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짧은 이 한마디에는 필승에 대한 집념과 조국수호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
[송동훈의 '역사와 기행']
▲ 선장이 배를 버렸다.
수백 명의 승객을 배 안에 남겨둔 채로. 슬픔과 분노에 떨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에게 '의무(義務)'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오늘의 주제로 한평생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았고, 결국 의무를 지키다 죽어간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선택한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그는 런던의 트래펄가(Trafalgar) 광장에 서 있다. 광장을 둘러싼 도로는 차량으로 넘쳐나고, 광장 안은 언제나 런더너(Londoner)와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그럼에도 탁 트인광장과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오는 시원한 분수, 당당한 동상, 멋진 파사드의 내셔널
갤러리가 주는 청량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광장 초입에 서 있는, 하늘 향해 높이 치솟은 돌기둥은 광장의 풍광을 지배하고 완성한다. 그는 바로 그 위에 서 있다. 그는 마치 한겨울 눈 내리는 산등성에 홀로 선 한 그루 소나무 같다. 단호하고 강인하고 고독하다. 만약 그가 없다면? 이곳은
그냥 광장일 뿐, 트래펄가가 아니다.
그의 이름은 넬슨이다.
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은 평범하게 태어나 자랐다.
그러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며 영웅으로 죽었다.
어떻게? 간단하다. 평생토록 조국이 그에게 부여한 의무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넬슨은 10대 초반부터 배를 탔다. 당시 해군 장교를 꿈꾸던 많은 청소년은
이때부터 배를 타면서 해군 장교가 되기 위한 예비 수업을 받았다.
영국은 해군을 책상머리에서 길러내지 않았다. 바다에서 키웠다.
그들이 배워야 할 모든 것이 바다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넬슨은 해군 장교에게
필요한 자질과 지식을 익혔다. 열아홉에 해군 소위가 된 후로는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영국의 국익을 지켰다. 그러던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터졌고,
이를 계기로 전 유럽이 전쟁에 돌입했다. 영국은 역사적 라이벌이자
의회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를 위협하는 프랑스에 맞섰다.
전쟁은 영국에 불리했다. 혁명을 통해 프랑스가 60만 대군을 순식간에 징집할 수
있는 근대 국민국가로 발돋움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폴레옹이란 불세출의
명장이 등장했다. 나폴레옹은 혁명전쟁의 마지막 적이 영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뜬금없이 유럽을 떠나 이집트로 간 것도 영국 때문이었다. 그는
영국 경제의 젖줄인 인도를 치려했는데, 인도로 가려면 이집트까지 배를
타고 가 그곳에서부터 육로로 가야 했다. 통찰력이 번득이는 이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건 넬슨이 1798년 여름 나일 강에서 프랑스 함대를
전멸시켰기 때문이다. 넬슨은 인도를 지켜냈고
지중해를 다시 장악했다.
전쟁은 갈수록 격렬해졌다.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을 시도했다. 그는
단 6시간만 도버해협에서 영국의 제해권(制海權)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영국
정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운명의 6시간을 지켜내는 것도 넬슨의
몫이었다. 넬슨은 최전선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했다.
그 대가로 한쪽 눈과 한쪽 팔을 잃었지만, 그는 바다를
떠나지 않았다. 아직 의무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나라 해군 간 최후의 결전은 1805년 10월 21일 새벽 스페인 남부 트라팔가르
해협에서 벌어졌다. 넬슨의 작전에 속아 카디즈 항구를 떠난 프랑스 함대 앞을
영국 함대가 막아섰다. 수적으로는 33척 대 27척으로 프랑스군이 우세했다.
더구나 프랑스의 전함들은 최신형이었다.
반면에 사기는 영국군이 높았다. 그들에게는 넬슨을 비롯한 역전의 노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에 앞서 넬슨의 마지막 명령이 깃발 신호를 통해 전 함대에 하달됐다.
아직도 영국군에게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겨지는 바로 그 명령이다.
"영국은 그대들이 맡은 바 의무를 완수할 것을 기대한다."
명령의 핵심은 '의무'였다.
군대의 모든 구성원이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면 반드시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그렇게 전투는 시작됐다. 치열했다. 모두가 이 한 번의 전투로
전체 전쟁의 승패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넬슨은 언제나처럼 선봉에 섰다. 오후에 들어서면서 영국이 승기를
잡았다. 넬슨이 총에 맞은 건 그 무렵이었다.
