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 章 華山의 滅亡
등룡 12식(騰龍十二式).
난피풍검법(亂皮風劍法).
중원사대검파(中原四大劍派).
이것이 수백 년간을 빛나는 이름으로 군림하여온 힘의 근원이다.
누구나 이쯤 되면 한 문파의 이름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대 화산파(華山派)!
화산파는 면면히 이어내려 오는 무림의 전통속에 검파로 군림하고 있었다.
화산 기슭의 천여 평 대지 위에 우뚝 선 장원.
문하생은 많지 않아도 언제나 200여 명을 상회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화산제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검을 갈고 닦아 출도하기를 손꼽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봉(封)>
지금 화산파의 문루에는 그 같은 큼직한 글씨가 담긴 깃발이 꽂혀 있다.
그것은 봉문의 표식이었다.
이 봉기가 내려지지 않는 한 화산제자는 강호출도를 할 수 없었다.
종(鐘).
거종이었다.
다섯 사람 이상이 손을 둘러야 간신히 맞잡을 수 있는 거대한 청동으로 만든 종이다.
그 종은 한번 울리면 인근 수백 리 까지 울음을 전한다.
그러나 종이 울리지 않은지 꽤나 오래인 듯...
종루로 오르는 계단은 막혀 있었다.
한 사람.
그는 거종 앞에 서 있었다.
군자검(君子劍) 악천상(岳天相).
그는 제 18대 화산파의 장문인이다.
그는 지금 우울한 표정으로 종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언제나 봉파(封破)의 힘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건가...?"
당대 화산파의 장문인으로서 그는 봉문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구파일방이 봉문한 것은 스스로의 결의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삼패천의 막강한 힘을 막을 수 없기에 내려진 조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언제 봉파를 할지 기약이 없었다.
악천상은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때였다.
우연히 문루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그는 흠칫했다.
사나이.
처음에는 하나의 점이었다가 눈 깜빡할 사이에 거대한 체구를 가진 흑포인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거짓말처럼 가공한 속도로 문루에 떨어진 것이다.
(...?)
악천상은 그가 어떻게 화산파의 문루까지 올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비록 봉문하고 있기는 했어도 화산은 아무나 함부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곳까지 오르기에는 최소한 십여 곳의 관문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굉음을 들었다.
"아... 아니...?"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흑포의 철탑 같은 사나이가 손을 한 번 들어 올린 순간 거대한 문루가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 것이었다.
"크핫핫핫핫핫...!"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광소가 화산의 장원을 뒤흔들었다.
잠자듯 정적에 싸여 있던 화산파가 일제히 진동했다.
마치 고요한 연못의 수면에 돌이 던져진 듯한 파문이 일어났다.
여기저기서 우르르 화산 제자들이 뛰어 나왔다.
종루에서 보면 화산의 전경이 손바닥처럼 들여다보인다.
악천상은 눈을 크게 뜨고 눈 아래 벌어지고 있는 믿어지지 않는 정경을 바 라보고 있었다.
물결이었다.
화산제자들이 물결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유영을 하듯 지나가는 흑포거인은 유유히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양손을 가볍게 저을 때마다 수십 명의 제자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피떡이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마치 잡초를 헤치며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으으... 저럴 수가... 이... 인간도 아니다..."
악천상은 두 눈을 찢어질 듯이 부릅떴다.
그는 눈앞의 현실이 현실로 믿어지지 않고 있었다.
천지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저자는 누군인가?
지옥에서 온 염라대왕이란 말인가?
제자들이 검진(劍陳)을 펼치며 그를 가로막는 광경이 보였다.
그러나 그도 역시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나이가 손을 흔들면 검진은 여지없이 박살나고 있었다.
벌써 눈 깜빡할 사이에 연무장에는 백 명도 넘는 시신이 즐비하게 누워 있 었다.
"종사이시여..."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하나의 태산 같은 인영이 그의 앞에 떨어져 있었다.
"귀... 귀하는 누구이길래 본파에..."
악천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사나이는 철탑이었다.
그는 철탑 아래 짓눌리는 개미 한 마리에 불과했다.
"너는 물어 볼 자격도, 들을 자격도 없다. 그러나 말해주지, 짐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제왕이시다!"
그 뿐이었다.
철탑거인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악천상은 검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미처 이어지기도 전에 그의 몸은 주르르 항거할 수 없는 엄청난 흡인력에 의해 사나이를 향해 딸려갔다.
흑포거인은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헉!"
악천상의 두 눈이 튀어 나왔다.
이런 일이...
이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다니...
우득... 뚝!
목이 꺾어졌다.
