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김상옥 의거 터 (서울 종로구 종로 65, 종로2가 8-4)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김구, 이동휘, 조소앙 등을 만났고, 자신의 성격에 맞는 무력항일단체인 의열단 에 가입한다
그리고 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을 지원받아 서울에 잠입,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조선인 탄압으로 악명 높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피신한다
김상옥을 추적하던 일경은 그가 삼판통(현 후암동) 의 매부 고봉근 집에 은신해 있음을 탐지하고 종로 경찰서 우메다(梅田), 이마세(今瀨) 두 경부의 지휘 아래 20여 명의 무장경찰로 은신처를 포위했다
1월 17일 새벽 3시였고, 일경과 대치하다가 김상옥은 은신처를 탈출한다
절(금호동 장안사)에서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 하고 하산한 김상옥은 18일은 무내미[수유리(水踰里)] 이모 집에서 잤고 19일 새벽에는 삼엄한 일경 의 경계망을 피해 효제동 이혜수의 집으로 옮겨 은신에 들어갔다
그러나 1923년 1월 22일 새벽, 최후의 은신처도 일경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동대문서 고등계 주임 구리다(栗田) 경부가 이끄는 결사대 맞서 3시간 반에 걸친 총격전을 벌였다
중과부족인 상태에서 마지막 탄환이 재인 권총을 머리에 대고 김상옥은 방아쇠를 당겼다
10시 30분, 7시부터 시작된 총격전은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김상옥 의거는 두 달 후가 되어서야 <동아일보> 에서 호외로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 한성전기회사 사옥 터
일제강점 이후 1915년~1929년 동안에는 독립지 사를 탄압하는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건물로 사용 되었고, 1930년부터는 체신국 사무실로 사용되었 다
처음 한성전기회사의 전차 부설은 서울 남대문에서 종로와 동대문을 거쳐 홍릉에 이르는 노선이었다
그러나 공사 진행 중에 시발지점이 새문 밖, 지금의 적십자병원(서울 종로구) 남쪽으로 바뀌게 되었고, 1898년 9월 경희궁(慶喜宮) 앞에서 기공식을 가진 후 결국 미국인의 소유로 넘어간 이 회사는 전차 운행에 필요한 선로 부설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899년 5월 4일 한국 최초의 전차 구간이 정식 개통됐다
이때 건설된 구간은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에 이르는 약 8km의 단선 궤도였다
- 1887년 03월(고종 24) : 대한민국 최초의 전기 점등(경복궁 건청궁)
- 1894년 05월(고종 31) : 경복궁 내 병기창에 제2전등소 준공 (이를 통해 창덕궁에도 최초로 점등 개시)
- 1898년 01월(광무 2) : 한성전기회사 설립
- 1899년 05월(광무 3) : 서울시내 전차시승회 및 개통식(동대문 ~ 신문로)
- 1900년 04월(광무 4) : 종로에 가로등 3등을 점등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점등)
- 1904년 08월(광무 8) : 한성전기와 콜브란의 합작회사
- 1905년 06월(광무 9) : 인천의 일본인 중심 인천전기주식 회사 설립하여 최초의 수력발전소 운산수력 준공 (660마력, 500 kW)
1936년 옛 건물의 모습을 모두 버리고 다시 지었지만, 이마저 1936년에 지어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지 못하고 원래 2층이던 건물이 4층으로 증축되었다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장안파'가 똬리를 틀었던 곳이 이 건물이다
'장안파'란 말도 건물의 이름에서 나왔으며, 장안파 공산당은 해방 후 남북한을 통틀어 최초로 결성된 정당이다
♤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
1898년(고종 34) 1월 한성에서 전차, 전등, 전화 사업을 위해 설립된 회사
회사의 모든 사업은 미국인 콜브란(Collbran)·
보스트윅(Bostwick)과 맺은 도급계약으로 이루어 졌다
이러한 운영은 당시 대한제국 정부의 친미의뢰정책
때문에 가속화되었다
특히, 콜브란·보스트윅과 도급계약을 맺을 때 회사 의 전재산과 이권까지도 담보로 제공, 그 소유권마 저 박탈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공사비용을 상환하지 못하게 되자, 회사소유권 의 일부가 콜브란·보스트윅에게 넘어갔다
1904년 7월 회사의 명칭이 한미전기회사(韓美電氣會社)로 변경되면서 콜브란·보스트윅은 공사 도급업자에서 주도적인 소유자로 부상하였다
