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이와의 감격적인 재회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감격 적은 개뿔.. 잔소리만 실컷 듣고 있다.
나보다 어린놈한테 잔소리 들으니까 기분 묘하다. 지가 뭐라고 나한테 화를 내!!
"다, 다 널 위해서였다구.."
"날 위해서 그랬으면 아예 하질 말았어야지. 고생 할 거 뻔히 알면서 다시 뭐요? 연예이인?"
"아, 몰라몰라. 귀찮아귀찮아. 잔소리하지마. 안 들려!"
"아.. 진짜 머리 아파.. 어떻게 여자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냐."
듣자듣자 하니까 저 새끼(헉, 욕 튀어나온다) 너무 하잖아? 누군 하고 싶어서 했냐?
무, 물론 내 돈 욕심 때문에 하기도 했다만.. 그래도 적어도 널 위해서였다고!!
차마 입 밖으로 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나도 이제 와서 느꼈다. 너무 내 욕심이라는 걸..
지금 생각해보니까.. 연예인보다는 일반인이 지천이에게 더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연예인이 되면 기자들은 나를 하나하나 감시하고 과거를 캐낼 것이며.. 그렇게 되면 다시 밝혀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정말 나란 멍청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걸까? 아니.. 어쩌면 하나도 모를 수도 있잖아..(심하다;)
"야, 그만해 유지천. 시빈이라고 무작정 했겠냐? 다 생각이 있어서였겠지~" -후천
후천이가 옆에서 거들며 나를 도와준다. 근데 후천아.. 어쩌냐? 나 무작정 한 거 맞는데.. 흑.
그런 후천이의 말을 듣고는 '후-' 라며 크게 한숨을 쉰 지천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문을 열고는 나가버렸다.
그렇게 후천이와 단 둘이 남게 된 나는.. 지천이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입술을 이로 앙 물고는 눈물을 뚝뚝 흘려버렸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후천이가 깜짝 놀라 살짝 안아주며 위로를 했지만.. 다 필요 없었다.
.. 남자들은 다 똑같애. 지들 위하는 건 알아주지도 않고.. 무작정 화만 내고..
"야, 야 시빈아.. 울지마아- 저 녀석도 화가 나서 그랬을 거야. 연예계가 얼마나 힘든 곳인데.."
"아무리 힘들어도.. 흐으.. 나한테 그러냐 정말?"
"정말 더러우면서 힘든 곳이잖아.. 너 힘든 거 보기 싫어서였을 거야.. 네가 이해해.."
"아이 씨.. 나쁜 자식.. 이.. 너보다 못한 자식.."
"야.. 야! 거기서 내 얘기가 왜 나와!"
"너.. 너까지 나한테 화내? 남자 새끼들은 다 똑같다고!! 흐으.."
"미, 미안. 미안하다니까? 미안하다고 강시빈!!"
......
밖으로 나간 유지천 자식은 돌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 녀석을 찾아 나갈 생각조차 하질 않았다.
내가 왜 나가? 내가 뭐 하러 나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얘 왜 이렇게 안 들어와? 무슨 사고라도 난 거 아니야?"
쌩뚱맞은 한울이의 얘기에 흠칫 놀라서는 바지를 꼭 부여잡았다. 진짜.. 그런 건 아니겠지?
그렇게 한울이와 후천이와 아까 있던 사무실에서 꼬박 3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유지천 녀석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미친 자식 같으니라고. 연예인 주제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후천이 형. 나랑 그 자식 좀 찾으러 나가자.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어떻게 해.."
"그래. 아, 시빈아. 너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 시간도 늦었는데.."
"아.. 응."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하고는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오는 도중에 지천이에게 전화를 10번도 넘게 해봤다.
끊임없이 컬러링 소리만 요란하게 들릴 뿐.. 녀석의 목소리를 끝끝내 들을 수가 없었다.
어디 가서 뭐하고 있는 거냐.. 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니.. 지금.. 뭐하고 있는 거니..
.......
[다음 날]
이상하게도 늘 7시 정도에 일어나던 내가 오늘은 웬일인지 오후 2시가 다 돼서야 일어나 버렸다.
사실.. 어젯밤 잠도 제대로 자질 못했다. 이유는 뭐.. 귀찮은 놈 하나 때문이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새벽 2시쯤에도 전화를 했었지만.. 끝끝내 받지 않는 그 녀석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샤워를 하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차렸다. TV는 언제가 그렇듯 요란스럽게 켜두고 말이다.
냉장고에 딱히 먹을 게 없었던 지라 대충 옷을 껴입고는 동네 편의점으로 들어가 3분 음식들을 대충 샀다.
그리고는 모자를 한 번 벗었다 다시 눌러쓰며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연예신문 1면에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어떤 여자와 낯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순간 나는 내 눈물 믿을 수가 없었다. 저거 저거.. 유지천 녀석이잖아.. 저 녀석하고 다른 여자가 왜..
