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왕릉인 김포 장릉과 파주 장릉, 그리고 소령원과 보광사를 거닐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이며, <왕릉 가는 길>의 저자인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와 함께 하는왕릉 가는 길이 첫 번째로 시작됩니다. 아파트 건립 때문에 널리 알려진 인조의 아버지가 잠든 김포 장릉과 인조가 잠든 파주, 장릉,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잠든 소령원, 그리고 소길원과 소령원의 원찰인 보광사와 의주대로의 중요한 역원인 벽제관터를 답사할 이번 기행에 참여를 바랍니다.
인조의 아버지가 잠든 김포 장릉 가는 길
장릉이 세 개나 있다. 단종의 영월 장릉이 있고 인조의 파주 장릉이 있으며 원종의 김포 장릉이 있다. 김포 지역에 있는 유일한 왕릉인 장릉章陵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과 그의 비妃 인헌왕후의 무덤이다. 원종(정원군, 1580∼1619)은 추존 왕으로 선조의 다섯 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인빈 김씨仁嬪 金氏다. 비 인헌왕후仁獻王后(1578∼1626)는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정원군(원종)을 영변으로 데려가 왜적을 피하게 하도록 신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울면서 말했다. “지금 왜적의 형세가 성하고 임금의 행차는 날로 멀어지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임금과 신하가 삶을 같이 하지 못할 것인데, 이 몸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에 선조는 정원군의 마음을 가상히 여겨서 다시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여 전란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하도록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그 공을 높이 사서 정원군을 호성공신 2등에 봉했다.
우울한 삶을 살다간 왕자
정원군의 생애는 순탄치 않았다. 선조가 승하한 뒤 이복형인 광해군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임해군(정원군의 이복형)을 유배 보냈다가 죽였다. 그 뒤 영창대군(정원군의 이복형)을 서인으로 폐하여 강화로 유배를 보냈다가 그 역시 죽였다. 또한 정원군의 아들이자 인조의 막내 동생인 능창군을 역모 혐의로 국문하고 교동에 금고했다가 자살하게 했다. 살얼음판 같은 시대 상황 속에서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우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화병으로 1619년 12월 28일 마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원종대왕(정원군을 추존한 칭호)이 훙薨하였다. 대왕은 어려서부터 기표가 있었고 천성이 우애가 있어 특별히 선조의 사랑을 받아 전후로 선물을 내려 준 것이 왕자에 비할 수 없이 많았다. 왕이 왕위에 올라 골육을 해치고는 더욱 대왕을 꺼렸다. 능창대군을 죽이고는 그 집을 빼앗아 궁으로 만들고, 인빈의 장지가 매우 길하다는 말을 듣고는 늘 사람을 시켜 엿보게 해서 죄에 얽어 해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왕은 걱정과 답답한 심정으로 지내느라 술을 많이 마셔서 병까지 들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하였는데, 훙할 때의 나이가 40세였다. 상이 그 장기葬期를 재촉하고 사람을 시켜 조객을 기찰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양주 곡촌리에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 금상(인조)이 왕통을 계승하자 대원군으로 진호하였다.
김포시청사 앞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금세 장릉에 이른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을 천히 걸어가면 홍살문이 보이고 양옆으로 학이 날개를 편 듯 펼쳐진 그 가운데에 모셔진 장릉, 정자각에서 본 쌍릉이 더없이 아름다워서 한 폭의 그림이다.
정자각을 지나 능으로 오르는 길 참도 양옆에 두 그루의 뽕나무가 마치 일주문처럼 서 있는데, 이곳 참도는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서 그런지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장릉은 능 위에서 볼 때 오른쪽이 원종, 왼쪽이 인헌왕후의 능이다.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이 두 능 앞에 혼유석이 각각 하나씩 놓여 있다. 봉분 아래로 병풍석과 난간석 없이 얕은 호석護石만 두른 것은 추봉된 다른 왕릉의 전례를 따라 만들어서 그렇다. 능침 밖으로 석양과 석호 각 두 쌍을 서로 번갈아 배치되어 있다. 혼유석 좌우로 망주석 한 쌍이 있다. 두 능 앞에 팔각 장명등이 서 있고 이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문·무석인 각 한 쌍과 석마 두 쌍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 뒤쪽으로는 삼면 곡장을 둘렀다.
좌청룡 우백호가 펼쳐진 능 뒤에서 바라보면 새로 짓는 아파트 너머로 인천의 계양산이 한눈에 보인다. 저 산에 ‘장명이고개’라고도 부르는 천명이고개가 있다. 도둑이 많아서 1000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었다는 고개다. 옛날에는 도둑이 고개 마루에 서서 사람들을 기다렸는데, 현대식 도둑들은 인터넷을 비롯한 신기한 도구로 사람들을 등쳐먹고 있으니 홍길동이나 임꺽정, 일지매와 같은 옛 도둑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면 얼마나 억울해 할까?