그 뒤 1909년 콜브란이 이 회사를 일본의 국책회사 인 일한와사회사(日韓瓦斯會社)에 매도함으로써 회사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YMCA (서울시 종로구 종로 69, 종로2가 9)
1899년경 조선의 150여 상류충 청년들이 YMCA 창설을 주장하여 1903년 3월 중국, 조선, 홍콩 YMCA 전체위원회 브록크만 총무를 초청해 YMCA 창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1903년 10월 28일 황성기독청년회를 결성하였다
위원회 모금으로 1904년 종로대로 북쪽 옛 태화궁 (太華宮) 자리에 부지를 마련하였다
1905년 개화파였던 현흥택(玄興擇)이 이곳에 맞닿아 있던 부지를 기증했고, 나머지 필요한 부지는 미국 공사 모간(E. W. Morgan)이 기부한 기금으로 마련했다
1906년 6월 29일 대지 소유권 등기를 마치고 미국인 부호 워너메이커(J. Wanamaker)가 제공한 건축비를 사용하여 1907년 회관을 신축, 1908년 12월 3일 개관식을 가졌다
1907년 11월 7일 고종은 당시 11살이었던 왕세자 영친왕을 정초식(定礎式)에 보냈고 영친왕은 ‘일천구백칠년(一千九百七年)’이란 글을 머릿돌에 썼다
고종은 당시 1만원의 하사금과 은으로 만든 삽 두 자루도 하사했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이 이루어진 후 일제는 황성기독교청년회 활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여 1913년 초 김린, 사일환, 유일선 등 친일기독교인을 매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해 황성기독청년회를 일본 YMCA에 소속시키는 공작을 벌여 1913년 4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로 명칭을 바꾼다
YMCA는 계속되었지만 황성기독교청년회는 10년 만에 막을 내린다
더 큰 공간이 필요하게 된 YMCA는 1914년 건물의 왼편을 증축하였다
서울YMCA 회관은 3·1운동 때 학생YMCA가 중심이 된 학생단 독립운동이 주요 거점으로, 신간회 창립대회를 비롯해 각종 민족운동 집회가 개최된 곳이다
1950년 9월 27일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은 서울 YMCA 건물을 불태웠다
당시 건물은 3층 벽돌조 서양식 건물로 약 2000㎡ 규모였다
서울YMCA는 1952년 2월 5일 임시 건물을 짓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YMCA(The Smallest YMCA in the world)’라는 간판을 달았다
1958년 서울YMCA는 전쟁으로 파괴된 YMCA 회관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4.19혁명과 5.16쿠대타 등을 겪었고, 건축공사는 1961년 6월 20일에 시작돼 1967년 4월 15일 완공됐다
♤ 기타 등등
조선극장 터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1길 9, 인사동 130-1)
조선극장은 황원균(黃元均)이 동양생명보험 경성 지부장 야자와[矢澤銀次郞]의 자본을 끌어들여 엘리베이터에 식당, 오락실까지 갖춘 700여 석 규모의 최신식 3층 벽돌건물을 신축하고 1922년 11월 개관하였다
[화신백화점(1937년)보다 무려 15년이나 앞섰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엘리베이터는 1914년 조선호텔(당시 조선철도호텔)에 설치되었다. 단 화물용 엘리베이터는 조선은행이 화폐운반용으로 1914년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영화 상영을 위한 영화상설관으로 허가를 받았으나 건축 도중에 연극 상연에도 지장이 없도록 무대를 확장한 연극·영화 겸용극장이 되었다
조선인 관람객을 전문으로 하여 조선연극을 상연할 것을 표방하고 극장 사상 최초로 가족석까지 만든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경영주 황원균과 자본주 야자와 사이에 분규가 일어나 소유주와 경영주가 10여 차례나 바뀌는 어려움을 겪다가 1936년 6월 대형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다
조선극장은 영화관 최초로 발성영화를 상영하는 등 서양 영화 개봉관으로서도 주가를 높였지만, 그보다 는 각종 명창대회와 신극단체의 단골무대로서 우리 문화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3년 9월 토월회(土月會)가「카츄샤」를 상연 하여 큰 성공을 거두며 신극운동의 횃불을 올린 곳도 여기였다
또한 1929년 12월 신간회의 민중대회 사건 당시 김동준(金東駿 ; 일명 金武森)이 일제를 규탄하는 전단을 뿌린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지하 8층, 지상 17층 규모의 건물이 세워 질 예정이다
박자혜 산파 터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길 6, 인사동 43-2)
단재 신채호의 부인이자 간호사이며 여성 독립운동 가였던 박자혜가 산파(현 산부인과 병원)를 개업한 곳이다
