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무대] 현판이 걸려 있는
동장대
1795년(정조 19) 7월 15일 공사를 시작하여
8월 25일 완공된
동장대에 관한
안내문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에 관한
안내문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에서 바라본
화성의 안쪽 풍경
동북노대(東北弩臺)
동북노대(東北弩臺)에 관한
안내문
동북노대(東北弩臺)의 안쪽 모습
수원화성의 東門인
창룡문(蒼龍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반달모양으로 쌓은
창룡문
창룡문(蒼龍門)의 옹성
창룡문(蒼龍門)과 옹성
산상동성에 관한
안내문
수원화성의 東門인
창룡문(蒼龍門)에 관한
안내문
화성의 안쪽에서 바라본
창룡문(蒼龍門)
동일포루(東一舖樓)
동일포루(東一舖樓)에 관한
안내문
뒤돌아본
동일포루(東一舖樓)
동1치(東一雉)에 관한
안내문
동1치(東一雉)
동포루(東砲樓)
동포루(東砲樓)에 관한
안내문
동2치(東二雉)에 관한
안내문
동2치(東二雉)
봉돈(烽墩)
봉돈(烽墩)에 관한
안내문
1796년 6월 17일 완성된 봉수대인
봉돈
뒤돌아본
봉돈(烽墩)
[봉돈~동이포루] 구간
화성 성벽길에서 바라본
수원제일교회
동이포루(東二舖樓)
동이포루(東二舖樓)에 관한
안내문
[동이포루~동3치] 구간
화성 성벽길에서 바라본
팔달산대승원의 황금미륵대불과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
동3치(東三雉)에 관한
안내문
동3치(東三雉)
동남각루(東南角樓)
동남각루(東南角樓)에 관한
안내문
동남각루(東南角樓)에서 바라본
남수문(南水門)과
그 뒤로 보이는 팔달산
수원천이
화홍문에서 남쪽으로 흘러 내려와
성곽과 다시 만나는 지점에 만든 수문인
남수문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에 있는
남수문(南水門)
남수문(南水門)
[남수문~팔달문] 구간
탐방로 도중의
팔달문 시장
수원화성의 南門인
팔달문(八達門)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한
팔달문
1964년 9월 3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02호로 지정된
팔달문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이름이 비롯된
팔달문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780(팔달로2가 138) 번지에 있는
팔달문
높이 9m, 너비 25m로,
누상에 종이 걸려 있는
팔달문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팔달문
팔달문을 기준으로
좌우 성벽이 단절되어 있는
화성 서쪽 성벽의
미복원 구간에 관한
설명문
남치(南雉)
뒤돌아본
남치(앞)와 팔달문(뒤)
남포루(南砲樓)에 관한
안내문
남포루(南砲樓)
뒤돌아본
남포루(南砲樓)
서남암문(西南暗門)
서남암문(西南暗門)
서남암문(西南暗門)과 서남포사에 관한
안내문
3.1 독립운동 기념탑
3.1 독립운동 기념탑
서3치(西三雉)에 관한
안내문
서3치(西三雉)
2024년03월09일(토요일) 수원 화성(華城) 탐방기 탐방지 : 수원 화성(華城)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사적 제3호)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조 18년(1794년)에 축성공사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에 완공했으며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였다. 수원화성은 거중기, 활차, 녹로 등 신기재의 발명과 활용,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한 축성방법 등 18세기 과학과 건축, 예술을 살필 수 있는 대한민국 성곽 건축사상 가장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수원화성」은 방어 기능과 성벽안에 갖추어진 4개의 성문을 비롯해 각기 다른 모양과 특성을 지닌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 으뜸 관광 명소’, ‘CNN선정 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곳 50곳’, 2012 한국관광을 빛낸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되는 등 한국 전통역사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며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탐방코스: [ 화서역 4번 출구~(2.5km)~화서문~(138m)~서북공심돈~(292m)~북포루~(176m)~북서포루~(209m)~북서적대~(171m)~북옹성~(29m)~장안문~(169m)~북동적대~(148m)~북동치~(172m)~북동포루~(201m)~화홍문(북수문)~(161m)~동북각루(방화수류정)~(66m)~북암문~(131m)~동북포루~(208m)~동암문~(208m)~동장대(연무대)~(185m)~동북공심돈~(87m)~동북노대~(145m)~창룡문~(251m)~동일포루~(164m)~동1치~(153m)~동포루~(155m)~동2치~(161m)~봉돈~(149m)~동이포루~(164m)~동3치~(80m)~동남각루~(354m)~남수문~(320m)~팔달문~(257m)~남치~(129m)~남포루~(130m)~서남암문~(58m)~3.1 독립운동 기념탑~(83m)~서3치~(303m)~성신사(城神祠)~(288m)~팔달산 대승원~(689m)~수원 시립미술관~(247m)~화성행궁 매표소~화성행궁 탐방(행궁 내 이동거리 1.0km)~화성행궁 매표소~(172m)~행궁만두~(776m)~서3치~(196m)~서포루(西舖樓)~(92m)~효원의 종각~(121m)~서암문~(70m)~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69m)~서노대~(104m)~서2치~(350m)~서포루(西砲樓)~(166m)~서1치~(82m)~서북각루~(221m)~화서문~(2.5km)~화서역 4번 출구 ] (14.450km) 탐방일 : 2024년 03월 09일(토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수원시 팔달구 최저기온 영하 3도C, 최고기온 6도C] 탐방코스 및 탐방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5시간15분 소요) 09:03~10:21 구산역에서 6호선을 타고 합정역으로 가서 2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신도림역으로 간 후 1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화서역으로 이동한 후 화서역 4번 출구로 나옴 [1시간18분 소요] 10:21~10:55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387-6 번지에 있는 화서역 4번 출구에서 탐방출발하여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331 번지에 있는 수원화성의 西門인 화서문(華西門)으로 이동 [화서문(華西門)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다.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1964년 9월 3일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화서문(華西門)은 좌우 성벽에 연결되는 돌로 된 기부에 홍예문(虹霓門)을 두어 그 위에 단층의 문루를 세웠다. 문의 앞부분에는 반달형으로 된 전축(塼築) 옹성(甕城)이 있는데 높이는 안쪽이 2.62m, 바깥쪽이 3.65m, 두께는 3.25m이다. 이 옹성은 한 평이 트여 있어 문을 출입할 때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 1975년 수원 화성을 중수 공사할 때 보수되었다.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사각형모양으로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한 방어가 되도록 하였다.