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1일 (목) 촬영.
지하철 동대문 역사 내에는 1974년 8월 15일 우리나라 최초로 개통한 지하철 1호선(서울역~청량리역)의 시점을 기념하는
초기 지하철의 시설물 일부가 보존 전시되어 있습니다.
표지석, 표지판, 대기 의자 등입니다.
동대문의 안쪽입니다. "우리 역사탐방" 카페에서는 첫 답사를 오늘 10시에 동대문역 9번 출구에서 13명이 모여 시작했습니다.
답사 장소는 흥인지문, 홍덕이 밭, 자주동천, 비우당, 청룡사, 정업원 터, 동망봉, 안양아, 장면 가옥, 송시열 집터, 북비, 최순우 옛집입니다.
경대장님이 처음 오신 두 분을 소개하고.
동대문에서부터 답사를 시작했습니다. 해설은 물론 경대장님이 해 주셨습니다.
동대문 홍예 안쪽 천장에 그려져 있는 청룡을 살펴보고,
그리고 동대문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동대문 양쪽의 성벽은 없어졌지만 성벽이 있던 자리에는 한양도성이란 글을 새긴 돌로 표시를 해 놓았습니다.
서울 한양도성 / 1396년(태조 5)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1396년(태조 5)에 백악(북악산), 낙타(낙산), 목멱(남산),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쌓은 이후 여러 차례 고쳤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며,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래도록 (1396~1910, 514년) 그 역할을 했던 건축물이다.
한양도성의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고친 역사가 남아 있으며, 성벽 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별로 다른 돌의 모양을 통해
축성 시기와 축성 기술의 발달 과정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사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사소문(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을 두었는데,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없어졌다. 현재까지 한양도성 전체 구간이 정비되어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 현지 설명문 -
서울 흥인지문 / 보물, 조선 시대,
서울 흥인지문은 1398년(태조 7)에 세운 당시 서울 도성의 동쪽 문이다. 지금의 문은 1869년(고종 6)에 다시 지은 것이다.
당시 서울 성곽에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세웠다.
동서남북의 사대문에는 각각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글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그중 동쪽의 대문을 흥인문이라 하였다.
흥인지문은 서울의 숭례문과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성문이다.
성벽과 이어진 축대에 아치형의 통로를 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워 성문을 만들었다.
서울의 성문 가운데 문루를 2층으로 만든 것은 숭례문과 흥인지문밖에 없다.
문루는 문을 지키는 장수가 머무는 곳으로 유사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도 했다.
문루 바깥으로는 벽돌로 된 담장과 나무판으로 된 창문을 설치해서 적을 막는 데 유리하게 하였다.
흥인지문의 문루는 전체 구조는 간단하지만 장식이 많은 19세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반영한다.
또 흥인지문의 앞에 적을 막기 위한 반달 모양의 옹성을 둘렀는데, 이는 서울 성문 가운데 유일하다. - 현지 설명문 -
성벽의 돌이 크기와 모양도 다르지만 성벽 위의 여장도 쌓은 재료가 서로 다르네요, 벽돌로 쌓은 여장은 정조 이후에 쌓았습니다.
각자성석입니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해석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숙종 2년(1706) 4월에 훈련도감의 관리인 한필영이 공사를 총괄하고,
1구간은 성세각, 2구간은 전수선, 3구간은 유제한이 공사를 이끌었고, 석수의 우두머리는 오유선이며, 1구간 석수는 양육오,
2구간은 황승선, 3구간은 김정립이 참여하여 고쳐쌓았다는 기록이다.
석재의 운반을 담당한 관리들의 명단은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한양도성에 남아 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 구간을 표시한 것(14C)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성 밖으로 올라갑니다.
뒤돌아보니 옹성의 숨겨진 입구가 보입니다.
옹성 안은 들여다볼 수도 없게 차단해 놓아서 누에 걸린 편액조차도 가까이 볼 수가 없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성을 쌓은 돌이 일정하지가 않죠. 태조 때부터 세종, 숙종 등 성을 보수하며 쌓은 시기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보수한 성돌들도 성을 쌓았던 당시의 모습대로 만들었네요.
통행을 위해 만든 암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갔습니다.