사나이의 손아귀 속에서 악천상의 목은 힘없이 꺾여버린 것이다.
"으핫핫핫핫...!"
희미해져 가는 악천상의 의식 저편으로 들리는 웃음소리는 악마의 웃음이었다.
꽈아아앙!
종(鐘)이 깨어졌다.
사나이의 단 한번 주먹에 두께가 한자가 넘는 거대한 청동종이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최후의 울음을 남긴 것이다.
이것이...
479년 간의 대화산파의 종말이었다.
왕옥산(王屋山)은 본래 단풍이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여름이었다.
녹음이 우거진 왕옥산의 열 여덟 봉우리는 저마다 절경을 자랑하고 있다.
날카롭지는 않되 수려한 산세와, 계곡 마다 흘러내리는 맑은 옥류는 정녕
신선이 살만한 아름다운 산이었다.
여름이 시작되는 왕옥산을 한 백의 유생 차림의 청년이 헤매고 있었다.
"이런... 석담사가 왕옥산에 있다고 하길래 쉽게 찾을 수 있는 줄 알았는 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줄이야..."
그렇게 투덜거리며 이마의 땀을 훔치는 청년은 바로 종리연이었다.
그는 다지성녀 궁단향을 찾아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벌써 사흘 째 그는 왕옥산 일대를 뒤지고 있었다.
석담사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어느 정도 지치고 있었다.
목도 마르고 땀으로 인해 온몸이 끈적거리고 있었다.
막 산모퉁이를 돌았을 때, 쏴아아아!
문득 시원한 물소리가 그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고 있었다.
과연 시원스런 계곡의 물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어쨌든 반가웠다.
달려가 우선 물을 몇 모금 마시자 해갈이 어느 정도 되었다.
그런데 우르릉, 하는 굉음이 들린다.
(근처에 폭포수가 있나?)
종리연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울리는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마장 쯤 거슬러 올라가자 웅장한 폭포가 나왔다.
그런데 폭포 옆의 공지에는 한 채의 자그마한 규모의 암자가 있었다.
종리연은 암자를 보자 언뜻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혹시 저곳이 석담사(石潭寺)가 아닐까?)
폭포는 물로 된 바닥에 떨어져 수만 년 간에 걸쳐 담(潭)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래 쪽의 담을 석담이라 부를만한 풍경이었다.
종리연은 반가운 마음이 들어 암자쪽으로 접근해 갔다.
암자에 접근한 종리연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그의 눈길이 절로 찌푸려지고 있었다.
긴 여행을 한 끝이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옷은 먼지로 더럽혀지고 머리칼도 엉망이었다.
그는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섭선을 꺼내 보았다.
그러나 섭선 역시 엉망이었다.
몇 군데가 찢어지고 구멍이 나 있는 것이다.
종리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낫겠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린 다음 한 번 휘저어 보았다.
너덜너덜하는 것이 보기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몇 번 연속하여 흔드니 다소 모양이 가려진다.
종리연은 잠시 궁리했다.
(이번에는 어떤 보법을 쓸까?)
그가 아는 보법은 모두 열여덟 가지다.
조화 18보.
(다지성녀 궁단향은 지혜가 뛰어난 여인이니 풍류공자보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고... 역시 학문을 아는 여인이니 시성군학보(詩聖君學步)를...)
이어, 종리연은 섭선을 흔들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는 목청을 돋운 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을이 서러워 흰 머리 돌리고... 지팡이에 기대어 성을 등지고 보니...
강물 줄어 성과 모래 솟아났고, 텅빈 하늘과 풍물이 말쑥하여라..."
그는 암자로 접근해 갔다.
암자로부터는 아무런 기척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종리연은 더욱 목청을 돋우었다.
"창해에 숨고자 하나 노쇠함이 한스럽고... 평소의 뜻과 달리 붉은 인끈
받았노라... 황혼의 새들 날개 가벼이... 숲으로 돌아오는 양이 부럽도다...!"
한 귀절의 시가 끝났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종리연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때쯤이면 어느 정도 반응이 와야 하는 것이다.
사실 그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성녀 중 벌써 세 여인을 얻지 않았는가?
과정이야 어찌되었든지 이제 남은 한 명 뿐인 다지성녀만은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혹시 잠 들었나?)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다시 한번 목청을 돋우어 시를 읊었다.
그러나 아무리 목청껏 읊어도 암자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사실 그는 많은 작전을 세워두고 있었다.
시를 읊는 소리에 문을 열고 나오면 어찌어찌 해야 한다는...
그러나 사람이 있어야 그것도 실행해 보지 않겠는가?
