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7일 (일) 핸드폰 촬영
세계문화관
국립중앙박물관은 다양한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선보이기 위해 '세계문화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관람객들이 아시아 각 지역의 문화와 함께 동서양의 주요 문명을 언제라도 찾아와 가깝게 만나볼 수 있도록 상설 전시하는 공간입니다.
세계 여러 문화를 접하면서 우리 문화를 되돌아보고 세상을 보는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지금의 이라크가 있는 티크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비옥한 지대에 자리했다.
기원전 3400~3000년 무렵 최초의 도시들이 탄생하였고, 쐐기문자를 발명해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으며,
예술과 건축이 정교한 형태로 발전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러한 중대한 문화 혁신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신전이 있었다.
신전은 신을 모시는 성스러운 공간인 동시에 생산물이 모이고 재분배되는 경제 활동의 공간이었다.
복잡해지는 경제생활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한
쐐기문자 점토판과 인장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관심사와 세계관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전시에서 소개하는 기원전 3500년대에서 기원전 500년대 사이에 만들어진 전시품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창의성과
높은 기술력을 보여준다. 원통형 인장과 장신구, 통치자의 상에서 드러나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관념은 복잡하고 세심하게 발전했다.
금속, 보석용 원석, 원목과 같은 희귀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광범위한 주변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세계문화관 '메소포타미아실'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공동으로 기획하였으며, 2024년 9월 29일까지 운영된다.
이번 전시가 인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문화적 혁신과 뛰어난 기술, 그리고 그들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문화 혁신
기원전 3500년 무렵부터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정착 촌락들이 확대되고 노동 분업화로 생산력이 늘면서
인구가 증가하자 신전이 중심이 된 도시 공동체와 이를 운영할 권력이 생겼다.
이러한 변화로 사람들이 주변 환경이나 사회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또한 쐐기문자 체계를 창안하여 교역과 거래의 내용을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복합 사회의 모습이 최초로 나타난 도시가 이라크 남부의 우륵이다. 그 이름을 딴 우륵시대(기원전 약 4200~3000년)에는
지금의 시리아, 터키 남부, 이란 서부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고대 서아시아 전 지역에 이러한 변화가 퍼져 나갔다.
초기 왕조 시대(기원전 약 2900~2350년)에 독립적인 도시 국가들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등장하였다.
슈메르어로 점토판 문서와 왕들이 남긴 명문이 작성되었고 새로운 형태의 예술과 건축이 나타났다.
신전에 물건을 봉헌하여 신심을 표현하는 풍습이 있어 일상용품부터 정교한 상까지 다양한 물품을 신전에 바쳤다.
전형적인 신전 건축의 모습이 확립되었고 더불어 건축과 관련된 의례가 생겨났다.
원통형 인장은 행정 업무를 위한 도구이자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지로 이전에 등장했던 도장형 인장을 빠르게 대체했다.
최초의 도시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서 기원전 3500~3000년 사이에 일어났던 중대한 사회문화적 변화는 '도시 혁명'으로 이어졌다.
농업이 발전하고 생산물을 재분배하는 경제 체제가 도입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생산하지 않는 물품과 서비스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경제 활동과 지적 활동의 도구로 문자를 만들어 활용하면서 인간과 지식과의 관계 역시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고대 도시 우륵에서 제일 먼저 나타나 고대 서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와 발맞추어 소원 성취를 기원하며 봉헌한 상, 궁전 벽을 장식하는 거대한 부조, 원통형 인장, 제의에 사용되는 물품 등
새로운 형태의 예술과 거대한 건축물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봉헌용 그릇
기원전 약 2600~235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닙푸르 출토, 방해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인안나 여신에게 바친다는 명문을 새긴 방해석 그릇이다.
이와 같은 봉헌용 그릇은 신심을 표현하고 소원 성취를 빌기 위해 신전에 바치는 물품이었다.
이처럼 뛰어난 품질의 그릇을 바치려면 수입한 돌과 솜씨 좋은 장인이 필요하므로 봉헌자들은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을 것이다.
"인안나께, 헤티의 아들이자 수석 상인 아카 - 엔릴이 <이 그릇을> 봉헌한다"
봉헌용 그릇
기원전 약 2600~235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닙푸르 출토, 방해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인안나 여신에게 바친다는 명문을 새긴 그릇이다.
이와 같은 봉헌용 그릇은 신심을 표현하고 소원 성취를 빌기 위해 신전에 바치는 물품이었다.
이처럼 뛰어난 품질의 그릇을 바치려면 수입한 돌과 솜씨 좋은 장인이 필요하므로 봉헌자들은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을 것이다.
