 국사제도를 시행했다. 958년에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관리등용을 하면서 승과를 신설하기도 했다. 고려시대는 불교 국가 답게 왕자들이 승려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의천 대각국사(1055∼1101)은 문종의 아들로 11세에 출가하여 영통사의 왕사 난원스님에게 화엄을 수학했다. 송나라 에도 유학하고 천태학을 전수받아 귀국 후에는 천태교관을 설파한다. 교장도감을 설치하기도 하면서 고려의 불교서책을 수집하여 속장경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렇듯이 고려는 초기부터 선이 왕성했지만 천태교학이 유입된 중기부터 선종은 부진하게 된다.
이 무렵에 고승 지눌(1158∼1210)은 조계선종의 발전에 토대를 확보한다. 그의 노력으로 선승이 배출되면서 후기의 고려불교는 선종으로 자리를 잡는다. 지눌은 9산선문의 교리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한국 불교의 정통인 조계종을 확립한다.
대처승(帶妻僧)은 남자 승려 중에서 혼인하여 아내와 자식을 둔 승려를 부르는 용어다.
한국 불교에서는 결혼한 스님을 허용하는 대처승의 전통이 없었다. 수행에 정진하는 이판승(理判僧)에 반대되는 승려를 사판승(事判僧)이라 부른데서 시작되었다. 사판승은 당시에 사찰의 살림을 관장하였기 때문이다.
결혼한 승려는 일제 강점기에 대처승이 일반적이었던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확산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불교계에 결혼한 대처승이 결혼하지 않은 비구승보다 더 많았다.
1954년 5월 20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처승은 일본 제국의 잔재이므로 모두 승복을 벗어야 한다고 강경하게 불교정화를 역설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처승 척결의지가 담긴 담화문으로 대처승과 비구승 간의 긴 분쟁이 발생한다.
대처승과 비구승의 분쟁은 단식과 시위를 포함한 소송 등으로 세상을 떠들 석하게 만들었다. 불교의 대립과 갈등은 한국 근대 불교의 성립의 과정에 매우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대처승을 허용하는 파벌로는 한국불교태고종이 되었고, 대처승을 허용하지 않는 파벌은 대한불교조계종을 구성하면서 일단락 되었다. 태고종은 1954년의 이승만 담화문으로 시작된 불교 사태를 불교계의 법난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조계종은 일제강점기의 왜색 척결을 위한 불교계 정화로 인식하는 시각 차이를 보이고 있다. 태고종 역시 대처승을 허용하지만 비구승이 없는 것은 아니다.
■ 조태일 시인의 삶과 문학
조태일 시인은 전남 곡성 출신으로 시 전문잡지 <시인> 주간과 한국작가회의 상임이사를 역임한 진보적인 작가였다. 1970년대 참여시의 한복판에서 쓴 연작시 <식칼론>은 독재정권의 폭압정치에서 어떻게 시인이 살아야 하는 지표와 역사의식을 표현했다. 식칼을 자기 자신을 자극하고 확인하는 도구로 보았기 때문이다. 1975년 발간된 시집 <국토>에는 남북 분단의 현실과 허구를 고발하고, 비판하면서 성실하고 건강한 민중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
1941년 조태일 시인은 부친 조봉호 스님과 모친 신정임의 아들로 태안사에서 태어났다. 스님이 결혼을 한다고 하는 것이 지금에야 놀라운 일이지만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대처승이면서 태안사의 주지였던 그의 부친은 16세 연하인 어머니와의 사이에 7남매를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태어나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에 발생한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은 더 이상 태안사에서 살 수 없도록 만든다.
조태일문학관 내부와 외관
연보를 확인하면, 삶이 순탄하지 않았다는 것과 저항문학의 열정을 느끼게 한다.
1941년 9월 30일 태안사에서 태어나서 1947년 동계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948년 여순사건으로 2학년 때 광주광역시로 피난한다.
1950년 초등학교4학년 때 한국전쟁으로 수창초등학교, 극락초등학교를 오고가면서 공부한 후에 1957년 초등학교를 졸업한다. 한국전쟁으로 3년을 휴학하였다. 당시의 모습이 한편의 시로 남아 있다.
