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창시자이자 선문대학교 설립자. 언론 등 대외적으로는 주로 '총재'라는 호칭을 쓴다.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 개명 전 이름은 문용명(文龍明).
박정희 정부의 코리아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미국에서 특히 더 유명세를 치렀다. 해외에서는《자칭 메시아이자 창교자인 종교 운동가》(뉴욕타임즈),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방대한 종교 및 기업제국을 창건하다》(워싱턴포스트),《1970년대 미국을 휩쓴, 가장 논란이 되는 종교지도자》(LA타임즈), 《수천 쌍 합동결혼식의 주재자》(가디언), 《거대 기업제국의 창시자》(TIME) 등으로 표현되는 기사들이 나온다. 심지어 토마스 해리스의 소설 한니발 극초반에 "이 인간에게 FBI가 건물을 싸게 임대했네 어쩌네"하는 구절이 나온다.
해외에서 문 목사(Rev. Moon)라고 하면 지금도 대부분 문선명을 가리킨다. 한국의 위상이 높지 않던 시절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 중 한 명이었고, 특히 1970년대 미국에선 워싱턴 모뉴먼트에 30만 명의 미국인들을 결집시키는 등 컬트적인 열풍이 불었다. Moon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구글 번역이 문재인 관련 기사를 번역할 때도 Mr. Moon을 자주 문선명으로 번역한다는 2017년 기사도 나왔다.
2. 생애
2.1. 유소년기
1920년 1월 6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달면(德達面) 덕성동(德星洞)의 '문촌(文村)'으로 불리던 남평 문씨 의안공파 집성촌에서 문경유(文慶裕)와 김경계(金慶繼) 슬하의 7남 6녀 중 다섯째(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대대로 유교집안이었으나, 열 살 무렵, 그의 형인 장남 문용수(文龍壽)와 누나인 3녀 문효순(文孝淳)이 정신질환을 앓아 치유를 위하여 가족들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였고, 정주군 덕언면 덕흥동의 덕흥장로교회를 다니며,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이후에 교회 덕분인지는 모르나 둘의 정신질환은 완치되었다.
어릴 때부터 그의 집안은 상당히 부유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지방 조선인이 일본 와세다대학 부설의 고등학교에 유학까지 했다는 건, 머리도 머리지만 나름 부유층이었음을 의미한다. 문선명이 자서전에서 밝히길, 어릴 때 굶주린 사람들이 집에 찾아오면 가족들이 항상 밥을 거저 줬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작은할아버지 문윤국이 독립운동가로서 집안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헌납하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매진하자 집안의 가세가 점점 기울어갔다.
열여섯 살의 문선명은 1935년 4월 17일 부활절 새벽, 정주의 묘두산(猫頭山)에 올라 기도하던 중 문선명 앞에 예수의 환영이 나타나, 예수가 문선명에게 "고통받는 인류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슬퍼하고 계시니라. 지상에서 하늘의 역사에 대한 특주부(特主婦)의 사명을 맡아라."라고 말했다고. 문선명은 이 경험으로 자신이 메시아로서 태어난 존재임을 자각했다고 한다. 문선명은 그 경험 이후 계속 고뇌하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고뇌를 담아 16살 때 '영광의 면류관'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그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세 곳의 서당을 다녔다. 1934년, 15살 때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사립 오산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가, 1935년 정주공립보통학교 4학년으로 전학하여 1938년 졸업하였다. 그런데 1938년 3월 25일, 문선명이 자원하여 그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소견발표를 하게 되었다. 문선명은 경찰서장, 군수, 면장 등이 모인 자리에서 "일본인들은 하루빨리 보따리를 싸서 일본으로 돌아가라."며 일제의 식민정책을 비판하고 교사 개개인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연설을 일본어로 했다. 이 때문에 그 이후부터 문선명은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었다고 한다.
2.2. 청년기
1938년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하여 1941년 졸업하였다. 재학 때에는 서울 동작구 흑석동의 하숙집에서 하숙을 했다. 그런데 그 하숙집의 주인인 이기봉(李奇峰)은 당시 용산구 서빙고동의 서빙고오순절교회에 다니고 있었고, 문선명도 그 교회에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됐다. 또한 이기봉의 어머니인 강숙경(康淑卿)은 종로구 내자동의 자택에서 '내자동 새예수교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문선명은 내자동 새예수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이 때 김백문이 교회에 문선명과 같이 다녔다. 그러던 1939년 강숙경은 흑석동 명수대에 교회 건물을 지었고, '조선예수교회 명수대예배당'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이 교회 신축 과정에 문선명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교회 완공 후 문선명은 주말마다 그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21세 때인 1941년 4월 1일 일본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학교(高等工學校) 전기과에 입학하여 1943년 9월 30일 제 25회로 졸업하였다. 유학을 가기 위해 처음 창씨개명을 하였었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에모토 류메이(江本龍明). 유학 중 한인 유학생들의 지하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일본 경찰의 기록에 문선명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八)昭和十七年九月上旬頃東京都淀橋區戶塚町一ノ五二三白鷺莊に於て大原麟瑞は友人たる專修大學生高山允德、早大生江本某、早大生松本鍋禧の三名に對し支那蔣介石軍の下に朝鮮獨立運動者が參加し日本と戰爭し居る旨を强調同志として獲得せんとして朝鮮獨立に關し宣傳煽動を爲したり。
쇼와 17년(1942년) 9월 초순에 도쿄도 요도바시구(현 신주쿠구) 도쓰카마치 1-523 시로사기소에서 오하라 린즈이는 친구인 센슈대학생 다카야마 인토쿠, 조대(와세다대학)생 에모토 모, 조대생 마쓰모토 가키 3명에게 지나(중국)의 장제스 군 아래 조선 독립 운동자가 참가하여 일본과 전쟁하고 있다는 뜻을 강조, 동지로 획득하려고 조선 독립에 관하여 선전 선동을 하였다.
