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광복단⌟의 15만원탈취사건 - 15만원 탈취사건의 의미를 찾아서
15만원탈취사건의 의미를 찾아서
연길에서 처음으로 15만원탈취사건이라는 팩트를 접하며 적지 않은 혼란과 빚진 자 의식과 부담감을 느꼈다.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여러 책을 뒤졌지만 그 글이 다 그 글이어서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거사 모의장소 중에 하나였던 최봉설 네 집의 흔적이 가까운 와룡동에 남아 있다는 말을 듣고 유적지 탐방에 일가견이 있는 조선족 형제의 안내를 받아 방문하였다. 집은 나무 울타리로 빙 둘러 담이 쳐졌고 집터 자리에는 마른 옥수수 대가 널려 있었으며 마당에는 김장배추가 심겨져 있었다. 최봉설의 아들이 연길로 이사를 나가며 집을 팔았고 현재 주인은 최봉설의 아들에게 집을 구매한 사람에게 집을 구입하여 집을 헐고 밭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집터 위에 가까스로 남아있는 주춧돌의 흔적들을 살피며 만져보았다. 마당을 거닐며 앞문과 뒷문으로 나가서 고샅길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최봉설이 9살 되던 해에 세워진 와룡동교회와 창동소학교를 떠올렸다. 또한 1910년에 세워진 창동중학교를 떠올렸다. 몇 차례 다니는 동안에 용정 3.13만세시위와 순국한 최익선, 창동학교 은사로 이름이 남은 분들과 정기영, 정기선이 모자이크조각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조각뿐 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글을 쓰고 싶었지만 조각으로 글을 쓸 수가 없어서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경신대학살 그리고 자유시참변까지는 글을 썼지만 15만원탈취사건에 대해서는 글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간도국민회 외곽단체에서 활동을 하였다는 기록에서 힌트를 받아 큰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1910년대 북간도사회 무드와 수많은 열혈청년들과 학생들을 만날 수가 있었고 그들의 순수한 에너지가 1910년대와 20년대 만주독립운동의 밑거름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 많은 무명의 투사들의 열기를 모아 목숨을 걸고 중국 땅에서 독립전쟁의 화살을 쏜 용사들이었다. 그들의 거사는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첫째 그들의 거사는 철저히 준비된 거사였다.
그들의 거사는 우발적인 거사가 아니었다. 3.13만세 시위 후에 최봉설, 임국정, 한상호 그리고 윤준희는 독립은 무장투쟁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의기투합을 하였다. 그들은 일정과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와룡동과 제창병원 지하실에서 자주 만났다. 당시 윤준희는 간도국민회의 신문 중의 하나인 대한독립신문을 구춘선의 지도로 발간하는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제창병원에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최봉설과 한상호 부친이 송아지를 팔은 돈으로 1919년 9월에 거사를 위한 무기를 구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왔다. 그들은 당시 무기 구입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반병률이 쓴 홍범도 연보에 의하면 추풍 당어재골로 홍범도를 찾아가 15만원 탈취계획과 무기구입문제를 논의하였다.70) 그들이 회룡지점의 조선은행 직원인 전홍섭을 포섭하는 것도 용의주도하였으며 수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전홍섭이 3.13만세시위 때 부상자를 업어서 제창병원에 나른 것을 확인하였고 여러 차례 걸쳐서 설득하여 거사에 참여시킨 것이다. 그들은 거사에 필요한 두 명의 동지를 10월에야 확보하였다. 회령에서 용정에 오는 루트를 잘 아는 명동의 박웅세와 그의 친구 김준을 가담시킨 것이다. 당시 박웅세는 1월 초에 결혼식 일정이 잡힌 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거사 계획에 기꺼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고 있었지만 성공을 위해서 철도부설자금이 회령에서 용정으로 오는 1920년 1월 4일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둘째 그들의 거사는 범 단체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 말은 그들이 러시아나 간도의 단체들의 권유나 지시와 명령으로 거사를 도모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어떤 글에는 그들이 러시아 국민의회 군사부장 김하석의 지시로 거사를 도모하였다고 한다. 만약에 그들이 국민의회 김하석의 사주로 거사를 도모하였다면, 김하석이 거사에 필요한 장비를 공급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장비를 구입하러 부친에게 돈을 받아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직접 다녀오는 수고를 감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5일 의란구 유채구에서 보스인 김하석을 만났을 때 그에게 탈취금의 권리를 넘겨주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법정의 판결문과 다르게 실제로 무기구입에 대하여서도 그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았다. 단원들 사이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 구입 건으로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최봉설의 회고에 의하면 홍범도에게 돈을 넘겨주어 무기를 사자는 의견과 자발적으로 무기구입을 하자는 의견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임국정의 의형제인 엄인섭을 통해 무기를 구입하기로 합의하고 그에게 선불금 까지 주었으나 그의 밀고로 일경에게 붙잡히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에 러시아의 국민의회나 기타 단체의 지시나 배후 협력이나 지원이 있었다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 구입을 위해 엄인섭에게 의뢰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 지역의 독립투사들의 현황과 일제의 경찰과 군부대 상황에 그렇게 무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일제 간섭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에서, 역할을 분담하여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지 않고 7,8일이라는 긴 시간을 그 곳에서 죽치고 앉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들이 비록 김하석의 편지와 권면을 받았다할지라도, 거사의 주체가 철혈광복단의 이름으로 알려졌다 할지라도 그들의 거사는 간도국민회 외곽단체인 철혈광복단의 단원인 윤준희를 비롯한 7명 청년들의 거사였다. 그들의 순수한 자발성은 당시 북간도 청년들의 독립전쟁에의 열망과 환상, 순수와 고뇌를 말해준다.