"인안나 여신께, < > 한 파-아누쿠쉬의 아내 헤-우투가 <이 그릇을> 봉헌한다"
봉헌용 상
기원전 약 2600~235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돌,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경건한 자세로 선 남성의 모습을 한 보헌용 상이다. 는썹과 눈은 조개껍데기, 청금석 또는 다른 귀금속으로 상감 세공했을 것이다.
초기 왕조 시대에 일반적으로 착용했던 여러 겹으로 짠 치마를 입고 있다.
커다란 눈과 맞잡은 손은 신성에 압도되었다는 뜻이며, 봉헌자들은 신에게 존경을 표한다는 의미로 신전 안에 이러한 값비싼 상을 바쳤다.
인장과 날인
실감개 모양을 한 원통형 인장에는 다양한 도안과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 젖은 점토판에 인장을 굴리면 도안이 반전된 모습으로
찍혀 나온다. 원통형 인장은 쐐기문자가 발명된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점에 등장했으며, 기원전 500년 이후에 아람어 문자를
파피루스에 쓰고 줄로 묶은 뒤 점토 덩어리에 도장을 찍어서 봉인하는 관습이 널리 퍼질 때까지계속해서 사용하였다.
원통형 인장은 문서를 인증하려는 행정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아주 사적인 물건이기도 해서 때로는 장신구처럼 착용하거나
몸에 부적으로 지니기도 했다. 원통형 인장은 다양한 재료로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메소포타니아에서 나지 않는 보석이나 준보석으로
만든 것은 원거리 무역망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원통형 인장은 작고 휴대하기 편리하여 고대 서아시아 전역에 도상을 전하는 자연스러운 매개체가 되기도했다.
채무 변제 증서와 보관함
가원전 약 20~19세기, 중이 청동기 시대, 아나톨리아의 퀼테페 출토 추정,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앗슈르-나다가 카리야에게 빌린 은 9 2/3마나를 갚아 채무가 없어졌음을 기록한 채무 변제 증서로,
함께 전시된 보관함은 점토판을 담는 봉투 역할을 한다. 보관함에는 네 개의 원통형 인장이 찍혀 있다.
세 개는 상환을 확인한 증인 세 명의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은 9 2/3 마나를 돌려받은 카리야의 아들 앗슈르-타브의 것이다.
실제로 계약에 인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채무 변제 증서
보관함.
사자 모양의 인장 부적
기원전 약 3300~2900년 후기, 우룩~젬데트 나쯔르 시대, 메소포타미아 남부 출토, 대리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대리석으로 만든 사자 머리 형태의 인장으로 도장면에도 사자로 생각되는 동물 세 마리가 새겨져 있다.
이 같은 도장형 인장은 서아시아 지역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였으며 기원전 5000년대부터 사용되었다.
인장은 문서로 인증하는 용도로도 쓰였지만,
재료의 속성이나 인장에 새긴 내용에 깃든 보호 의미 때문에 부적처럼 인식되어 사용자가 늘 가까이 지니거나 착용하였다.
상자를 나르는 사람들과 여신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약 2600~250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대리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초기 왕조 시대의 인장에는 신전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이 꾸준히 나타난다.
화면 오른쪽에 여신이 앉아 있고, 그 앞에 상자를 나르는 사람들이 있다. 상자 하나는 제단 위에 놓여 있다.
이들 중 여신은 메소포타미아 신들이 쓰는 전형적인 뿔 장식 관을 쓰고 있으며 다른 인물보다 크게 표현하였다.
여신이 자리에서 일어난다면 앞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클 것이다.
결투 장면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약 2250~2150년, 악카드 왕조 시대, 조장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결투 장면을 새긴 원통형 인장으로 특별히 근육의 세부를 공들여 표현한 것이 눈에 띈다.
메소포타미아의 결투 장면에는 사자, 황소 인간, 나체 영웅이 흔히 등장하는 데 비해 이처럼 인더스 계곡에 서식하는 물소가
등장하는 경우는 드문데, 이는 악카드 제국과 하라파 문명(인더스 문명) 사이에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악카드어 명문에 따르면 이 인장을 소유했던 이는 이쉬리-일룸이다.
경배하는 인물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약 16~15세기, 카슈 시대, 옥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카슈 왕조는 기원전 16세기부터
메소포타니아 남부를 다스린 외래 민족이 세운 나라로, 인장에 긴 명문을 넣는 것이 카슈 시대의 특징이다.