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10:55~10:57 경기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372-1 번지에 있는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으로 이동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핌과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로 수원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1796년(정조 20) 3월 10일 완공된 서북공심돈은 3층 건물로 아래쪽 부분의 치성(雉城)은 석재로, 위쪽 부분의 벽체는 전돌로 쌓았다. 내부는 전투에 편리한 구조를 갖추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다. 1797년(정조 21) 1월 화성을 방문한 정조는 서북공심돈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10:57~11:00 경기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320-3 번지에 있는 북포루(北舖樓)로 이동 [북포루(北舖樓)는 북서포루의 서쪽 129보 5척의 거리에 있다. 치(雉)가 성 밖 19척까지 튀어 나왔다. 외면의 너비 27척, 5량 집을 지었다. 사방 2간인데, 구조는 동북포루와 같다. 3면의 평평한 여장은 누의 바닥과 이어지며, 각각 포를 쏘는 구멍을 내었고 안쪽에 나무사다리를 설치했다.] 11:00~11:02 경기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320-2 번지에 있는 북서포루(北西砲樓)로 이동 [북서쪽에 위치한 북서포루(北西砲樓)는 검정 벽돌을 쌓에 치성과 같이 성밖으로 돌출시키고 내부는 나무판을 이용하여 3층으로 구획하였으며 포혈을 만들어 화포를 감추어 두고 위와 아래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서포루는 성밖으로 약 8.8m 돌출되어있으며 지붕의 형태가 성안쪽은 맞배지붕형식, 바깥쪽은 우진각 형식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11:02~11:05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332 번지에 있는 북서적대(北西敵臺)로 이동 [북서적대(北西敵臺)는 장안문의 북서쪽 약 62.5m 지점에 있으며 1795년(정조 19년) 화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는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화성 축성 때에는 이미 총포가 전쟁에 사용되던 때이지만, 옛날의 축성법에 따라 적대를 만들어 창과 활 대신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을 마련하였다.] 11:05~11:09 북옹성(北甕城)으로 이동 [수원 화성 북옹성(北甕城) 1795년(정조 19) 창건 1975년 수리 장안문 바깥에 반달모양으로 쌓은 성으로, 성문을 이중으로 지키는 시설이다. 출입문을 옹성 한 가운데 내서 출입하기 편하도록 했다. 조선시대 여러 성곽에도 옹성이 설치되어 있지만 출입문이 중앙에 나 있는 사례는 장안문과 팔달문이 유일하다. 문 위에는 물을 저장하는 오성지(五星池)를 설치하여 화공(火攻)에 대비했다. 화성에만 설치한 색다른 방어시설로서 정약용이 제안했으나 설계안대로 시공되지 못했다.] 11:09~11:10 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910(장안동 329) 번지에 있는 수원화성의 北門인 장안문(長安門)으로 이동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마쳤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한다. 장안문은 우진각 지붕(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지게 되어있는 형태)으로 규모가 웅장하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장안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정하지만, 조선시대 당시 임금이 한양(지금의 서울)에서부터 수원으로 오실 때 가장 먼저 맞이하는 문이 북문(장안문)이었기 때문에 북문을 정문으로 정했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 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를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시)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장안문은 1794년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완공하였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상징하는 의미이다. 서울의 국보 제1호 숭례문보다도 큰 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또 정조대왕이 이 문으로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11:10~11:11 경기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136-1 번지에 있는 북동적대(北東敵臺)로 이동 [북동적대(北東敵臺)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이다. 포루와 치성은 성곽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적대는 성곽보다 높게 만들어서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였으며 총안등을 만들어 유사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11:11~11:12 경기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420 번지에 있는 북동치(北東雉)로 이동 [북동치(北東雉)는 북동적대 바로 옆으로 적대와 서로 이어져 있다.]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은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11:12~11:15 경기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145-12 번지에 있는 북동포루(北東砲樓)로 이동 [북동포루(北東砲樓)는 화성의 5개 포루(砲樓) 중 장안문과 화홍문 사이인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4년(정조 18) 9월 23일에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火砲)를 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의 발전된 형태이다.] 11:15~11:19 경기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9000-1 번지에 있는 화홍문(북수문)으로 이동 [북수문(北水門) - 화홍문 화성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 위에는 북수문과 남수문 두 개의 수문이 있다. 북수문은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5년(정조 19) 1월 13일에 완성되었다. 별칭은 화홍문으로 화(華)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虹)자는 무지개를 뜻한다.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으로 넘쳐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다.] 11:19~11:22 경기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90 번지에 있는 동북각루(東北角樓)로 이동 [방화수류정으로 부르는 동북각루(東北角樓)는 1794년(정조 18) 10월 19일 완공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訪花隨柳)”라는 뜻을 지닌 방화수류정은 독특한 평면과 지붕형태때문에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화성에서 가장 뛰어나며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11:22~11:23 경기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27-18 번지에 있는 북암문(北暗門)으로 이동 [북암문(北暗門)은 동북각루의 동쪽 40보 되는 벽돌로 쌓은 성 사이에 있다. 