"저, 저기요. 저 신문 말인데요.. 오늘.. 나온 건가요?"
"오늘 아침에 빠르게 나왔죠 아마? 난리도 아니에요~ 동네 고등학생들이 이미 다 사가고 저거 하나 남았어요."
"무슨.. 내용인데요?"
"유명 그룹에 유지천이라는 사람이 어젯밤에 모르는 여자랑 술집에서 키스를 했다는데.. 그게 인터넷에 뜬 모양이에요. 신문기자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다 기사 쓰더라 구요. 저렇게 대문짝만하게 났으니.. 큰일 터진 거죠 뭐."
친절한 남자 아르바이트생에게서 짤막하게 저 신문기사의 진상을 알아볼 수 있었다.
허어- 어이가 없어서 자꾸 한숨만 나왔고 헛웃음만 피식피식 나왔다.
나는 빠르게 계산을 하고는 신문을 하나 더 사서 집으로 얼른 들어왔다.
그렇게 사온 물건들을 거실에 내팽개쳐두고는 신문을 쫙 펴서 하나하나 읽어가기 시작했다.
평소.. 지루해서 그토록 읽기 싫어하던 신문이었다.
[유명 그룹 J-F의 멤버 유지천 씨가 어젯밤 11시쯤 서울 유명 ▲▲ 술집에서 한 여자와 키스를 하는 낯뜨거운 장면이 포착되어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어젯밤 11시쯤 유지천 은 이미 술에 만취한 상태였으며 그의 옆에는 20대 초반의 여자가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총 20명이 넘었으며............]
결국 끝까지 읽지 않고 얼른 북북 찢어 쓰레기통에 집어 넣어버렸다.
이런 개..... 아오, 정말.. 이거 정말.. 사실 맞아? 아니.. 맞겠지. 저렇게 사진까지 떴는데..
순간 머리끝까지 올라온 분노를 잠재우느라 안간힘을 다 쓰며 주먹을 꼬옥 쥐었다. 도저히 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었다.
뭐랄까.. 머리가 핑 돌고 눈앞이 캄캄하다고 해야할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나를 죽이려 들고 있었다.
그렇게 흥분시킨 마음을 가다듬으려 조용히 소파에 앉아서는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틀어놓고 나간 TV에서도 지금까지 지천이에 대한 기사를 말하고 있었다.
하늘은 날.. 가만두질 않는구나 정말..
......
그렇게 침대에서 약 1시간 정도를 멍하게 누워있었을까.. 또 다시 나의 핸드폰이 진동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울린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이걸로 벌써 35번째다. 전화 건 사람들은 J-F 멤버들이었으며 하비도 그 속에 껴있었다.
그 중 25번 정도는.. 지천이가 내게 건 전화였다. 그래도.. 양심은 있나봐?
지금 걸려온 전화 역시 지천이가 내게 건 전화였다.
그렇게 진동소리가 거의 끝나갈 쯤에서야 나는 조용히 핸드폰을 받았다.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말이다.
"..."
"(누나.. 나, 나야 지천이. 전화 받은 거 맞지. 대답 좀 해봐..)"
"..."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1시간이 지난 후에도 내 화는 쉽사리 가라앉질 않았다.
나만 사랑하겠다고 불과 얼마 전에 다짐한 녀석이.. 이렇게 배신을 쉽게 때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목이 메어 대답할 수도 없었으며.. 대답할 생각도 없다. 여기서 무너지면.. 나만 바보 되는 거다.
"(누나.. 정말 오해야. 진짜.. 나 좀 믿어줘라.. 어? 진짜 기사가 잘못 난 거라니까? 정말.. 정말 난 맹세한다고..)"
"그 기사에 있는 사람이.. 너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어?"
"(그건...)"
그 기사의 남자가 유지천은 확실한 모양이다. 기사가 잘못 났는데 그 기사 속 남자가 너는 맞다 라..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잘 받아들였다고 소문이 나는 걸지..
또 다시 혼란스러워진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지러움이 또 다시 나를 감싸고돈다.
"(나랑.. 나랑 만나서 얘기하자. 그럼.. 그럼 될 것 같단 말야. 제발 나랑 만나서 얘기해..)"
"유지천.. 너 미쳤냐? 나만 사랑하겠다고.. 나면 된다고 한 게 불과 얼마 전이야. 기억 안 나? 기억도 안 나냐?"
"(기억나. 다 기억나. 오해야 정말.. 제발 만나서 얘기하자.. 어?)"
"니 기획사 난리 났을 테니까.. 그거나 잘 정리해. 일 크게 만들지 말고.."
그렇게 난 모질게도 전화를 끊어버렸고 다시는 걸려오지 않게 핸드폰 빠떼리를 빼놓았다.