수염 기른 남자가 스핑크스 아래에서 경배의 표시로 오른손을 들고 있다. 파리의 아들이자 인장의 주인 투나미삭이 마르둑 신에게 드리는
기도문 8줄이 새겨져 있다. 카슈 시대 인장에는 일반적으로 악카드어를 썼는데, 이 인장은 슈메르어로 썼다.
신과 정령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12세기경, 중 - 앗슈르 시대, 벽옥, 대리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물이 나오는 병을 든 신과 새머리를 한 정령을 새긴 중 - 앗슈르 시대의 원통형 인장이다.
신의 모습은 앞 시대의 짐리림 궁전 분수 조각과 비슷한 데 반해,
새 머리를 한 정령의 모습은 약 300년 뒤 님루드에 지어진 궁전을 장식한 석판 부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이는 원통형 인장에 조각된 이미지는 크기와 무관하게 다른 예술 분야와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알려준다.
여인들과 그릇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약 3300~2900년, 후기 우룩~ 젬데트 나쯔르 시대, 닙푸르 출토, 자연 역청이 섞인 석회암, 메트로폴리타 소장.
네 명의 여성을 둘씩 짝을 지어 조각한 원통형 인장이다.
여성들이 큰 원 하나와 그 위쪽에 원 두 개로 이루어진 물건을 잡으려고 팔을 뻗은 모습으로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이 장면은 여성들이 고리 손잡이가 달린 토기 그릇을 만드는 모습으로 생각된다.
도시가 생기고 이처럼 노동이 분업화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생산하지 않는 물건과 서비스를 얻기 위해 교역을 시작했다.
이쉬타르 알현 장면을 묘사한 원통형 인장
기원전18~17세기, 고-바빌리 시대, 적철광, 메트로폴리타 소장.
오른손에 철퇴를, 왼손에 초승달 모양의 칼을 든 이쉬타르 여신의 모습을 세 줄의 명문과 함께 인장에 새겼다.
이쉬타르의 어깨에서도 무기가 솟고 있다. 이쉬타르의 앞에는 곤봉을 든 남자가 단에 올라 서 있다.
남자의 뒤에 서 있는 여신이 간청하는 모습으로 이쉬타르에게그를 소개하고 있다.
인장의 주인을 알려주는 명문에는 "피티툼, 이쉬메신의 아들이며 네르갈 신의 하인"이라고 적혀 있다.
수로에 관한 기록
기원전 약 260~235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닙푸르 출토,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이라크 남부에서는 농사에 필요한 강수량이 모자랐기 때문에 농부들은 수로와 저수지를 만들어 인근의 강에서 경작지로 물을 끌어왔다.
인안나 신전에서 발굴된 이 점토판에는 슈메르의 종교도시 닙푸르를 가로지르는 수로를 보수하고
수로가 성공적으로 기능하기를 인안나 여신에게 기원하는 내용이 슈메르어로 적혀 있다.
황소 장식 그릇 조각
기원전 약 3300~2900년, 후기 우룩~젬데트 시대, 메소포타미아 남부 출토, 노니석이 섞인 동석, 메트로폴리스박물관 소장.
동석(凍石)으로 만든 그릇의 조각으로 항소 형상을 장식해 멋을 더했다.
황소들이 줄지어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가축으로 길든 동물의 질서 정연함을 넌지시 드러내는 듯하다.
황소의 몸은 다양한 높낮이의 부조로 표현했고, 머리는 황소를 보는 사람을 향하도록 한껏 각도를 틀어 아주 입체적으로 조각했다.
이런 모양의 그릇은 주로 신성한 장소에 봉헌되었다.
테두리가 비스듬한 그릇.
기원전 약 300~100년, 후기 우룩 시대, 토기,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틀에 찍어 만든 이러한 형태의 그릇은 기원전 3000년대 말에 메소포타미아 남부 전역에서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크기가 대체로 일정하여 계량에 사용했다고 추정된다. 곡물을 분배하면서 메소포타미아 경제활동의 중심 기관 역할을 했던
신전에서 생산했다. 쐐기문자, 원통형 인장과 더불어 도시 문화를 이루는 근본적 요소들이 널리 퍼졌음을 뜻하는 중요한 물건이다.
황소 머리 장식
기원전 약 21--~2000년, 신 - 슈메르 시대, 동석 또는 사문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야생의 황소와 가축화된 황소는 메소포타미아 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로, 조각, 인장 등 다양한 장르에서 힘과 생식력을
상징한다. 황소 머리 장식은 그릇, 가구, 악기부터 건축과 기둥머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을 장식하는 데 쓰였다.
쐐기문자와 기록 문화
문자의 발명은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에 중요한 전환점으로, 최초의 문자가 기원전 3400년 무렵 이라크 남부에서 발명되었다.