성내에서 성벽을 따라가는 이 길을 이곳 사람들은 '이화동 하늘 정원 길'이라 하는 예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올라가며 보면 좌측에는 마을이 우측에는 성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 주택이었던 곳이 카페 등으로 많이 변해 있더군요.
예쁜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한옥도 아니고 양옥도 아닌 정체불명의 주택에 서양의 화가인 모딜리아니와
고흐의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길가의 모든 집이 다 카페 같았어요.
거리가 조금 산만하다는 느낌도 드네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도 생각났었습니다.
성 밖의 풍경입니다. 미세먼지도 많았지만 날씨도 흐렸습니다.
길이 점점 더 가팔라지네요.
지붕에 앉아 낚시를 하고 있는 강태공이 언제 이곳으로 왔지? 이화동 마로니에 공원 뒤에 있던 분인대 ㅋㅋㅋ
경사가 급한 곳에서부터는 도로에 열선을 깔았습니다.
이화마을.
일제강점기 시절에 지은 사택들도 어느새 카페로...
개뿔,
오랜만에 이 길을 걸었습니다.
돌아 본 풍경입니다. 괜스레 쓸쓸해 보이네요.
이화동 하늘 정원길 주변 안내도가 있는 이곳 정자에서 간식을 하며 잠시 쉬어 갔습니다.
정자에서 본 풍경입니다. 흐릿하지만 인왕산과 북악산과 북한산까지도 보였습니다.
아래쪽으로 내려갑니다. 갈림길에서
바로 이 홍덕이 밭을 보려고요.
홍덕이 밭
낙산 아래 동숭동에 있던 밭으로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뒤
효종(당시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심양에 있을 때 따라가 모시던 나인 홍덕이라는 여인이 심양에 있으면서 채소를 가꾸어
김치를 담가서 효종에게 날마다 드렸는데 볼모에서 풀려 본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이 홍덕이의 김치 맛을 잊을 수가 없어
이에 효종은 낙산 중턱의 채소밭을 홍덕이에게 주어 김치를 담가 대게 했다 하여 낙산에 '홍덕이 밭"이라는 지명이 전해진다. - 현지 설명문 -
홍덕이 밭을 보고 다시 성곽길로 올라갔습니다.
성 밖의 풍경이 멋지네요.
지주 동천과 비우당입니다.
비우당(庇雨堂)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9-471
비우당은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실학자인 지봉(芝奉)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살던 곳이다.
낙산 동쪽 상산(商山)의 한 줄기인 지봉 아래 있었는데, 이수광의 호 지봉이 여기에서 나왔다.
원래는 창신동 쌍용2차아파트 자리에 있었는데 서울시에서 낙산공원을 조성하면서 이곳에 복원하였다.
조선 초기의 청백리로 명성이 높은 유관(柳寬)이 이곳에서 살았는데 지붕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면서 부인에게
"우산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라 농담을 하였다는 '유재상의 우산(柳相手傘)'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이곳은 외손인 이수광 집안으로 상속되었는데, 그 집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이수광이 집을 새로 짓고 그 이름을 비우당이라 하였다.
<동원비우당,東園庇雨堂記>에 이러한 사연을 자세히 적었다.
이수광은 비우당에 살면서 이 일대의 여덟 곳을 '비우당 팔경'이라 하고 시를 읊었다.
동지세류(東池細柳)에서 흥인문 바깥의 못가에 핀 버들이 봄바람에 버들 개지를 날리고 꾀꼬리가 지저귀는 모습을 노래하였으며,
북령소송(北嶺疎松)에서는 북악의 산마루가 낮에도 늘 어둑한데 푸른 솔그림자가 집에 드리운 것을 보고 동량(棟梁)으로 쓰이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였고,
타락청운(駝駱晴雲)에서는 아침마다 누운 채 낙산의 구름을 마주하면서 한가한 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하였다.
아차모우(峨嵯暮雨)에서는 아차산에서부터 벌판을 지나 불어오는 저녁 비를 노래하였다.
전계세족(前溪洗足)에서는 비가 오고 나면 개울에 나가 발을 씻고 개울가 바위에 드러눕는다고 하였고,
후포채지(後圃採芝)에서는 지봉과 상산의 이름에 맞추어 상산사호(商山四皓)처럼 살고 싶다 하였다.
