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30일 (토) 촬영.
영조(재위 1724~1776)와 정조(재위 1776~1800)의 시대를 '왕의 귀환'이라고 합니다.
영조와 정조는 '탕평'을 통치이념으로 삼아 임금이 임금 다운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2024년 영조 즉위 300주년을 기념해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에 밑받침이 된 글과 그림의 힘을 보여 주는 전시를 개최합니다.
두 임금은 글과 그림으로 인재들과 소통하며 이상을 공유했습니다. 또 왕실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며 탕평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특별전이 선보이는 서화 88점은 영조와 정조의 치열하고 치밀한 소통의 결과물입니다.
혼돈한 상황을 정리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고, 명분을 만들어 정당성을 강조하며, 마음을 전달해 지지 세력을 확대하고,
질서와 화합의 이상을 구현하는 데 글과 그림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전시는 4부로 구성했습니다.
제1부 탕평의 길로 나아가다. 제2부 인재를 고루 등용해 탕평을 이루다. 제3부 왕도를 바로 세워 탕평을 이루다.
제4부 질서와 화합의 탕평.입니다.
제2부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탕평을 이루다.
좋은 목표를 이루려면 함께할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글과 그림으로 뜻을 전달해 지지 세력을 확보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영조와 정조도 탕평책을 함께할 인재를 구하기 위해 제도를 개선하고 학문으로 뜻을 통하기도 했습니다.
나라의 인재를 공정하게 평가하고자 이전 왕들과 달리 영조는 인사행정에 관여했고,
더 나아가 정조는 인사행정을 주도하며 이를 기념하는 그림에서 왕의 위상을 강조했습니다.
영조와 정조는 인재를 학문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왕이자 신하들의 스승인 '군사, 君師'가 되고자 했습니다.
영조는 세자와 세손 교육에 관심을 기울였고, 정조는 규장각을 설립해 젊은 인재를 교육하고 정책 연구 기관으로 성장시켰습니다.
영조와 정조는 인재들의 마음을 얻고자 시와 초상화를 선물로 주거나 공신 초상화로 충성심을 북돋웠습니다.
이처럼 영조와 정조는 글과 그림으로 신하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탕평한 세상을 만들고자 애썼습니다.
을사친정계병乙巳親政契屛 / 작가 미상, 1785년(정조 9), 비단에 색과 먹.
왕이 중심인 인사행정
산봉우리 다섯 개가 그려진 오봉 병풍 앞 왕의 의자가 있습니다.
왕의 자리 가까이에 내시와 사관이, 다음에 승지와 규장각 관원이 있습니다.
반면 인사행정 담당인 이조와 병조 관원들은 툇마루와 전각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규장각 관원은 정조의 친위세력입니다.
친위세력을 바탕으로 왕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의지가 돋보입니다.
무신친정계도戊申親政契圖 / 작가 미상, 1728년(영조 4), 비단에 색.
동쪽을 바라보는 왕의 자리.
임금의 자리를 서쪽에 두어 동쪽을 향하게 하고, 관원들은 남북으로 나누어 앉아 있습니다.
본래 임금은 북쪽에 앉아 남향하는 것이 법도였고, 이 행사에서도 왕은 북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림에서는 서쪽에서 동향하도록 표현되었고, 오히려 행사에 참여한 관원들의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도록 그려졌습니다.
이는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당시 인사행정에 참여한 관원들로, 이들이 그림의 주인공이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
왕과 신하는 구정 운영의 동반자입니다. 영조는 임금과 신하의 친밀함을 물과 물고기의 관계인 어수(魚水)에 비유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임금과 신하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창덕궁 후원 주합루 뒤에 '어수당'이라는 전각이 있었습니다.
왕과 신하의 친밀함에 백성이 기뻐한다는 의미를 지닌 이 전각에서 인사행정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탕평으로 나아가는 첫걸음, 인사행정
조선시대 관리들의 근무 성적 평가와 인사 발령을 결정하는 인사행정인 도목정사(都目政事)가 음력 6월과 12월에 시행되었습니다.