초기에 작성된 문자들을 보면 문자가 주로 회계에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용어목록'과 같은 다른 용도의 문서가 발견되면서
경제적 목적으로만 문자가 발명되었다는 주장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후 의료와 과학 관련 문서를 비롯하여 역사, 문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문자가 사용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충적토로 만든 점토판에 갈대 줄기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글자를 썼기 때문에 이들의 문자는 특징적인
쐐기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 문자는 원래 슈메르어를 적으려고 고안되었지만 곧 악카드어를 쓰는 데도 차용되었고,
마침내 서아시아 전역에서 통용되던 여러 언어를 기록하는 데에도 쐐기문자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필경사들은 대부분 번역에 능통했고 여러 언어를 동시에 쓰는 문화가 번성했다.
맥아와 보릿가루 수령 내역을 적은 장부
기원전 약 3100~2900년, 젬데트 나쯔르 시대, 우룩 출토 추정,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베개 모양의 점토판 앞뒷면에 초기 슈메르 쐐기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 점토판에는 양조업자로 보이는 쿠심이라는 사람이 수령한 보릿가루와 맥아의 수량이 기록되어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기록은 경제활동과 관련된 것이 많은데, 숫자 기호와 그림 문자를 조합해 간단한 거래 내역을 적었다.
그림 문자는 그림의 대상만을 지칭하는 방식으로 형용사나 부사 같은 문법적 요소가 없는 문자 발전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파종 축제 때 바칠 동물의 수를 적은 장부
기원전 2043년, 우르 제3왕조 시대, 드레헴 출토,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기원전 2043년경 바빌리에서 열린 아키투 파종 축제에 참여한 40여 명이 신에게 제물로 올릴 동물의 종류와 수를 정하여
그 내역을 상세하게 기록한 장부이다. 동물의 종류는 살찐 황소, 살찐 양, 최상급의 살찐 양, 양, 다 자란 염소로 구분되어 있다.
지금도 회계 분야에서 사용되는 일람표의 아주 이른 사례이다.
슈메르어 - 악카드어 가축 용어 목록
기원전 약 500 - 1년,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세분화된 가축의 명칭을 슈메르어와 악카드어로 나란히 열거한 용어 목록이다.
무려 380줄에 걸쳐 양, 염소, 소, 말의 수십 가지 이름을 어형 변화표처럼 적은 점토판의 일부이다.
이같은 용어 목록이 행정, 갈대, 고기 부위 등 주제별로 24종류가 있는데,
이를 자세히 보면 고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지식을 체계화했는지 알 수 있다.
판사들의 판결문
기원전 약 20~19세기, 중기 청동기 시대, 아나톨리아의 퀼테페 출토 추정,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고대 앗슈르의 무역 식민지였던 카룸 카네쉬에서 발견된 이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판결이 앗슈르어로 기록되어 있다.
"쿠룹-이쉬타르는 은 1/3마나와 2 1/2긴 때문에 샤마쉬-타파이를 고소하려고 한다.
난니야, 까타툼, 우쭙-이쉬쿰이 이 사건의 판사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인류 최초의 법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변호사는 존재하지 않아 당사자들이 자신의 소송을 왕이나 그 측근에게 직접 호소하였다.
닌막 여신의 신전을 재건하며 묻은 원통
닌막 여신의 신전을 재건하며 묻은 원통
닌막 여신의 신전을 재건하며 묻은 원통
기원전 약 604~562년, 신-바빌리 시대,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신 - 바빌리 시대의 왕나부쿠두리우쭈르 2세가 수도 바빌리에 어머니 여신 닌막을 위한 에막 신전을 재건하며 작성한 원통형 문서이다.
명문은 여신이 자신과 자기 후손에게 복을 주기 바란다는 기도로 끝을 맺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문서를 건물 기초에 묻는 전통은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어 왔는데,
신-바빌리 시대는 물론 후대 아케메네스 왕조와 헬레니즘 시대 통치자들도 이 전통을 따랐다.
현악기에 달았던 황소 머리 장식.
기원전 약 2600~235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청동에 조개껍데기와 청금석 상감,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청동으로 주조한 황소 머리 상으로 곱슬곱슬한 수염이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숙련된 장인의 기술에 더해 황소의 눈에 상감 세공된 조개껍데기와 청금석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고대에는 현악기에 이 황소 장식을 부착하였다. 악기는 소의 울음을 닮은 소리를 냈을 것이다.
현악기는 왕실과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때나 군대가 행진할 때 또는 연회를 베풀 때도 연주하였다.