안과 밖의 홍예 역시 벽돌로 쌓았다. 안쪽은 너비가 4척 6촌 높이가 6척 5촌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이다. 문 위에는 둥근 여장을 설치했는데 제도는 동암문과 같다. 홍예 사이에는 돌계단을 설치하여 들어가는 곳은 높고 나오는 곳은 낮게 만들었는데, 지세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11:23~11:26 경기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96 번지에 있는 동북포루(東北鋪樓)로 이동 [동북포루(東北鋪樓)는 각건대(角巾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 135보 4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지세가 별안간 높아져서 용두(龍頭)를 눌러 굽어보고 있다. 『성서(城書)』에 이르기를, "치성의 위에 지은 집을 포(鋪)라 한다"고 하였다. 치성에 있는 군사들을 가려 보호하려는 것이다. 치성이 성 밖으로 18척 5촌이 튀어 나왔는데, 외면의 너비는 24척이고, 현안(懸眼) 1구멍을 뚫었다. 5량으로 집을 지었는데, 판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다.] 11:26~11:29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57 번지에 있는 동암문(東暗門)으로 이동 [동암문(東暗門)은 동장대 서쪽 166보 되는 곳에 있다. 동쪽에 자리잡고 북쪽을 향하여 있으며 벽돌로 안과 밖의 홍예를 만들어 말 한필이 지나갈 수 있다. 안쪽 너비는 7척 높이는 8척이고 바깥은 너비가 6척, 높이가 7척 5촌입니다. 문 위는 벽돌을 깔았고 누는 세우지 않았다. 다만 오성지와 한 개의 큰 둥근 여장을 설치하였는데 마치 나무로 만든 전붕(戰棚)의 제도와 같다.] 11:29~11:33 경기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103번길 20(매향동 3-32) 번지에 있는 연무대(鍊武臺)로도 불리는 동장대(東將臺)로 이동 [동장대(東將臺) - 연무대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머물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동장대는 1795년(정조 19) 7월 15일 공사를 시작하여 8월 25일 완공되었다. 무예를 수련하는 공간이었기에 연무대(鍊武臺)라고도 부른다. 이곳의 지형은 높지 않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솟아 있어서 화성의 동쪽에서 성 안을 살펴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11:33~11:35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57 번지에 있는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으로 이동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노대의 서쪽 60보쯤 되는 거리에 있다. 성탁(城托)의 위 성가퀴 안에, 요동(遼東)에 있는 계평돈(平墩)을 본떠서, 벽돌로 쌓아서 둥그렇게 돈(墩)을 만들었는데, 겹으로 둘렀다. 높이 17척 5촌, 바깥 원 둘레 122 척,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 안쪽 원 둘레 71척, 내원과 외원 사이에 가운데 4척 5촌의 공간을 비워두고, 2 층 덮개판으로 둘렀다. 아래 층 높이 7척 3촌, 가운데 층 높이 6척 5촌인데, 모두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11:35~11:37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57 번지에 있는 동북노대(東北弩臺)로 이동 [동북노대(東北弩臺)는 창룡문의 북쪽 96보의 거리에 있다. 치(雉) 위에 벽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었는데, 대 아래의 석축 높이 13척, 대의 높이 18척이다. 벽돌로 쌓는 방식은 사각형이지만 모서리를 깎아 벌의 허리처럼 만들어서 모를 죽였다. 안쪽 너비 17척 4촌, 바깥쪽 너비 19척, 성밖으로 나온 부분이 25척 5촌, 2개의 현안을 뚫었고, 위에 둥근 여장을 만들었다.] 11:37~11:41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에 있는 수원화성의 東門인 창룡문(蒼龍門)으로 이동 [창룡문(蒼龍門)은 화성의 4대문 중 동쪽 문으로 1795년(정조19) 5월 8일 공사를 시작하여 10월 17일 마쳤다. 창룡은 곧 청룡으로 풍수지리상 좌청룡이며 동쪽을 의미한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반달모양으로 쌓았는데 장안문, 팔달문과 달리 한쪽을 열어놓았다.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창룡문(蒼龍門)은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에 위치한 수원 화성의 동문이다. 돌로 쌓은 홍예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우고 밖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쪽이 열려 있는 옹성을 쌓은 구조로 되어있다. 1794년에 정조대왕의 명으로 성곽과 같이 착공했으며 1796년에 다른 시설물과 같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문루와 홍예가 소실되었으나 1975년에 복구하였다. 그리고 1997년 수원 화성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주변 시설로는 국도 제43호선 건너편에 동북공심돈과 연무대가 있다. 그리고 연무대 쪽에 국궁체험장이 있다. 그 밖에 연무초등학교 등이 있다.] 11:41~11:44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11-160 번지에 있는 동일포루(東一舖樓)로 이동 [동일포루(東一舖樓) 포루는 성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지은 목조건물이며 초소나 군사대기소와 같은 곳이다. 동일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정조20) 7월 10일 완공되었다. 평탄하고 넓은 지형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북쪽의 포루와 다르게 성벽에서 많이 돌출 되었으며 판문이 설치되어있지 않다.] 11:44~11:46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153 번지에 있는 동1치(東一雉)로 이동 [동1치(東一雉)는 동일포루에서 봉돈 쪽으로 125보(148m)의 거리에 있다.]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은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11:46~11:48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153 번지에 있는 동포루(東砲樓)로 이동 [동포루(東砲樓)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 동일치와 동이치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 (정조20) 7월 16일에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로 치성의 발전된 형태이다. 화성의 포루는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공심돈과 같이 안을 비워 적을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 있게 하였다.] 11:48~11:50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153 번지에 있는 동2치(東二雉)로 이동 [동2치(東二雉)는 동포루(東砲樓)와 봉돈의 중간 지점에 있다.]