이조와 병조가 각각 문관과 무관 인사를 주관했습니다.
왕이 참석하면 친림 도목정사(친정)라 하는데, 영조는 이전과 달리 인사의 공정성을 강조했습니다.
정조는 인사행정을 온전히 주도하며 인재를 선발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도목정사를 그린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병오친정계도,丙午親政契圖 / 작가 미상, 1726년(영조 2), 종이에 색, 개인 소장(한국 유교문화 진흥원 기탁)
남쪽을 향하는 왕의 자리
왕은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것이 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 이전까지 조정 관리의 인사 평가하는 날
왕의 참여를 기념하는 그림인 친정도에서 왕은 동쪽이나 서쪽을 바라보도록 그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건물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왕의 자리가 바뀌었습니다.
이조 관원에게 당부하는 글, 大政日面勅吏銓官(대정일면칙리전관) / 영조 1739년(영조 15), 비단에 먹, 수원 화성 박물관
영조는 때때로 인사 담당 관원을 불러 자신이 쓴 글이나 시를 읽게 했습니다.
이조 관원에게 근무 성적을 심사할 때 공정함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영조는 인사의 원칙과 방향에 대해 밝힌 글을 짓고 써 신하들에게 보냈습니다. 영조는 이처럼 자신의 생각을 글로 종종 전달했습니다.
병조 관원에게 당부하는 글, 大政日面勅兵銓官(대정일면칙병전관) / 영조 1739년(영조 15), 비단에 먹,
영조가 군사 업무를 담당한 관청인 병조의 인사 행정 담당자에게 내린 글입니다.
영조는 인사행정에 앞서 병조의 인사 담당자에게 공정한 인사행정을 당부하는 글을 내렸습니다.
바른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싶은 영조의 마음과 노력이 전해집니다.
신하들과 기쁜 마음을 글로 나누다.
나라에 큰 가뭄이 들어 영조가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리자 비가 내렸습니다. 영조가 매우 기뻐하며 지은 시에는
마음 졸이며 비를 기다리고 백성을 걱정한 영조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영조는 신하들에게 이 시의 운을 따 시를 짓도록 명했습니다.
'시'로 왕의 기쁜 마음을 신하와 함께 나누려는 의도였습니다.
영조의 시, 1737년(영조 13)
단비가 내림을 기뻐하다. 喜雨 <어제 갱화첩,御製賡和帖> 제1,2면 / 종이에 먹, 1981년 이홍근 기증.
영조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비가 내리지 않자 백성을 많이 걱정했습니다.
며칠 뒤 건강을 회복했고, 얼마 후 사흘에 걸쳐 비가 내렸습니다.
영조는 이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내려 운을 따라 시를 짓도록 했습니다.
신하들 입장에서 왕에게 보이는 시 짓기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나,
왕의 시가 실린 첩에 자신의 시가 수록되는 일은 영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경현당 세손 회강 약기, 景賢堂世孫會講略記 / 글 영조, 글씨 민백흥閔百興(1715~?), 1762년(영조 38), 종이에 먹.
열한 살 세손은 할아버지 영조의 어려운 질문에 막힘없이 답했고 글 읽는 소리와 태도도 법도에 맞았습니다.
영조는 세손의 영특함에 기뻐하며 이 일을 글로 남기도록 했습니다.
또 첩을 만들어 세손이 영조의 정치이념을 전수받았음을 널리 알리고자 했습니다.
다음 달에도 세손의 공부를 확인하고 또 글로 남겼습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지금 아득히 많은 일 중에서 세손의 공부가 가장 우선이다...
이제 봄기운이 한창일 때 세손이 (경희궁) 이르렀으니 한편으로는 권면하려는 뜻이고 한편으로 내가 몸소 가르치려는 뜻이다.
1762년 3월 29일 세손과 회강한 후 영조의 글.
묵매도,墨梅圖 / 그림 오달제,吳達濟(1609~1637), 17세기 중반,
글, 글씨 (상단) 숙종 1705년(숙종 31), 글(화면) 영조 1756년(영조 32), 글씨 (화면) 오언유,吳彦儒, 1756년,
종이에 먹(그림), 비단에 먹(글씨 상단), 1972년 오기환 기증.