압칼루 상
기원전 약 9~8세기, 신 - 앗슈르 시대, 님루드 출토,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바구니를 인 우르 - 남마 상
기원전 약 2112~2095년, 우르 제3왕조 시대, 구리 합금,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통치자들은 자신을 '건물을 짓는 사람'으로 이상화하기도 했다.
사람 모양 말뚝은 건물 아래에 묻는 의례 물품으로, 구리 합금으로 주조되었다.
바구니를 이고 있는 모습은 신전을 짓는데 쓸 첫 벽돌을 제작하는 것과 같이 기념할 만한 건축 행사에 참여했다는 표현이다.
하반신에 새겨진 명문은 우르 제3왕조의 통치자
우르 - 남마(기원전 2112~2095년 재위)가 인안나 여신의 신전을 지으면서 이를 묻었다고 적고 있다.
수호 여신 라마의 비
기원전 약 1307~1282년, 카슈 시대, 메소포타미아 남부 출토, 설화석고,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신격을 상징하는 뿔 모양 머리 장식을 갖춘 라마 여신을 얕은 부조로 새긴 비다.
두 팔을 들어 위계가 더 높은 신에게 남성을(보통은 왕을) 데려가는 '중재의 신'으로서 경건한 모습을 표현했다.
카슈 시대(기원전 1595~1155년)의 나지-마룻타쉬 왕이 인안나에게 바치는 슈메르어 명문이 치마에 가득 새겨져 있다.
이 바는 우룩의 에안나 신전 지구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술과 정체성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예술과 물질문화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인장이 가장 대표적인 예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도안과 명문을 주인이 선택했다.
생전 혹은 사후에 걸치는 장신구와 옷도 착용자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역할을 했다.
기원전 3000년 이후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인물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값비싼 석상을 주문해 신전에 봉헌하려는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릴 수 있는 봉헌 명문을 새겨 넣어 자신을 드러냈다.
메소포타미아의 인물상은 구체성이 없는 유사한 모습으로 조각만으로는 자신을 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통치자들의 '초상'은
개별 인물의 특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왕위에 오를 만한 자격으로 여겨지는 속성들을 조합해 완성하였다.
튼튼한 팔, 큰 눈, 얼굴을 뒤덮은 수염, 크고 윤곽이 뚜렷한 근육, 특정한 옷과 머리 장식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물상은 대체로 비슷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어느 왕의 상이라고 특정할 수 있도록 명문을 새겼다.
통치자의 상과 초상 미술
'초상'이라는 단어는 한 개인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뜻하며,
묘사 대상과 재현된 이미지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묘사 대상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의 관념 체계에서는 이러한 초상 미술의 개념이 성립되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통치자를 형상화할 때
통치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속성을 조합했는데 그 문화에서 통하는 약속된 표현과 엄격한 양식적 전통을 따랐기 때문에, 명문이 함께
있어야만 어느 왕의 상인지 구별해낼 수 있었다.
더욱이 초상은 대상을 단순히 '다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가진 본질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초상이 왕의 대리적 성격을 지닌다고 믿었기 때문에 전쟁이나 분쟁이 나면 상의 감각기관을 훼손하여 왕의 이미지를 '살해'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눈, 코, 입, 귀가 없는 통치자들은 감각을 잃게 되고 이들의 초상은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구데아 왕의 상
기원전 2090년경, 신 - 슈메르 시대, 기르수 출토 추정, 섬록암,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도시 국가 라가쉬의 왕 구데아(기원전 2150~2125년 재위)를 섬록암으로 조각한 상이다.
구데아는 단순하고도 부드러운 선으로 표현되었으며 맞잡은 두 손과 커다란 눈은 사려깊고 경건한 성정을 나타낸다.
오른파릐 다부진 근육은 신체건강한 통치자라는 점을 드러낸다. 구데아는 라가쉬의 신전 재건을 기념하려고 이를 비롯한
여러 조각상의 제작을지시했다. 이 내용이 치마에 슈레르어로 찍혀 있다. 구데아 왕의 상은 라가쉬의 신전에도 놓였다.
두상
기원전 8세ㅣ 후반~7세기 초반, 신-바빌리 시대, 구운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초인적인 존재로 생각되는 이 작은 두상은 눈매가 깊고 눈썹이 두드러지며 수염이 풍성하여 앗슈르 왕의 표준 이미지와 유사하다.