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은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11:50~11:53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153 번지에 있는 봉돈(烽墩)으로 이동 [1796년 6월 17일 완성된 수원 화성 봉돈(烽墩)은 일반적인 봉수대(烽燧臺)가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에 별도의 시설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화성 성벽에 맞물려 벽돌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성곽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으로 마치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든 수원화성의 대표시설이다. 평상시 남쪽 첫 번째 화두(火竇: 횃불구멍)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올려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 봉화로 신호를 보냈다.] 11:53~11:55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153 번지에 있는 동이포루(東二舖樓)로 이동 [동이포루(東二舖樓)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 (정조 20)7월 3일에 완공되었다. 포루는 성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지음 목조건물이며 초소나 군사대기소와 같은 곳이다. 평탄하고 넓은 지형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돈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서북쪽의 포루와 다르게 성벽에서 많이 돌출되었으며 판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11:55~11:57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153 번지에 있는 동3치(東三雉)로 이동 [동3치(東三雉)는 동이포루와 동남각루의 중간지점에 있다.]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은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11:57~11:59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11-350 번지에 있는 동남각루(東南角樓)로 이동 [동남각루(東南角樓)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건물이다.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도 하였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성 안팎의 시야가 가장 넓은 곳이다. 남수문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남공심돈과 마주보며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11:59~12:01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에 있는 남수문(南水門)으로 이동 [남수문(南水門)은 수원천이 화홍문에서 남쪽으로 흘러 내려와 성곽과 다시 만나는 지점에 만든 수문이다. 수원천 하류 수량 증가에 대비하여 9개의 홍예수문으로 되어 있으며, 수문 위에는 성밖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포사가 세워져 있어 비상시에는 군사들이 대기 하거나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남수문 복원을 위해 지난 2004년 남수문터에 대한 발굴조사에 나섰고, 2012년 6월 복원을 완료하였다.] 12:01~12:05 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780(팔달로2가 138) 번지에 있는 수원화성의 南門인 팔달문(八達門)으로 이동 [팔달문(八達門)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한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하였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팔달문(八達門)은 수원 화성의 남문이다. 1964년 9월 3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문루의 규모는 높이 9m, 너비 25m로, 누상에 종이 걸려 있다. 수원 화성은 정조(正祖) 18년(1794년)에 이궁(離宮)으로 축성되었다. 중국을 거쳐 들어오는 서양문화의 영향을 반영한 점이 중요한데, 이는 전축(塼築)의 보루 같은 구조 면에서나 건축기계 면에서 실측할 수 있다. 흥인문에서와 같은 옹성을 앞쪽에 두고 역시 위에는 총안을 뚫었다.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 18년(1868)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화성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868)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돌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보물이다. 이 문은 수원 화성의 남쪽 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화유적은 앞면 7칸·옆면 9칸의 3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 수원 화성 안쪽에 있는 여러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발달된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현지 안내문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대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문이며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통과한 문이다. 1794년 1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5월 15일에 완공하였다. 팔달문은 모든 곳을 통한다는 사통팔달의 의미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에 보물 1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12:05~12:10 사진촬영 후 휴식 12:10~12:14 경기 수원시 팔달구 교동 6-197 번지에 있는 남치(南雉)로 이동 [남치(南雉)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은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남치는 팔달문과 남포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2:14~12:18 경기 수원시 팔달구 교동 6-197 번지에 있는 남포루(南砲樓)로 이동 [남포루(南砲樓) 포루(砲樓)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치섬과 유사하게 축조하면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 그 안에 화포 등을 감추어 두었다가 위. 아래와 삼면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성곽시설물 중에서 가장 중무장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화성에는 벽돌을 사용하여 모두 5개의 포루(남포루, 서포루, 북서포루, 북동포루, 동포루)를 만들었는데, 서포루만 약간 작고 4개의 포루는 동일한 규격이다.] 12:18~12:22 경기 수원시 팔달구 교동 6-197 번지에 있는 서남암문(西南暗門)으로 이동 [서남암문(西南暗門)은 서암문의 남쪽 367보 되는 곳에 있는데 용도(甬道)가 실지로 시작되는 곳이고 화양루의 통로가 된다. 