《特高 月報》(특고 월보) 쇼와 18년(1943년) 12월 호 125쪽
위 문서는 문선명의 독립운동에 대한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공식 자료이다. 문선명과 당시 동창이자 친구였던 엄덕문(嚴德紋)은 에모토 모가 문선명이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선명은 와세다대학이 아니라 와세다대학부설고등학교의 학생이었고, 자료엔 성만 있고 이름을 아무개라고 적었으니 참 애매하다. 물론 당시 경찰이 그의 이름도 정확히 몰랐던 수준이니 와세다대학도 잘못 적은 기록일 수도 있긴 하다. 게다가 위 문서에서 경찰에 검거된 사람의 명단에는 주동자 오하라 린즈이의 이름만 있다. 이렇듯 기록이 애매해서 문선명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참고로 문선명의 하숙집은 도쓰카마치 1-503으로 지하 항일 운동을 한 1-523 시로사기소와는 걸어서 1~2분 거리였다.
이에 대해 더 자세한 문선명의 썰로는, 입학 초에 '한인유학생회'(밀칭: 엽전회)라는 비밀 결사단체의 신입생 환영회에 참가하였고, 그 이후부터 지하 항일 운동에 꾸준히 일조했다고 한다. 이 단체는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일왕 암살 계획을 도모하는 지하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본인은 주로 일본 정권을 비판하는 전단지를 배포하고 다니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때 문선명은 자주 경시국 도쓰카(戸塚)경찰서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2.3. 첫 결혼 이후
1943년 10월 중순에 문선명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문선명은 최선길과 맞선을 보고 결혼했고, 이전에 하숙하던 서울 흑석동의 이기봉의 하숙집에 신혼집을 차렸다. 당시 문선명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에 있었던 '가시마구미(鹿島組)'라는 토목건설회사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1944년 10월, 서울 흑석동에 살고 있던 문선명의 집에 경기도경찰부 특고(特高) 형사들이 들이닥쳐 문선명을 체포했다. 문선명은 '독립운동을 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경기도경찰부 경성본정(本町)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당시 문선명의 측근이던 곽노필의 증언에 의하면,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의 한 학생이 징병을 거부하며 조선으로 도망쳐왔다가 경찰에 붙잡혔다고 한다. 그 학생이 취조 중 문선명의 이름을 언급하여 문선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문선명은 4개월간 경성본정경찰서에 '구류'되어 1945년 2월 석방되었다.
해방 후 1945년 10월 하순, 문선명은 고향 정주에 내려갔고, 서울에서 일하고 받은 월급으로 과일을 샀다. 그런데 뜬금없이 위조지폐를 썼다고 고발을 당했다. 그래서 정주경찰서 곽산지서에서 일주일 가량 유치되었다가 풀려났다.
2.4. 종교활동
1945년 10월 4일, 자신이 메시아라는 말을 알아줄 사람들을 찾아, 당시 한국에서 가장 신령하다고 알려진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한 김백문(金百文)의 '이스라엘수도원'[28]에 들어가 6개월간 봉사생활을 한다.
이렇게 들으면 김백문은 문선명보다 대단히 위면서 나이 많아보이나, 당시 문선명은 25세, 김백문은 28세였다. 즉 당시 둘 다 20대 청년이었으며, 김백문과 3살 차이였다. 또한 둘은 해방 전에도 서울 내자동의 '새예수교회'에 같이 다니던 구면이었다.
결국 1946년 3월 초, 김백문이 문선명에게 "솔로몬왕의 영광으로 오신 분"이라며 증거했다카더라. 그러나 김백문의 신도들 중 문선명의 설교를 들으러 빠져나가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자, 김백문이 "내가 바로 성령상대주님이다.'라며 문선명을 내쳤다.
2.5. 북한에서의 활동
문선명은 이스라엘 수도원에 있는 동안 "평양의 어떤 정신 나간 할머니가 자기가 하나님의 부인이라고 한다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 얘기를 듣고 문선명은 평양에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또한 문선명은 "평양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계시도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수도원을 나온 문선명은 당시 소련군정의 평양으로 갔다. 당시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로 기독교 뿌리가 깊은 곳이었다.
문선명은 1946년 6월 6일 평양에 도착하여 재림주 타이틀을 걸고 우선 길거리 전도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신도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그러던 중 기존 기독교 목사들이 "허호빈의 복중교와 유사한 단체의 지도자이며, 이승만의 첩자"라며 문선명을 북한 안전부에 고발했다. 그리하여 8월 11일 문선명은 안전부 내무서원에게 체포되었다. 문선명은 유동보안서에서 고문당하고 평양 대동보안서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11월 21일에 무죄로 풀려났다.
