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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최초의 소설 시누헤 이야기: 국내 최초 고대 이집트어 원전 완역본』 (유성환 옮김, 휴머니스트, 296쪽, 2024.05)
고전 《시누헤 이야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신형철 평론가의 요약대로 “조촐한 자기구원”에 이르는 자전적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시누헤 이야기》는 같은 시기 메소포타미아에서 널리 읽혔던 영웅서사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은 웅장한 스케일이나 삶의 심연을 바라볼 수 있는 영웅으로의 변모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4000년 저쪽의 ‘호모 픽투스’와의 스산한 대화”인 것이다.
우선 《시누헤 이야기》가 어떤 서사를 품고 있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주인공 시누헤는 파라오의 대왕비를 모시던 왕실 궁인이었다. 그는 왕세자를 따라 이집트 본토를 지나 동부 사막지대의 원정대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왕궁으로부터 급히 파견된 전령이 왕이 갑자기 서거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왕세자는 측근들만 거느리고 왕위계승을 위해 왕궁으로 향한다. 왕이 급작스럽게 서거한 이유가 왕위를 둘러싼 왕궁 내부의 암투라고 생각한 시누헤는 그만 탈영하여 오늘날의 시리아-팔레스타인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도주하고 만다.
낯선 땅에서 그곳 족장의 호의로 정착에 성공한 시누헤는 제법 풍족한 삶을 누린다. 그러나 현지에서의 그의 성공을 시기한 현지의 전사에 의해 도전받게 된다. 마치 다윗과 골리앗 같은 싸움에서 시누헤는 승리를 거두지만 이방인으로서의 자신의 지위와 처지에 대한 회의를 뼈저리게 느낀 시누헤는 서신을 통해 왕에게 자신을 사면해줄 것을 청하고 왕은 시누헤의 사면과 귀환을 허락한다. 마침내 노구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온 시누헤는 다시 전형적인 이집트 귀족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이방에서의 생활과는 비교가 안 되는 문명 속의 풍요와 함께, 그토록 염원했던 영생의 조건인 장례절차와 분묘를 약속받는다.
이처럼 서사의 흐름은 전반적으로 단순하며 원문 자체의 분량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전을 원전에서 한국어로 번역한 필자가 《시누헤 이야기》의 일독을 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텍스트라서? 물론 그런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필자 나름대로 생각해본 첫 번째 이유는 이 서사문학 작품이 고대 이집트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이었다는 사실이다.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시누헤 이야기》의 필사본은 파피루스 7점, 석편 연습본 25점 등 총 37편에 달하는데, 이것은 다른 이집트 고전 작품의 필사본에 비해 월등하게 많은 숫자이다. 뿐만 아니라 《시누헤 이야기》는 적어도 800년 간 지속적으로 필사되어 읽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시누헤 이야기》는 한국인의 《춘향가》나 《심청전》, 일본의 《추신구라》, 중국의 《삼국지》와 마찬가지로 서기관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던 상식과 같은 작품, 즉 이집트 문명을 대표했던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고대 이집트의 정신문화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 번은 반드시 마주쳐야 할 작품이다.
