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원선생 상소문] 상의정부진함양마천면설둔폐서(上議政府陳咸陽馬川面設屯弊書) 마지원(馬志遠) |
함양신문ㅣ 기사입력 2022/02/21 [10:49]ⓒ 함양신문 |
의정부에 함양마천면 설둔 폐단을 진정하도록 올린 글 마지원(馬志遠) |
咸陽素是偏小崍邑而民戶都數不過爲四千三百戶田結摠計亦不過三千九百結而馬川一面居其半焉若以馬川乃爲折授設屯之地則咸陽一邑因此而必不成樣寧革罷付屬它邑之外更無他樣底道理况且馬川處在智異之下深邃隱僻官令不能行且其居民頑悍不知官家之爲何如各道各邑流亡藏蹤之類相率來居故嘯聚奸究之徒多發於此殺掠之患比比有之是以巡營與本官深慮爲治之難矣今若猝然設屯作爲宮家之所掌處則其爲居民投入宮屬籍其宮勢自行自止本官尢不能下手號令於其間而惟彼一面變爲化外無人之別區域竊惟爲民教導歸善之方已不暇論而來頭無窮之弊將生馬川折授設屯與不於志遠實不爲大關躡處而邑弊蝟集難保之患必立至此豈非歎惜之甚者乎且伏念 朝家以咸陽有八良嶺要隘之重地乃於己酉年間陞爲府使蓋八良爲地亦在馬川之界西抵雲峯南接河東求禮距本府三十餘里則馬川之於八良豈不重且要哉當其陞號之時只是陞號而已曾無壤地器具加設之事故仄聞前後來守此土者皆欲廣拓地方添益物力大壯其形勢鞏固其嶺隘之計者無他蓋莫非爲 國禦㬥之遠慮而事非容易變通者故徒懷恨惜式至今日然而識者慨然固已久矣今若分割馬川設爲宮屯則當初陞府使設置之意果安在哉茲將折授難便之梗槩如是陳達而其餘小小爲弊者將欲畢陳則恐涉煩瑣略陳委折伏愿細垂察焉 만운공(晩雲公) 마지원(馬志遠)은 태종(太宗) 때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 충정공(忠靖公) 마천목(馬天牧)의 11세손이고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한 이조참판(吏曹參判) 문간공(文簡公) 마승(馬勝)의 10손이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한 절충장군(折衝將軍) 충신공(忠臣公) 마정립(馬挺立)의 증손(曾孫)으로 나라의 충효에 대하여 많은 노력을 했고 조선후기 학자로 후학을 가리켰던 훌륭한 인물이다. 마지원은 서기1720~30년대 영조(英祖) 초기 당파로 어지러운 세상에 많은 상소와 폐단을 지적하여 조정과 영조임금에게 직접상소를 올려 폐단을 바로잡고 올바른 정사를 펴 기아에 굶주려 죽은 백골이 낭자하여 불쌍한 백성들을 위한 애민정치와 덕치로 백성들이 편안히 잘 살 수 있도록 하라는 많은 상소(上疏)의 글을 써서 올렸다. 마지원은 조상대대로 서울에서 살면서 헌릉참봉(獻陵參奉)을 지내셨고 만경현감(萬頃縣監)을 제수 받아 함양과 어떤 관계도 상관없었던 사람이었는데 함양을 위하고 함양백성들의 고통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마지원의 아들 되시는 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 양암공(陽岩公) 마진광(馬震光) 선생이 그 많은 조선의 땅 중에서 마침 함양으로 이사를 오게 되어 함양읍 신관리 기동마을을 처음 개척하여 지금까지 그 자손들이 300여년이나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함양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자식에게 함양에 가서 살라는 예언이라도 한 것 같은 모양세가 되었다. 이 상소를 처음으로 밝히는데 함양의 마천면 설둔의 폐단에 대한 글로 마지원선생이 남긴 유집인 만운유고(晩雲遺稿)가 있다. 그것을 번역하다가 함양마천에 대한 글을 발견하여 읽어본즉 함양 마천에 설둔(設屯)과 절수(折授)에 백성들은 모두 종복(從僕)으로 전략하고 그 폐단은 매우 심각하여 백성들의 굶주린 삶의 고통이 될 것이라며 또 팔령은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 무한한 성장할 수 있는 자산이 우려되며 함양 고을수령의 령(令)이 서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그 폐단을 잘 살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이다. 아마 그때부터 지금까지 함양을 사랑하시고 무한한 가치가 있는 나라의 보물창고인 함양과 함양국민들이 잘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여전할 것으로 믿어진다. 