대동보안서에서 풀려난 후, 문선명은 1947년 자신이 '하나님의 부인'이라 주장하는 평양의 박을룡(朴乙龍)에게로 갔다. 문선명은 박을룡의 옆집으로 이사갔고, 40일간 박을룡의 집을 왕래하며 김백문 때처럼 봉사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박을룡이 문선명을 "하나님의 종(從)의 종,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양자, 하나님의 서자, 하나님의 아들, 하늘나라의 총리대신(總理大臣), 예수님, 하나님의 대상실체"라며 총 8번을 문선명을 증거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문선명이 박을룡에게 "그럼 이제부터 나한테 경배하고, 당신이 나를 따르라"고 했다. 그러나 박을룡은 이를 거부하며, 되려 문선명에게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그렇게 문선명은 박을룡으로부터 빠져나와 다시 전도생활로 돌아갔다.
문선명은 이 평양 전도 활동 시절에 이름을 용명(龍明)에서 선명(鮮明)으로 개명하였다.
그러던 중 또 다시 83명의 기존 기독교 목사들이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며, 부녀자의 재산을 갈취하며, 이승만의 스파이다."라며 1948년 2월 22일, 또다시 평양내무서에 구금되었다. 이후 4월 7일 공판이 열려 '사회질서문란죄'로 5년형을 언도받아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다.
5월 20일 흥남 덕리 특별노무자수용소로 이감되어 암모니아 비료를 만드는 일에 동원되다가, 2년 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UN군의 폭격으로 감옥이 무너져 탈출하였다. 흥남 감옥에서도 12명 가량을 전도했다고 한다. 몇몇의 옥중 제자들과 문선명은 전쟁통에도 평양에 다시 가서 신도들과 같이 남하하려 했다. 그러나 20여 명의 신도들은 문선명이 감옥을 갔다온 사이 신앙이 사라져 문선명이 보낸 편지를 그대로 반송하고 문선명을 쌩깠다. 문선명과 만나게 된 나머지 소수의 신도들은 어찌저찌 사정으로 같이 남하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김원필(金元弼)과 박정화(朴正華), 이 2명만이 문선명을 따랐다. 이리하여 3명이 자전거 하나만 갖고 부산까지 같이 남하했다.
2.6. 남하 이후 통일교 설립
부산에 도착한 문선명은 흙으로 매우 아담한 토담집을 지었다. 문선명은 그 토담집 안에서 통일교 최초의 교리서인 '원리원본'을 직접 연필로 갱지에 저술하였다. 1952년 5월 10일까지 약 1년 동안 총 690여 쪽을 저술하였다. 그 후 1954년 5월 1일에 서울로 올라가 정식적으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이 단체가 바로 우리가 아는 통일교이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이전 명칭이다.
1955년 7월 4일, 장충동의 통일교회에 갑자기 형사 2명이 나타나 그곳에 있던 문선명을 체포해갔다. 문선명은 '병역법 위반과 불법 감금 및 간통'의 혐의로 서울중부경찰서에 구금됐다. 며칠 후 김원필, 유효원 등 문선명의 제자들도 잇따라 경찰에 체포되었다. 7월 13일 서울지검에서 문선명과 제자들은 전원 기소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9월 20일 서울지방법원에서 문선명과 제자들의 재판이 열렸다.
재판에서 '불법감금 및 간통'은 사실근거가 없어, 21일 결심공판에서 '병역법 위반 및 징발특별조치령 위반' 혐의만 인정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경찰은 문선명이 한국의 여성 신도들과 간통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그들을 심문 및 조사했으나, 여성 신도들이 극구 부인하는 마당에 증거도 잡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간통을 했다. 문선명이 최선길과 이혼한 것이 1957년인데, 이혼 전인 1954년에 김명희라는 여성과 성관계를 하여 임신까지 시켰으니 간통이 맞다. 그러나 김명희는 경찰 조사 당시 미수교국이었던 일본에 가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경찰이 이를 조사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던 10월 4일 언도공판이 열려 문선명과 제자들은 병역 관련 죄목에서도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11월 21일 판결공판에서도 검찰공소는 기각되었다.
1981년 10월 15일, 미국 뉴욕 검찰청과 미국 국세청은 통일교의 헌금에 붙어야 할 소득세 162,000달러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세 혐의로 당시 미국에 있던 문선명을 기소했다. 문선명은 법원에 수차례 자진출두하여 '모든 미국의 종교인들이 소득세를 안 내는데 자신에게만 소득세를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기소가 부당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1982년 5월 18일 문선명은 뉴욕 연방지방법원에서 징역 18개월과 벌금 2만5천 달러를 선고받았다. 이에 문선명은 미국 대법원 3심까지 갔으나, 모두 패소하여 그대로 형을 받게 되었다. 1984년 6월 26일 문선명은 미국 국회 상원 헌법소원위원회의 청문회에서 당당히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4년 7월 20일, 미국 코네티컷 주 댄버리의 댄버리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투옥 중 기독교 우파단체 Moral Marjority의 수장 Jerry Lamon Falwell 목사, 연합감리교회 목사이자 미 남부기독교리더십컨퍼런스의 회장인 Joseph Echols Lowery 목사, 미국침례회, 미 전국교회협의회, 미 전국흑인가톨릭성직자회[39] 등 미국의 40여 개 교단의 기독교 목사들이 문선명의 무죄와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제 210회 미국 독립기념일이던 1985년 7월 4일, 댄버리에서 출소하여 뉴욕 변두리의 '브루클린 하프웨이하우스'로 이감되었다. 이후 모범수로 선정되어 5개월 감형을 받아 1985년 8월 20일 석방되었다.