날이 샐 무렵
어둠 더불어 빨치산들이 산으로 오른 뒤,
골짜기 대밭에서
죽순 서로 키재기하는 걸 보고
나는 무럭무럭 자랐다.
어린 짐승새끼
어미 잃고 집 잃어 밤새 울어쌀 때
동리산 품 같은 어머니 가슴 파고들며
속으로 꺼이꺼이 울며
나도 밤을 샜다.
홍시감 익어갈 때,
홍사초롱 수천 개씩 가지 휘어져라 매달릴 때,
아랫집 남순이랑 얼굴 붉히며
왼종일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그 빨치산들 다 어디 갔나
그 어린 짐승 자라서 다 어디 갔나
그 죽순 자라서 어디 갔나
그 홍시 다 어디 갔나
그 남순이 어디 갔나.
-조태일 시 <동리산>에서 전문
1959년 광주서중학교, 1962년 광주고등학교 졸업하고, 경희대국문과에 입학한다.
1964년 경희대학교 2년 재학 때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고 이듬해인 1965년 제1시집 <아침선박>간행할 정도로 문학의 열정이 대단했다. 제1시집 제목이 되기도 한 <아침선박>은 그해 신춘문예 당선작의 작품명이다.
아침 바다는 예지에 번뜩이는 눈을 뜨고
끈기의 서쪽을 달리면서 시대에 지치지 않고,
처절했던 동반의 때에
쓰러진 시간들을 하나씩 깨워 일으키고
저 넘쳐나는 지평의 햇살을 보면
청명한 날에 잠깨는 출항.
철저한 자유를 부르면서 흐느끼는 심연,
그 움직이는 고요, 가파른 정오의 한 때를.
이해만이 남고,
오직 진행이 있을 때 당황하던 파도를,
식욕을 거느린 별들이 주워 들고 멀리 떠났다.
험한 해협엔,
그러나 의지를 철썩이는 잔잔한 파도의 무료.
밤세워 해변을 지키던 새의 녹은 남고.
순수의 깊이에서 일어서는 서적들의 눈부신 항변.
획득의 눈이 내리고 있다. 학동들의 꿈길에서 얻어진,
멀고 먼 나라의 가까운 은혜가 흩날리고 있다.
아침 인사를 받으면서 물러 않은 산.
아침 인사를 받으면서, 오
후가 되더라도 피로하지 않을
하이얗게 움직이는 선박이 있다.
우리 젊은, 우울한 선장에겐 무엇을 바칠까?
우리의 모국어를,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진 나침반을,
우리의 눈에 맞는 색깔의,
저 지평을 향해 펄럭일 기를 바쳐야 한다.
조태일 시인의 시 <아침 선박>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부분
1966년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R.O.T.C 4기)하여 제대를 하였지만 출세의 길을 포기한다. 대신에 그는 1969~1970년 월간 시 전문지 <詩人>을 창간한다.
김지하 시인의 시 <황톳길>외 4편을 받아 게재함으로 등단의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김지하 시인의 시 <황톳길> 부분
1970년 시인사에서 제 2시집 <식칼론>간행한다. 1973년 창제인쇄공사에 취직하고, 덕성여대 출강하였지만 보수적인 문단생활를 거부하며 1974년 11월 18일에 진보적인 문인들과 함께〈자유실천문인협의회〉창립한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 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 조태일 시인의 시 <국토>
1975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제 3시집 국토(國士) 출간했지만 긴급조치9호로 판매금지 당하고 2년 후에는 설상가상으로 1977년 양성우 시집 <겨울공화국>발간 사건으로 고은시인과 함께 구속 되는 시련을 겪는다.
당시 양성우 시인의 시 <겨울공화국>은 지금 읽어도 가슴이 서늘하다.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쉬는 것을 보았는가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가라앉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
불끈 불끈 주먹을 쥐고
으드득 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 껄껄껄
웃어대거나 웃다가 새하얗게 까무러쳐서
누군가의 발 밑에 까무러 쳐서
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가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 대는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을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
삼천리는 여전히 비단 같은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날마다 우리들은 모른체하고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기울이며
뻐 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
-양성우 시 <겨울공화국> 일부
1979년 4월, 반정부 발언 때문에 투옥되었다가 한 달 만에 석방되어서도 그는 문학을 잊지 않고 이듬해 시론집<고여 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를 발행하였지만 판매금지를 당했다.