끝단을 접어 올린 관은 메소포타미아 조각에 흔히 나타나지만, 관만 바꿔 씌운다면 신과 왕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인이 다른 재료로 더 큰 상을 만들기전에 제작해 본 견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치자의 두상
기원전 약 2300~2000년, 초기 청동기 시대, 이란 또는 메소포타미아 출토, 구리 합금,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우아하게 정돈된 턱수염과 잘 다듬어진 콧수염, 머리에 터번을 두른 남자를 실제 인물의 크기로 만들었다.
눈은 귀한 재료로 상감되어 있었을 것이다.
구리 주조라는 혁신적인 기술과 값비싼 재료를 쓴 것으로 보아 통치자나 지배층에 있는 사람이 제작을 의뢰하였을 것이다.
인물의 개성적 특징을 이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한 초상 조각은 메소포타미아 예술에서 매우 드물다.
우르 왕실묘의 부장품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우르에서 2000기가 넘는 무덤이 1920년대에 발굴되었다. 이 가운데 16기 무덤에는
금, 은, 청금석, 홍옥수로 만든 장신구, 준보석으로 만든 원통형 인장, 금제 그릇, 악기와 같이 화려한 부장품이 묻혀 있었다.
무덤의 주인과 함께 묻힌 시종들의 수와 부장품의 규모를 바탕으로 이 무덤에는 우르의 왕실묘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연구자들은 이 부장품에서 초기 왕조 시대(기원전약 2900~2350)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많은 단서를 얻었다.
특히 장신구의 재료로 금, 은, 청금석이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지 않아 교역으로 구해야 하는 귀한 재료는 특권을 상징하고 이러한 귀금속이 내는 빛은 상서롭고 고결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뛰어난 세공 기술로 재료의 속성은 한층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장신구는 다른 부장품과 함께 부적으로서 죽은 자를 보호하는 제의적인 힘을 가졌다.
목걸이와 팔찌
기원전 약 2600~250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금 청금석, 홍옥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왕의 묘'로 불리는 우르의 789호 무덤에서 발굴된 것이다. 금과 청금석을 쌍원추형 원통형으로 만들어 줄로 엮었다.
파찌로 추정되는 장신구에는 홍옥수 구슬도 사용되었다. 장신구에 광채나는 재료를 쓰는 것이 중요했고 부적의 성격이 있는 특정한
원석을 사용하는 것도 제의적 힘이 생기는 데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다.
앗슈르 제국의 예술
기원전 9세기 초, 서아시아와 지중해 동부 해안에 정치, 사회적 혼란기가 끝나고 앗슈르 제국이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차지했다.
앗슈르나찌르아플리 2세(기원전 663~859년 재위)의 통치 아래 앗슈르 제국은 중기 앗슈르 시대(기원전 약 1400~1000년) 때의
영토 대부분을 되찾았다.
앗슈르나찌르아플리 2세는 님루드로 옮기고 신전과 기념비적인 새 궁전을 짓는 대규모 건설 사업을 진행했다.
앗슈르나찌르 아플리 2세를 상징하는 건물인 님루드 궁전은 앗슈르 정치 이념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궁전의 내부는 앗슈르나찌르아플리 2세와 그의 군대, 신하, 시종들이 의례, 전쟁, 사냥에 참여하는 장면을 부조로 조각한 커다란
석판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앗슈르나찌르아플리 2세가 신으로부터 받은 축복과 앗슈르의 영토 확장을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
기원전 7세기 앗슈르 제국의 권세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의 영토는 이란 서부의 자그로스 일대부터 지중해, 이집트까지 확장되었다.
제국의 시대
기원전 1000년 전후는 한때 우세했던 정치 세력들이 멸망해 메소포타미아, 지중해 동부와 이집트에 이렇다 할 세력이 없는 기간이었다.
이 권력 공백기 뒤에 신-앗슈르 제국(기원전 약 911~612)과 신-바빌리 제국(기원전 약 626~539)이 나타났다.
신-앗슈르 제국의 미술은 님루드, 코르사바드, 니네베 등 제국의 수도에 세워진 궁전을 장식한 대형 석판 부조를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부조에는 왕의 군사 원정 장면, 정복당한 민족이 추방되는 모습, 앗슈르의 우월함을 보여주는 광경이 묘사되었다.
앗슈르 제국이 모으고 생산한 금은제 그릇, 상아가 상감 세공된 가구, 장신구 등의 사치품 역시
제국이 부조를 통해 드러내고 싶어한 강성함, 우월함을 보여준다.