숙종 어제(상단)
신묘한 붓놀림 우리나라에서 어찌 둘이 있을까? 그림을 보니 문득 지난 시대의 사건이 느껴진다.
임금께 하직한 뒤 마음은 잠시라도 나라를 잊지 않았고 오랑캐를 마주하고선 통렬히 꾸짖지 않은 적 있었던가?
빛나는 절개와 의리는 세 분(삼학사)이 같지만 밝게 비추는 효심과 충심은 오직 한 몸에 다 갖추었네.
뒤를 이을 후손을 끝내 전하지 못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선행을 하면 복을 내린다는 이치를 참으로 알기 어렵다.
을유년(1705) 섣달 하순에 쓰다.
영조 어제(화면)
충렬공 오달제의 매화 족자
어제시를 이어서 찬贊을 쓰고, 후손 대사성 언유彦儒에게 주다.
오늘 바라보면서 인사를 올리니 아득히 지난 시대의 일이 생각난다.
중국 땅을 바라보니 더욱더 처절하고 슬픈 생각만, 오늘 이때에 매화 족자를 보게 되니 다행이 아닌가.
동쪽 누각에 있는 매화 그림은 충렬공의 필적이다. 위에 있는 어제시는 충렬공을 추모하고 안타까워하였다.
오랫동안 공을 추모하는 시가 중단되어 삼가 이어서 이 찬을 짓는다.
어느 때에 충성심을 세웠는가 남한산성에 저녁 구름일 때이다. 어떻게 나의 마음을 나타낼까 특별히 그의 후손에게 준다.
숭정 기원후 세 번째 병자년(1756) 11월에
충렬공 오달제의 현손인 가선대부 행 성균관 대사성 신臣 오언유가 하교를 받들어 삼가 쓰다.
두 임금이 글로 병자호란 충신을 기리다.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다 1637년 29세에 청나라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1705년 그의 꼿꼿한 기개와 어울리는 매화 그림 위에 그의 충심을 기리는 숙종의 글이 덧붙여졌습니다.
영조도 병자호란 발발 120년이 되는 해 오달제를 추모하는 글을 지었습니다.
오달제 그림에 두 임금의 글이 더해지면서 그림의 가치와 그의 충성심이 더 높아졌습니다.
김중만 분무공신 반신상 / 작가 미상, 1750년(영조 26) 비단에 색(그림), 종이에 먹(글), 경기도 박물관, 보 물.
공신으로 임명할 때 제작하는 공신 초상화는 집안에서 보관합니다.
영조는 자신에게 큰 위기였던 무신란을 진압한 분무공신 초상화를 다시 제작해 궁궐에 보관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들의 공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일 듯합니다.
22년 만에 다시 그린 초상화에 김중만의 연로한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초상화로 당신의 공을 잊지 않으리.
조선 시대에 위기에서 나라와 왕실을 구한 신하를 공신功臣으로 임명하고 초상화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1728년(영조 4) 무신란을 진압한 공신을 분무공신奮武功臣이라 하고 이때 초상화를 분무공신 상이라 합니다.
그런데 22년이 지난 1750년(영조 26), 박문수가 분무공신상을 다시 제작하자고 건의하자 영조는 이를 허락했습니다.
위기의 순간 도움을 준 공신들을 수십 년이 지나도 잊지 않겠다는 영조의 마음이 이 초상화에 담겼습니다.
허목 초상(좌)과 김육(우)의 소상.
허목 초상,許穆肖像 / 그림 이명기(1756~1813 이전), 1794년 (정조 18) 모사,
글 채제공(1720~1799), 1794년(정조 18), 비단에 색(그림), 비단에 먹(글씨), 보 물.
초상화로 정치하는 정조.
정조는 남인 계열 영수 허목(1595~1682)의 82세 초상화를 가져오라고 하여 당시 뛰어난 초상 화가에게 그리도록 했습니다.
