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탑골공원 (서울시 종로구 종로 99, 종로2가 38-1)
고려시대 흥복사(興福寺)라는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1464년(세조 10)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세조가 효령대군의 건의로 군사 2,100명 가량을 동원하여 주변 민가 200여 채를 모두 철거하고 원각사로 개명하여 중건하였다
연산군시대에 기생방이 되었으며, 그 이름도 연방원 (聯芳院)으로 바뀌었다
(기생 1200여 명, 악사 1000여 명이 기거)
연산군이 실각한 뒤 이 건물은 잠시 한성부 청사의 일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14년(중종 9) 호조에서 원각사의 재목을 헐어 여러 공용건물의 영선에 쓸 것을 계청하자 왕이 이를 허락한 뒤 얼마 안가서 이 사찰건물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비와 10층석탑만 남아 있다
1897년(고종 34) 고종의 명을 받은 영국인 브라운 이 황실을 위한 서양식 공원(파고다공원으로 칭함) 으로 만들어서 1920년 대중에게 개방하였다
1919. 3. 1 독립운동의 핵심적 공간이 된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공원을 폐쇄하였으며, 1928년 조선총독부에서 경성부청으로 이관하여 재개방 되었다
1992년 5월 28일 탑골공원이라 개칭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으로 조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 전해진 것으로 1888년에 개원한 인천의 만국공원(인천 자유공원)이 우리나라 최초 의 공원이다
♤ 원각사(圓覺寺)
고려시대부터 흥복사(興福寺)라고 내려오던 절로 태조때 조계종 본사로 지정하였던 고찰(古刹)이다
1464년(세조 10) 중건하여 원각사로 개칭, 1504년 (연산군 10) 원각사를 폐하고 1505년(연산군 11) 에는 장악원을 이곳으로 옮겼다
원각사는 일시에 훼철된것이 아니고 1504년 (연산군 10)부터 1519년(중종 14) 혹은 1554년 (명종 9) 대화재(大火災) 때까지의 약 50년에 걸쳐 공가(空家)로 폐기되어 자연적으로 소멸되었다고 추측한다
♤ 3.1 운동
❶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파리평화회의 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제안, 이로 인해 전 세계의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❷ 1919년 1월 중순, 일본 유학생 송계백이 보성 학교 교장 최린을 찾아왔다
이 학교 졸업생인 송계백은 모자 안감에 숨겨 온 명주 헝겊을 최린에게 내밀었는데, 일본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2월 8일에 독립 선언을 할 때 발표할 선언서였다
최린은 송계백이 돌아간 뒤 천도교 지도자들을 만나 일본 유학생들의 용기를 칭찬하며 독립운동에 찬성 했다
❸ 1919. 2. 8일, 마침내 조선의 유학생들은 일본의 수도인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❹ 그런데 마침 고종이 1919. 1.21일 사망하셨다
갑작스런 죽음을 두고 일본이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한국 사람은 누구나 고종의 사망를 슬퍼하며 장례식에 참가하려고 했다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때에 맞춰 독립 선언을 하기로 하였고, 그래서 고종의 장례식(인산일 : 3월 3일)이 열리기 전인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그런데 왜 3월 1일인가?
고종 장례(인산)일은 1919년 3월 3일이다
3월 3일 만세운동을 하자!
>> 인산일 당일에 거사는 불경이다
3월 2일에 만세운동을 하자!
>> 일요일은 안돼
그럼 3월 1일에 만세운동을 하자!