신-바빌리 제국은 우수한 건축으로 이름을 떨쳤다. 신-바빌리 왕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성스러운 도시 가운데 하나이자
'신들의 문'이라는 뜻을 가진 도시 바빌리를 재건했다. 양질의 벽돌로 만든 건축으로 명성이 높았던 이 시기의 바빌리인들은
벽돌 제작과 건축 기술을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한 면에 색을 넣은 벽돌들을 조합해 만든
다색의 부조 조각은 거대한 크기로 바빌리의 벽을 장식했다. 사자와 무슈후슈 용으로 장식한 이쉬타르 문이 가장 유명하다.
이 시기 바빌리는 고대 세계에서 불가사의로 불릴 만큼 경이롭고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다.
앗슈르나찌르아플리 2세의 명문을 새긴 쐐기문자 석판.
기원전 약 883~859년, 신-앗슈르 시대, 님루드 출토, 설화 석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앗슈르나찌르아플리 2세 때의 석판으로 왕의 여러 칭호와 군사적 위업을 적고, 님루드에 새로 지은 북서 궁전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동일한 명문이 궁전의 알현실과 방의 입구를 표시하는 부재 등 님루드에서 여러 건 확인되어 '표준 명문'이라 불린다.
앗슈르나찌르아플리 2세는 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난 공물과 전리품을 거둬들여 앗슈르를 크게 부유하게 만들었다.
강가를 따라 말을 끄는 기병
기원전 약 704~681년, 신 - 앗슈르 시대, 니네베 출토, 설화 석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니네베에 있는 신악하에리바 왕의 '대적할 자가 없는 궁전'을 꾸몄던 부조로 말을 끄는 앗슈르 기병을 묘사하였다.
이 장면은 전쟁에 나간 앗슈르인의 모습을 새겨 방 전체를 장식했던 대형 조각의 일부다.
기병은 원뿔형 투구, 단검, 가죽 또는 금속 미늘을 붙인 갑옷, 창, 활과 화살통 등 앗슈르 군인의 전형적인 차림새를 하고 있다.
앗슈르 시대 후기의 궁전 부조는 이렇게 풍경 요소를 빼곡히 채워 군사 원정을 묘사하는 특징이 있다.
맹견 상
기원전 1000년대 중반, 카슈 시대, 이라크 남부 출토, 구운 점토에 채색,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개는 메소포타미아 예술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점토로 빚어 구운 이 맹견 상은 내부가 비어 있고 표면에 칠했던 안료가 일부 남아 있다.
카슈 왕조의 장인들은 점토를 다루는 데 능했는데 근육질의 몸통과 얼굴의 주름, 실을 꼰 형태의 목줄에서도 그 기술을 엿볼 수 있다.
머리 위의 구멍은 부대를 상징하는 깃발을 꽂는 용도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
조공 행렬에 선 외국인 마부
기원전 약 721~705년, 신 - 앗슈르 시대, 코르사바드 출토, 설화 석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말 두 필을 고삐로 끄는 마부를 묘사한 부조이다.
마구의 정교함이 돋보이는데, 굴레에 앗슈르식 장미 장식이 있고 이마 장식에서 술이 내려오며 머리 위에는 근사한 문장(紋章)이 보인다.
마부는 차림새와 머리 모양으로 보아 앗슈르인이 아닌 외국인이다.
이 부조는 앗슈르에 조공을 바치는 외국 사절단의 모습을 담은 큰 조각의 일부이다.
앗슈르 왕세자
기원전 약 704~681년, 신 - 앗슈르 시대, 니네베 출토, 설화 석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니네베에 있는 신악하에리바 왕의 '대적할 자가 없는 궁전'을 꾸몄던 부조로 긴 수염과 의복, 장신구로 미루어 지위가 높았던 인물을 표현했다.
등까지 길게 늘어진 천이 달린 머리장식은 그가 앗슈르의 왕세자라는 사실을 상징한다.
표면이 마모되어 정교한 세부 표현은 대부분 사라졌는데, 특히 왕세자의 얼굴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으로 보인다.
강을 건너라고 지시하는 앗슈르 군인
기원전 약 668~627년, 신 - 앗슈르 시대, 니네베 출토, 설화 석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창을 든 앗슈르 병사가 갈대로 만든 배의 선미에 서서 엘람인 포로에게 늪을 통과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여성 포로 둘은 슬픈 듯 두 손을 들고 있다. 물에는 적의 시체가 떠 있다.
이란 남서부의 엘람 왕국은 앗슈르바니아폴리 왕이 여러 차례 싸웠던 나라다. 고대 서아시아에서는 상을 만드는 것에 초자연적인
힘이 있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군은 늘 승리하는 모습으로, 적군은 무력하게 패하는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벽돌과 벽돌 제작
다소 수수한 외양이긴 해도 벽돌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건축에 가장 중요한 재료였고 벽돌을 만드는 방식은
메소포타미아의 세계관과도 관련이 있다. 가장 단순한 벽돌은 충적초와 진흙을 섞은 뒤 겨나 동물의 배설물을 더해 단단하게 말린 것이다.
