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샐러드를 만들고 남았던 달걀 3개를 후라이하고,
비닐에 싸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라울표 소스와 찬 밥을 꺼내 전자렌지에 돌려 데웠다.
아침에 밥을 먹는 나를, 라울과 도밍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다.
후라이도 안 먹겠다길래 내가 다 먹었다. 꺼억.
라울과 17km정도의 길을 내리 걷는데 중간에 마을이 하나도 없다.
게다가 공허한 하늘에 잡초만 무성하게 자란 들판 뿐인 여기는 메세타 고원지대.
나는 아침에 아랑곳않고 밥을 두둑하게 먹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심은 정녕 대단하다. 밥 만세!
"Raul, Do you know ... korea song?" (라울, 한국노래 아는 거 있어?)
"No, I don't know. Sorry." (아니, 미안한데 없어)
"I teach you. Look at this. One, two, three..."(그럼 내가 가르쳐줄게. 내 발 잘봐. 하나, 둘, 셋...)
언젠가 아체아저씨가 가르쳐줬던 아리랑이 생각났다.
열 두 번의 발걸음에 박자를 맞춰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노래를 부르면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셋이 돌아가면서 즉석가사를 지어서 노래를 부르곤 했었는데,
아저씨가 너는 어쩜 그렇게 리듬감이 없냐고 감탄(?)하기도 했었다.
그런 내가 라울에게 아리랑을 가르치겠다고 나선거다.
그런데 그는 의외로 곧잘 따라했다. "아리아리라으~ 뜨리트리라르~"라면서.
상상이 되는가? 커다란 배낭을 멘 늙은 스웨덴 남자와 젊은 한국 여자가
아리랑을 부르며 흥에 겨워 비틀비틀 까미노 길을 걷는 모습이.
그렇게 내가 한 번 한국말로 노래를 가르쳐준 뒤로,
라울은 가끔 내 혼잣말을 흉내내서 날 웃기기도 했다.
"아휴, 똥 마려. 라울, 나 똥 마려워..."
"또?똔? 또마려...?"
또, 라울은 등에 메는 큰 배낭 외에 앞에 메는 식량 창고용 작은 배낭에서,
내가 배고프다고 투덜댈 때마다 먹을 것을 꺼내 주었다.
처음 그와 걷기 시작한 날, 내가 맛있게 얻어먹었던 초코쿠키를
매일 채워두고 다니면서 주는 바람에 나중엔 질려서 못 먹을 정도였다.
그렇게 쿠키도 먹고 사과도 반쪽씩 나눠먹고(내가 손으로 쪼개니까 놀랬다)
해바라기씨도 까먹으며 지루할 틈 없이 걸었다.
썰렁한 마을에 도착해 숨어 있던 바를 찾아가니 도밍고가 이미 도착해 쉬고 있었다.
아까 먼저 가더니, 어느 틈에 만났는지 파란 눈의 스웨덴 여자 벨라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부인에게 말할거야!라고 협박하니까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아스트로가 가던 길에 라울과 도밍고)
라울과 나는 그 바에서 맥주를 여섯 병이나 마셨다. 캬! 살 맛 난다!
도밍고와의 수다에 푹 빠진 라울이 한 눈 파는 사이, 벌이 재주 좋게 날아와 맥주병에 쏙 빠졌다.
녀석도 술 꽤 하는가 보다. 술독에 빠지다니.
맥주를 마시며 낙서를 하던 나를 보고, 벨라가 자기 얼굴을 그려달라고 했다.
12색 미니색연필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보다. 똥폼이라도 나게.
다시 출발해서 떼라디요스까지 또 한참을 걸어야했다.
이번엔 라울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다.
엉성한 주먹질이지만 그럭저럭 절도있어 보였다.
아무래도 기합 소리와 쭉 뻗는 주먹과 함께 그의 큰 눈이 번쩍여서 그런가보다.
마침 지나가던 어떤 부부가 우리의 모습을 보고 가라데냐고 물었는데
라울이 태권도라고 대답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This is very hot! I have this and you too. If no have this, we die."
(이건 아주 뜨겁고, 나도 있고 너도 있는거야. 이게 없으면 우리는 죽을거야)
"heart?" (심장?)
눈치 빠른 라울, 또 금새 맞췄다.
수수께끼인데 내가 너무 쉽게 설명해주고 있나? 그래도 그와의 스무고개놀이는 재밌다.
조금 샘나는 게 있다면, 라울은 난이도를 마음껏 조절할 수 있다는 거다.
흑흑. 난 darkness(어둠) 맞추기도 어려웠는데.
(순례자 사무실에서 준 종이의 뒷장이다.
어느 세월에 산티아고까지 가나 싶었는데 벌써 뒷장으로 넘어왔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오늘은 걷는 동안 쉴 새 없이 떠들면서, 입으로 에너지가 빠져나간 모양인지
알베르게에 도착할 때 쯤에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라울은 어떻게 종일 떠들고도 피곤한 기색조차 안 보이는지 모르겠다.
난 또 한번 내 저질체력에 반성해야 했다.
알베르게가 바도 겸하고 있다보니,
식사시간이 되자 테이블마다 순례자들이 빼곡히 채워 앉았다.
나는 라울과 도밍고, 종종 마주쳤던 프랑스 할머니 두 분과 할아버지와 함께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됐다. 그런데 이 프랑스 사람들도 수다스럽다. 으악!
"Uh... Many koreans comes here. Uh...Why?"
(어...많은 한국 사람들이 까미노에 오던데, 왜 그런거죠?)
깔끔하게 넘겨 빗은 쇼트커트 머리에 익살스런 동그란 안경을 낀 할머니가
더듬더듬 영어로 내게 물었다. 걸으면서 숱하게 받은 질문이다.
처음에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고, 책을 쓰기 위함도 있고,
유행성도 있고, 휴식을 위함도 있고, 새로운 경험을 위함도 있고...
생각나는 것들을 모조리 말했으나 슬슬 귀찮아져서
파울료 코엘료의 책 순례자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대체 그게 왜 궁금한걸까?
라울이 맥주 한 잔 더 하지 않겠느냐길래,
배부르다고 거절한 뒤 내 밥값을 계산했다.
그랬더니 왜 그걸 지불하냐고 정색하며 묻는게 아닌가.
니가 먹은 밥도 아니고 내가 먹은 밥값을 치르는 건데 왜 그러냐고 묻자 대답하는게 가관이다.
"넌 돈이 없고, 난 돈이 많으니까."
아, 오천원의 비운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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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2병 : 2.20유로
떼라디요스 데 로스 뎀쁘라리오스 알베르게(아침식사 여부 기억안남) : 7유로
순례자 메뉴 : 8유로
10월 28일 지출 : 17.20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