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충전은 잘 하면서 내 삶은 왜 충전 못하나
‘내일은 미스터트롯’이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노래를 부르고 있는 정동원.
마음의 여백 ‘성찰’
바야흐로 트로트 전성시대다. 가수들의 경연 프로그램인 ‘나는 가수다’의 성공으로 그 영역이 록이나 트로트, 크로스오버 등 다양한 장르로 확대되었다. 이를 통해 재기에 성공한 가수도 등장하고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가요가 아이돌 중심으로 흘러간다는 지적이 있어왔는데, 경연 프로그램의 활성화로 대중들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음악이 지나치게 경쟁적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긍정적인 시선이 많은 이유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트로트도 동참했는데, 그 과정에서 송가인과 임영웅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탄생하기도 하였다. 그동안 트로트는 나이든 기성세대가 듣는 음악이라는 편견이 있어왔다.
하지만 경연 프로그램을 통해 젊고 새로운 스타들이 주목을 받으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전 세대가 좋아하는 장르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나이 어린 학생들도 경연에 참여하여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정동원이다.
정동원은 2020년 ‘내일은 미스터트롯’이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치열한 경쟁을 뚫고 결승까지 진출한 가수다. 당시 그는 14세의 학생 신분이었는데, 자기보다 한참 나이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결승에서 당당히 5위를 차지하였다. 그때 부른 노래가 바로 ‘여백’이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전부터 대중의 관심을 받아왔다. 2018년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하여 우수상을 받으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정동원은 차세대를 대표하는 트로트 유망주로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다.
사람들의 관심이 지속되자 2019년에는 그에 관한 이야기가 KBS ‘인간극장’에 소개됐다. ‘트로트 소년, 동원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에서 어린 시절부터 트로트를 좋아하게 된 계기와 가족들의 일상이 방영된 것이다. 잇따른 인기에 힘입어 2020년 5월에는 경남 하동에 자신의 이름을 딴 ‘정동원길’이 생기기도 하였다. 지역문화 홍보 및 관광발전에 기여했다는 이유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정동원길’이란 이름은 5년 동안 사용이 가능하고 이후 연장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도로명 가운데 세계 최연소라고 해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정동원은 어린 나이에 가수로서 성공과 명예를 동시에 얻는 셈이다.
정동원이 결승전에서 부른 ‘여백’은 ‘존재의 이유’를 부른 김종환이 작사와 작곡을 하였다. 이 프로그램을 보지 않아 잘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지인이 카카오톡으로 보내와 알게 된 노래다. 처음 듣는 곡인데도 마음에 울림이 있었다. 가사를 찬찬히 음미하면서 들어보았다.
14살의 나이에 소화하기 힘든 곡이라 생각했는데, 묘하게 가수의 목소리와 잘 어울렸다. 청량하고 담백한 목소리가 가사를 전달하는데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다. 물론 노랫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그 의미를 가슴으로 이해하게 될 때 과거를 회상하며 다시 부르지 않을까? 자신의 삶에서 마음의 여백이 얼마나 중요한지 성찰하면서 말이다.
정동원의 ‘여백’은 정신없이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핵 펀치를 날리는 노래다. 사람들은 휴대폰 배터리가 60~70% 상태가 되어도 100%를 유지하기 위해 충전을 한다. 그런데 정작 전화기보다 훨씬 중요한 자신의 삶이 방전되었는데도 충전할 생각도 못하고 산다.
그래서 가수는 묻고 있다. 전화기 충전은 잘 하면서 왜 내 삶은 충전하지 못하느냐고. 노래의 근원적인 문제의식이다. 가수는 마음에 여백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대답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노랫말을 음미하면서 성찰해보기로 하자.
“얼굴이 잘생긴 사람은 늙어 가는 게 슬프겠지/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어도 저녁이면 벗게 되니까/ 내 손에 주름이 있는 건 길고 긴 내 인생의 훈장이고/ 마음에 주름이 있는 건 버리지 못한 욕심의 흔적/ 청춘은 붉은 색도 아니고 사랑은 핑크빛도 아니더라/ 마음에 따라서 변하는 욕심 속 물감의 장난이지/ 그게 인생인거야/ 전화기 충전은 잘 하면서 내 삶은 충전하지 못하고 사네/ 마음에 여백이 없어서 인생을 쫓기듯 그렸네.”