선대왕의 명신이었던 허목 초상화를 베껴 그림으로써 채제공(1720~1799) 및 남인의 지지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허목 초상화가 도성으로 들어오고 떠나는 날 남인들이 모두 모였다고 합니다.
정조는 당색을 가리지 않고 옛 신하들의 초상화를 가져오라고 하여 조정에서 신하들과 함께 보고
그 인물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 내렸습니다.
김육 소상 金堉小像 / 그림 호병(17세기 전반 활동) 중국 17세기 전반, 글 영조 1751년(영조 27), 비단에 색, 실학박물관.
잠곡 김 문정공의 소상 / 어제찬.
윤건 쓰고 학창의 입고 솔바람 의지하고 서있으니 이는 누구의 초상인가? 잠곡 김공이로세.
과거 대신으로 나라 위해 충성하였고 옛사람의 뜻을 본받아 혼신으로 직분을 다하였네,
대동법을 도모하고 계획하니 신통하다 하겠다. 아, 후손들은 백 대가 지나도 공경하라. 신미(1751년) 2월.
인문印文 <호병지인胡炳之印>, <화학행인화鶴行人>
명신 김육의 행적을 글로 기리다.
김육(金堉(1580~1658)은 대동법을 시행해 백성들에게 큰 도움을 준 인물입니다.
소나무 아래 한가롭게 서 있는 김육의 모습입니다. 특이하게 중국 화가가 그린 것입니다.
그림 위쪽 영조의 시는 이 그림이 그려지고 100여 년 뒤 적은 것입니다.
영조는 온천을 다녀오는 길에 김육의 대동법 기념비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김육 초상에 시를 내렸습니다.
이렇듯 영조는 자신의 글로 옛 신하의 충성스러운 행적을 높였습니다.
신제학 정민시 추안 호남(贐提學鄭民始出按湖南) / 정조 1791년(정조 15), 비단에 먹, 국립진주 박물관, 보 물.
아끼는 신하의 새로운 출발을 격려하며
정성 어린 전송연에 술잔 몇 순배 오가고
내일에는 그대 전송하러 동작진 나루터로 나가겠지
지금의 복잡한 일은 오직 백성을 보살펴야 하니
예부터 지방 순시의 임무는 가까운 신하에게 맡겨왔다네
관복 입고 부임한 새 관찰사 보러 사람이 몰려오겠지만
그대 모친 기거하는 데는 아무 탈이 없으리라
누대의 이름이 '공복루'임은 정말 우연이 아닐지니
밤마다 누대에 올라 북쪽 대궐을 바라보겠지
인문印文 - 如山如阜 如岡如陵 如川之方至 如月之恒如日之升 如南山之壽 如松柏之茂 <홍제弘齊>. <만기지가萬幾之暇>.
여산여부 여강여릉 여천지방지 여월지향여일지승 여남산지수 여송백지무
정조는 신하에게 써준 시가 참 많습니다.
가까운 신하들이 지방에 부임할 때 시로 격려했습니다.
정조가 "정성을 다해 죽기로 맹세하여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평가한 정민시(1745~1800)가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시를 짓고 손수 쓴 서예 작품입니다.
모란, 박쥐 등 문양이 있는 고운 분홍색 비단에 주저함 없이 유려하게 글씨를 썼습니다.
1790년대 정조의 필치는 이전과 다르게 안정되고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정조는 아끼는 신하들에게 시를 선물하며 관계를 돈독하게 했습니다.
증철옹부백부임지행贈鐵甕府伯赴任之行 / 글, 글씨 정조, 1799년(정조 23), 비단에 먹,
특별히 당부하는 마음을 담아
정조가 평안도 영변 부사로 임명되어 떠나는 서형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쓴 글과 시가 적혀 있습니다.
작품 규모와 품격만으로도 정조가 51세의 서형수를 얼마나 특별하게 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서체는 정조의 다른 글씨와 다른 점이 많습니다.
위 글의 끝에 찍은 낙관입니다.