아무런 반응도 없는데야 마이동풍인 격이다.
그는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암자의 방문이 닫혀 있었다.
그는 잠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역시 인기척이 없자 조심스러이 문을 열었다.
순간, 그의 눈이 한껏 커지고 있었다.
"아... 아니?"
그때였다.
안으로부터 달콤한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뭘 그리 봐요? 어서 들어오시지 않고..."
뜻밖이었다.
방안에는 그가 아는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종리연은 눈을 크게 뜨고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방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
그녀는 바로 하오방주 방의경이었던 것이다.
종리연은 아연실색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서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어떻게 여기 온 것이오?"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지요. 왜 안 되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곳은 본래..."
"후훗, 당신이 마지막으로 정복해야 할 다지성녀 궁단향의 거처란 말이죠.
알아요. 왜 제가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녀는 벌써 오래 전에 이곳을 떠났어요."
"...!"
"그녀의 소재를 파악한 후로 수하를 시켜 이곳을 찾게 했는데 그녀가 이미
수년전에 이곳을 떠났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 뭐에요. 그래서 직접
이리로 달려왔어요. 당신에게 전할 것들이 있어서요.“
"...?"
방의경의 얼굴에는 한 가닥 근심의 빛이 어렸다.
"삼패가 움직였어요."
종리연은 흠칫했다.
"움직이다니...?"
"화산파가 무너졌어요. 그것도 단 한 사람... 삼패의 첫째인 일지겁천의 손에 단 반나절만에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전멸했어요."
"그럴 수가..."
종리연은 심장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단 일인!
일인의 힘으로 수백 년 전통의 문파가 몰살하다니...
종리연은 전율이 이는 것을 금치 못했다.
방의경은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로 인해 무림은 흉흉해지기 시작했어요. 각 파에서는 더 이상 앉아만 있다가는 언제 자신들에게 혈풍이 닥쳐올지 몰라 암암리에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종리연은 신음을 발했다.
"으음... 생각보다 빨리 폭풍이 불겠군."
방의경은 그를 보며 다소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멍청한 듯한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나 종리연은 어딘가 모르게 성 숙한 듯한 분위기였다.
종리연은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각 파의 움직임을 어떻소?"
"구파일방이 중심이 되어 자구책을 강구하고 있어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소림사(少林寺)에서 비밀리에 회합을 갖는다는 말이 있어요."
종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소림으로 가야겠군."
"소림으로 가서... 어떡하시려고요?"
"막아야 하지 않소?"
"막다니요? 뭘?"
"무림의 위기를 어찌 보고만 있겠소?"
방의경은 어이가 없었다.
"당신이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나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종리연의 두 눈에서 일순 형언할 수 없는 장엄한 빛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엄숙한 빛이었다.
방의경은 문득 종리연이 딴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간신히 말했다.
"저도 가겠어요."
"안 되오. 의경은 하오문으로 돌아가시오."
"아니... 왜요?"
"소림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하오문으로 돌아가 조직을 정비하시오. 언젠가 하오문이 크게 쓰일 날이 있을 것이오.“
"...?"
방의경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까지는 모든 일들을 그녀가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역전이 된 듯한 기분이 든 것이었다.
"하지만... 저는..."
종리연은 빙그레 웃었다.
"걱정 마시오.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
"...?"
점입가경이라더니, 방의경은 점점 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종리연은 피식 웃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것이오?"
"아... 아니에요. 다만... 너무 변한 것 같아... 마치 딴 사람 같아요."
종리연은 빙긋 웃었다.
"이리 가까이 오시오."
"예?"
"당신을 안고 싶소."
"...!"
방의경의 얼굴이 빨개졌다.
설마 그가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방의경은 문득 자신이 한없이 나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종리연의 가슴에 안겼다.
넓은 가슴이었다.
평원에 사슴 한 마리가 평온하게 쉬고 있는 듯한 그런 안식감이 느껴졌다.
종리연은 그녀를 힘차게 끌어안으며 귓전에 속삭였다.
"사실 그 동안 나도 그대를 보고 싶었소."
종리연의 뜨거운 숨결이 귓밥에 닿자 방의경은 온 몸이 녹아나는 듯한 기분으로 응, 하는 콧소리를 낼 뿐이었다.
온몸이 붕붕 뜨는 듯 하고 나른하기만 했다.
폭포수의 굉음도 멀어져 가고...
오직 그녀의 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자신의 가슴이 쿵쾅거리는 소리뿐이 었다.
종리연이 의복을 하나하나 벗길 때마다 그녀는 몸을 틀어가면서 그의 손길 을 은연중 돕고 있었다.
육체의 향연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