"I don't care if he's turned 'em all into moonies! Just get him out of here before he calls a mass wedding!"
해석: "그가 (이 감옥의) 모두를 통일교인으로 만들었다해도 상관없어! 그가 합동결혼식 얘기를 꺼내기 전에 어서 그를 내보내줘!"
뉴욕 포스트의 1985년 7월 5일 만평. 댄버리 교도소의 문선명을 그렸다.
2008년 7월 19일, 문선명과 그의 가족들 16명이 탄 헬기가 경기도 가평군의 장락산 부근에서 추락했지만 아무런 인명피해도 없었다.
2.7. 사망
2012년 8월 15일, 문선명이 폐렴과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상태가 위독하여 중환자실에 입원하였다. 이후 8월 31일 현대의학으로는 낫기 어렵다는 진단이 나와 결국 9월 3일 오전 1시 54분 사망하였으며 통일교 총본산격의 궁전인 천정궁의 '본향원'이라는 산소에 시신이 안치되었다. 향년 만 92세.
3. 주요 활동
만수대의사당에서 북한 최고위 간부들 모아놓고 하나님 믿으라고 하는거 보면, 배짱만큼은 정말 두둑한 것 같다.
1990년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만난 바 있었고, 1991년 11월 30일 문선명이 정부의 허가 없이 북한을 방문해 여동생을 상봉한 뒤 흥남 마전 주석공관에서 김일성과 금강산 개발투자 등을 협의하려고 회담을 열었다고 한다. 이때 문선명이 북한의 국회격인 만수대의사당에서 노동당 간부를 비롯한 여러 북한 요인들을 앞에 두고서 "남쪽에 심어놓은 고정 간첩 2만 명을 전부 자수하도록 지령하라. 그러면 내가 하나님 주의로 그들의 사상을 바로잡아 민족을 위해 헌신하도록 만들겠다.", "한국전쟁은 북침이 아닌 남침이다. 전 세계 앞에 남침을 사과하라.", "주체사상을 포기하고 하나님주의를 해야 한다.", IAEA 핵협정에 조인하라.", "이산 가족 상봉시켜라." 라는 발언을 그것도 탁자를 내리치며 거의 호통조로 연설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문선명을 친절히 안내해주던 김달현 부총리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고 다른 북한 간부들이 야유를 보내는 등 분위기가 상당히 안 좋았다고.
이에 대해 같이 갔던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이 김일성과 만나는 건 물건너갔다고 체념하자 문선명은 도리어 "내가 이런 말 했다고 김일성이 안 만나겠다면 쩨쩨한 거지. 그래서 안 만나겠다면 만날 필요 없어."라고 대꾸했는데, 김일성은 김달현 부총리로부터 이 발언을 보고받자마자 껄껄 웃으며 "저런 배포를 가진 사람이라면 만나야지." 라면서 문선명과 단독 회동을 했고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해졌다. 특히 이때 오찬도 겸했는데 김일성이 내놓은 건 언감자국수. 두 사람 다 고향이 평안도였는데 언감자국수가 평안도 음식이라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잘 먹었다고.
그러나.. 이러한 김일성과 북한의 관용적인 태도는 문선명이 1991년 당시 약 5조 원 가량의 현금을 북한에 건네준 것 때문으로 미국 국방부 정보국 보고서에 의해 밝혀졌다. 출처 즉 문선명은 북한에 돈을 주면서 이런 저러한 사업을 제안한 것. 5조 가량의 현금이면 당시 북한의 1년 GDP의 30프로 가까운 엄청난 돈이다. 그런 돈을 준다는데 약간의 기행은 웃어 넘길 수 있었던 것. 이 금액은 김대중 정부시절 사법처리된 대북송금 금액의 5억불보다도 약 10배나 많은 것이다.
아무튼간에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국가보안법을 무시하고 남측에서 유일하게 조문을 보낸 단체 역시 통일교였다. 당시 세계일보 회장 박보희를 베이징을 거쳐 북한으로 보내려했는데 주중 북한 대사관이 조문을 안 받는다며 난색을 표하고 이를 문선명에게 보고하자 문선명은 "뭐라고? 조문을 안 받아? 내가 보내는 사람은 달라. 끝끝내 조문을 안 받는다고 하면 압록강을 헤엄쳐서라도 들어가 조문해!"라며 호통을 쳤다고 주장한다.
결국 주중 북한 대사가 김정일에게 이를 보고했고 김정일은 통일교 관계자들을 잘 모셔오라고 얘기해서 조문이 성사되었는데, 이 때문에 박보희는 나중에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위기에 놓이면서 5년간 해외에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겨우 입국할 수 있었다고. 아무튼 이래저래 북한과의 사이는 꽤 좋은 편이다. 젊었을 땐 철저히 반공, 승공을 주장했고 일본에서도 반공활동을 하면서 교세를 폈지만 말년에는 또 북한과 친하게 지낸 기묘한 이력인 것이다.