셋째 그들의 거사는 가족, 교회, 학교와 와룡동 국민회의 총체적인 신앙고백이었다.
최봉설의 할아버지는 1969년 기사년에 생명을 걸고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찾아 무인지경인 와룡동 오지로 들어와서 개척을 시작하였다.
최봉설의 아버지는 1907년에 창립소학교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고 학부모위원회 한 멤버로 후원 회비를 내어 창동학교를 학비가 없어도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다 받아 주는 학교로 만들었다. 그는 창동학교 교가 후렴 구절 가사 대로 “참스럽다 착하다 아름다워라 정신은 자유요, 이상은 독립”71)에 뜻을 둔 아들을 키워 독립운동의 제단에 관제처럼 부었다.
1907년에 세워진 와룡동교회는 한 손에 성경을 들고 한 손에 조선독립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안고 출범하였고 와룡동 청소년들에게 조선독립에의 꿈을 심어주었다. 3.13만세 시위에 거교회적으로 신도들이 참여하였고 시위 후에는 간도국민회 와룡동지회 거점이 되었다. 신도인 정기영과 정기선 그리고 청년 최봉설이 간도국민회와 간도국민회 외곽단체에서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와룡동은 경신대학살에 토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거사는 그들의 거사이면서 와룡동을 만든 모든 사람들의 총체적인 신앙고백이며 와룡동 사람들의 거사이다.
넷째 그들의 거사는 중국 영토에서 벌인 일본에 대한 최초의 대담한 선전포고였다.
3.13시위 후에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서 조선 땅에 진공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중국 영토 내에서는 학생들이나 청년들의 자위단과 암살대가 조선인 첩자와 일경에 대한 암살과 습격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일제는 독립군의 조선 진입과 암살대의 저격은 예상하고 있는 일로 반격과 추격, 검문과 체포, 구속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15만원 탈취사건은 무장 호위 군인이 2명, 동행자가 4명이 있는 호송단체의 거금을 목표하고 있었으므로 일제로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 조선 독립군은 일제의 군인과 경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지만 1920년 정초의 독립군은 그전과 차원이 다르게 거액의 자금을 노렸다는 측면에서 일제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리하여 일제는 두만강 연안, 전 만주와 연해주에 비상경계망을 펼쳤으며 1월 31일 그들이 잡힐 때까지 삼엄한 경계를 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기 위하여 언론보도를 막았으며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위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재판정에서 투사들이 자신들의 거사가 조선인의 대의이며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살인약탈죄로 사형을 언도하였다.
그리하여 15만원탈취사건은 북간도의 독립운동이 평화적인 시위를 종료하고 무력투쟁으로 전환하였다는 선언이 되었다. 그리고 북간도 사회는 열혈청년들의 죽음에 자극을 받아 독립전쟁무드로 들어갔다. 모연대들이 포고문과 군자금청구서약서를 휴대하고 권총으로 무장하고 북간도 어디를 가서든지 모금을 하여도 통하는 사회가 되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이간질에도 불구하고 군자금 모금이 활성화되어 1920년 각단체가 모금한 금액이 50만원이 모금되었다. 이는 당시 북간도 조선인 1인당 1원 73전을 군자금으로 납부했다는 놀라운 통계이다. 사건 후, 더 많은 청년들이 독립군에 지원을 하였다. 그 당시 북간도 인구가 28만9천여 명이었는데 독립군의 숫자가 4,241명이었으니 69명에 1명꼴로 독립군에 지원했다는 말이 된다. 그들의 실패한 거사는 실로 일제에 대한 선전포고 되었으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선봉전이 되었다.
그들이 생명을 걸고 탈취한 15만원의 가치를 알고 싶어서 가이드를 해주시는 형제분께 물었다. 그분은 선뜻 당시 그 돈이면 일개 사단을 무장을 시킬 수 있었다고 대답하였다. 사단의 구성인수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사단의 숫자 규모가 나라마다 달랐다. 3천명에서 무려 2만 명까지 편차가 커서 금액을 종잡기가 어려웠다. 어떤 연변의 기록은 그 돈이 ‘3만여 자루의 총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이라고 하였다. 인터넷 어느 글들에 260여억 원, 150여억 원으로 추산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들의 주장도 너무 편차가 커서 신뢰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15만원이면 대대적으로 독립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무기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이었음에 분명하다. 만약에 마지막 관문에서 그들이 무기 구입에 성공했으면 우리 민족의 독립이 앞당겨지고 동북아의 운명이 바뀌어 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고 애석하다.
가만히 통 큰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1920년도 북간도 독립운동의 무드를 결정한 순수한 열혈청년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전홍섭, 최봉설, 박웅세. 김준의 피 묻은 이름! 북간도 하늘에서 별이 된 이름이다.
아! 아! 북간도 하늘에 뜬 검은 구름에 가려진 맑고 아름다운 별을 본 나는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가!
2022.1. 25일. 화요일. 새벽
우담초라하니 올리다.
미 주
70) 반병률 저⌜홍범도 장군⌟, 248쪽, 한울 아카데미, 2019
71) 김택, 김해진 주필, ⌜연변문사자료 제 5집 교육사료전집⌟, 26쪽,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 회, 1988
참 고 서 적
1. 반병률 저⌜홍범도 장군⌟, 한울 아카데미, 2019
2. 김택, 김해진 주필, ⌜연변문사자료 제 5집 교육사료전집⌟,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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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런 역사적 사실을
이제라도 접하게 된 것이 다행~~~
7인의 열혈 청년들을 기억하라~~~
즐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