만운공 마지원선생은 나의 7대 조부(祖父)로 유집을 번역하면서 내가 탄생한 유서 깊은 성리학의 본고장 아름다운 나의 고향산천인 함양마천에 대한 글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어서 최초로 함양주민들과 함께하고자 이 글을 기고한다. 上議政府陳咸陽馬川面設屯弊書 마지원선생의 상소한 번역내용 함양은 본래 협소한 산골 읍으로 일반민가의 총합한 수가 불과 4,300호 전결로 총계 또한 불과 3,900결이 되고 마천의 한 면에 사는 사람이 그 절반입니다. 만약 마천에 설둔의 땅을 나누어 절수한다면 함양의 한 읍에서 이것으로 반드시 모양을 이룰 수 없습니다. 차라리 혁파하여 타읍 밖의 다른 부속으로 다른 모양밖에 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물며 마천이라는 곳은 지리산 아래로 사람의 왕래가 드문 깊숙한 곳에 있어 관청의 명령을 행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곳에 사는 주민은 사나워 관청에서 하는 일을 알지 못하므로 어찌 각도와 각 읍의 유랑자나 종적을 감춘사람들과 같겠습니까? 옛날부터 여러 사람을 이끌고 오고 서로 불러와서 모여 살던 곳으로 부정이나 협잡의 무리들이 자주발생해서 약탈과 살육의 근심이 흔히 일어나고 이로써 순영과 더불어 본 관아에서 깊이 생각하며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지금 만약 갑작스럽게 궁전이 맡아보는 곳의 설둔을 만들면 그 곳에 사는 주민들을 투입하여 궁에 딸린 종 신분으로 기록하게 됩니다. 궁의 세력이 자기 마음대로 했다 그쳤다 하여 본관은 더욱 그 사이에서 명령으로 손쓸 수가 없습니다. 저 한 면이 변하면 외딴지로 변하게 됩니다. 사람이 특별한 지역에서 도둑이 없는 것은 오직 백성들을 가르치고 인도하기 때문에 선한 방향으로 돌아가는데 이를 논할 겨를이 없을 뿐입니다. 다가올 앞날에 무궁한 폐단이 장차 나타나 마천에 설둔을 나누는 절수와 더불어 뜻이 원대하지도 않고 실지로 큰 관문에 도달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고을의 폐단이 한꺼번에 많이 모여 환란을 보호하기 어려워 반듯이 이러한 폐단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어찌 탄식하며 애석히 여김이 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삼가 생각하건대 조정에서 함양에 있는 팔량령이 요충지의 중요한 땅입니다. 이에 기유(1729)년 사이에 부사로 승격되어 모두 팔량 땅이 되었습니다. 또 마천의 경계로 서쪽은 운봉과 남쪽으로 하동, 구례는 본부와의 거리가 30여리로 마천이 있는데 팔량이 어찌 중요하고 또 요충지가 아니겠습니까? 승격될 때를 당하여 다만 이 승격으로 일찍이 기구를 더 설치하는 일에 토지가 없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고을수령이 온 전후로 얼핏 소문을 듣고 토지는 모두 땅을 개척해서 넓게 하고자 하나 더 많은 이익의 물적 재료 힘이 크게 장성하는 그 형세가 굳고 튼튼하여 험준한 요충지 영애를 계획한 것으로 다른 방법이 없어 어찌 하지 않을 다름이 없겠습니까? 나라가 포악한 앞날을 생각하여 방지하고 쉽지 않은 일을 변통하는 것은 자고로 무리들의 가엽고 애석한 한을 품는 식으로 오늘날 그렇게 알고 있는 자에 이르러 그런 강개함이 진실로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마천의 설치한 궁둔을 분할하면 당초에 설치의 뜻으로 부사로 승격시켰는데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이는 장차 절수의 어려움이 편의상 대개 이와 같아서 진술하여 알려드립니다. 그 나머지 소소한 폐단은 장차 염려하여 자질구레한 진술을 끝내고자 하는데 간략히 진술한 곡절을 삼가 바라옵건대 세밀하게 굽어 살펴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八世孫 硄德 永鉉 譯 (8세손 광덕 영현 번역) |
[마영현] 무신난(戊申亂)을 평정한 의병장 만운공(晩雲公) 마지원(馬志遠) 포고문(布告文) |