두 번째로, 《시누헤 이야기》 안에는 다양한 유형의 텍스트가 녹아 있다. 서사의 틀은 귀족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소위 ‘회고적 자전기록’의 형식으로 저술되었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왕을 위한 찬가, 왕실 포고문, 공문서(보고서), 서간문, 기도문 등 실로 다양한 유형의 텍스트가 이야기의 흐름을 끊을 정도로 자주 삽입되는데, 이런 다양한 유명의 문서들은 《시누헤 이야기》가 단순한 서사문학 작품이 아니라 서기관을 양성하는 학교에서 교과서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시누헤 이야기》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누렸던 문자문화의 다채로운 이면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종합 선물세트’와 같다. 따라서 《시누헤 이야기》는 이집트를 비롯한 고대 근동의 서기관 문화나 문자문화를 일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세 번째로, 《시누헤 이야기》는 당시 이집트인들의 세계관, 그리고 주변국에 대한 지식과 이방 민족에 대한 인식을 가감 없이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은 웅장한 스케일이나 영웅의 심리적 변용과 같은 극적인 장치는 없지만 《시누헤 이야기》는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탈주와 귀환’이라는 신화적 여정을 독자들에게 담백하게 전달하는 서사의 힘을 가지고 있다. 작품에서 뼛속까지 이집트인이었던 시누헤는 비(非)이집트인으로서, 그러니까 이방인으로서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외국 땅에서 분투하며 보내다 왕의 사면을 받아 노년에 이집트로 귀환한다. 그러나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귀환 부분은 이방인이었던 주인공 시누헤가 다시 완벽한 이집트인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세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이집트인”이라는 정체성이 당시 독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끝으로, 필자는 《시누헤 이야기》에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일부 독자들은 이런 대담한 주장에 다소 의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면을 통해 부연 설명하자면, 이집트의 여타 서사문학 작품과 비교했을 때 《시누헤 이야기》는 작품을 구상하고 작성한 이름 모를 서기관의 창작의지가 단연 돋보이는 수작이다. 이 작품과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작품 중 상당수는 오랫동안 구전되었던 이야기를 편집했거나 채록하여 문자로 고착시켰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들 작품과 달리 《시누헤 이야기》는 서두에서 결말에 이르는 이야기 전반 걸쳐 작가가 일일이 고심하고 작성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필자가 이 작품을 감히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도 번역 과정에서 감지되었던 작가의 ‘창작의지’였다.
원전이 자체적으로 가진 이런 미덕 이외에도, 필자는 약 4,000년 전 창작된 이 작품을 현대의 독자들이 불편 없이 감상할 수 있도록 고대 이집트 문명 전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와 해설을 최대한 많이 수록하려고 노력했다. 직역을 원칙으로 했지만 부득이하게 의역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은 일일이 각주를 달아 설명했으며 고대 이집트의 지리와 역사부터 고대 이집트어와 문자의 변천과 같은 배경지식과, 서사문학의 성격과 유형, 원문과 번역 저본을 소개하는 한편, 글을 시작할 때마다 성각문자로 주요 문장을 표기하고, 지도, 벽화, 석판, 파피루스 사본, 고대 이집트의 다양한 문자 등 시각자료를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이 이집트의 원전을 읽는다는 사실을 실감하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자가 작품을 번역하면서 배우고 느꼈던 모든 것을 〈옮긴이 해제: 이집트인에 의한, 이집트인을 위한, 이집트인의 서사〉로 압축하여 정리했다. 해제는 필자의 설명인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작품의 해석에 같이 동참하자는 일종의 초청이다. 작품을 대중에 선보인 입장에서 필자는 독자 여러분들의 새로운 해석과 감상이 무엇보다 궁금하다. 끝으로 필자가 이 책을 마주할 미래의 독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을 본문에서 인용하면서 소개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시누헤 이야기》는 주인공 시누헤의 도주를 통해 ‘이집트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도주라는 사건이 아니라 그가 도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주인공과 독자가 각자 찾아가는 과정에서 정체성에 대한 해답이 도출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시누헤의 도주는 《시누헤 이야기》를 관통하는 핵심적 주제인데도 그가 도주한 이유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속 시원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누헤가 자신이 도주하게 된 원인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직면할 수밖에 없는 질문, 요컨대 ‘왕과 신민은 어떤 관계인가’, ‘신과 인간은 어떤 관계인가’, ‘개인의 행위와 그에게 닥치는 운명은 어떤 관계인가’와 같은 질문은 결국 ‘이집트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에 다다르게 한다.”
- 〈옮긴이 해제〉, 254쪽
유성환 서울대·이집트학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아시아언어문명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동대학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미국 브라운대학교 이집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고대 중근동의 팬데믹: 문명의 어두운 동반자》와 《인류 최초의 이야기: 원전으로 읽는 고대 이집트 창세신화》(근간)가 있다. 2022년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 전문 패널로, 2023년과 2024년 두 차례에 걸쳐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 강연자로 각각 출연했다. 성각문자의 아름다움에 반해 고대 이집트 문헌학의 세계에 들어선 필자는 이집트의 주요 원전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문헌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고 틈틈이 원전 번역과 주해 작업을 수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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