인조仁祖·인열왕후仁烈王后 파주 장릉長陵
파주 장릉은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로 시작하는 오규원 시인의 <한 잎의 여자>에 나오는 물푸레나무가 입구에 늘어서서 사람들을 반겨 맞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장릉을 감싸고 도는 길목에 봄이면 눈꽃 같이 하얗고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 때죽나무 꽃이 빼곡하게 들어찬 숲들이 장릉을 에워싼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에서 가장 논란거리가 많은 왕을 꼽으라면 누구겠는가? 주로 선조와 인조를 꼽는다. 그것은 선조 때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나 수많은 백성들이 일본으로 끌려가는 참변을 당했고, 인조 때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이 일어나 적게는 30명, 많게는 50만 명이라는 백성들이 청으로 끌려가는 엄청난 피해를 입은 탓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가족 간의 이해 충돌로 엄청난 후유증을 유발한 이유가 터 클 것이다.
인조(1595~1649, 재위 1623~1649)는 원종(추존)의 아들이자 선조의 손자로 어머니는 인헌왕후다. 1607년 능양군에 봉군되고, 1623년(광해 15) 3월에 이귀, 김유 등의 반정이 성공하여 경운궁에서 즉위했다. 비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열왕후이며 계비는 장렬왕후다.
1623년 이귀李貴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 인조반정이다. 계해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계해정사 혹은 계해반정이라고 부르는 인조반정은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연산군의 폭정 때문에 일어났던 중종반정과는 달리 인조반정은 광해군과 대북 정권의 청(후금)과의 현실적 외교와 폐모론을 명분으로 일으킨 일종의 쿠데타였기 때문이다.
숙빈 최씨淑嬪崔氏 소령원昭寧園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잠든 파주 소령원昭寧園
슬픈 일이 닥치거나 위급한 일이 닥쳤을 때 부르는 이름 ‘어머니’다. 물론 종교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일 수도 있고, 부처님일 수도 있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어머니’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릿하고 서늘해지는 이름이 어머니이다.
“어린 아이 머리 너머로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다.
어머니의 눈을 나는 다시 보고 싶어라
어머니의 눈길은 나의 별
다른 모든 것이야 바람처럼 지나가도 좋다.
모든 것은 죽는 법,
모든 것은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법,
우리를 낳아준
영원의 어머니만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것,“
헤르만 헤세의 <무상無常>이라는 시의 일부분을 읽다가 보면 문득 떠오르는 사람들 속에 영조와 그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있다.
<숙빈 최씨 소령원도淑嬪崔氏昭寧園圖>(보물 제1553호)는 1753년경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능묘인 소령원(현 파주시 광탄면 소재)과 주변의 지세를 그린 기록화다. 그림을 보면 가운데 원소와 좌측에 제청, 우측에 비각을 배열하고 아래쪽에는 전답들이 펼쳐져 있다. 이 그림은 어머니 숙빈 최씨에 대한 영조의 추숭 의지를 잘 보여 준다. 또한 함경북도에 소재하고 있는 조선 태조의 4대조 선조들의 능묘와 태조 관련 사적지를 산도 형식으로 그린 《북도각릉전도형北道各陵殿圖形》과 함께 조선 왕실의 능묘 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21세기 현재의 모습과 거의 비슷한 그림 속의 소령원昭寧園의 진입로 초입에는 커다란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다. ♣그 안에 숙빈 최씨의 신도비가 보호각으로 보호되고 있는데, 그 비문을 지은 사람은 숙빈 최씨의 아들 영조였다.(→홍살문을 지나 향어로를 따라 정자각에 이르는 길은 조선 왕릉이나 원묘와 비슷하나 소령원에는 총 4기의 비석이 있다. 숙종 연간에 세운 묘표를 비롯하여 아들 영조가 건립한 신도비와 소령묘갈, 소령원표 등이다. 왕실 능과 묘에서 4기의 비석을 세운 예가 전혀 없다고 한다. 그중 정자각을 지나 능을 오르는 길에 있는 비각이 소령묘 비각인데, 영조가 친히 지은 묘갈문은 그 자체가 절절한 사모곡이다.)
사친私親(임금의 친어버이를 일컫는 말)의 본관은 수양首陽(해주)이고, 성고(아버지) 숙종대왕의 후궁이다. (…) 빈嬪은 7세에 입궁하여 처음 숙의와 귀인에 봉해졌다가 다시 숙빈으로 진봉되었으니 이는 내명부 정1품의 품계다. 빈은 왕자 셋을 낳았는데 나는 그중 둘째다. 즉위 원년(1725) 순화방의 도성 북쪽 산기슭 아래에 사당을 세웠고, 즉위 10년(1734) 2월에 빈의 부모님을 추증하였다. 즉위 20년 갑자 정월에는 다시 빈의 조부모와 증조부모를 추증하였다. 3개월 후, 묘호廟號를 육상毓祥으로 묘호墓號를 소령으로 정했다. (…)
아! 지금부터 돌아가신 사친께서 예전에 행한 어질고 지혜로운 덕을 찬양할 수 있으니, 사친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을 높이 받들어 조금이나마 펼 수 있게 되었다......