한편 시사IN에서는 1994년 북핵위기 때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 낸 것이나, 2000년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던 것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2007 남북정상회담을 열었을 때도 통일교가 훨씬 전부터 갖고있던 대북 핫라인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사를 내었다.
2011년 김정일 사망 당시 북한에 조화를 보냈고, 2015년 8월 30일 김정은이 문선명의 3주기를 앞두고 유족들에게 애도의 메시지를 보냈다. 참고로 김정은은 문선명의 사망 당시에도 조전을 보낸 바 있다. 2019년 지금까지도 북한 고위 관료나 통일교 고위 관료가 죽으면 서로서로 죽은 당일 바로 조문을 주고 받는다. 참고로 조문에서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아시아태평양평화통일위원회'라고 칭하며, 통일교는 '세계평화련합'이라고 칭한다.
2002년 6월 4일 펠레와 찍은 사진. 웃기게도 1994년 김일성이 곧 죽을 거라고 예언했다며 월간조선이 대문짝만하게 보도한 무속인 심XX이 1995년 문선명이 오래 안 가 곧 죽을 것이라고 책에서 주장했는데 17년이나 걸렸다. 2003년 이라크 전쟁 후 '종교 화합'을 목적으로 '이스라엘 평화대행진'을 열었다.
2005년 2월 14일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천주청평수련원(현 HJ천주천보수련원)에서 열린 '평화의 왕' 추대식. 이날 참아버님과 참어머님으로 진정한 만왕의 왕으로 즉위했다.
2005년 7월 15일 '2005 피스컵코리아' 개막전에서 박근혜와. 이 사진이 후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진 이후 세계일보의 최순실 단독 인터뷰건과 엮여 통일교의 유착 의혹이 제기되었다.
문선명의 90살 생일 때는 김정일이 생일선물로 90년근 산삼 등 선물을 보내주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통일교 행사에 축하 영상을 보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문선명 장례식장에 축하화환을 보냈다. 사진 오른쪽. 통일교에서 죽음은 천국에 가는 축하해야 될 일이기 때문에 통일교인이 죽으면 장례식장에 반드시 축하화환을 걸어야 한다. '제12대 대통령 전두환'이라고 써 있다. 2012년 당시 국회의장이던 강창희도 껴있는 걸 볼 수있다.
문선명 사망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장례식장에 축하화환이 아닌 근조화환을 보냈다.
4. 가족관계
슬하에 10남 7녀를 두었다. 이정도면 거의 전근대 군주나 가질법한 자녀수다. 그리고 가족관계를 보면 알겠지만 문선명 본인 뿐만 아니라 문선명의 부친인 문경유도 자녀를 엄청나게 많이 낳아서 슬하 7남 6녀를 두었다. 형제자매들도 자녀를 꽤 많이들 낳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에서도 문선명이 문경유의 자녀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았다.
문선명의 자녀들도 자식을 많이 낳았다. 5명 이상 자녀를 낳은 자식이 5명이다.
그래서 자녀수는 17명, 손자녀는 모두 45명이다.
전처 최선길과의 사이에서 아들이 1명 있고, 사생아 아들 2명이 있고 본처인 한학자와의 사이에서는 슬하 7남 7녀를 낳았다. 사실 전근대의 군주들도 본처와의 사이에서 그렇게 많이 낳는 경우는 드물다. 기껏해야 조지 3세(9남 6녀, 15명)나 마리아 테레지아(5남 11녀, 16명),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7남 7녀, 14명) 정도가 문선명과 비슷하거나 더 많이 낳았다. 한국사의 군주들 중에서도 문선명처럼 본처인 왕후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10명 이상 낳은 군주는 드물다는걸 생각하면 대단하다 못해 놀라울 지경이다. 참고로 역대 조선 군주 27명 중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수가 10명 이상인 군주는 단 3명뿐이다.
그러나 정작 문선명은 자식 농사만큼은 기가 막히게 못 지었다. 후계자 감이 없던 건 아니고 후계자로 세웠던 자식들이 모두 중도이탈했다.(...) 그리고 문선명 사후 몇갈래로 찢어졌다.
문선명은 40세인 1960년에 23세나 연하인 17세였던 한학자와 결혼했다. 이는 완전히 키잡이 수준에 이 결혼은 재혼이었다. 전처 최선길과의 사이에는 아들 문성진 1명이 있다. 허나 문선명의 선교활동 몰입과 북한에 있을 때 탄압으로 인한 문선명의 로동수용소 수감이 원인이 되는 장기간의 별거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1953년에 전처의 가족들에게서 강제로 이혼을 당했다. 이는 사실 전처의 (기독교 목사인) 오빠의 강한 압력 때문. 근데 나중에 전처 및 전처 소생의 아들도 통일교 신자가 된다. 더구나 결혼 이후 한학자를 몇 년 동안 가혹한 환경에서 고생시키는 것을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문선명과 한학자 사이에는 슬하에 총 7남 7녀가 있었다. 문선명의 아들 중 장남인 문효진은 마약 논란 등 사생활에서 많은 문제를 보이면서 첫 부인 홍난숙과 이혼했는데, 홍난숙이 미국에서 문선명 가족과 통일교의 내부 문제를 고발하는 수기를 출간해 통일교가 큰 타격을 입으면서 자연스레 후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문효진은 2008년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전처 홍난숙이 미국 방송과 인터뷰한 영상을 보면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 뺨치는 충공깽이다. 해당 인터뷰 방송은 미국의 탐사 보도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CBS의 '60 Minutes'이다. 우리나라의 추적 60분이 이 방송을 벤치마킹해서 제작되었다.