1980년 7월에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임시총회와 관련하여 계엄법과 포고령 위반으로 신경림 시인과 구중서 평론가 등과 함께 구속되었다가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의 집행유예 3년이 확정되었다.
1982년 항일민족시선 <아아 내나라>간행하여 제1회 신동엽 창작기금을 받았으며, 1983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제 4시집 <가거도>를 간행했다.
<가거도>는 울림이 있는 시다.
너무 멀고 험해서 오히려 바다같지 않는
거기 있는지조차 없는지조차 모르던 섬.
쓸 만한 인물들을 역정내며 유배 보내기 즐겼던
그때 높으신 분들도 이곳까지는 차마 생각 못했던,
그러나 우리 한민족 무지렁이들은 가고, 보이니까 가고,
보이니까 또 가서 마침내 살 만한 곳이라고 파도로 성 쌓아
대대로 지켜오며 후박나무 그늘 아래서
하느님 부처님 공자님 당할아버지까지 한식구로 한데 어우러져
라는 듯이 살아오는 땅.
비바람 불면 자고 비바람 자면 일어나 파도 밀치며
바다 밀치며 한스런 노랫가락 부른다.
낯선 사람 찾아오면 죄 많은 사람 찾아오면
태풍 세실을 불러다가 겁도 주고 달래 보고 묶어 보고
풀어 주는 바람 바람 바람섬, 파도 파도 파도섬.
길가는 나그네여!
사월혁명의 선봉이 되어 반민주 반독재와 불의에 항거하여 싸우다가
십구일 밤 무참히 떨어진 십구세의 대한의 꽃봉오리가 여기 누워 있다고 전해다오*
자식 길러 가르치고 배운 자식 뭍으로 보내 나라 걱정,
나라 위해 목숨도 걸 줄 아는 멋있는 사람들이 사는 살 만한 땅.
-조태일 시인의 시 <가거도> 부분
가거도는 전남 신안군 흑산면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최서남단의 섬이다. 다른 지명으로 소흑산도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 지명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붙인 이름이다. 가거도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거도>라고 부르고 있으며, 소흑산도란 말을 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1960년 4·19혁명 당시에 시위하다가 세상을 떠난 가거도 출신으로 서라벌예술고등학교에 재학중 김부연 학생의 기념비가 가거도에 세워졌다.
이 시는 가거도의 역사성과 지정학적인 위치가 포함되고 김부연 군의 죽음 등이 어우러져 파도가 다가오는 듯 한 물결의 일렁임을 느끼게 한다.
1984년 김현승 시인의 시를 연구하여 경희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하고 경희대와 단국대에 강사로 출강하면서 이듬해 시선집 <연가>를 발간한다.
너, 들끓는 쬐그만 가슴을
흐트리지 않고 용케도
여기까지 달려왔구나.
무슨 소문 듣고파서
다투며 밀려오는 파도에
큰 눈을 맡기고 설레이는 마음 맡기고
기대어 있는 너의 곁에까지
숨 할딱이며 나 또한
용케도 따라왔구나.
지평선 끝에 타오르는
이 시대의 그리움들은 파도치고,
저녁놀로 타오르고.
별들이 하나둘 떠오를 때까지
순한 서로의 눈들은 불꽃이 되어
포개지고 얼싸안고 함께 나뒹굴 때
그렇게 그렇게
사슴의 눈에 사슴의 눈이
어른거릴 때
우리는 입을 열지 않은 채
두고 온 온갖 소문들을
파도에게 별빛에게 퍼뜨렸다.
거듭 사슴의 눈에
사슴의 눈이 포개질 때,
우리의 눈이 어른거릴 때,
파도는 소문이 되어
더 큰 바다를 향해 떠나고
별들도 소문이 되어
하늘에 바다에 웅성거렸다.
-조태일 시<연가> 전문
1987년에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의 토대가 마련되는 해였다. 그해 6∙10항쟁은
민주주의 성립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시청에 모였던 100만명의 외침을 회상한다.
제 5시집 <자유가 시인더러>는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시집이다.