내가 모진 게 아니다. 그 녀석이 죽을죄를 진 거다. 난.. 절대 잘못한 게 없다. 그것만은 맹세할 수 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오른쪽으로 가서 올라가시면 된다고 한다. 뭐.. 올라가라는데 올라가야지.
201호.. 202호.. 203호..........................301호.
301호 문 앞에는 어엿하게 '유지천' 이라는 이름이 떡 하니 붙어있었다.
장난하는 줄 알았다. 장난이면 다 불러다가 밟아버리려고 했는데.. 아니니까 별 수 없네.
"..."
문을 벌컥 열고는 안의 상황을 살폈다. ..유지천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있질 않았다.
이 자식들.. 혹시 뭐 짠 거 아냐?
그렇게 의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눈을 감고있는 지천이 녀석의 옆으로 다가가 툭툭 쳤다.
"아이 씨.. 누구야아.."
"나다."
몸을 일으켜 세우며 신경질적으로 누구냐고 묻는 놈의 말에 입이 씰룩거렸다. 감히 내 앞에서 빈정대는 말투라니..
"어? 누.."
"시끄럽고. 너..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지. 그걸 못 참고 픽 쓰러지냐?"
"아니 나는.. 계속 기다리려고 했는데.. 솔직히 아파서 쓰러지는 게 내 맘대로 조절 돼? 그거 아니잖아."
"그니까 바보 같이 누가 아픈데 찾아 오랬냐고!"
"찾아가면.. 용서해 줄 줄 알았....지.."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긁적이는 유지천. 너.. 머리는 왜 달고 사냐..
사람이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할 줄 알아야지. 아픈 거 뻔히 알면서 찾아오는 심보는 또 뭔데.
진짜.. 저런 놈을 두고 무뇌아라고 하는 거다. 없을 무. 뇌가 없는 아이. 뇌는 왜 달고 살아 유지천!!
"..무뇌아."
"..헉. 누나 정말 나한테 이래도 돼? 무뇌아? 아.. 충격이야.."
"네가 무뇌아지 유뇌아냐?"
"유뇌아는 또 뭐래."
"됐고, 너 다음부터 우리 집 또 한 번 찾아와 봐. 그땐 다신 니 얼굴 안 본다 나.."
"아씨.. 누구는 가고 싶어서 갔어? 내가 안 가면 사이 더 이상해 질까봐 간 거 아냐! 솔직히 우리 사귄다고 해놓고 사귀는 거 맞아?"
"난 내 입으로 직접적으로 사귄다는 말 안 했는데. 너 혼자 결정하고 생각한 거잖아."
"..어쨌든 누나도 나 좋다며. 나도.. 누나 많이 좋아해. 그러니까 사귀는 거잖아!"
"하여튼 고집하고는.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어쩌자고 나이도 어린 게 술집 가서 키스나 하고 돌아 다니냐?"
나의 말에 잠시 표정이 굳더니 이것저것 생각하는 유지천의 머리와 얼굴. 핑계하나 대보려고 하는 거.. 다 보인다.
네가 아무 핑계나 다 말해봐라. 그 중 거짓말 하나 내가 못 골라내겠냐. 눈치가 몇 단인데.
이래 보여도.. 너보다 오래 살았다 내가.
"아니 그게.. 원래는 내가 그 여자랑 모르거든? 근데 술이 취하니까.. 하여튼 생각은 안 나는데 기획사 쪽에서 공식적으로 사귀는 걸로 하라는 거야~ 근데 그 여자나 나나 술 깨니까 아무 생각 안 들더라고. 그래서 그냥 사귀는 걸로 하되 난 누나랑 예쁜 사랑하겠다 이거지."
스스로 말해놓고도 뭐가 그렇게 뿌듯한지 실실 웃으며 은근슬쩍 넘어가려 하는 유지천.
그래.. 이번 일은 내가 두고두고 기억해두마. 나중에 한 번.. 보자고..
어쨌든.. 저렇게 말하니까 내가 뭐라 할 수는 없다. 술이 취해서 그랬고 서로 잘 해결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화가 난다!! 술을 먹질 말던지. 지 몸 지가 못 챙기는 쳐 먹지를 말던지!
하아.. 후우.. 참자. 그래.. 참자..
"..이번 한 번만 그냥 넘어간다. 다음부터 나랑 사귄다는 걸 빌미로 이상한 짓하고 다니면 죽어 너.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리 집 찾아 와봐. 죽음이야."
"남자친구가 여자친구 집에도 못 놀러가나..(궁시렁)"
"유지천! 너 양다리 걸친다고 신문에 나고싶어? 어? 그러니까 다.신 찾아오지마. 아니, 방송에서도 아는 척 하지마. 알았어?"
"..너무해."
"어디서 귀여운 척이야~ 음.. 괜찮은 것 같으니까 이만 간다. 나 오늘 저녁에 스케줄 잡혀있어서 얼른 준비해야 돼."
"아- 진짜 치사해. 알았어 알았어. 스케줄 늦겠다.. 얼른 가."