벽돌로 된 홍예는 안쪽의 너비가 7척 높이가 8척 5촌이고 바깥 너비 6척 높이 8척이다. 위에는 안팎으로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으며 그 안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포사(鋪舍)이다. 서남포사는 암문 위에 있어 높은 곳에 의거해서 멀리까지 볼수 있기 때문에 군졸을 두어서 경보를 알리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12:22~12:23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에 있는 3.1 독립운동 기념탑으로 이동 12:23~12:25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55-24 번지에 있는 서3치(西三雉)로 이동 [서3치(西三雉)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은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서삼치는 서포루(西舖樓)와 서남암문 사이에 있다.] 12:25~12:30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산로 228 번지에 있는 성신사(城神祠)로 이동 [수원시 팔달산 중턱엔 성신사(城神祠)라는 건물이 있다. 수원화성을 축성하면서 건설 과정과 제도, 의식 등 모든 사항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남긴 조선왕실의궤인 ‘화성성의궤(華城城役儀軌)’에는 성신사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병진년(1796년) 봄 특교(特敎)로 집터를 잡으라는 명령이 계셔 택일하여 사당을 지었다’라는 기록과 함께 “화성의 준공을 앞두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좋은 날을 가려 성신묘(城神廟)를 세우는 것”이란 정조대왕의 어명도 들어 있다. 정조대왕은 “때에 맞춰 제사를 지냄으로써 나에게 수(壽)를 주고 복(福)을 주며 화성이 만세토록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며 제문(祭文)을 직접 짓고 향을 내렸다. “고유제의 제품은 7가지, 폐백은 없고 축문은 있게 하라. 해마다 봄가을(음력 1월, 7월) 첫 달 좋은 날에 수원유수가 헌관이 되어 고유제를 지내라”는 왕명(有旨)도 함께 내렸다. 이는 성신사가 그만큼 중요한 화성의 시설물이라는 뜻이다. 성신사는 팔달산 오른쪽 기슭의 병풍바위 앞에 동쪽 방향으로 자리 잡았다. 1796년 봄 7월 11일 고유제를 올리고 터를 닦기 시작해 9월 19일 ‘화성성신지주(華城城神之主)’라는 위판을 봉안하고 고유제를 지냈다. 전기한 것처럼 수원화성 성신사 고유제는 새로 건설한 수원화성이 만세토록 보존되고 수원 백성의 태평성대를 기원했던 의식이었다. 성신사 고유제는 100년 이상 지속됐으나 일제에 의해 성신사가 훼철되면서 명맥이 끊어졌다. 1899년 편찬된 ‘수원군·읍지(水原郡·邑誌)’에도 소개되고 있지만 일제가 민족정기와 왕기가 깃든 화성행궁을 파괴하면서 함께 없앴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성신사를 헐고 이 자리에 신사를 지으려 했으나 수원사람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사라진 성신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러던 중 화성연구회 회원들이 각종 문헌 자료 연구를 통해 성신사 위치를 확인한 뒤 매년 연초 ‘성신사 중건을 위한 고유제’를 지내며 중건 캠페인을 펼쳤다. 2004년 지표조사 때는 '왕(王)'자가 새겨진 기와 파편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에 수원시는 성신사를 중건 복원하기로 결정했고 기업은행도 건립기금을 쾌척했다. 성신사 중건 준공식은 2009년 10월8일에 열렸다. 이후에도 화성연구회의 고유제는 매년 계속되고 있다.] 12:30~12:33 경기 수원시 팔달구 행궁로26번길 38(남창동 56-3) 번지에 있는 팔달산대승원(八達山大乘院)으로 이동 12:33~12:36 팔달산대승원의 황금미륵대불(1988년에 조성된 높이 19m의 대불)을 사진촬영 [수원 화성 관광오신 분들이 두번째로 많이 찾는 곳이 "팔달산 대승원(八達山 大乘院)"이라고 한다. 수원의 화성행궁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팔달산 기슭에 거대한 황금색의 불상이 보인다. 이곳은 수원 화성 관광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 중 하나로 "팔달산 대승원(八達山 大乘院)"이라고 한다. 이 대승원에는 거대한 미륵황금불상이 있다. 대승원은 고봉(杲峰) 황성기(黃晟起, 1919~1979) 스님이 '마하사(摩訶寺, 지금의 대승원)를 창건해 대중교화에 힘썼다고 전한다. 팔달산 대승원은 어떤 종파에 속하지 아니한 무종파 사찰이다. 사찰로서의 기능도 하지만 불교사상을 교육하는 장소로서도 은연 중에 이름나 있다.] 12:36~12:43 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33 번지에 있는 수원 시립미술관으로 이동 [수원에 가면 꼭 가야 할, '수원시립미술관' 2024년, 더욱 새롭고 다양해진 수원시립미술관 '미리보기' 기자명 한송이 기자 여성조선 기사 입력 2024.02.21 18:37 수정 2024.02.21 18:44 수원에 간다면 '수원시립미술관'을 꼭 챙겨보자. 다채로운 전시 라인업으로 미술을 눈과 마음에 깊게 담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될 것. 수원시립미술관은 지역 원로부터 신진작가까지 넓은 범위의 작가를 조망하고 미술을 통한 지역 연구에 더해 어린이 참여형 전시를 확대하는 등 '누구나' 관람할 수 있는 ‘모두의 미술관’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2024년, 수원시립미술관(행궁동 본관)은 ▶미술을 통한 지역 연구 ▶동시대 시민의 다양한 가치 수용·반영·공유 ▶수준 높은 국제적 미술관 수요자 중심 콘텐츠 개발을 미술관 전시 운영 방향으로 설정했다. 이에 오는 27일부터 6월 9일까지 열리는 2024년 첫 번째 전시는 ‘이길범 : 긴 여로에서’부터 시작한다. 한국화가 우당 이길범(1927~)을 깊이 있게 다루는 전시로 수원현대미술사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고 수원 원로 작가를 조명한다. 수원 연고의 신진작가 전시도 마련했다. ‘화성 블로썸’(2024년 11월~2025년 3월)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지역 고유의 문화적 자원을 연구하고 그 결과를 발표한다. 2024년 미술관의 전시는 수원 원로 화가에서 출발해 신진작가로 마무리되며, 이는 수원의 역사와 함께 신구세대를 아우르려는 미술관의 의지를 반영한다. 또한, 현대미술 기획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3월 12일~6월 9일)을 통해 ‘여성의 일과 삶’에 관해 고찰하며 시민들과 동시대 담론을 나눈다. 강용석, 권용주, 김이든, 로사 로이, 방정아, 임흥순 작가 등이 참여한다. 프랑스 추상회화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도 준비돼 있다. 프랑스 뚜르시(Tours)와의 문화예술교류로, 프랑스 대표 추상회화 작가인 ‘올리비에 드브레(Olivier Debre)’의 연대기별 작품을 살펴볼 수 있는 국내 최초 개인전을 7월부터 10월까지 개최한다. 만석공원 내에 위치한 수원시립만석전시관에서는 어린이의 발달 단계 및 교육과정을 고려한 참여형 교육 전시와 성인·가족 대상으로 한 다채로운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를 통해 수원시립미술관은 미술에 대한 장벽을 낮춰 누구나 미술을 향유할 수 있는 ‘모두의 미술관’을 표방한다. 상반기에는 현대미술작가 깪, 이학민의 작품을 통해 ‘반려’와 ‘유대’의 의미를 전하는 참여형 교육 전시 ‘꿍짝공원 속 친친’(3월 14일~7월 21일)과 환경을 주제로 최경아, 정유종, 이우재, 이학민 작가와 함께하는 성인 대상 창의 워크숍 ‘이달의 만석’을 4월부터 7월까지 개최한다. 하반기에는 식문화를 바탕으로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소개하는 참여형 교육 전시 ‘맛있게 보이는(가제)’(8월 6일~12월 8일)과 작가와 함께 가족의 추억을 예술적으로 기록·보관하는 가족 대상 참여형 워크숍 ‘미술로 가족을 하나로(가제)’를 8월부터 12월까지 진행한다. 