제문상정사題汶上精舍 / 글, 글씨 정조, 1798년(정조 22), 종이에 먹.
시로 전하는 돈독한 마음
이 작품은 정조가 말년에 쓴 서예의 대표작으로 은은한 분홍색 종이 위에 진한 먹으로 굵고 묵직하게 쓴 글씨가 인상적입니다.
'문상정사汶上精舍'라는 별장을 읊은 시인데, '문상'은 정조의 외숙 홍낙윤洪樂倫(1750~1813)의 호입니다.
위 글에 찍은 세 개의 낙관입니다.
규장각도奎章閣圖 / 傳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 1776년(정조 즉위년 추정), 비단에 색.
정조의 정책과 학문 연구 기관 설립
정조는 영조에 이어 군주가 정치와 학문을 이끌어 나가는 군사君師가 되고자 했습니다.
신하보다 학문적으로 우위에 서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규장각을 건립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규장각에서 젊은 관리들을 교육시켰고, 규장각 관원들은 정조의 탕평 정책을 뒷받침했습니다.
규장각의 위상에 어울리게 이 그림에서 규장각 2층 건물이 다른 건물들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정조의 인재 양성
문예 군주 정조는 즉위 뒤 왕의 책과 어필을 보관하던 규장각 기능을 확대해 정책 연구 기능을 겸하도록 했습니다.
규장각 신하들의 위상을 높여 친위세력으로 양성했습니다.
붕당이나 서얼 차별에 얽매이지 않고 실력 있는 인재를 선발해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도'를 운영해 직접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정조는 규장각 신하들에게 활쏘기 시험도 보게 할 정도로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원했습니다.
자신이 스승이 되어 신하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그들의 업무 능력을 높여 국가 운영에 도움이 되고자 했습니다.
규장각 사호헌 수교 현판奎章閣司戶軒 受敎懸板 / 글 정조, 1781년(정조 5), 나무에 색.
규장각 관원을 보호하고 위상을 세워주는 글귀
규장각 관원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은 규장각 2층 건물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어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정조는 사무실인 이문원을 인정전 서쪽으로 옮기도록 했습니다.
규장각 실무 담당자인 서리書吏들의 공간에 '사호헌'이라 이름을 지어주면서,
"비록 상급 관청 서리라 해도 출입할 수 없게 하라 雖上司吏胥毋得出入(수상사리서무득출입)고 명을 내렸습니다.
규장각 위상을 세우기 위한 정조의 세심한 노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강세황 초상 / 그림 이명기, 1783년(정조 7), 글 정조 1793년(정조 17), 글씨 조윤형(1725~1799), 1793~1799년,
비단에 색, 진주 강씨 종친회 소장(국립중앙박물관 기탁) 보 물.
표암 강공 칠십일세 진영
어제 제문
탁 트인 흉금, 고상한 운치, 서화는 거친 자취일 뿐 붓을 휘둘러 수 만 장 글씨를 궁중의 병풍과 시전지에 썼네.
판서 지냈으니 벼슬은 낮지 않은데 삼절은 당나라 정건鄭虔(705~764)의 수준일세.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기로소 서루(西樓)에 선배 뒤를 따라 들어갔네. 인재를 얻기 어려운 생각에 거친 술이나마 내리노라.
조윤형曺允亨(1725~1799)이 삼가 쓰다.
초상화와 글로 깊어진 인연.
정조는 초상화로 군신 관계를 돈독히 다진 영조처럼 빈번히 신하들의 초상화 제작을 지시했습니다.
1783년 강세황(1713~1791)이 70세 이상 고위직 관리의 모임인 기로소에 들어가자 정조는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이명기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이명기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무수한 잔 붓질과 깊이 있는 색감으로 강세황이 눈앞에 있는 듯 그려냈습니다.
강세황이 죽은 지 2년 뒤, 정조는 그의 재능을 아끼는 마음을 담아 글을 지어 내렸고, 이 글은 초상화에 적혀 있습니다.
박문수의 초상화입니다. 좌측은 38세 때의 초상화이고, 우측은 60세 때의 초상화입니다.