>> 그래 그게 좋겠네
♤ 삼일문(三一門)
현재의 정문은 1967년 민자사업으로 추진된 파고 다공원 현대화 때 국보 제51호(강릉소재 객사문)를 딴 한식으로 세웠으며,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필 글씨가 새겨진 삼일문 현판을 부착하였으나
2001.11.23일 민족정기소생회 대표 곽태영과 한국민족청년회 집행위원장 우경태에 의하여 현판이 훼손되어 철거되었으며, 그 후 탑골공원의 관리를 맡고 있는 종로구청에서 2003년 2월 독립선언문의 서체를 이용해 새로 제작한 현판을 내걸었다
옛 탑골공원 정문은 1910~191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67년 공원정비 때 서울대학교 법대 정문으로 이전(1969년 실시)되어 현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이화동 소재)의 정문으로 이용되고 있다
탑골공원이 우리 민족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정신적 재산인 것은 이곳이 3·1운동의 발상지라는 점이며, 일제강점기에 시민들이 울적하여진 심정을 달래기 위하여 이 공원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 팔각정 (八角亭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3호)
1897년 영국인 브라운이 조성한 탑골공원 (파고다공원)과 함께 축조된 누정으로, 1902년 (광무 6)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위하여 군악대의 연주 장소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 건립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 팔각정은 황실 관현악단이 쓰던 황실 음악 연주소였다
당시 일요일에 한하여 일반에게 공개되어 관현악을 듣고자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곤 하였으며, 평일에도 일반에게 공개하기 시작한 것은 1913년 7월부터 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학생들과 시민이 이 앞에 모여 학생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시위 행진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 교수(동경제대)가 1902년 7~8월에 걸쳐 진행한 답사 결과를 엮은 <한국건축 조사보고>에 실린 사진엔 팔각정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 러시아 학자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의 <코레야 1903년 가을>에는 팔각정의 모습이 확인 된다
지은이인 바츨라프는 1903년 10월10일 부산에 도착해 같은 달 30일 서울에 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두 자료를 종합해보면, 팔각정은 1903년 말에 건립 됐음이 확실하다
♤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자는 과연 누구??
① 정재용(경신중학교 졸업생, 해주 의창학교 교감)
지금까지의 정설(본인 주장)
② 한위건(경성의전 대표학생)
김성숙선생 구술(학계 일각)
③ 김원벽(연희전문학교 대표학생)
당초 낭독하기로 예정
④ 성명불상자
일본 군경과 검찰의 심문조서(일본 재판부)
♤ 원각사지십층석탑 (圓覺寺址十層石塔 - 국보 제2호)
1348년 개성근교에 건립된 경천사 십층석탑을 본떠 1465년(세조 11) 원각사 중건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대리석 으로 만들어진 높이 12m의 석탑이다
산성비와 비둘기 배설물로 인한 손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서울시가 1999년 말에 유리 보호각을 씌웠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격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표면에는 용, 사자, 연꽃, 불상, 보살상 등을 조각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층부 3개 층의 탑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땅에 있었느냐에 대하여 명확한 자료는 없다
여러 설이 있는데 연산군이 궁궐에서 보니 위 3개 층이 눈에 들어오므로 보기 싫다고 내려놓았을 것이라는 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가져가려고 3층 까지 내려놓았는데 너무 무거워서 그냥 두었을 것이라는 설 등이다
상층부 3개 층은 1946년 2월 17·18일 양일간 당시 우리나라에 진주하여 있던 미24사단 소속의 공병대 에 의하여 기중기로 상층에 올려지면서 원상태로 복원되었다
♤ 원각사지 대원각사비(圓覺寺址 大圓覺寺碑 - 보물 제3호)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기록한 석비로 1471년(성종 2)에 세워졌다