이와 함께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은 수원시립아트스페이스광교에서도 가족체험전 ‘감각운동, 장’(8월 30일~12월 22일)을 개최한다. 미술관을 운동 경기와 놀이가 펼쳐지는 ‘감각의 운동장’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고, 동시대 미술을 친근하게 경험할 수 있는 전시와 연계 교육을 추진한다. 수원시립미술관 관계자는 "지난해 수원시립미술관 4개관의 관람객이 전년 대비 94%나 증가했다. 코로나19로 주춤했던 미술관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 같다"면서 "올해 다양한 전시, 교육프로그램, 문화행사 등을 통해 시민과 함께하는 미술관으로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수원시립미술관 소장품 김우영 초상(Portrait of Kim Wooyoung) : 나혜석 RHA Hyeseok | 1928년 추정 자화상(Self-portrait) : 나혜석 RHA Hyeseok | 1928년 추정 방화수류정이 보이는 풍경(The scenery of Banghwasuryujeong) : 오용길 OH Yongkil | 2014년 화성성곽과 건축물이 있는 도시풍경(Cityscape of Hwaseong Fortress and buildings) : 오용길 OH Yongkil | 2014년 행궁과 팔달산(서장대) 풍경(Suwon Hwaseong Haenggung Palace and Seojangdae) : 오용길 OH Yongkil | 2014년 연꽃(A lotus flower) : 송영방 SONG Youngbang | 2015년 뇌락(Falling stones) : 송영방 SONG Youngbang | 2015년 ] [수원시립미술관 시설별 이용안내 수원시립미술관은 연면적 9,661.94㎡에 지하1층/ 지상2층 규모로 건축되었으며, 전시실, 라이브러리, 교육실 등 다양한 문화, 편의시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2층의 시설 : 전시실 3, 4, 교육실 Ⅰ,Ⅱ, 아트앤디자인 라이브러리 1층의 시설 : 전시실 1, 2, 5, 카페테리아, 수유실, 포니정홀 지하1층의 시설 : 주차장 시설소개 전시관 : 1층 제 1, 2, 5전시실, 2층 제 3, 4전시실 총 5개의 갤러리로 구성되어 다양한 장르의 현대미술을 만날 수 있다. 전시홀 : 1층, 전시실 앞에 위치한 2개의 전시홀은 전시를 위한 공간뿐만 아니라 관람객의 휴게공간, 또는 간이 아트샵 등으로 활용 가능한 다목적 공간이다. 포니정홀 : 1층에 위치한 포니정홀은 한국 자동차 산업의 선구자 고 정세영 명예회장을 기리는 공간이다. 교육실 : 2층에 위치한 2개의 교육실은 어린이, 청소년, 성인 등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미술교육프로그램을 매개로하여 시민과 소통하는 열린 공간이다. 라이브러리 : 모든 시민에게 무료로 개방되는 ‘미술관 라이브러리’는 아트&디자인 특화 도서관으로서 미술, 디자인, 건축 등의 전문 도서는 물론 다양한 정기간행물을 열람할 수 있는 공간이다. 카페테리아 : 만남의 장소, 휴식의 공간으로 이용되는 카페테리아에서는 양질의 음료와 간단한 다과를 판매한다. 주차장 : 총 2,174 ㎡의 넓은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는 지하주차장은 총 77대의 차량이 주차 가능하다.] 12:43~13:05 수원 시립미술관에서 20세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羅蕙錫)의 작품과 수원 출신 화가인 이길범의 회고전을 관람 [나혜석(Na Hye seok , 羅蕙錫) 이칭 : 호는 정월(晶月), 나아지, 羅兒只, 나명순, 羅明順 출생 1896년 4월 18일, 경기 수원 사망 1948년경, 서울 요약 : 20세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주요 작품은 <농부>와 <자화상>과 <스페인 해수욕장>. 호는 정월이고 서울 경기에서 태어나 오빠의 권유로 미술을 시작했으며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글을 쓰고,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되는 등 진보적인 성격을 지녔다. 다양한 국가를 여행하면서 야수파 형식의 그림을 그렸고 귀국 후에는 사회에 저항하는 글을 썼지만 무시당했다. 생활고에 시달려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랑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 신문학을 존중하는 개화된 가정에서 기정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도쿄에 유학중이던 오빠 경석의 권유로 1913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했다. 유학시절에는 최승구·이광수와 사귀면서 동경 유학생 동인지였던 〈학지광〉에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이상적 부인〉 등의 글을 발표했다. 1918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함흥 영생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를 지내다가 3·1운동에 참가 후 체포되어 수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고, 남편의 도움으로 1921년 서울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첫 전람회를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서양화전시회로, 〈매일신보〉의 기사에 의하면 "낙역부절하여 인산인해"(絡繹不絶人山人海)였다고 한다. 1923년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된 남편을 따라 만주에 거주했다. 1927년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영국·이탈리아·스페인 등을 여행하면서 미술관과 박물관을 견학하고 파리에서는 야수파 계열의 그림을 그렸다. 제1~11회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9번 출품하여 제3회 때 〈가을의 정원〉으로 4등상, 제4회 때 〈낭랑묘 娘娘廟〉로 3등상, 제5회 때 〈천후궁 天後宮〉으로 특선을 받았다. 유럽 여행중 사귄 최린과의 만남이 문제가 되어 귀국한 뒤인 1931년 이혼했다. 그뒤 사회의 인습적인 도덕관에 저항하는 〈우애결혼, 실험결혼〉·〈이혼고백서〉 등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는 글을 발표했으나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그뒤 수덕사·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가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다.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작품세계 나혜석의 작품은 크게 1918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 때부터 1927년 무렵 만주 봉천 시기까지, 유럽 체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그리고 미술활동을 거의 중단한 이후의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는 사실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그렸다. 1924년 판넬에 제작한 〈만주 봉천 풍경〉은 안정된 구도에 색채의 표현이 부드럽고,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어, 서양화 도입 초기의 사실주의적이고 인상주의적인 화풍을 견고하게 다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유럽 여행을 통해서는 활달한 필치와 과감한 표현으로 점차 바뀌어갔다. 