"그런데.. 애들은 왜 안 보이냐?"
"스페셜 앨범 녹음한다고 다 갔어. 내 부분은 다 나중에 넣을 거래."
"그래? ........알았어. 잘 있어~"
"..심심하면 핸드폰 문자 해. 전화하면 더 좋고.."
"이 누님은 돈이 없어."
그렇게 싱글싱글 웃으며 문을 쾅 닫았다. 막상 다 해결하고 나오니 기분은 홀가분하다.
진작 해결할 걸 그랬나.. 어쩌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었지만.. 지 몸 관리 못한 저 자식 잘못이 무엇보다도 크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한다.
솔직히 이럴 때면.. 괜히 연예인 했나- 라는 생각이 무척이나 크게 들기 시작한다.
내가 연예인이 아니었으면 아픈 애 혼자 안 두고 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들킨다 하더라도 '사촌 누나 에요' 라고 하면 끝날 일. 그러나 이미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변명할 수조차 없다.
스케줄에 쫓기는 일.. 어쩌면 오늘뿐만이 아니라 항상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연예계라는 걸 은퇴할 때까지..
이미 3년 계약을 맺은지라 쉽게 깰 수도 없는 일이고.. 3년 간은 적어도 시달리며 살아야한다는 얘기가 된다. 연예계라는 곳..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안전하고 재미있는 곳 아니다.
연예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 아무도 모를 걸. 대표적으로.. 서정우 놈의 이야기처럼..
알게 모르게 죽은 사람 만들었다가.. 아직도 인기가 있으니까 자기네들이 죽인 사람 다시 살려 온갖 변명 다 하며 집어넣어 주고.. 이런 게 연예계라는 곳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
그렇게 차로 촬영 현장으로 이동을 하고있는데 매니저가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며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를 꾸벅꾸벅 한다.
오, 오빠! 그러다가 사고나.
보다못한 언니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매니저 오빠를 바라본다.
그렇게 묻는 와중에도 민주는 내 옆에서 와그작와그작 대며 쿠키를 먹는다. 말로는 남자친구가 사줬다고..
나한테는 한 개도 안 준다. 살 쪄서 안 된다는 말이 껴있었지만.. 남자친구가 사준 거라 주기 싫은 거라고 얼른 말하란 말야!
"아아.. 드디어 강시빈 네가 인생을 피는 구나!"
나더러 인생 핀단다. 인생을 펴? 무슨 말이야 대체..
"너 신인이야!"
"나도 알아.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그래~"
"C.. C.."
"씨?"
"CF 들어왔다고! 드디어!!"
"CF?"
그와 동시에 차가 들썩거린다. 코디들이 드디어 미친 것이다. 서로 부둥켜안고는 방방 뛴다.
..드디어 미친 것이다. 정작 나는.. 담담한데..
솔직히.. 연예인이라는 거.. 별로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CF에 관심도 없으니까..
그런데도..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들을 보니 내가 다 행복하다. CF는 찍는 게 매니저나 코디한테 무슨 효과를 주는지는 몰라도.. 기뻐하니까 굉장히 기분 좋다.
........
[스튜디오]
오늘 컨셉은 대충 들어보니까.. 청순한 이미지. 아- 청순 은 나와 너무 동 떨어져있는데..
그래도.. 모델이나 연기자들이 어떻게 청순한 이미지를 하는지 아는가?
물론 하얀 얼굴이나 긴 생 머리 때문에 본래가 청순해 보이는 스타일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메이크업의 진화이다. 메이크업 하나면~ 못하는 게 없는 세상이라니까.
청순이라는 것 때문에 까맣고 긴 머리의 가발을 써야했다. 딱 붙이니까 진짜 머리 같은 게 기분이 좋다. 머릿결이 너무 좋은 거 있지.
"시빈 씨. 고개 좀 들어봐요."
"아.. 네."
진짜.. 뭔가 아는 분이라 그런지 다루는 솜씨부터가 부드럽다. 우악스럽게 찍찍 발라대는 우리 코디들과는 달리. 그렇다고 해서 우리 코디들이 못한다는 건은 절-대 아니다. 절대로. 진짜로. 흐-음.
"피부가 좋네요? 관리 잘 했나봐?"
"관리까지는 아니 구요. 그냥.."
끝에는 말을 아끼며 희미하게 미소를 살짝 지었다.
매니저 오빠의 말 + 코디 두 분의 말씀. 신인은 말을 아껴라.
자칫 잘못하다가 기자들의 귀로 들어가 싸가지 없다는 기사 나면 끝까지 살아남기 힘들다고 한다.
한 번의 이미지가 연예계 있으면서 평생의 이미지를 좌우하기 때문에..
한 번 잘못 박히면.. 나 3일 밤낮으로 잔소리 꼬박꼬박 들어야할 거다.