대한간호협회(회장 신경림)가 간호역사뿌리찾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2020년 1월22일 종로구청과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에 신청한 표석 설치 건을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가 심의하여 같은 해 8월26일 지금의 위치에 표석을 설치했다
♤ 박자혜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중인 출신인 박원순의 딸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아기나인으로 궁궐에 들어가 약 10년 간 견습나인으로 생활한 그녀는 일제가 1910년 12월 30일궁내부 소속직원을 해직시키자 궁궐 밖으로 나왔다
1911년 숙명여학교 기예과에 입학하면서 근대교육 을 받기 시작했고,
다시 사립 조산부양성소를 졸업하여 조선총독부 의원 산부인과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던 1919년 당시 3.1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무장하지 않은 시위 군중에게 총탄을 발포 하는 등 만세운동을 야만적으로 진압하였고, 각 병원에서는 부상자가 끊이지 않았다
부상자들을 치료하면서 민족적 울분을 느껴 함께 근무하던 의사, 간호사들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주장하며 '간우회' 를 조직하여 간호사들과 동맹 파업을 준비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가 병원 장의 도움(신원보증)으로 풀려나 조선총독부의원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 펑티엔(奉天)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하여 옌징대학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망명할 당시 베이징은 독립전쟁을 통한 조국광복을 모색하며 이회영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중국으로 이주 후 이러한 국내인사들과의 연락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으로 활동하던 신채호도 임시정부의 외교독립노선에 반대하며 1920년 4월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자리를 옮겼다)
베이징에서 1년 여를 지낼즈음 신채호가 베이징으 로 오자 이회영의 부인인 이은숙으로부터 소개받아 첫 번째 부인과 별거(사별?)한 뒤 10년간을 독신으 로 지냈던 신채호(당시 39세)와 박자혜(당시 24세) 는 평생의 반려자로 삼아 1920년 베이징 진스방지에(錦什坊街)의 한 셋집을 얻어 가정을 꾸렸다
결혼한 이듬해인 1921년 첫 아들 수범을 출산하고,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독립운동가 아내로서 삶을 시작하였다
(신채호는 박자혜의 지원을 받아 순한문 잡지인 <천고>를 발행하는 등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며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다)
1922년 둘째 아들을 임신했을 때, 신채호는 더 이상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어 박자혜와 수범을 국내로 돌려보냈다
(이 때 5개월 된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지만 아마 이 두 번 째 아들은 국내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둘째 아들 두범은 1927년에 출생하였다)
국내로 돌아와 인사동 69번지에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을 내걸고 생계를 유지하였다
국내에서 아들을 키우면서 신채호와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으며 가능한 한 독립운동을 지원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나석주의 폭탄 투탄사건 때에도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석주를 돌보고 안내하는 등 의열단 활동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 홀로 남겨진 박자혜는 병고와 생활고에 시달리 다가 해방을 10개월 남겨둔 1944년 10월 16일, 단칸 셋방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고, 유해는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져 재 한줌조차도 남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