〈자화상〉(1928)에서는 강한 색채의 대비적 효과를 살린 표현기법으로, 〈스페인 해수욕장〉(1928경)·〈불란서 마을 풍경〉에서는 거침없는 필치에 자유분방한 기법으로 야수파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1931년 이혼 이후 생활과 정신의 불안정을 반영하듯 작품에는 생동감과 활발함이 사라졌으며 작품창작도 거의 하지 않았다. 죽은 뒤에 그의 글을 모아 〈날아간 청조〉·〈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등이 발간되었다.] [수원시립미술관 '이길범: 긴 여로에서' 회고전 연다 박종대 기자 뉴시스 기사 입력 : 2024. 3. 5. 09:02 6월 9일까지 개최 스케치, 스크랩북, 전시자료 사진, 인터뷰 등 70여 점 공개 [수원=뉴시스] 박종대 기자 = 경기 수원시립미술관이 오는 6월 9일까지 수원시립미술관 1전시실에서 한국미술사에서 상대적으로 조명이 부족했던 수원 출신 작가에 대한 재평가와 연구의 일환으로 '이길범:긴 여로에서' 회고전을 연다. 이길범은 1927년 수원군 양감면에서 태어나 17살이 되던 해 산수, 화조, 인물 전 분야에 걸쳐 큰 명성을 얻었던 이당 김은호를 만나 그의 문하에서 6여년간 그림을 배웠다. 작가는 1949년 봄날의 온후한 기운을 그린 화조화 '춘난'으로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며 등단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을 겪게 된다. 제2국민병으로 소집된 작가는 대구와 제주, 부산에서 훈련 괘도를 그리며 복무했고, 전역 후에 대한도기와 대한교육연합회에서 도안 디자인과 삽화를 그리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후 53살이 되던 무렵, 전업 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자신만의 공간인 작업실을 마련하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펼쳤다. 특히 1982년 수원미술계에 첫 한국화 동인인 성묵회를 결성하고 한국미술협회 수원지부장 등을 역임하며 정부표준영정 작가로 참여하는 등 인물화가로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지난달 27일부터 시작한 이번 전시는 온화하고 담백한 미감을 형성해 온 이길범의 생애와 작품을 회고하는 자리다. 그림의 소재에 따라 ‘영모화조(새, 짐승, 꽃, 새)’, ‘인물’, ‘산수풍경’으로 구성해 주요 대표작을 선보인다. 또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는 자료를 함께 전시해 이길범의 발자취와 수원미술사가 전개되어 온 과정을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전시를 기획한 수원시립미술관 이채영 학예사는 "이번 전시는 수십 년간 수원을 기반으로 활동한 원로작가 이길범을 조명해볼 수 있는 기회"이라며 "작가 특유의 온화하고 담백한 미감이 주는 정서적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13:05~13:07 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25(남창동 6-2) 1층에 있는 화성 행궁 매표소로 이동 13:07~13:52 화성행궁(華城行宮)을 [신풍루~집사청~비장청~서리청~남군영~외정리소~유여택~복내당~낙남헌~노래당~득중정~내포사~미로한정~봉수당~경룡관~장락당~드라마 ‘대장금’ 속 수라간~유여택~집사청~신풍루]의 동선으로 탐방 후 화성 행궁 매표소로 회귀 [화성행궁은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 아래의 산기슭을 중심으로 경사지가 펼쳐지고, 시가지가 시작되는 곳의 평지에 위치해 있다. 구조는 앞쪽으로 긴 장방형 구조이다. 정문인 신풍루 양쪽으로 남군영과 북군영이 있으며 신풍루로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서리청과 비장청, 오른쪽으로는 집사청이 위치해 있다. 서리청과 비장청, 집사청을 좌우로 지나 마당을 가로지르면 좌익문이 있고, 이를 통과하면 중앙문이 나온다. 이 중앙문을 지나면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이 나타난다. 화성행궁과 따로 떨어져 있는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御眞) 즉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어진을 모신 사당을 전국 여러 곳에 뒀다. 지금은 전주 경기전과 개성 목청전, 창덕궁 선원전, 수원 화령전만이 남아 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801년(순조1)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을 짓고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모셔져 있던 어진을 옮겨와서 봉안했다. 화령전은 정전인 운한각을 중심으로 이안청, 복도각. 재실, 전사청과 향대청 등을 갖추고 내·외삼문까지 구비했다. 당대 최고급 기술자들이 참여해 약 2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완성했다. 현재 전사청 등 일부 공간은 복원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남아있다. ‘운한각’은 정조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건물로, 중앙에는 정조 어진을 모신 합자를 두고 좌우에 딸려 있는 익실에 정조가 편찬한 책과 제사에 쓰는 물품을 보관했다. 합자와 익실 바닥에는 온돌을 설치해 5일마다 불을 넣어 습기를 제거했다. 1872년(고종9)에 바닥을 마루로 개조했지만 아궁이 흔적이 남아 있다. ‘이안청’은 정전을 수리하거나 변고가 생겼을 때 어진과 서책 등 기물을 옮겨 놓기 위해 만든 건물이다. 임금의 초상화를 모신 건축물에서 정전 결에 이안청을 두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정전과 이안청을 ‘복도각’으로 연결한 방식은 화령전에서만 볼 수 있다. 화령전은 조선시대 영전 건축물에서 복도각이 적용된 최초의 사례이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유일한 사례로 문화제 가치가 높다. 순조는 1804년(순조4) 화성에 내려와서 융릉과 건릉에서 몸소 제사를 올린 뒤 화령전에서 술잔을 올리는 작헌례를 올렸다. 재위기간 동안 총 10차례 화령전에서 작헌례를 올렸던 순조를 본받아 헌종, 철종, 고종도 화성에 내려올 때마다 작헌례를 올렸다. 화령전은 정조 이후의 모든 왕들이 직접 방문해 제향을 했다는 점에서 그 위상이 높아 2019년 보물로 지정됐다.] [정조의 원대한 꿈과 효심이 느껴지는 화성행궁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경복궁만큼 아름다운 궁궐로 손꼽힌다. 華城行宮 | 사적 제478호 | 1796년(정조 20) 창건 | 2002년 복원 화성행궁은 조선 정조 13년(1789)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 자리로 옮기고, 원래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했다.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위상을 높인 한편,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하여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다. 1796년에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되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행궁 등이 있고,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는 온양행궁이 있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화성행궁이 있다. 