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 노포 ⑤ 낙원떡집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438, 낙원동 9)
낙원동이 떡집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궁 밖으로 쫓겨난 수라간 나인들 이 낙원동에 모여 궁중 떡을 빚어 팔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일제강점기 당시 외증조인 ‘고이뻐’씨는 어려운 형편에 수라간 상궁들이 만든 떡을 가져다 낙원시장 에서 파는 행상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상궁에게 직접 떡 만드는 기술을 배워 문을 연 것이 ‘낙원떡집’이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다
다만 김승모 대표가 들은 얘기로는 2대 김인동 할머니가 태어난 1919년에도 이미 떡집이 있었다고 한다)
1919년부터 시작했으니 103년째 이어져 온 떡집인 셈이다
오랜 세월에 걸맞게 낡은 물건들도 낙원떡집 안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나무금고는 언제 만들었는지 도 모를 만큼 나무판자를 몇 번이고 덧댔다
게다가 인절미를 썰어주는 칼은 얼마나 쥐었는지 손잡이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데다 넓적했던 칼날도 닳고 닳아 너비가 좁아졌다
4대 김승모 대표는 떡집을 이어받으면서 오래된 떡집의 유물은 남겨두되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자각했다
현재 낙원떡집은 낙원동 1번지 공장에서 8명의 종업원이 새벽 4시부터 작업해 점심 즈음 모든 떡을 만들어낸다
미리 주문받은 것이 있다면 자정부터 시작한다
조광조 집터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종로 탑골공원에서 악기상가로 유명한 넉원악기 상가를 빠져나가면 마주치는 중앙 분리대에서 작은 표지석을 볼 수 있다
성리학적 도학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 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한 조광조의 흔적조차 사라진 공간,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경지략>과 <동국여지비고>에는 '향교동에 조 정암(조광조의 호)의 옛 집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한양향교가 이곳에 있었다'고 하였다
이곳의 옛이름이 향교동 혹은 한양골이라 하였던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정암(靜庵) 조광조의 묘이다
심곡서원(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포은대로 125, 상현동 산 55-1)에서 약 550m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조광조 부부의 합장묘와 신도비(神道碑)가 경기도 기념물 169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석영 집터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446-22, 낙원동 17)
1855년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난 지석영은 어려서 부터 서양의학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영국인 에드워드 제너의 천연두 예방법인 ‘종두법(種痘法)’ 에 관한 공부를 하고 싶어했다
1876년 지석영은 스승 박영선이 일본에 수신사로 가게 되자 ‘종두귀감(種痘龜鑑)’이라는 책을 부탁했고 1879년에는 부산의 제생의원에서 일본인 원장에게 종두법을 배웠다
당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충주에 들러 40 여명 에게 우두를 놓아줬는데 이것이 국내 첫 공개적 종두법 실시다
이후 지석영은 의학적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1885년 ‘우두신설(牛痘新說)’이라는 두 권의 책을 냈다
‘우두신설’은 우리나라 사람이 쓴 최초의 서양의학 서이자 천연두의 예방·치료에 관한 서적이다
나라의 정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05년에 <신정국문> 6개조를 고종에게 상소하여 공포하게 하였다
또한 그는 여러 외래도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글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자각하여 한국어의 발전과 보급에도 노력하였다
또한 1909년에는 한자를 국어로 풀이한《자전석요》를 간행하여 한자 해석의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경술국치) 후에는 모든 공직을 버리고 진료생활에 전념하다가 1935년에 사망하였 다
교동초등학교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46, 경운동 2)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밀려 들어오는 서양 문물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1894년 9월 18일 「관립교동소학교」로 개교하였는데「소학교령」이 선포된 때보다도 10개월 먼저 설립된 것이다
당시에는 황실학교로 불렸는데 공식적인 것은 아니고 학교가 북촌 가까이에 있어 고관 자제들이 많이 입교하였으므로 이런 별칭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개교 당시에는 학생 대부분이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입학하였으므로 연령도 8~15세 정도로 다양하였 고 결혼을 한 학생은 갓을 쓰고 오기도 하였으며 산술, 영어 등 신학문을 배웠다
1895년 4월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된 뒤 같은 해 7월 「소학교령」의 반포와 함께 관립 한성사범헉교 부속소학교로 개편되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소학교령」에 따르면 “소학교에는 심상과 3년과 고등과 2~3년으로 나누어 교육을 실시한다.”고 하였으나, 실제 고등과가 설치된 학교는 이 학교 밖에 없었으므로 1897년에는 관립 헌성고등소학교 로 학교명을 개칭하고 심상소학교를 졸업한 헉생들 이 입학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뒤 관립교동보통학교(1906년), 교동공립보통 학교(1910년 9월), 경성교동공립심상소학교 (1938년 4월), 경성교동공립국민학교(1941년 4월) 로 학교 이름이 바뀌었다
해방 후인 서울교동국민학교(1947년 10월)로 재개교하였고 서울교동초등학교(1996년 3월)로 학교명을 바꾸었다
학교 교문
교내에 있는 개교 100주년 기념탑 등