여담으로 문효진은 음악, 특히 헤비메탈에 재능이 있어 평생 만 곡 이상을 작곡했다는 말이 있고, 몇몇 곡은 (통일교 교리로 가득한 종교적 가사를 감안하고 듣는다면) 한국 헤비메탈 음악 사상 최고의 곡들이라고 칭송받기도 한다. 음악적 재능 하나만큼은 진짜배기였던 셈이다.실제로 상당히 좋다. 들어보자.
차남 문흥진은 20세가 되기도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자식 중 가장 정신상태가 올곧았던지라 문선명은 이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아껴했었다.
이후 이미 세계재단 리더로 사업경영 수완이 좋고 처가가 통일교 재단 내에서 위치가 높았던 3남인 문현진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문현진은 문선명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며, 통일교라는 종교 자체를 부정하여 사실상 파문당했다. 이제 사이즈 불릴 만큼 불렸으니 종교적 아이덴티티로 헛짓거리 하지 말고 재벌로 정체성을 굳히고 나가자고 하다가 불경죄를 쳐맞은 셈이다.[48] 문현진은 파문당한 뒤 통일교 재산(파크원 등)을 최대한 많이 싸들고 통일교를 박차고 나갔다. 당연히 우주황제 맥콜킹 참아버지 문선명은 대노했고 한다. 이 일은 "가족의 가치"를 교리상에서 강조하는 통일교에 꽤나 상징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 뒤로 기존 통일교와 문현진 측이 재판으로 치고 받고 싸웠는데 문현진 측이 대부분 승소했다.
결국 통일교는 7남인 문형진을 종교 담당 후계자로, 4남 문국진을 기업 담당 후계자로 각각 삼았다. 그리고 문국진은 문현진의 UCI재단과 여의도의 2조짜리 땅뙈기를 놓고 법정공방을 벌이다 패소하여 자리에서 짤렸다.
사진은 문선명의 7남이자 2008년 취임한 당시 통일교 세계회장 문형진(1979. 09. 26~ ). 하버드 대학교 비교종교학 석사 출신이라고 한다. 세계회장이었지만 실권은 어머니 한학자가 쥐고 있었으며 문형진 본인은 얼굴마담이라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문형진이 불교를 좋아해서 기독교 계열의 신학대학을 다닐 시절에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기독교 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을 입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장로교 신학대학을 다니면서 스님처럼 하고 다녔다는 얘기다. 위의 만왕의왕 즉위식 사진에서 삭발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다. 헌데 2015년 한학자에 의해 세계회장 직책에서 쫒겨났다. 문형진이 한학자의 기존 통일교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파문하겠다고 선포했는데 당연하게도 기존 통일교의 교세가 훨씬 막강했던지라 되려 문형진이 통일교 세계회장에서 짤리게 된 것이다. 후임으로는 문형진의 누나이자 문선명의 5녀인 문선진이 취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문선명의 아들들은 모두 죽거나 퇴출당했기에 통일교 입장에서는 문선명의 차남 문흥진의 죽음이 뼈아팠다. 문흥진이 살아있었다면 문흥진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했을 것이기 때문.
그리고 그 문형진은 통일교 세계회장에서 보직해임 당하자 자신과 인연이 있는 통일교 원로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생츄어리 교회를 차렸는데 이 종교도 골때리는데 교리부터가 "마귀 사탄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총기로 중무장해야 한다" 이다. 그래서 신도들은 전원 총기를 소지하고 있으며 문제는 실제로도 군사훈련을 한다는 점이다. 아예 자기 신도들로 사설부대를 만들어 놓았다. 이에 대해 문형진의 어머니인 한학자는 "저 후레자식이 아버지가 남긴 명예를 먹칠하고 있다"면서 아들인 문형진을 맹비난하고 있다. 그러자 이에 발끈한 문형진은 이미 사망한 아버지와 자신과 적대관계인 어머니를 이혼시키고 뜬금없이 '강현실'이라는 다른 여성과 강제 영혼결혼을 시키는가 하면 문선명 동상을 만들어서 퍼레이드를 시키는 기행을 보이며 이미지가 더 나빠졌다.
2015년도 남동생 문형진이 쫓겨난 후 2019년까지 세계회장을 맡은 5녀 문선진.
4.1. 공식 자녀
1960년 결혼한 한학자(韓鶴子, 1943년 2월 10일 ~)와의 사이에서 낳은 7남 7녀
- 청주 한씨로, 한승운(韓承運)과 홍순애(洪順愛)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3곳의 초등학교를 옮겨 다녔으며, 선정중학교를 다니고, 서울시 중구 중림동에 있던 '성요셉간호학교'에 재학 중 문선명과 결혼했다.
1959년 4월 1일 신부 후보였던 김명희가 일본에서의 사명 실패로 한국에 돌아오자, 문선명은 새로운 신부 후보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최 모씨와 윤정혜(尹貞惠)를 신부 후보로 세웠다. 같은 해 7월 20일부터 8월 31일까지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야목리의 야목교회에서, 문선명은 윤정혜를 위해 《제2회 전국 전도사수련회》를 열었다. 이후 윤정혜가 유력한 신부 후보자 한 명으로 좁혀졌다.(참부모님 생애와 섭리 2권 1-6-1, p.116)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문선명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겠다는 맹세를 못했다. 이는 즉 윤정혜가 문선명의 신부가 될 수 있는 책임에 실패한 것이다.