수길원 가는 길
바로 근처에 영조의 후궁이자 진종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묘소인 수길원綏吉園이 있다. 정빈 이씨靖嬪李氏(1694~1721)는 이준철李俊哲의 딸이다. 1701년(숙종 27) 입궁하여 1719년(숙종 45)에 효장세자(진종으로 추존)를 낳았다. 연잉군이 세제로 책봉되자 종5품 소훈에 올랐으나 바로 사망했다. 1724년 영조가 임금이 되자 정4품 소원에 추증되었고, 즉위 원년에 왕세자를 낳았다는 이유로 정빈으로 추증되었다. 위패는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에 봉안되었다. 처음에는 ‘묘’라고 했다가, 1778년(정조 2)에 수길원으로 승격되었다.
소령원 좌측을 흐르는 개울을 건너 조금 오르면 묘역에 이르는데, 홍살문도 정자각도 서남쪽에 있던 수복방도 사라지고 주춧돌만 남아 있다. 산기슭에 서남향으로 조성된 수길원은 봉분 뒤편으로 곡장을 설치했으며 봉분 정면으로 비석과 혼유석 그리고 장명등이 일렬로 서 있다. 그 양쪽으로 망주석과 문석인이 서 있다. 수길원 역시 소령원과 마찬가지로 현재 일반인에게 비공개 관리되고 있다.
한편 소령원의 지척에 있는 절이 파주 보광사普光寺다. 보광사는 소령원의 원찰이자 수길원의 조포사였다. 894년(신라 진성여왕 8)) 왕명에 의해 도선국사가 세운 절로 알려져 있다. 이후 1215년(고려 고종 2년)에는 원진국사에 의해, 1388년(우왕 14)에는 무학대사에 의해 중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1622년(광해 4)에 설마와 덕인이 법당과 승당을 복원했다.
보광사가 소령원의 원찰이 된 시기는 1740년 영조가 생모 숙빈 최씨의 묘를 소령원으로 추승하면서 부터다. 이후 보광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거듭되는 중창으로 사세를 발전시켜 나아갔다. 조선 후기 조포사로 지정된 사찰 가운데 제사 비용 명목으로 상당한 규모의 토지(사위전)까지 받은 곳은 보광사와 수원 용주사(사도세자의 원찰) 외에는 없었다. 보광사 어실각 옆에는 영조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향나무가 서 있고, 대웅보전에는 영조의 친필 현액이 걸려 있다.
쌤앤 파커스에서 펴낸 <왕릉 가는 길>의 저자이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인 신정일 대표와 함께 하는 왕릉 가는 기 첫 번째 기행에 참여를 바랍니다.
1. 일시: 2022년 10월 8(토요일)
2. 출발시간 및 장소: 전주 아침 5시 전주 종합경기장 앞 출발
서울 아침 8시 양재역 12번 출구 서초구청 앞 출발
3. 참가비: 6만원
4. 어디로 가나요: 김포 장릉, 파주 장릉, 소령원, 수길원, 보광사, 벽제관
5 안내 도반. 신정일(문화사학자,우리 땅 걷기 대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왕릉 가는 길>의 저자)
6. 신청방법: 댓글로 신청하고 참가비 입금해야 완료(코로나 접종을 마친 사람)
7. 참가비 입금계좌: 국민은행 754801-01-479097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8. 참가비 입금 후 취소 시 환불 규정
(1) 행사일 5일전 인지: 은행 수수료를 공제 후 전액 환불
(2) 행사일 4일전부터 3일전까지: 참가비 50%를 공제후 환불
(3) 행사일 1일전부터 당일까지(미참가 포함): 환불액 없음
위와 같이 행사 참여 취소 시 행사비 환불을 명심하시어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회비를 입금하시고 대기자로 기다리셨다가 참여를 못하시는 회원님들의 불편함을 없게 하고자 함이오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9. 문의전화: 010-9144-2564
10. 주의사항: 모든 걷기의 안전에 대해서는 참석자 본인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카페나 진행자는 안전사고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첫댓글 안호석 / 김정주 사당 신청합니다 (회비는 양양건 대체)
참가합니다/이대주/양재/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따라가겠습니다. 전주 윤순길 / 입금완료
연락처를 남기지 마세요~^^;
참가합니다.
집이 김포인데 장릉에서 합류하고 싶은데 몇시에 가면 될까요
입금했습니다.
김영희/홍광원 참가합니다/ 서초/ 입금완료
연화성1명+동행2명/참가합니다/서초/18만원입금(입금자황*복)
참가/ 죽전 or 서울 . . . .편리한대로
신 선생님을 꼭 뵈어야만 할 것 깉아서.
참가합니다/김순복/안성
황성희 안미경 박경희 이성수 전주에서 참석
입금했습니다
박은희 참석 서울양재탑승
입금했습니다
김순태/양재출발/입금완료
신영선 신청합니다 동행해서 2명이요 송금하고 문자 드릴께요
미안합니다
제가 15일가는것에 댓글을달아야하는데 잘못달아 8일명단에있네요
어쩌죠
댓글 보신분 해결좀부탁해요
친구들 4명포함 5명인데
연락좀 부탁해요
친구들 4명포함 5명인데
연락좀 부탁해요
@선써니 알겠습니다.
구룡령옛길로 변경할께요.
15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