그래도.. 기획사 쪽에서 날 워낙에 이뻐라~ 해주시니까.. 기분이 좋기는 하다.
내가 유일한 빛이라나 뭐라나~......너무 건방져도 안 된다. 절대 내 얘기는 아니다. 절대.
"머리도 됐고.. 화장도 됐고.. 옷은~ 가만있어보자.."
한 여자 분이 옷을 고른다. 이것저것 들춰보고 내 몸에 걸쳐보고..
그러다가 하얗고 긴 드레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걸로 갈아입으시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니 이 옷은.. 무슨 여신 옷 같다.
길고.. 날씬해 보이는 깨끗한 드레스.. 내가 이 옷을 소화할 수 있으려나..
그렇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사람들이 하나같이 '와~' 라며 탄성을 내뱉는다.
..괘.. 괜찮은가?
"시빈 씨! 너-무 잘 어울린다~"
여자 사진 작가 님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다. 성격은 남자 같고 하는 행동이 남자 같아도.. 속은 여자라니까. 잘 어울린다는 말에 이렇게 기분이 다 좋아지고..
"감사합니다-"
또 싱글싱글 모드다. 나.. 이러다가 성격까지 바뀌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그 애들 만나고 나서 많이 헤퍼졌는데.. 이번에는 너무 착해지는 거 아냐? 아- 걱정이야.
"시빈 씨. 저 쪽에 가서 한 번 서볼래요?"
하늘 풍경에 인상적인 배경 앞에 나를 세우고는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내게 말한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약간 앞으로..
어느새 이런 직업에 익숙해져서 혼자서 잘 해나가는 내 모습을 보자면.. 웃음만 나오기도 한다.
고등학생 때만해도 '나 이렇게 보스로 살래' 하던 게 기억이 나는데.. 보스라는 것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모델을 하고있는 나의 모습이라니..
이래서 오래 살고 볼일이야 라는 말이 나온 건가? 내가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조차 못했다.
그때는.. 모델이 뭔지도 모르고 연예인이 뭔지도 몰랐으니까. 알기야 알았지만 통 관심이 없었으니까.
"선생님. 이번에는 시빈 씨 다른 옷 입히고 촬영해야 할 것 같은데요."
"벌써 5번을 다 찍었단 말야? 아.. 내 정신 좀 봐. 시빈 씨- 다른 옷으로 입고 다시 촬영 들어갈 게요~"
"아.. 네."
"지금부터 30분간 휴식 들어갈게요!"
그렇게 첫 번째 옷 촬영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명을 들고있던 아저씨며 취재하러 나온 취재진이며.. 급하게 카메라와 여러 도구들을 땅에 내려놓는다.
하긴.. 저런 거 계속 들고있다가는 팔 빠지지.
"시빈아, 수고했어. 정말 이번 사진 잘 나오겠다."
"맞아 언니. 이번 꺼 정말 여신 같이 나올 거야."
"비행기 태우지마~ 이상하게 나오면 어쩌려고."
"장담한다니까?"
"알았어. 한 번 나도 기대해 보지 뭐."
이런 식으로 튕기지만.. 은근슬쩍 칭찬 듣는 거 무척이나 기쁜 일이다. 이 세상에 칭찬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렇게 생수를 한 입 꼴깍 마시고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오늘 모델이라 그런지.. 아니면 정말 잘해서 인지.. 주변의 칭찬이 장난이 아니다.
'넌 꼭 성공할 거야.'
'장담한다 내가.'
'청순한 게 무척 잘 어울리네.'
아.. 여러모로 얼굴 빨개지는 순간이다. 만약에 내가 뜨지 못하는 무명 모델이라 할지언정.. 후회는 없을 것 같다. 아니.. 좌절은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실-컷 즐기련다.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대접 받아보나. 신문이나 TV에서 팍팍 띄워줄 때 즐겨야지.
사실.. 나도 내가 망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만큼 자신감 있다는 소리 아니겠어?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이 정말 큰 일이든 정말 작은 일이든.. 일단은 노력과 자신감이 중요한 거라고 본다.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 더 오래 살고 일이 잘 풀리는 법이다. 매사에 툴툴대면 예쁘게 봐줄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그렇게 살려고.. 한 번.. 살아보려고..
이왕 시작한 거.. 멋나게 살아보자 한 번. 최고 인기인 아이돌 스타 유지천의 여자친구는 유지천 보다 아깝다는 소리 들리지 않게.. 한 번 잘 해보고 싶다.
"알았어. 알았어. 다- 인정해. 내가 덜렁거리면서 스캔들 낸 거 인정하고 유지천 잘못도 있다는 거 인정해! 근데.. 근데 너무 힘들잖아. 서로 사랑하는데.. 말도 못하고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이러는 거 정말 힘든 거잖아. 차라리 확 말해버리고 공개적으로 데이트도 하고 그러고 싶은데.. 사람들 시선이 무섭단 말이야.