그리하여 윤정혜를 대체할 신부 후보자를 찾았으니, 그게 현 부인 한학자이다. 1960년 2월 26일 문선명은 한학자와 만나 9시간 동안 신부의 자질과 소양이 있는지 여러 질문으로 테스트했다. 이후 한학자에게 "그대에게 훌륭한 선생을 한 분 소개해주겠다."라며 최원복(崔元福)에게 신부수업을 받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한학자는 2월 26일부터 3월 27일까지 신부수업을 받았다. 이후 문선명은 한학자를 신부로 최종 확정했다. 그리고 3월 27일(음력 3월 1일) 가약식(약혼식)과 4월 11일(음력 3월 16일) 성혼식(결혼식)을 치러 드디어 문선명의 아내가 된 것이다.
5. 학위 및 수상
모범 노동자상 수상 (1948년~1950년, 북한 흥남 덕리 특별노무자수용소)
미국 리커대학 명예 법학박사 (1975.12.09)
미국 뉴스위크에서 1976년 올해의 사건 인물 (1976.6.14)
문스위크
아르헨티나 라플라타가톨릭대학명예 법학박사 (1984.11.15)
미국 침례교 계열 쇼신학대학 명예 신학박사 (1985.05.11)
미국 플로리다 주 성경신학대학원 명예 신학박사 (1985.05.28)
미국 버나디언대학교 명예 법학박사(1985.05.15)
국제기사단 최고십자정의기사상 수상, 국제기사단의 명예 총재로 추대됨. (1985.12.12, 서울 리틀앤젤스예술회관)
브라질 훈장학회(Heraldic Medal of Brazil) 국민문화공로십자상 수상 (1986.09.18, 브라질 상파울루 buffet colonial)
남북미통일연합(CAUSA) 자유통일대십자금성훈장 수여받음 (1987.09.23, 서울 리틀앤젤스예술회관)
배달문화선양회 제 1회 정신문화상 수상 (1989.01.10, 서울 리틀앤젤스예술회관)
멕시코 국제법률학회 'Color of honor' 훈장 수여받음 (1990.02.01, 서울 힐튼호텔)
미국 블룸필드대학 명예 인문학박사 (1990.02.01)
브라질 훈장학회 공로 상장과 메달 수상 (1991.04.21, 브라질 상파울루 Tivoli Mofarrej São Paulo 호텔)
문선명브라질상
인도 국제통일재단 '1991 통일상' 수상 (1991.08.28, 서울 리틀앤젤스예술회관)
미국 브리지포트대학 명예 인문학박사 (1995.09.07)
제 2회 아메리칸 센추리 어워드 특별대상 수상 (2000.02.02, 미국 국회의사당 Caucus Room)
도미니카공화국 페데리코엔리케스이카르바할대학 명예 인간학박사 (2000.02.10)
키르기스스탄 국립민족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명예 교육학박사 (2000.02.10)
러시아 우퍼볼타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명예 교육학박사 (2000.02.10)
브라질 바히아신학철학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명예 교육학박사 (2000.02.10)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IIFWP) 2000 총회 만국평화상 수상 (2000.08.18, 미국 뉴욕 UN본부)
이그노벨상 경제학상 수상 (2000년)
미국 통일신학대학원 명예 신학박사 (2001.06.21)
선문대학교[92] 명예 문학박사, 명예 신학박사 (2002.04.14)
천주평화대훈장 수여받음 (2006.09.12, 가평군 천정궁박물관)
베네수엘라 산타마리아대학 명예 문화인류학 박사 (2006.09.12)
키르기스스탄 국립과학아카데미 명예 언어학박사 (2006.10.14)
북한 조국통일상 수상 (2012.09.07, 평양 만수대의사당)
한국 K리그 공로패 (2012.12.03, 서울 힐튼호텔)
6. 여담
통일교 교리상 문선명은 메시아이기는 하지만 영생인 존재는 아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메시아임을 주장하는 교주가 사망했는데 어떻게 종교가 유지되는지 이해가 안 가겠지만 교주 사후에도 어쨌든 큰 문제 없이 조직 자체가 유지되는 것은 메시아관의 차이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문선명은 언제나 영(靈)적으로 모두와 함께하고 있다고 한다. 통일교의 모든 기도에는 마지막에 '이 모든 말씀, 축복중심가정 ㅁㅁㅁ의 이름으로 보고드리고 아뢰었사옵니다.'라는 구절을 넣게 되었다.