함양신문ㅣ 기사입력 2022/10/04 [11:31]ⓒ 함양신문 |
무신역변유도내문(戊申逆變諭道內文) (무신1728년 역적의 변란에 도민을 깨우치게 하는 글) 缺 天地之常經君臣之大義神人之同憤叛逆之凶慘凡在含生之類豈不思致討乎今我 聖上以堯舜傳授之法承明旨於慈闈體仁化於靈考八域謳歌孰不願戴顧玆小醜作此前代所無之逆其忘君負國之罪可勝誅哉昔南越尉佗之黃屋左纛後秦苻堅之投鞭濟河勢力强㬥比諸此賊不啻百倍而尉佗之頭終懸北闕之下苻堅之師卒潰淝水之上此豈非天定勝人者乎嗚呼廟堂文武與監兵守宰徒知食肉之爲貴不知經國之猷謀坐視讎賊終無施計此豈非吾輩之羞恥乎惟我三南素稱人才之府庫士林之淵藪當此賊臣亂倫之日豈無一介忠義之士乎今此志遠方倡義旅討賊而素乏才智人微權輕大事不可以獨辦故敢以此意通告於各郡父老豪傑伏願僉君子體 列聖培養之恩憤義士慷慨之志各率所親奴僕今月晦日齊會于全州府聲勢數罪則不怒之威嚴於鈇鉞賊雖强㬥安敢抗拒於堂堂義陣乎無失天討誅凶是期千萬幸甚 빠짐 하늘과 땅 간의 지켜야할 떳떳한 올바른 도리는 임금과 신하가 마땅히 행하여야할 큰 의리이고 신과 사람도 매한가지이다. 분하도다! 반역의 역적은 흉악하고 참혹하도다. 무릇 살아있는 무리들을 어찌 다 쳐서 토벌하지 않겠는가? 지금 나는 성스러운 임금님께서 요,순임금의 법을 전수하였고, 임금님의 뜻을 받들어 자상한 어머니의 어진 몸에서 숙종임금이 감화되어 조선 8도가 기뻐 노래 부르니 누군들 이때를 살펴 되돌아보려하지 않겠는가? 미천한 무리들이 이 지경을 만들어 이전시대에 없었던 역적들이 그 임금을 잊어버리고 나라를 저버린 죄 어찌 모두 다 죽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옛날 남월왕 위타는 황옥과 좌독으로 지위가 대단했고, 후진의 부견은 채찍을 던져 강물을 막아 강을 건너서 세력이 강하고 사나워 이 모든 것에 비해 역적이 백배나 더 많을 뿐이 아닌데도 위타의 머리는 마침내 왕궁의 북쪽 문 아래에 달렸고, 부견의 군사들은 비수위에서 궤멸되어 죽었다.” 이 어찌 하늘이 정하여졌는데 사람을 이기지 못하겠는가? 아아! 조정의 문무대신과 더불어 감영과 병영의 지방관 무리들은 기름진 고기를 먹는 것만 귀한 줄 알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좋은 계책을 알지 못하여 역적원수들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끝내 계책에 대한 실천행동에 따르지 않았다. 이 어찌 우리들은 창피하고 부끄럽지 않겠는가? 아! 우리 삼남인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는 인재의 창고로 잘 알려졌는데 사림의 현사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이 반역의 신하들이 인륜을 어지럽게 하는 날을 당하여 어찌 보잘 것 없는 나라의 충성과 절개의 의리가 있는 올곧은 선비가 없겠는가! 바로 지금 여기에 나 자신 마지원은 의병을 일으켜 역적을 토벌해야겠다. 본래 재주와 지혜가 있어도 지위가 낮고 권력이 작아 큰일은 할 수 없으나 혼자서 모든 것을 다 처리하였기 때문에 감히 이것으로써 각 군 원로와 호걸들에게 널리 통지하여 알리는 뜻이다. 삼가 바라옵건대 여러 올바르고 점잖은 사람들과 몸소 역대 여러 임금께서 잘 보살펴준 은혜로 의리와 절의를 지키는 사람들로 솟구치는 정의감과 적개심이 있는 뜻으로 분노하여 각기 남자 종들을 친히 인솔하고 이달 그믐에 모두 모이는 것은 전주부의 명성과 위세로 여러 가지 범죄에 꾸짖지 않아도 위엄이 작두와 도끼보다도 더 두렵기 때문이다. 역적은 비록 무자비하게 잔인하고 사나우나 어찌 감히 당당한 의병의 병진에 저항하리오! 하늘은 역적을 토벌하고 흉악한 자를 죽이는 것을 결코 잊어버림이 없다. 이 기간이야말로 천만 대행이겠노라! - 나의 고향 함양은 조선시대 무신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무신난의 역적 충청도의 이인좌(李麟佐) 경상도의 정희량(鄭希亮), 전라도의 박필현(朴弼顯) 등으로 나라가 온통 어지럽고 심지어 청주의 감영을 지키던 병마절도사, 장군, 우후 등을 죽이고 이인좌의 역도들에 함락되었다. 그 당시 경상도에서도 정희량의 무리들이 거창, 함양을 함락시키고 추풍령을 내달려 이인좌 박필현 무리들과 합세하여 서울로 진격하려 했었던 영조 4년 1728년 무신년의 변란이다. 