쟤네들 사귀어? 유지천이 훨씬 아깝잖아.. 나 이런 소리 듣기 싫어 언니. 가요계에 한 획을 그은 아이돌이랑.. 기껏 해서 조금 떴다는 모델이랑.. 뭐가 같아? 나 사람들 시선 무서워. 충분히 무서워. 그런데도.. 그런데도 말하고 싶어! 당당하게. 나 유지천이랑 사귄다! 뭐라고 그러지 마라!"
"..."
"나 진짜 말하고 싶어 죽겠어. 그런데.. 여기저기서 내 입 틀어막는 걸 어떻게 해! 믿었던 기획사 사장님까지 절대 말하지 말라고.. 이미지 깎을 일 있냐고 내 다리 붙들고 말리는데.."
"..그래.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강시빈 너 그냥 말해버려. 나 유지천 사랑한다! 사귄다! 그냥 말해버리라고. 대신.. 연예인생활 하면서 3년 간 고생하고 싶으면.. 그렇게 말 해. 난 절대 안 말려 너."
"..."
"못하겠어? 왜.. 못하겠니?"
"..."
"그깟 포부도 없이 큰소리만 떵떵 친 거야 너? 나이 차.. 기껏 해봐야 얼마 안되지만.. 인생 선배로써 충고 한 마디 하자. 너도 20대의 나이잖아.. 생각할 줄 아는 거 다- 생각하고 똑똑하잖아. 응? 네 미래를 위해서 까짓 것 꾹- 참았다가 나중에 말할 수도 있는 거잖아. 더 뜨고 나서.. 사람들한테 박수 받고 인정받고 나서.. 그러고서 말할 수도 있는 거잖아.."
"..."
"열심히 해보자 강시빈. 열심히 해서 완벽하게 성공한 다음에! 기자회견 멋지게 열어서 사귄다고.. 결혼한다고 밝혀버려 그냥~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알았지? 내 말.. 알아듣지? 지금 힘들어도 꾹 참자.. 꾹 참고.. 견뎌내서.. 멋지게 기자회견 열자."
"..언니 말.. 맞는 말이다. 내가.. 생각이 짧았던 모양이야. 역시~ 인생 선배 말은 거역할래 야 거역할 수가 없다니까.."
"..그래! 내 말 거역하지마. 우리 끝-까지 열심히 하자. 이번에 찍는 CF 대박 나서 완벽한 연예인 될 때까지.."
"..열심히 할게.. 그렇게 할게 언니.."
인생 선배라는 게.. 뭐 있을까? 그냥 나보다 오래 산 거? 오래 살았다고 뻐기는 거?
아니다. 정말.. 인생 선배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닌가 보다.
인생 선배님의 말에 답답했던 가슴이 확 풀어지고.. 기분까지 좋아졌다.
그래.. 지금 말해봤자.. 서로 힘들잖아.. 서로 이것저것 둘러대기에 바쁘고 힘들잖아..
지천이도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하다는데.. 말려야지.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해야지.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멋들어지게 기자회견 열어서 확실하게 밝히자고 해야지.. 그래 야지..
"여보세요? 지천이야?"
......
......
"오랜만이네 서정우? 그간 잘 지냈나보네.. 피부가 뾰샤시-한 게.."
"..기분 안 좋아? 말투야 영- 아닌데?"
"뭐.. 너랑 나랑은 첫 만남부터 그리 유쾌한 인연이 아니었으니까 말야."
"..그거야 그렇지."
"부른 이유가 뭡니까 서정우 씨?"
오늘은 스케줄이 없는 날이나 집에서 빈둥대며 코디 동생 친구들이랑 오이 마사지를 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울리는 핸드폰 덕에 오이 다 떨어졌었다.
그리고 모르는 번호라 고민을 하다가 전화를 받았는데.. 쌩뚱맞게 서정우였다. 그래놓고는 대뜸 나오라나 뭐라나..
그래서..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고는 요 앞 카페로 나갔더니.. 어느새 기다리고 있더라. 무슨 할 말이 있는 건지..
"여긴 사람들 눈이 많은데.. 시빈아. 우리.."
"사람 있어봐야 너랑 나랑 합쳐서 8명밖에 없잖아. 것도 멀리멀리 떨어져있고. 그냥 말해~"
"..그래.. 뭐..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
진지하게 분위기를 잡는 서정우의 표정에 나까지 살짝 굳어져서는 침을 꼴깍 삼켰다.
뭐야 저 녀석.. 갑자기 분위기 잡고..
"너 정말.. 지천이 좋아하기는 하냐?"
"..."
순간 어이가 없어서 말을 하지 못했고.. 그런 나의 행동에 서정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금 내게 묻기 시작했다.
"그럼.. 네가 유지천을 위해 해준 게 뭐야? 너랑 지천이가 잘 되는 건.. 너랑 지천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그룹 전체의 문제가 되기도 해."
"..그래?"