암동심화(巖洞尋花)에서는 복사꽃 핀 골짜기에서 나비를 따라 꽃을 찾아가는 풍류를 말하였고,
산정대월(山亭待月)에서는 맑은 달밤 정자에 올라 술잔을 잡는 흥취를 말하였다.
비우당이 있던 곳은 조선 시대 자지동(紫芝洞)이라 불렀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폐위되어 영월로 간 단종을 기다리면서 이곳에 와서 빨래를 하였는데
빨래가 붉은빛으로 염색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위쪽에 거북바위가 있었다. 정순왕후가 단종이 거북이를 타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는데 아침에 보니 이 바위가 나타났다는 전설도 전한다.
비우당(庇雨堂)
비우당은'겨우 비를 피할 수 있는 집'이라는 의미로 조선 중기 실학자 이수광(1563~1628)이 살던 곳이다.
이수광은 조선 초 청백리(淸白吏)로 명성이 높았던 유관(柳寬,1346~1433)의 외현손이다.
유관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동대문 밖 울타리도 문도 없는 초막에 집을 정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이후 유관의 외손이자 지봉의 부친인 이희검(李希儉)이 이 집을 조금 넓히고 살았는데 어떤 손이 너무 소박하다고 하자
우산에 비하면 너무 사치스럽다고 대답하여 듣는 이들이 감복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병화에 비우당이 소실되자 이수광이 옛 터에 소당을 짓고 비바람을 간신히 피한다는 의미로 '비우(庇雨)'라는 편액을
달았는데 이는 선조 유관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이수광은 비우당에 살면서 이 일대의 여덟 곳을 비우당 팔경이라고 하고
시를 읊었고 그의 저서 <지봉집>에 비우당에 대한 서문과 기문에 이어 비우당 팔경이 수록되어 있다.
비우당팔경(庇雨堂八景)
동지세류(東池細柳) 동쪽 연못의 실버들
북령소송(北嶺疎松) 북녘 고개의 성긴 소나무
타락청운(駝駱晴雲) 낙산의 맑은 구름
아차모우(峨嵯暮雨) 아차산의 저녁 비
전계세족(前溪洗足) 앞 시내에서 발 씻기
후포채지(後圃採芝) 뒷밭의 영지버섯
암동심화(巖洞尋花) 바위골의 꽃구경
산정대월(山亭待月) 산 정자서 달맞이
원래 비우당은 낙산의 동편에 있는 지봉의 남쪽에 있었으나 낙산공원을 조성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 현지 설명문 -
자주동샘(紫芝洞泉)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고 궁에서 쫓겨난 정순왕후 송씨는 정업원에 머물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옷감에 물들이는 일을 했다.
샘물 주변과 낙산 기슭에는 자지초(紫芝草-옷이나 손에 닿기만 해도 보라색 물이 드려지던 약초)가 지천에 깔려 있었고
화강암 바위 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에 비단을 빨아서 자주색 물을 들였다.
이 샘물을 '자주우물', '자지동천'이라 하였으며 정순왕후가 염색된 옷감을 펼쳐 말리던 바위에 자주동천(紫芝洞泉)이 새겨져 있다.
정순왕후 송씨는 이곳 자지동천 우물물로 염색한 비단으로 만든 댕기, 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을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64년간 슬프고 한 많은 삶을 살았다. - 현지 설명문 -
청룡사
우화루.
그리고 청룡사 후원에 있는 정업원 터. 비각 안에는 영조가 눈물을 머금고 썼다는 '정업원 구기'라고 새긴 비가 있습니다.
정업원을 나와 동망봉으로 올랐습니다.
동망봉에 있는 ㅊ비운의 왕비, 단종 비 정순왕후의 삶을 요약한 그림 판.
정순왕후의 재실.
동망봉이라고 쓴 현판은 영조의 친필을 집자해서 만든 현판입니다.
동망봉에서 내려와 동망봉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채석장으로 사용해 망가진 동망봉을 상상하며...
조금 늦은 점심을 궁나라에서 해결했습니다. 오전 답사는 이곳에서 마무리했습니다.
여섯 분은 묵밥.
여섯 분은 만둣국.
냉면을 먹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첫댓글 아주 낯익은 곳들
태어나서 자란 곳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
수없이 지나쳤던 아련한 추억들이 있는
정겨운 거리들입니다
청룡사 묘각사 안양사 한양도성등등
덕분에 역사공부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