이로 인하여 안음현(안의)은 함양, 거창, 합천으로 분리시켜 현(縣)을 없애버리고 함양은 역적의 고을로 전락되어 가혹한 형벌이 내려져 가히 함양의 고통과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나의 7대 조부 만운공(晩雲公) 마지원(馬志遠) 할아버지께서 무신봉사(戊申封事)의 상소(上疏)를 영조임금에게 직접 올리는 글에 의하면 “역수들은 법에 따라 처형을 하되 나머지 시골사람들은 무지한 사람들이라 법이 엄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용서하고 어진정치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것이 은혜라고 이므로 가혹한 지방의 형벌을 거두어 달라”는 상소를 임금에게 아무도 보지 못하고 오직 임금만 볼 수 있는 봉사(封事)의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므로 함양은 7년만에야 비로소 사면되고 복권되기에 이르러 함양이 다시 예전모습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만운공 마지원은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포고문을 작성해서 호서(전라도, 충청남도)의 각 고을에 수령에게 보내 방을 붙여 역도들에 저항하라는 격려를 하고서 전주감영에 말을 타고 들어가 전주감영 이현록(李顯祿) 관찰사와 함께 병사들을 모으고 훈련을 시키며 병기를 연마하고 장비를 마련해서 역도인 태인현감(泰仁縣監) 박필현의 공격을 막아내고 승리하였다. 연이어 대대적으로 역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청주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러한 일례의 일들을 만운공 마지원의 일기에 기록되어 전하고 호서지역에 포고문을 전한 기록이 남아 있어 처음으로 발표를 한다. 일기에 의하면 1728년 무신년 3월 12일 서울에서 말한 필에 동자를 데리고 전주로 가서 생원 만곡(晩谷) 이우제(李宇濟) 집에 머물며 다음날 정읍 논산을 지나 유숙하고 3월 16일 공주로 가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피란을 가며 이상한 소문이 돌고 흉측한 뜬소문이 나 청주가 함락되었고 곧 공주도 함락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어 18일 관아에서 찾아와 청주에서 보내온 공문서 보여주므로 15일 청주가 함락되었던 것을 실로 알게 되었다. 그러자 울분을 토하며 곧장 전주감영으로 들어가 “지금까지 역적이 몸소 관아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모두 다 간담이 서늘하여 통곡하고, 삼남의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수 천리의 땅에서 일찍이 남자 한사람도 없었던가? 청주의 진영장을 지키는 병사와 같은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아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순국자라고 말할만하다. 죽음이 어찌 부끄러울 수 있겠는가?” 하고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격려하며 공문의 포고문을 써서 생원 만곡 이우제에게 각 고을에 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반역의 변란이 일어나는 날을 당하여 삼남인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에서 여론을 들끓어 요란하게 한 모든 군은 호응하므로 국가는 위태롭고 어지럽다. 또한 피를 흘려 죽음을 염려하나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는 것은 부끄럽지가 않다. 살아서는 공신의 자손을 위해 기리는 누각에 이름을 써서 넣는 영광이 있을 것인데, 어찌 대장부의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격려했다. 그런 사이 서울의 집에서 사내종 수복이 찾아와 편지를 보내왔는데 내용이 나라에 변란이 생겼으니 빨리 집으로 오라는 서찰이었다. 