박문수 분무공신 전신상朴文秀 奮武功臣 全身像 / 진재해(?~1735) 추정, 1728년(영조 4), 비단에 색, 개인 소장(천안박물관 기탁) 보 물.
영조의 탕평정치를 뒷받침한 박문수
영조가 왕세제 때 교육을 담당했던 박문수(1691~1756)는 균역법으로 부족해진 세수를 해결하는 묘책을 내는 등
영조의 탕평정치를 뒷받침했습니다.
무신란을 진압한 공으로 그의 초상화를 제작할 때, 당대 최고 초상화가 진재해가 직접 그를 보면서 밑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갈색 선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색을 엷게 칠하고 음영은 좀 더 어두운색으로 표현하는 18세기 전반 초상화 표현 방식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박문수 분무공신 반신상 / 작가 미상, 1750년 (영조 26), 비단에 색(그림), 종이에 먹(글), 개인 소장, 보 물.
소중히 전해진 초상화로 박문수를 기억하다
박문수의 건의로 분무공신상이 1750년 다시 제작되었습니다. 이때 그려진 초상화는 상반신만 표현된 반신상입니다.
완성된 초상화 중 한 부는 첩으로 만들어 집으로 보내고,
나머지 한 부는 다른 분무공신 반신상과 함께 첩으로 꾸며 충훈부에 보관했습니다.
박문수 38세 초상에 비해 60세 초상에서는 수염이 희어지고 주름이 깊어졌습니다.
소중히 보관된 두 초상화로 그의 달라진 모습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박문수의 60세 때 초상화.
전시실
귀한 음식으로 가르침의 공을 치하하다.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 정조어찰첩 1책, 정조 1797년(정조 21) 5월 8일, 종이에 먹, 보 물.
정조는 심환지를 아꼈습니다. 이 편지에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전복, 해삼, 문어 등 해산물을 보낸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1797년 5월 심환지는 규장각 제학이라는 높은 벼슬에 있었지만
원자(훗날의 순조)가 <소학>을 공부할 때 참석해 원자의 학습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힘썼습니다.
정조는 이를 고마워하며 귀한 선물을 보냈습니다.
편지 내용.
관리를 천거하는 일이 잘 되었다고 하니 매우 다행이다.
경은 잠시 벼슬에서 물러난다는 의리로 사퇴의 명분을 삼는 것이 좋겠다.
내일 안으로 사직하여 명을 받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관직에 나오는 것이 어떠한가? 이만 줄인다. -무오년(1798) 1월 11일 밤에 받은 편지 -
사직 상소를 사전 모의하다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 정조어찰첩 2책, 정조 1798년(정조 22) 1월 11일 밤, 종이에 먹, 보 물.
정조는 1796년부터 1800년까지 노론 대신 심환지에게 297통의 편지를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습니다.
정조는 인사 행정을 한 날 밤 심환지에게 관리의 임명이 잘 되었다고 전하는 한편, 그에게 사직상소를 올리도록 지시했습니다.
이틀 후 심환지는 사직을 청했고, 정조는 어쩔 수 없이 이를 허락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감정 표현이 거침없던 정조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 정조어찰첩 3책, 정조 1798년(정조 22) 8월 16일, 종이에 먹, 보 물.
심환지는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 신하가 정조에게 심환지 흉을 보는 글을 올립니다.
정조는 그 신하를 가리켜 "이 신하는 내면이 충실하지 못하니 참으로 '호로자식이다'"라고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감정 표현이 거침없던 정조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편지입니다.
왕이 건강 상태를 직접 알려주는 친밀한 사이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 정조어찰첩 6책, 정조 1800년(정조 24) 6월 15일, 종이에 먹, 보 물.
정조는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임금의 건강 상태조차도 심환지에게 자세히 알렸습니다.
정조는 몸의 화기 때문에 약도 많이 먹고, 잠들지 못해 답답하다는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로 심환지를 믿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편지를 보내고 13일 뒤 정조는 49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첫댓글 탐독하고
즐감했담다
고맙슴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