자유가 시인더러 하는 말 좀 들어보게.
시인이 자유더러 하는 말 좀 들어보게.
서로 먼저 말하겠다고 싸우는 꼴 좀 바라보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 한번 들어보게.
자유가 시인더러
시인이 자유더러
멱살을 잡고 무슨 말인가를 하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네.
우리 같은 촌놈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네.
자유가 시인더러
시인이 자유더러
따귀를 올려치면서 탁탁탁 치면서
하는 소리 들어보게나.
아아, 저게 상징이구나 은유로구나
상상력이구나
아픔만 낳는 詩法(시법)이구나.
오늘 하루도 평탄치 못하겠구먼.
일찍 일어나 세수부터 정갈하게 하고
구두끈도 단단히 동여매야겠구먼.
- 조태일 시 <자유가 시인더러> 전문
1988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단체명이 바뀌면서 초대 상임이사직을 맡다가 이듬해 광주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된다.
이 무렵 그는 태안사를 찾았던 슬픈 감회를 시로 승화시켰다.
다음의 시는 당시의 회상적인 감정을 말해준다.
나라가 위태로웠던 칠십년대 말쯤
아내와 어리디어린 세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 떠난 지 삼십년 만에
내가 태어났던 태안사를 찾았다.
여름 빗속에서 칭얼대는
아이들을 걸리며 혹은 업으며
태안사를 찾았을 때
눈물이 피잉 돌았다.
그리고 두번째로
임신년 겨울,
팔십을 바라보는 어머님을 모시고
아내와 이젠 왠 만큼 자란 아이들을 데리고
터벅터벅 태안사를 찾았을 때
백골이 진토 된
증조부와 조부와 아버님이
청화 큰스님이랑 함께
껄껄껄 웃으시며
우리들을 맞았다.
- 조태일 시 <태안사 가는 길 1> 전문
1991년 봄에는 경희대 대학원에서 “김현승 시 정신 연구”로 문학 박사 학위를 창작과비평사에서 제 6시집 <산속에서 꽃속에서>를 출간하면서 이 시집으로 제1회 평운문학상을 수상한다. 편운문학상은 조병화 시인을 문학을 선향하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시집 <산속에서 꽃속에서>에 관해 문학평론가 김우창과 시인 이시영은 다음과 같은 단평을 시집에 써 놓았다.
조태일의 시가 되풀이하여 다짐하고자 하는 것은 원초적 생명력을 그대로 집중해서 폭발시키는 의지다. 이것이 그의 시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연과 일기의 비유를 쓰게 하는 이유다. 그러나 그가 다짐하는 의지는 막혀 있는 현실생활에 대결하는 힘으로써 환기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우창
조태일 시인은 바위 같은 사람이다.
그 바위는 묵직하고 고집스러워 인간의 사소한 일에는 도대체 꿈쩍하지를 않는다. 그러나 그 바위가 한번 입을 열면 한없이 다감하고 섬세할 줄 알며, 때로는 불같은 뜨거운 언어로 우리의 가슴을 지져놓는다.
-시인 이시영
1992년에는 제35회 전라남도 문화상 문학 부문을 수상하고 2년 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과 광주대학교 예술대학 초대 학장에 취임한다. 나남출판사에서 시론집 <시 창작을 위한 시론>과 <시인은 밤에도 눈을 감지 못한다>출간했다.
1995년에는 창작과비평사에서 제 7시집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를 간행하였는데, 이 시집으로 제10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한다.
풀꽃은 꺽이지 않는다
바람에 잠시 흔들릴뿐
찰나는 찰나로 가는것
긴 호흡 순한 몸짓으로
길 떠나 떠돌아도
안개는 안개일 뿐
역정이 묻어나는
일상의 먼 뒤안길 마저도
새벽녁 꿈결로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척박한 가슴, 가슴들이 그대들,
연민의 강을 건너 풋사랑
설레임마저 잊혀져 가는
희미한 옛사랑의 추억으로
술한잔의 그리움으로
잔인하게 노래하지 말자
풀꽃은 꺽이지 않는다
-조태일 시< 풀꽃은 꺽이지 않는다>
1998년에는 태학사에서 <김현승 시정신 연구』출간하고, 1999년에는 나남출판사에서 <알기 쉬운 시 창작 강의>간행한다.