운당여관 터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6길 36, 운니동 65-1)
순조 때, 궁중의 내관이 재목을 하사받아 지은 건물 이다
이후 몇 번 주인이 바뀌었는데,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인 박귀희와 남편 윤길병이 화신의 전무로 일하던 박병교(당시 한국 최고의 갑부였던 화신和信의 총수이며 친일파 기업인이었던 박흥식의 조카)로부터 구매한 집이다
(한때 4년 연상의 이응로李凝魯와 1949년 결혼하 였으나 성격 차이와 부군夫君의 성기능 마비로 인하여 1953년 이혼했다)
운니동 한옥을 구매한 후, 이웃한 시인 한상억의 집을 포함하여 3~4채를 합쳐서 1958년부터 이름 을 '구름 속에 있는 집' 혹은 '스님들이 좌선하는 집' 을 뜻하는 '운당(雲堂)'이라 짓고 여관으로 운영하였 다
1960년에는 정릉에 있던 순종의 비 윤씨(순정효황 후)의 별장(수안제修仁齊)도 이전 복원하면서 450평 한옥에 31개 객실을 가진 여관으로 확장했 다
박귀희는 1989년 운당여관을 국악예술고 재단에 기부할 때까지, 약 31년간 서울의 전통명소 중에 하나였던 운당여관을 직접 경영했다
운당여관은 싸고 저렴하면서도 주택가에 위치하여 조용한 것이 특징이었다
특히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전통 숙박시설로 알려져 있다
현재 운당의 일부는 경기도 남양주 종합촬영소로 이전 복원되어 세트장으로 쓰이고 있으며,
나머지 일부는 계동 한옥체험관으로 이전 복원되었 고, 운당여관이 헐린 터에는 월드오피스텔이 들어서 있다
♤ 이곳이 바둑의 성지가 된 것은 1958년의 일인데, 당시 동아일보 주최의 국수전 결승대국이 이곳에서 처음 진행되었다
이후 각종 신문사의 기전 결승국도 이곳에서 치러지면서 명실상부 '특별대국실'이 되었다
이곳을 거쳐간 대표 기사는 조남철, 김인, 윤기현, 조치훈, 조훈현, 서봉수 등 바둑 최고 원로이자 명실상부 전설들이다
총 4백여 판의 결승국으로 우리나라 절대권위의 타이틀이 오갔다
♤ 박귀희
1921년 3월 15일 경북 칠곡군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향사(香史), 본명은 오계화(吳桂花)이다
14세에 이화중선의 대동가극단에 입단하여 소리에 입문하였으며, 15세에 박지홍(朴枝洪)에게 단가와 판소리 몇 대목, 조학진에게「적벽가」, 1937년 강태홍에게 가야금병창을 시사하였다
박동실에게서「흥보가」·「심청가」, 유성준에게 서 「수궁가」, 이기권에게서「춘향가」를 라수하 였으며, 1941년 가야금병창을 오태석에게 사사한 뒤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54년 여성국극동지회를 창설하고《반달》에 출연한 후 1968년 가야금 병창 무형문화재 제23호 로 지정되었다
1955년 김소의·박초월·한영숙과 함께 헌국예술 학원을 설립해 초대 원장이 되었다
1960년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해 1973년에 아사장 을 지냈다
이후 한국판소리보존회에서 재무실 실장을 거쳐 한국판소리보존회 상무이사를 역임하였고 학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거쳐 서울예술전문대학 국악학과 특임교수를 지냈다
국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73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9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안숙선·강정숙·김성녀 등에 의하여 그의 가야금병창 곡이 전승되고 있다
홍명희 집터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32가길 11, 익선동 33-6)
신간회 민중대회(1929년) 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6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32년 1월 가출옥하여 대하소설 '임꺽정'을 집필하던 곳이다
1948년 4월 10일,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북쪽으로 간 후 북한에 주저앉았다
이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거쳐 부수상을 지냈고 과학원 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 여러 직책을 거치다가 1968년 만 80세로 세상을 떠나 북한 혁명열사릉에 묻혔다
홍명희의 역사소설 '임꺽정'은 몇 차례의 중단을 겪으면서 조선일보와 조광지 등에 13여년 동안 연재했지만 결국 끝을 보지 못했다
미완의 소설 '임꺽정'은 현재 북한에서 소설가로 활약중인 둘째 손자 홍석중이 뒷부분을 마무리 지었다
(홍석중은 홍명희와 함께 월북한 장남 홍기문의 둘째 아들이다)
월북문인의 작품으로 오랫동안 금서로 묶여 있다가 1985년 사계절출판사에서 이 소설을 간행함으로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임꺽정’은 한국 근대 역사 소설 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우리말의 보고이자 대해(大海)로 불릴 만큼 언어 표현이 빼어난 소설로 정평이 나 있다
식민지 시대, 일제가 우리말을 말살하려고 한 시기 에 벽초는 일부러 이 어휘들을 집어넣어 쓴 것이다
♤ 1950년 1월 15일 그의 딸 홍영숙(洪永淑, 또는 홍애연洪愛姸)이 김일성과 결혼하였는데, 맏딸 또는 둘째딸이라는 것으로 보아 쌍둥이(1921년 생)인 홍주경과 홍무경 중 한 명일 것으로 추정된다
홍명희는 부수상에 선임되자 쌍둥이 딸 둘을 김일성 관저에 가정부로 들여보냈으며, 이들 중 한명이 1950년 1월 15일 김일성과 결혼한 것이다
♤ 홍명희 창동 집터 (서울시 도봉구 도봉로 136다길 40, 창동 820)
1939에 이사와 5년 여를 거주하다 1944년 봄 증조모 신씨 일가가 살고 있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강정리로 옮겨 갔다
♤ 홍명희 생가 (홍범식고택, 충북 괴산군 괴산읍 임꺽정로 16, 동부리 450-1)
1888년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에서 태어나 이곳 생가에서 13세까지 살다가 서울과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생가는 1730년경 혹은 1861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태인 군수와 금산 군수를 지낸 홍범식 이 소유하고 있었다
홍범식은 홍명희의 아버지로, 금산군수로 재직하던 중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강탈(1910년 경술국치) 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으로서 항거하였다
(객사에서 목 매달았다)
첫댓글 종로의 구석구석 볼거리가 참 많이 있군요. 서울에 오래 살면서도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림으로 나마 즐겁게 돌아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