그러자 만운공 마지원은 단호하게 “내 일찍이 스승에게 학문을 배우러 나아갈 때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라는 글자로써 나는 47년간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충효의 도를 나타내 본적이 없다. 마땅히 이 변란이 일어난 날에 나라가 위태로워 아침에 저녁 일을 생각할 수 없어 나는 마땅히 나라가 어지러운데 힘써야 하고, 너희들은 마땅히 학문을 잘 닦아 조상들이 남긴 유업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며 종을 돌려보내며 죽음을 각오하고 역적들에 항거하여 태인현감 박필현의 공격을 막아내고 4월 10일에 대대적으로 청주를 공격하려고 이현록 감사와 함께 병사를 훈련시키고 병기를 갈고 닦는 중에 한 장의 공문서를 받아보니 만운공 마지원의 포고문을 보고 모든 역도들이 도망가고 흩어져 모두 격파되었다고 전하므로 이로써 모든 무신난이 평정되었다. 이리하여 나의 7대 조부 만운공(晩雲公) 마지원(馬志遠)께서 직접 작성하여 각 고을에 통지문을 알리고 방을 붙인 포고문을 함양신문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인다. 함중 26회 마영현 의병장(義兵將) 마지원(馬志遠) 書 |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5년 기미 > 4월 13일 > 최종정보
영조 15년 기미(1739) 4월 13일(기축) 맑음
15-04-13[21] 술업에 능통한 사인 마지원을 군직에 붙이기를 청하는 봉릉도감 도제조의 계
또 봉릉도감 낭청(封陵都監郞廳)이 전하는 도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능소(陵所)에 역을 시작할 때 풍수를 잘 아는 자 한두 사람을 엄선하여 데리고 가서 간역(看役)하도록 일찍이 여쭈어 정하였습니다. 사인(士人) 마지원(馬志遠)은 술업이 정밀하고 밝아 데리고 가도록 가정(加定)하였는데, 이미 직명(職名)이 없으니 해당 조로 하여금 구전 정사로 군직에 붙여 관디 차림으로 항상 사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성환 (역) | 2021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5년 기미 > 4월 14일 > 최종정보
영조 15년 기미(1739) 4월 14일(경인) 맑음
15-04-14[11] 민정 등을 부사과 등에 단부하였다
병조가 구전 정사를 하여 부사과(종6)에 민정(閔珽)을, 부사용(종9품)에 마지원(馬志遠)을 단부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성환 (역)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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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헌 책제목 :晩雲遺稿 : 幷附錄 馬志遠 著 [刊寫者未詳] [1922] 비치일 : 00020101 청구기호 : 古3648-19-2
卷二 上議政府咸陽馬川面設屯弊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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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집(勉菴集) 최익현(崔益鉉)생년1833년(순조 33)몰년1906년(고종 43)자찬겸(贊謙)호면암(勉菴)본관경주(慶州)소자기남(奇男)특기사항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학자이자 의병장
勉菴先生文集卷之十八 / 序 / 晩雲遺集序