창작과비평사에서 제8시집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간행하였지만 이 시집이 그의 마지막 시집이 되고 말았다. 〈섬진강여름문학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어 섬진강 주변을 문학의 이미지로 형상화 하려는 것도 무산되었다.
그해 9월7일 서울아산병원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정부에서는 문화 훈장을 추서하였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시집의 제목이 된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를 읽으면 가슴이 뭉클하다. 이 시집에서 <어머니를 찾아서>라는 시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어머니를 찾는다.
이승의
진달래꽃
한묶음 꺾어서
저승 앞에 놓았다.
어머님
편안하시죠?
오냐, 오냐,
편안타, 편안타
- 조태일 시인의 시 <어머니를 찾아서>
평소 조태일 시인과 친하게 지냈던 조병화 시인은 다음과 같은 조시를 쓰기도 했다. 그런 조병화 시인도 4년이 지난 2003년에 세상을 떠났다.
태일의 죽음이 이리도 빠르게 오다니 아끼고 촉망받던 시인들이 하나 둘 먼저 세상을 하직하누나 이것이 될 말인가 늙으면 누구나 외로워지는 것이지만 내게 태일의 죽음처럼 외로운 것이 또 있으랴 어찌 매정하게 그리 말없이 빨리 떠나는가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라는 최근의 시집을 읽으면서 얼마나 기뻐서 찬사를 보냈던가 불쌍한 것들에게 사랑으로 애정으로 그리 눈물어린 시들을 많이 쓰더니 살아 있는 작은 생명들에게 그리 사랑어린 많은 시를 남기더니 이것이 약한 것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인사였던가 아,태일아 너와 나, 우리는 너무나 격동하는 조국을 살았다 이제 무슨 말이 있으랴 네 앞에 그저 묵묵히 명복을 빈다.
-조병화 시 <조태일의 죽음>
2001년 광주 <너릿재시비공원>에 조태일 시인의 시 ‘풀씨’를 새긴 시비가 건립되었다.
청년시절에는 조태일 시인의 <국토>를 읽으면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시 <풀씨>가 가슴에 와 닿는다.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추는 곳
그곳이 나의 고향,
그곳에 묻히리.
햇볕 하염없이 뛰노는 언덕배기면 어떻고
소나기 쏜살같이 꽂히는 시냇가면 어떠리.
온갖 짐승 제멋에 뛰노는 산속이면 어떻고
노오란 미꾸라지 꾸물대는 진흙밭이면 어떠리.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출 곳 없어 언제까지나 떠다니는 길목,
그곳이면 어떠리.
그곳이 나의 고향,
그곳에 묻히리.
- 조태일 시 <풀씨> 전문
조태일 시인이 세상을 떠나고 4년 후인 2003년 9월 7일에 전남 곡성군 태안사에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이 건립 개관한다. 조태일시기념관은 태안사에서 대지를 기부하고 곡성군, 문체부 등의 예산 11억4000만원을 지원 받아 준공되었다. 대지 1,700평에 연건평 170평의 목조식 건축물이며, 외관과 의미가 남달라 건축대상을 받기도 했다. 조태일 시인의 시집은 물론 유품과 함께 육필원고를 포함한 자료들이 많다. 기념관 앞 언덕에는 작가들의 창작실을 갖춘 별관이 자리잡고 있다.조태일시기념관을 설계한 이윤하 시인은 건축사무소 노둣돌의 대표이다. 그는 기념관을 “조국의 국토에서 상승하는 역동을 표출하고, 우리의 대지에 뿌리받고 살았던 조태일 시인의 시를 표현”하려고 했다. 다른 의미로는 조태일 시인이 갈망하며 그리워했던 민중성을 향한 강인한 삶의 의지가 살아오는 공간을 조성하려고 했다.
결론적으로 조태일 시인은 매우 남성적인 성향을 지녔다. 체구도 크고 얼굴의 선도 굵어서 믿음이 가는 지사형의 성격으로 군사독재 정권이었던 70년대와 80년대를 버티며 뚝심으로 지조를 지킨 시인이다.