정조는 1790년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하였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부터 병원과 경찰서로 쓰이기 시작했고, 1920년대 병원 건물이 신축되며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는 낙남헌과 노래당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19년 3월 29일에는 자혜의원에 검진을 받으러 가던 김향화를 비롯한 기생 30여 명이 경찰서(북군영)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1980년대 말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고, 2002년에 중심권역의 복원공사를 마쳤다. 2016년부터 화성행궁 우화관과 별주의 발굴조사와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13:52~13:55 경기 수원시 팔달구 행궁로 25 번지 1층에 있는 ‘행궁만두’ 식당으로 이동 13:55~14:23 ‘행궁만두’ 식당에서 옛날돈가스(1만원)로 식사 14:23~14:37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55-24 번지에 있는 서3치(西三雉)로 회귀 14:37~14:39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55-24 번지에 있는 서포루(西舖樓)로 이동 [서포루(西舖樓) 포루는 성곽을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 위에 지은 목조 건물이며 군사들이 망을 보면서 대기하는 곳으로 화성에는 5개의 포루(舖樓)가 있다. 서포루는 서암문이 적에게 발각되어 공격받는 것에 대비하여 설치되었다.] 14:39~14:41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55-22 번지에 있는 효원의 종으로 이동 [효원의 종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종은 전통에 따라 나무망치를 사용해 세 번 울릴 수 있다. 첫 번째 타종은 부모님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며, 두 번째 타종은 가족의 행복을 빌며, 세 번째 타종은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과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효원의 종은 수원화성의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수원화성 팔달산 정상에 위치해 있다. 효원의 종은 수원 시민들에게 효심을 심어주고 영원한 화합과 진전을 다지는 동시에 선진시민상을 구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효원의 종은 1996년 12월 31일에 만들어졌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와 희망을 전하는 아름다운 예술품이다. 효원의 종은 수원 시민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 소원을 비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매년 12월 31일에는 새해의 시작을 기념하여 수원 시민들이 효원의 종을 치며 소원을 빈다. 이는 한 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의미로, 효원의 종이 수원 시민들에게 희망과 행운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14:41~14:43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55-23 번지에 있는 서암문으로 이동 [서암문(西暗門)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이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문이다. 화성에는 5개의 암문이 설치되어 있다. 서암문은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는 암문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감춰져 있다. 1796년(정조 20) 6월 18일 완공되었다.] 14:43~14:44 팔달산(145.5m) 정상에 있는 서장대(西將臺)로 이동 [서장대(西將臺) 소재지 : 12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55-23 번지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있으며 ‘화성장대(華城將臺)’란 편액은 정조가 친히 쓴 것이다. 1794년(정조 18) 8월 11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9일 완성되었다.] 14:44~14:48 사진촬영 14:48~14:49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55-23 번지에 있는 서노대(西弩臺)로 이동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두 곳이 있다. 서노대(西弩臺)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하여 사방을 볼 수 있으며 정팔각형 평면이며 기와 벽돌로 쌓았다.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시설이다.] 14:49~14:51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55-24 번지에 있는 서2치(西二雉)로 이동 [서2치(西二雉)는 서포루(西砲樓)와 서장대 사이에 있다.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은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14:51~14:54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26-60 번지에 있는 서포루(西砲樓)로 이동 [서포루(西砲樓)는 수원화성의 서쪽 성벽 서일치와 서이치 사이에 위치하는 포루로, 팔달산 중턱에 세워져 있다.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쌓고 상부에는 누각이 있는 치성을 말하는데 화포공격도 가능하도록 세운 시설물이다. 수원화성에는 5곳에 포루가 설치되었는데 서포루는 급경사지에 세워져 규모가 작고 화포와 총을 쏘는 구멍이 다른 포루에 비해 갯수도 적은 편이다. 전체 3층 구조로 아래 2개 층에는 화포와 총을 쏘는 구멍이 있고 상층에는 누각이 있다. 1796년(정조20)에 창건하고 1975년 복원되었다. 벽돌로 쌓은 하부층은 훼손되지 않은 상태의 창건 당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상부층의 누각은 이후 복원한 것이다.] 14:54~14:57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26-59 번지에 있는 서1치(西一雉)로 이동 [서1치(西一雉)는 서북각루와 서포루(西砲樓) 사이에 있다.]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은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14:57~14:58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26-58 번지에 있는 서북각루(西北角樓)로 이동 [서북각루(西北角樓)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설이다.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도 하였다. 서북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하나로 숙지산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서 화서문 일대의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만들었다.] 14:58~15:00 사진촬영 15:00~15:05 수원화성의 西門인 화서문(華西門)으로 회귀 15:05~15:36 화서역 4번 출구로 원점회귀하여 탐방을 완료 15:36~15:51 화서역에서 신도림역으로 가는 1호선 전철 승차 대기 15:51~17:09 화서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출발하여 신도림역으로 가서 2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합정역으로 이동한 후 6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1시간18분 소요] 수원 화성 안내도 수원 화성 행궁 안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