공(空), 마음의 여백
‘여백’이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본능적으로 ‘공(空)’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가사를 음미하면서 들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 노래는 공, 그러니까 비움의 철학이 담긴 곡이었다. 자연스레 우리나라 불자들이 좋아하는 <금강경>이 생각났다. <금강경>은 ‘상(相)’과 ‘공(空)’ 간의 한판 대결을 다루고 있는 다이내믹한 경전이다.
상이 중생의 집착과 욕심을 압축한 상징적인 용어라면, 공은 그러한 것들을 마음에서 비워내는 것을 의미한다. 불자들의 신앙 대상인 붓다와 보살은 이 싸움에서 공이 이기지만, 우리들 중생은 언제나 상이 이긴다. 중생의 삶이 삼독(三毒)으로 일컬어지는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 비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하다는 실상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를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유명한 단어로 표현하였다.
<반야심경>은 5000여 자로 이루어진 <금강경>을 260자로 압축해서 공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는 경전이다. 흔히 불교의 정수를 담은 지혜의 경전이라 일컬어진다. 한 편의 짧은 시 속에 불교의 핵심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불자들이 많이 독송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경전이기도 하다.
색(色)은 쉽게 말하면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바라 본 세계의 모습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색깔 있는 안경을 쓰고 모든 것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예컨대 빨간 안경을 쓰면 모든 것이 빨갛게 보이고 파란 안경 속에 담긴 세계는 파란색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가 본래 파랗거나 빨간 것은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如如) 존재할 뿐인데, 중생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색안경을 벗고 세계를 바라보라고 강조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공하다는 실상을 깨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자각은 깊은 종교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지식 차원에서 쉬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의 원리는 일상에서도 여전히 의미 있게 작동하고 있다. 2006년 미국 슈퍼볼 게임에서 우승하고 MVP를 차지한 하인즈 워드(Hines Ward)가 귀국해서 인터뷰한 적이 있다. 필자는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그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그의 다음 말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Love has no color
“Love has no color.” 사랑에는 색깔이 없다는 말에서 그의 아픔이 느껴졌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온갖 차별과 멸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했다. 그래서인지 같은 이유로 한국에서 상처 받고 있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게 이 말은 커다란 위로와 용기로 다가왔다.
또한 서양인에게는 따뜻하고 호의적이면서 동남아에서 온 이들에겐 차별을 서슴지 않았던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사랑에 색깔을 입혔던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그의 지적처럼 편견을 모두 제거하고 공(空)의 시선으로 보면, 사랑에는 본래 색(色)이 있을 수 없다.
정동원의 ‘여백’에도 이러한 삶의 성찰이 담겨있다. 가수의 지적처럼 우리는 청춘과 사랑에 붉음과 핑크라는 색깔을 입히면서 살아간다. 그러면서 젊음을 찬양하고 늙음에는 어둡고 초라한 색깔을 입힌다. 본래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에 따라서 변하는 욕심 속 물감의 장난’일 뿐인데 말이다.
그렇게 사는 게 우리 중생들 인생이라고 가수는 노래한다. 그리고 곧바로 전화기 충전은 잘 하면서 왜 자신의 삶은 충전하지 못하느냐고 직격탄을 날린다. 아프지만 반드시 필요한 질문이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할까? 가수는 마음에 여백이 없어서 인생을 쫓기듯 그렸으니, 이제는 마음의 공간을 조금 내주는 것이 어떠하냐고 조언을 한다. 욕심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는 마음을 비우라는 뜻이다. 여백이 생기면 서두르지 않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나와 주변을 바라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가수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진짜 삶의 충전이 여백에 있었던 것이다.
살다보면 마음에 여백이 없어서 생기는 우스운 일도 있다. 거실에서 막장드라마에 빠진 엄마는 딸이 초인종을 여러 번 눌러도 소리를 듣지 못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엄마의 마음이 온통 드라마로 가득해서 딸의 초인종 소리를 담을만한 여백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에 아주 작은 공간만 있어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그만큼의 여지도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 중생의 생생한 삶의 모습이다.
가수 나훈아는 ‘공’이란 노래에서 살다 보면 비운다는 의미를 알게 된다고 노래하였다. 그렇게 조금씩 비우고 살면 세상이 지금보다는 훨씬 아름답고 평화로울 것이다. 불교에서 중시하는 염불이나 명상, 절 수행 등은 모두 비움을 위한 실천으로써 의미를 가진다. 휴대폰 충전기는 분실해도 여백이라는 마음 충전기는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일야 전북불교대학 학장
첫댓글 여백~ 가사
느끼며 들으면
우리삶
불교 법문처럼
다가 오지요
정동원 바르게
성공하길 응원해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