그의 대표시 <국토>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자가 절망을 딛고 민중을 억압하고, 기득권적인 세상을 향해서는 저항하기를 갈망하며, 헐벗고 굶주리고 억울한 자들에 대해서는 희망과 연대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현실인식의 바탕으로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노래하고 떠났다.
■ 심청한옥마을과 근원설화
심청한옥마을은 섬진강변의 산 중턱의 송정마을터에 자리잡고 있는 한옥마을이다.
심청이야기를 주제로 한옥마을이 조성된 것은
관음사 사적기에 나온 원홍장의 설화를 토대로 한다. 물론 고증을 거쳐 조성된 것이다.
심봉사의 조각상과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기 전에 뱃머리에 올라서 응시하는 모습은 슬픔을 동반한다. 심청이 용궁에서 올라오는 모습도 작은 연못에 연출했다.
초가집과 기와집이 경사지에 어울린 모습은 소담스럽고 정겹다. 하룻밤 숙박을 하면서 지내고 싶은 곳이다. 다행스럽게 이곳은 다도체험관도 운영하고 숙박도 가능하다.
급경사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기와집 송정가의 모습과 돌담길은 그 운치가 예사롭지 않다. 송정가에서 효녀 심청을 생각하면서 연꽃차를 마시며 심청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의미 있는 기행을 제공한다.
심청 이야기는 우리나라 효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자 미상의 소설<심청전>로 쓰여져 아직도 읽혀진다. 소설 속의 심청은 1,700년전의 이 고장 출신 원홍장이다.
원홍장 설화가 역사적으로 조명받아 심청마을을 조성하기 까지는 곡성군에 위치한 관음사의 사적기에 원홍장이라는 인물이 행적이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록이 없었다면 심청마을을 조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 기록은 이렇듯 후세에 큰 의미적인 일로 승화 될 수 있다.
심청전은 설화소설이다. 그래서 출처를 찾기 위한 노력이 과거에 많이 있었다. 1930년 10월에 발행된 <불교> 제76호에 게재된 만해 한용운 선생의 글이 있다. 만해 한용운(韓龍雲)은 “하늘이 보내준 심청(沈淸)은 소저(小姐)는 원(元)봉사의 딸 홍장(洪莊)이다” 라고 하여 관음사연기설화가 그 출처임을 주장하고 있다.
김태준(金台俊)은 1933년에 출간한 <조선소설사>에서 심청의 근원설화를 다른 이설들과 함께 기록하면서 곡성군의 옥과현 성덕산〈관음사연기설화>를 그 출처로 쓰고 있다.
1990년에 관음사 주지스님이었던 광민스님이<심청전의 원형 관음사 연기설화>(1994)를 간행하여 그 내용을 체계적으로 충족하였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은 <성덕산 관음사>의 관음사연기설화에 관해 (불교춘추) 1997년 1월호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심청전 근원설화 연구자는 김태준(1933), 장덕순(1963), 김기동(1963), 황패강(1966), 김태곤(1967), 신동일(1968), 정하영(1983) 등이다.
심청전의 종류는 목판본과 구활자본, 필사본 등 80여 종으로 다양하다. 활판본은 대부분이 9~10판까지 책으로 출판했다. 많은 독자층이 있었음을 반증한다.
<심청전>은 대부분 한글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지식인보다는 평민출신의 불교신자들이 많이 읽었을 것이다.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판소리를 통해서 계속 전파된다.
<심청전>은 효행설화, 재생설화, 개안설화, 인신공희설화 등을 담았으며 유교와 도교, 불교, 민속신앙 등이 포함되어 있다.
<심청전>이 효라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지만 평민으로 전락한 심봉사의 가난을 묘사하고 있다. 현대판 인신매매로 인한 슬픔을 동반한다. 조선후기의 신분상승과 부귀영화를 열망하던 백성들의 대리만족을 충족하는 내용들이 심청전이 장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심청전의 주요 활판본은 다음과 같다.
- 광동서국 1912~1914
- 신문관본 1913
- 광동서국, 박문서관) 1915~1922
- 박문서관본 1916
- 대창서간본 1920
- 회동서관본 1925
- 태화서관본 1928
- 시문당서점 1928
- 대성서림본 1928
- 세창서관보 1934
- 영화출판사본 19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