창세 신화에서 인간의 창조에 사용된 재료가 충적토였기에 고대 사람들은 벽돌 제작을 창조 그 자체로 여기기도 했다.
틀에 찍어 대량으로 생산한 벽돌로 지은 건물들이 거대한 도시의 건물 단지를 형성했고, 때로는 벽돌 표면에 정교한 부조를 더하거나
빛나는 유약을 발라 장식하기도 했다.
바빌리는 벽돌 건축물로 손꼽히는 도시였다.
대표적인 예가 기원전 6세기에 나부쿠두리우쭈르 2세가 세운 '이쉬타르 문'과 '행렬의 길'이다.
이들은 현재 베를린의 페르가몬박물관에 일부 복원되어 있다. 바빌리의 상징이 된 이 건조물은 수천 년을 이어 내려온 고도의
벽돌 제작 전통 위에 건설되었으며 고대 서아시아 전역에서 형태나 함량이 비슷한 벽돌이 발견되고 있다.
사자 벽돌 패널
기원전 약 604~562년, 신 - 바빌리 시대, 바빌리 출토, 구운 점토에 유약,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이쉬타르 여신을 상징하는 사자가 표현된 벽돌 벽의 일부이다. 청금석처럼 반짝이는 파란색 배경에 사자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표면에는 유약을 발랐다. 이 같은 사자상 120구가 나부쿠두리우쭈르 2세가 세운 이쉬타르 문에서 '신년 축제의 집' 비트 아키투까지
이어지는 행렬 길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이쉬타르 문의 정면도 아다드 신과 마르두 신을 상징하는 575구의 황소와 무슈후슈 용으로 꾸며져 있었다.
사자 벽돌 패널
기원전 약 604~562년, 신 - 바빌리 시대, 바빌리 출토, 구운 점토에 유약,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이쉬타르 여신을 상징하는 사자가 표현된 벽돌 벽의 일부이다. 청금석처럼 반짝이는 파란색 배경에 사자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표면에는 유약을 발랐다. 이 같은 사자상 120구가 나부쿠두리우쭈르 2세가 세운 이쉬타르 문에서 '신년 축제의 집' 비트 아키투까지
이어지는 행렬 길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이쉬타르 문의 정면도 아다드 신과 마르두 신을 상징하는 575구의 황소와 무슈후슈 용으로 꾸며져 있었다.
벽돌
벽돌
벽돌
기원전 9세기, 신 - 앗슈르 시대, 님루드 출토, 구운 점토에 유약.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연두색이 섞인 파랑, 노랑, 검정, 흰색으로 끈을 꼰 모양의 무늬를 그린 벽돌이다.
석재가 귀했던 앗슈르인들은 궁전 벽을 장식할 때 이처럼 유약을 바른 벽돌을 많이 썼다.
벽돌은 간단한 장식이 그려진 것부터 인물이나 서사적 장면이 들어간 것까지 다양했다.
현재까지 전하는 앗슈르 벽돌은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유약을 바른 것이 대부분이지만, 앗슈르악하잇디나 왕의 통치기부터 벽돌에 장식 부조를 가미하기 시작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려 하늘과 땅이 만났다. 강이 만들어 내는 점토는 태곳적 창조에 쓰였다는 재료이자
주술적 힘이 가득한 물질이었다. 점토를 빚어 만든 상은 신전과 가정을 지켜주었고 점토를 구워 만든 벽돌은 신과 인간에게 지낼 곳을
마련해 주었다. 점토에 찍은 글자는 지식의 토대가 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생생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수천 년 전 기록과 예술이 들려주는 인간사는 지금과 다를 것이 없다. 축복을 받고, 세상을 이해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고 싶어 하며,
손해를 볼까, 후세에 잊힐까, 걱정하는 메소포타미아인들의 마음은 구체적으로 기록으로 남아 있어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라는 명성에 가려져, 메소포타미아인들이 당시 세계의 지식, 예술, 정치, 사회제도 면에서 최첨단에 있었다는
사실은 종종 잊히곤 한다. 그 유산은 고대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틀이 되고 기술의 기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 전시를 보며 떠올릴 수 있었으면 한다.
첫댓글 고풍스런
작품들 즐감합니다
재주꾼 선배님
멋지세요
늘 감사합니다 ^)^
지극한 정성으로
올려주신 글과 영상들
감사히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