전체 높이는 4.7m, 비신너비 1.3m 이며 비문은 현재 마멸이 심하여 알아보기 힘드나 그 내용은《속동문선(續東文選》에 실려있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로 두 마리 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으로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 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 몸돌 위로는 보주(寶珠: 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大圓覺寺之碑)'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김수온이 앞면의 글을 짓고 성임이 그 글을 썼으며, 서거정이 뒷면의 글을 짓고 정난종이 그 글을 썼다
♤ 3.1 운동 기념 동판부조
3.1 운동 당시의 모습을 12개의 부조를 조각가 김경승이 1967년에 청동 주물 후 화학적 파티네이 션(녹청기법) 처리를한 동판부조 작품으로 <삼일정신찬양비>의 북쪽으로 하나씩 설치되어 있다
동판부조의 내용은 3.1 운동 당시에 전국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과 일제의 참혹한 진압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례들만 부조로 만든 것이다
3.1 운동 당시의 현장 사진이 없는 마당에 이 동판 부조야말로 당시의 상황을 알아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마리서사 터 (서울시 종로구 수표로 104, 종로3가 2)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발상지인 ‘마리서사(茉莉書舍)’ 는 박인환이 20세가 되던 1945년 해방 후 평양의학전문학교를 그만두고 상경해 아버지를 설득하여 3만 원을 얻고 작은이모에게 2만 원을 빌려서 지금의 ‘송해거리’ 입구 ‘대한보청기’ 자리에 문을 연 20평 규모 서점이다
절친이자 선배 시인 오정환(후에 월북)의 남만서점 을 해방 후에 물려받은 것이다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의 도움으로 세련된 분위기 의 인테리어를 하고 문을 연 ‘마리서사’는 책을 좋아 하고 예술가들의 교류 장소를 만들고 싶어했던 박인환의 꿈이 실현된 곳으로 새로운 문물에 대한 욕구와 정열이 한창인 때에 예술인들의 작은 캠퍼스였다
‘마리서사’에서는 앙드레 브르통, 장 콕도 등 여러 문인의 작품과 문예지, 화집 등 주로 문학, 예술 분야의 서적들을 취급하였다
이곳에서 김광균, 김기림, 김수영, 임호권 등 문인, 예술인 등과 교류하였다
♤ 박인환은 이곳에서 손님으로 왔던 문학소녀 이정숙과 만나 1948년 결혼하였다
♤ 1948년 입춘 무렵에 마리서사가 문을 닫자 이를 걱정하던 김경린에게 박인환은 말한다
“김형, 나는 아무 미련이 없어. 그때 드나들던 많은 친구들을 사귄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지. 하지만 김형, 그 때에 손님으로 찾아왔던 정숙을 알게되어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서점에서 보석을 얻은 셈이지”
송해길
종로 2가 육의전 빌딩에서 낙원상가 앞까지는 ‘송해길’이 펼쳐져 있다
저렴한 이발관
시레기국밥
모듬전과 가오리찜
생맥주 등등 음식값이 저렴하다
잔술도 1천원에 팔고
그리고 락희(樂喜)거리
락희거리 7가지
한양의원 터 (서울시 종로구 수표로 118, 낙원동 143)
우리나라 근대 초창기의 양의(洋醫)로 한성의사회 회장과 조선의사협회 간사장을 엮임한 박계양 (朴啓陽)이 운영하던 병원(이비인후과)터이다
홍명희, 정인보, 최남선과 같은 당대의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였다
정인보는 한국전쟁때 이 병원에서 3개월간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납북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보시다시피 음식점으로 사용 중이다
♤ 박계양(朴啓陽)
1882년(고종19)에 아버지 박제은(朴齊殷)과 어머니 평산신씨(平山申氏) 사이에 2남으로 태어났다
1907년 대한의원 교육부(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를 졸업 후 3년간 일본 유학
1910년 이비인후과를 개업
1970년 사망
우리나라 의사면허 제1호다
지하철 5호선 5번출구에는 송해의 흉상이 있고
지난 2022년 6월 그의 부고에 슬퍼한 이웃들이 새로운 문화로 성소수자를 바라봤던 송해를 추모하 며 '종로 이웃 성소수자' 명의의 현수막도 내걸렸다
♤ 노포 ④ 소문난집(송해의 집) (서울시 종로구 수표로 131, 낙원동 241-12)
1951년부터 같은 자리에서 70여 년 장사해온 국밥전문 가게로
10평 남짓한 아담한 규모의 식당인데 원목을 사용한 테이불이 인상적이다
식당 내부에 있는 ‘송해의 집’이라는 문구와 캐리커처는 송해가 먼저 제안한 것이다
(송해는 생전에 60년이 넘는 단골이었다)
탑골공원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 ‘이천원 국밥집’ 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최근 물가가 오르면서 불가피하게 500원을 인상하게 되어 2022년 6월 1일부터터 ‘2500원’ 국밥집이 됐다
지난 32년간 오른 값은 겨우 1500원이다
메뉴는 우거지 얼큰 국밥 하나밖에 없어 입장과 동시에 서빙되는 시스템으로 여기서 판매하는 우거지 얼큰 국밥은 소뼈 육수에 직접 말린 우거지 를 넣고 푹 고아 두부와 함께 끓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