仁人君子。不忍恝然於國憂民計之疎漏闕略。而或寓於慷慨論議。或發於疏章獻啓。决非枉道而干譽。衒玉而求售也。其視天下國家。無一物而非吾心之所當愛。無一事而非吾職之所當爲。雖或勢在韋布之列。而所以致吾君於堯舜。奠斯民於衽席者。亦未嘗不在其分內也。然道有升降。世有汙隆。而不可以一例斷定。則出處語默。一以吾心之權衡而不隨俗低仰。亦守身之大防。吾於是知晩雲馬公之贒也。蓋公以忠孝世家。身居溝壑。而心懸王室。職在郞啣而自任甚重。其所上封事及廟堂方伯之書。類皆知無不言。言無不盡。一是出於愛君憂國之誠。而無毫髮強勉安排。當於古人中求。而視今之見利忘義。販君賣國者。又不啻天淵龍猪之相懸也。及其歸之以常談文具。而不見施用。則便翛然斂退。不出門庭三十年者。尤以見所守之確然也。後孫東碩。以其遺集之將入梓也。扶老踏趼。徵序於余。噫。先祖所居之地。一泉一石。所讀之書。一板一墨。尙可敬止而不衰。况精神心術之所寓。平生行事之所載。而可任其泯沒無傳乎。書云肯堂肯構。詩曰夙興夜寐。無忝爾所生。君其信矣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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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백헌집(老柏軒集) 정재규(鄭載圭)생년1843년(헌종 9)몰년1911년자영오(英五), 후윤(厚允)호애산(艾山), 노백헌(老柏軒), 회송(晦松)본관초계(草溪)특기사항기정진(奇正鎭)의 문인. 馬志遠의 「晩雲遺稿」
老柏軒先生文集卷之三十七 / 跋 / 晩雲馬公遺集跋
馬志遠의 「晩雲遺稿」 등 문집에 대한 발문
竆經將以致用也。世之學者。朝暮於經傳。而於當世之務。蓋昧昧也。昔人所譏束之高閣以待天下太平者。未必非自召也。今晩雲馬公早從儒賢之門。其於專經之業。聞之宜稔矣。而其所上封事及廟堂方伯之書。皆切切於時務之急。而又皆本之正心修身。若公眞所謂竆經者耶。使公致位當務。則做說之必相似。非臆度所料。而雖使識務辦事。號稱豪傑者論之。必不以公爲束閣以待之人物。嗚呼賢矣。公以忠勳世家。常懷報國之念。及値戊申逆變。聞賊陷淸州。馳入完營。上告方伯。下諭士民。倡義鍊兵。行將討賊。已而聞賊平而止。公之氣義。於此可見矣。惜乎無時無命。官止一命。而送老湖山。起遐想於孤雲也。其後孫東碩收拾遺文。誤以弁卷見託。載圭陋矣無聞。何敢玄晏。子雲,堯夫世自有人。姑書所感于中者。俾歸以俟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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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889책 (탈초본 48책) 영조 15년 4월 13일 기축 23/34 기사 1739년 乾隆(淸/高宗) 4년職名이 없는 馬志遠에게 軍職을 붙여주어 冠帶常仕하게 할 것을 청하는 封陵都監郞廳의 草記
○ 又以封陵都監郞廳, 以都提調意啓曰, 陵所始役時, 曉解風水者一兩人極擇率往看役事, 曾有稟定矣。士人馬志遠, 術業精明, 以加定率往, 而旣無職名, 令該曹口傳付軍職, 冠帶常仕, 何如? 傳曰, 允。
영조 15년 기미(1739) 4월 13일(기축) 맑음
15-04-13[21] 술업에 능통한 사인 마지원을 군직에 붙이기를 청하는 봉릉도감 도제조의 계
또 봉릉도감 낭청(封陵都監郞廳)이 전하는 도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능소(陵所)에 역을 시작할 때 풍수를 잘 아는 자 한두 사람을 엄선하여 데리고 가서 간역(看役)하도록 일찍이 여쭈어 정하였습니다. 사인(士人) 마지원(馬志遠)은 술업이 정밀하고 밝아 데리고 가도록 가정(加定)하였는데, 이미 직명(職名)이 없으니 해당 조로 하여금 구전 정사로 군직에 붙여 관디 차림으로 항상 사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성환 (역)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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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889책 (탈초본 48책) 영조 15년 4월 14일 경인 12/17 기사 1739년 乾隆(淸/高宗) 4년閔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兵曹口傳政事, 副司果閔珽, 副司勇馬志遠。
영조 15년 기미(1739) 4월 14일(경인) 맑음
15-04-14[11] 민정 등을 부사과 등에 단부하였다
병조가 구전 정사를 하여 부사과에 민정(閔珽)을, 부사용에 마지원(馬志遠)을 단부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성환 (역) |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