'문선명'을 로마자로 Sun Myung Moon이라고 쓴다. 표준 로마자 표기법을 따르면 Mun Seonmyeong. 하지만 정작 영어권에선 통일교인들을 조롱하는 어투로 무니(Moonie)라고 부른다. 이런 신조어가 탄생한 까닭에 영어사전에 등재된 거의 유일한 한국인인 게 아이러니. 손바닥만 한 콘사이스 사전에도 있을 정도다. 때문에 통일교인이 아닌 반기문 UN 총장이 선출 당시 '문선명 친척 아냐?' 하는 오해를 사기도 했었다. '반기문'의 공식 로마자 표기는 'Ban Ki-moon'인데, 문선명 총재 때만 해도 성을 이름 뒤에 쓰는 것이 일반적인 표기라 영어권에선 어느 것이 성이고 이름인지 헷갈릴 소지가 있었다. 그래서 오래된 정보에는 반기문의 종교에 '통일교'라고 되어 있는 것도 있다. 공식적으로는 무종교이나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인 것을 확인한 책이 있다. 그나저나 문씨라는 이유만으로 통일교인이라고 오해받는다니 우리나라 40만 문씨들은 어이없을 듯하다.
Moon(月) + Sun(日) = Myung(明)이라는 평도 있다. 특히 미국은 통일교 신도들을 가리켜 'Moonies'라고 부른 바 있다.
미국 영주권을 갖고 있다. 문선명은 1973년 4월 30일에, 부인 한학자는 1973년 2월 26일에 각각 미국 영주권을 얻었다.
1998년 조사로 문선명 일가의 추정자산은 약 2조 원. 다만 어디까지나 추정자산이며 당시 경제거품까지 생각해보면 실제로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왕족 자식들에게 다 나눠졌겠지만 역시 삼성일가보다 높은 거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당연히 그 정도급은 안 된다. 실질 자산을 보면 국내자산순위 20위권이 안 된다. 애당초 사이비 종교가 커도 전문적인 기업인한텐 안 되는지라 삼성은 고사하고 권혁빈 한 명만 나서도 문선명 일가는 물론 이만희 일가까지도 작살낼 수 있다. 애당초 통일교의 돈지랄도 재벌들이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비효율적으로 쓰고 싶지 않아서 안 하는 거다. 재벌들은 돈이 엄청나게 많은 대신 돈을 조금이라도 잘못 쓰면 계열사 1~2개가 날아간다. 계열사 관리 차원에서도 돈을 짜게 써야만 하는 입장이다. 종교인이라서 돈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문선명과는 다르다.
김진명이 2017년에 ≪예언≫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작중에 서술된 문선명의 행적이 책을 읽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화제가 되었다.
예술과 엔터테인먼트에 관심도 가져서 리틀엔젤스, 유니버설발레단, 선화예술고등학교 등을 창립했다. 그리고 오! 인천이라는 영화를 통해 문선명이 대배우 로런스 올리비에를 구해줬고 그 외의 이 영화 제작에 참여한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자선사업을 했다고 주장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주요 배우들의 개런티를 매일마다 헬기에 가득 실어서 공수했을 정도라고 비유한 덕분에 영화 똑바로 살아라에서 그의 이름이 나쁜 의미로 언급된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익스플레인: 세계를 해설하다 2시즌 1화 믿음의 함정 편에서 사이비종교에 대해 강의하는 강사가 어릴 적 문선명 지지 대회에 갔었다고 한다. 통일교 사진을 보여준 뒤, "이들이 한 짓들입니다."라며 인민사원의 집단자살 영상을 보여준다. 처음 본 사람들은 통일교=인민사원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통일교 사진을 보여준 후 다음으로 인민사원 집단자살사건을 일으킨 짐 존스, 도쿄 지하철에 생물학 무기 테러를 가했던 옴진리교의 아사하라 쇼코 교주, 웨이코 참사로 악명을 떨친 다윗교의 데이비드 코레시,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이 순차적으로 등장한다.
축빠였다. 1988년만 해도 K리그는 구단수가 5개밖에 없었는데 축구를 좋아한 문선명 총재가 축구판에 뛰어들어 1989년 통일그룹을 모기업으로 일화 천마를 창단했다. 초창기에는 신생팀의 한계 때문에 성적이 나오지 못했지만 92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축구단에 투자를 했고, 순식간에 명문구단으로 뛰어올랐다. 문선명 총재 사후 부인인 한학자와 통일그룹 실권을 쥔 4남 문국진은 축구에 애착이 없었고, 결국 매물로 내놓은 구단을 성남시가 인수해 시민구단인 성남 FC로 변했다.
문선명은 학업에 있어 이과 테크 트리를 탔음에도 종교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건 조금 특이한 점.
일본 총리를 역임했던 기시 노부스케와 돈독한 관계였으며, 그의 후원을 얻어 일본에서 통일교 교세를 확장했다.
문선명은 17개 나라에서 입국금지를 당한 적이 있다. 이는 다음과 같다.
일본 - 1978년 11월 10일 ~ 1992년 3월 26일
영국 - 1981년 7월 7일 ~ 2005년 11월
네덜란드 - 1995년 ~ 2005년
그리스,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룩셈부르크, 스웨덴, 스페인, 벨기에, 아이슬란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핀란드 - 1995년 ~ 2007년
상술한 일제시대에 일본어 연설을 했었다는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생전에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었고 1992년에 일본에 방문해서 일본어로 연설한 영상도 있다. 뭐 애초에 일본어 교육이 필수였던 일제시대 사람이기도 했고 고등학생 시절 일본에 유학까지 갔던 사람이라 크게 특이한 점은 아니다.
notable people이라는 지역별 유명인을 알려주는 사이트에서 이승만과 같은 굵기로 이름이 나오며, 광개토대왕과 율곡 이이와 같은 확대 정도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