"네가.. 유지천을 위해 해준 게 무엇이며 해줄 수 있는 게 뭐야?"
"..."
가만히 입을 꼭 다물고는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해준 거? 내가.. 해줄 수 있는 거? 뭘까? 뭘.. 해줄 수 있지?
그렇게 약 20초가 아무 말 없이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머리에서 어지러움증을 느꼈다.
서정우가 한 질문이.. 이렇게 머리에 무리를 줄 줄이야..
솔직히.. 내가 해준 거? 해줄 수 있는 거? 아직까진... 없다.
"묵비권이야? 왜 말이 없어? 입 꼭 다물고.."
"..."
"정말 묵비권이신가? 왜 대답이 없는 거야?"
"..글쎄.. 생각해 보니까.. 해줄 수 있는 거.. 없는 것 같다 아직까진."
"그런데도 유지천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그런데 말이야. 사랑이라는 게.. 꼭 주는 것만 사랑일까? 내가 생각해봤는데.. 주는 게 사랑은 아닌 것 같다. 사랑하면 줄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는 거잖아? 솔직히 말해서.. 나 지천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만나면서 잔소리하는 거.. 그것밖에 없어. 이런 소문 아는 몇몇 사람들 수군거림 다 한 귀로 흘려보내면서 사귀는 거.. 그것밖에 없어 나. 그래도.. 지천이 사랑할 수 있어. 사랑 할 꺼야. 지금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꺼야."
"..그래?"
"근데 너.. 고작 이런 이유로 날 부른 건 아니겠지? 고작 유지천의 대한 사랑 테스트하려고.."
"우리 이제.. 활동 접을까- 한다. 아직 기사화 되지는 않았지만.. J-F 해체하고 개인활동 하려고."
"어쨌든.. 기획사에서는 그런 걸 더 원하더라고. 지천이 너랑 사귀는 것도 그렇고.. 그 녀석 곧 아버지 회사로 들어갈 것 같거든."
..아.. 그러고 보니 난 아직까지 지천이의 부모님을 만나본 적이 없다. 아.. 이런..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과연 그 쪽에서 지천이보다 나이 많고 부모님도 안 계시는 나를 받아줄 수 있을까? 아버지 회사? 그럼.. 부자라는 얘긴데.. 그런 집안에 내가 들어갈 수는 있기나 할까? 아.. 이거 고민되잖아..
"저기.. 서정우. 있잖아.. 지천이 부모님이 날.."
"너 아셔. 그리고 곧 보자고 할 생각이 있으신가봐. 네 CF 보고는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시던데? 그리고 두 분 모두 좋은 분이시라 어렵지는 않을 거야. 신세대시거든."
"나를.. 마음에 들어 하신다고?"
"응. 그렇던데? 저렇게 참한 아가씨가 며느리로 들어오면 얼마나 좋겠냐면서.."
"..."
"그때를 맞춰서 지천이가 불어버린 거지. 여자친구라고.. 두 분 모두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시더라. 유지천 같은 놈에게 시집올 여자도 다 있다면서.. 하핫. 지천이가 어렸을 적부터 사고를 많이 쳤잖냐.."
서정우의 다정다감한 말과 더불어 지천이 부모님이 나를 보고싶어[?]한다는 말에 금새 기분이 up! 되어 가지고는 얼굴 가득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이야~ 정말 나를 좋게 생각하고있단 말이야? 참한 아가씨? 그러면.. 청순한 이미지로 밀고 나가야겠네?
어머님 아버님~ 안녕하세요~
뭐.. 이런 식으로. 근데 걸리는 게 있다면.. 고아인 나를.. 어떻게 보실까..
뭐.. 좋으신 분들이니까.. 믿어는 봐야지.
"그럼.. 내 할말은 끝났으니까 이만 간다. 아니다, 집 앞까지 바래다줄게."
"나랑 스캔들 내보게? 그냥 빨~리 사라지는 게 좋을 거다!"
"..흠.. 그런가.."
"얼른 가. 그리고.. 해체나 개인활동 소식 있으면 즉각 연락하고.."
"그래 야지. 기획사에서 해체를 바래서 우울했었는데.. 너 만나고 나니까 조금은 가벼워졌다. 다음에 또 봐!"
"난 싫어..(궁시렁)"
내 목소리를 못들은 서정우는 손을 휙휙- 흔들며 모자를 쓰고는 얼른 사라져버렸다.
가다 걸려라! 아니면.. 내가 나가서 소리칠까?
'꺄아~ 서정우야~ 어떡해!!'
생각 같아서는 하고싶다만.. 난 청순한 CF 모델이잖아? 아버님 어머님 만나기 전까지는 청순으로 밀고 나가야지.
.......
.......
오늘은 정말 엄청난 날이다. 전국 각지에 있는 J-F 팬들이 서울 시내에 모인 날.
바로.. J-F가 해체 된 날이다.
기자회견은 생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갔다. 소식 또한 무척이나 빨랐다.
이미 해체의 조짐이 보였고 예감하고 있었던 J-F 팬들은 일지감치 서울 가장 큰 시내에 모여 시위를 할 생각이 있었고, 기자회견을 방송한 오늘.. 드디어 수많은 팬들이 시위를 하게 되었다.
경찰이 수도 없이 모인.. 그야말로 대규모 시위였다.
지금 무엇보다도 힘든 애들은 멤버들인데.. 팬들은 왜 마음을 몰라줄까?
계약기간도 짧게 한 지라 이제 곧 다른 기획사로 다들 갈라지게 되어버린다. 이상하게 재계약이 없는 기획사라..
어찌됐건.. 우는 팬들 때문에 더욱 더 힘들어하는 건 그 애들인데..
나는 알고 있다. 그 애들이 얼마나 팬들을 사랑했는지..
아프면서 내색 한 번안하고 늘 웃는 모습만 지어 보이며 손을 흔들던 그 애들이 얼마나 팬들을 사랑하는지..
왜 모를까. 팬들은.. 서로 통한다면서.. 천생연분들이라면서.. 대체 왜 모르는 것일까.. 그 애들의 마음을..
"정말 파장이 크긴 크구나.. 저렇게까지 시위하는 걸 보면.."
TV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언니가 한 마디 툭 던진다. 파장이.. 크긴 크지요.
쟤네 들이 누구입니까. 그 유명한 아이돌 J-F의 팬들 아닙니까.
수많은 일들로 구설수에 오르고 기사에도 수도 없이 난 팬 애들이었지만.... 가엾다.
히끅-거리면서 펑펑 우는 게.. 너무나도 가엾다. 대체.. 가수라는 게 너희들에게는 무슨 존재니?
내가 유지천이랑 어울려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이야.. 너희들이 목숨보다 그 애들을 사랑하니까..
가수들도 사람이라 언젠가는 짝을 찾아 결혼하겠지.. 그런데.. 그 사랑이 너희들만 할까? 그 사랑이.. 팬들만 할까?
내 자신이 조금은 부끄럽고 실망스럽다. 너희 팬들만큼 눈물 펑펑 쏟아내며 죽겠다고 할 정도로 지천이에게 잘해주지 못해서..
단지 팬이라는 이름이 접근하기 어려울 뿐이지? 나처럼 팬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 집단 중 한 명은 지천이 옆에 있겠지? 물론.. 지금은 내가 있지만..
"언니. 대체 연예인을 저만큼 사랑하는 이유는 뭘까?"
"내가.. 예전에 연예인을 좋아한 적이 있었는데.. 물론 아직까지 좋아해. 그 가수 콘서트를 보러 갈 정도로.. 근데.. 예전만큼은 아니지. 사랑하는 애인도 있고 그러는데 그 가수가 얼만큼 소중하겠어.."
"..아.. 응."
"그런데 말이야.. 추억이라는 게 있잖아. 풍선 들고 사진 들고 이리저리 쫓아다녔던 추억이랄까.. 다른 팬들과 머리채 잡고 싸우던.. 그런 추억이랄까.. 하여튼 상당히 재미있고 좋았던 추억 같아. 그때는 그 분 아니면 결혼도 뭐고 하기 싫다고 다짐했는데.. 지금은 아니야. 그냥.. 사랑하시는 분이랑 잘~됐으면 하는 바램? 뭐.. 그 당시 팬들이었던 사람들 중에서 결혼한 사람도 꽤 되지 아마? 나도 멋지구리한 애인이 있고~"
"단순한 추억 때문에 저렇게 울고불고하며 매달리는 거야?"
"추억보다 더 중요한 건.. 마음을 뺏겼다는 거겠지. 어느 순간 자신의 가슴속으로 들어온 저 사람들에게.."
나는 연예인의 팬을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오, 그 가수를 팬으로써 사랑한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저렇게 애처롭게 울며 노래부르는 저 사람들을 보는 순간..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연예인이 맞고 아니고를 떠나서.. 마음을 뺏어간 사람이니까.. 꼭 지키고 싶다는 것..
저들이 사랑하는 연예인은 TV를 통해 나오는 사람들이니까.. 그것마저 놓치기 싫은 심보가 아닐까?
아니지. 심보가 아니라.. 마지막 간절한 소원일 것이다..
팬들에게는.. 그 사람.. 혹은 그 사람들이 아니면 안 된다는 공식이 머릿속에 콱 박혀 있기에..
진정으로 새로운 사랑이 나타날 때까지 그들을 지키고 싶어하는.. 소녀 팬들의 마음이 아닐까.. 하는 그런 작은 생각..
그렇게 오늘 하루는.. 시끄럽고 애처로운 하루였다.
이렇게 하루 하루가 지나면.. 언젠가는 평화로워지겠지. 이 세상이나.. 그들의 마음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