왼쪽 폐와 척추가 부서지는 치명상이었다. 스스로도 마지막임을 깨달았지만, 아직
전투가 한창이었다. 넬슨은 자신이 총에 맞았다는 사실을 숨긴 채 병상에서
전투 지휘를 계속했다. 계속 부하들을 독려했다.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 넬슨의 최후도 찾아왔다. 그는 울먹이는 부하들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에게 감사한다. 나는 내 의무를 다했다."
“England Expects Every Man Do His Duty"
넬슨은 죽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겼다. 프랑스 혁명전쟁의 향방도, 1800년대를 구가할
대영제국의 운명도 사실상 이때 결정됐다. 죽음의 순간에 자평(自評)했듯이 넬슨은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평범했던 한 소년이, 한 해군 장교가 영웅이 된 까닭이다.
2014년 봄은 진정 슬픈 계절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무'의
가치와 무게를 배우지 못한다면,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송동훈 '그랜드 투어' 저자
2. 세계인이 이순신 장군을 바라보는 시각
신(臣)에게는 다행히도 아직 13척의 배가 있습니다 |
“지금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진도 해상에서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고로 정부는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이순신이 그립다. 설마 300척이 넘는 전함을 고작 13척의 판옥선으로 이길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세계 4대 해전중 하나인 한산도 대첩을
만들어낸 그가 아니면 불가능 했다.
이순신 장군의 무혼과 지략을 되새기며 .... “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충무공 이순신이 승리한 23전 중에 가장 드라마틱한 해전은 단연코 명량해전이다.
1597년 9월16일에 이순신은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해남과
진도 사이의 울돌목에서 물리쳤다.
그런데 이순신의 승리에는 고난의 역정이 있었다. 선조 임금의 수군 폐지 명령,
유언비어 난무와 군사들의 공포심, 그리고 당일전투 등 소위 3중고를 겪었다.
이순신은 8월3일에 전라좌수사겸삼도수군통제사 발령장을 받자마자
단 10명의 군관과 함께 전라도로 달려왔다.
7월16일 거제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전멸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8월15일에 보성 열선루에서 선조의 편지를 받았다.“수군의 전력이
너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는 명령이었다.이순신은
착잡하였다. 그는 곧바로 장계를 작성하였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전선수가 적다하나 보잘 것 없는 신이
아직 죽지 않은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병법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 것이고, 살려고만 하면 죽을 것이다
(必死卽生必生卽死)라고 하였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족히 천명이
와도 두렵지 않다”라고 했는데 이 두 마디 말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그대들은 이번 전투에서 살고자 하는 생각을 품지 마시오. 장수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군졸들도 뒤를 따를 것이요. 만약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요”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막상 조선 함대 13척과 왜선 133척의 싸움이 시작되자 휘하의
장수들은 한 순간 뒷짐을 지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조선이 임진왜란을 극복한
것은 이순신, 유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같은
공직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진도 해상에서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고로
정부는 우왕좌왕하고 있다.그래서 지금 이순신이 그립다. 설마 300척이 넘는
전함을 고작 13척의 판옥선으로 이길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세계 4대
해전중 하나인 한산도 대첩을 만들어낸 그가 아니면 불가능 했다.
이순신 장군의 무혼과 지략을 되새기며 ....
노량해전
☞ 세계인이 이순신 장군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렇다. |
1. 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중장 G. A. 발라드
영국 해군중장 G. A. 발라드는"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고 극찬했다.
해군중장 G. A. 발라드는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 있어 그는 언제나 승리를 끝까지
추구했으며,그 반면에 그 용감한 공격이 결코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는 점은
넬슨(Horatio Nelson)제독이 기회가 있는 대로 적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다가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고 말했다.
2. 미국의 토마스 브레너
미국의 토마스 브레너는 "나는 35년 동안 역사를 공부했지만 이분에 대해서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이 안 알려져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며 "나의 아들이 해군인데 그 아이도 이순신을 못들어 봤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에게도 이글을 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3. 명나라 장수 진린
명나라 장수 진린, 1598년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 "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라고 전했다.
4. '이조사대전(李朝史大全)' 아오야기 난메이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제갈(諸葛孔明)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은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야 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린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더니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 없다!'고 했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그 충렬(忠烈). 조선왕조는 쇠망하기 시작해 3 백년 뒤 일본에
합병됐다. 허나 호걸 이순신의 영명(英名)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5. 와키자카 야스하루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 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 장수 정도였을 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6. 도고 헤이하치로
1905년 쓰시마 해전 승전 후 축하하는 축사를 듣고 나서.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순신장군이 만약
나의 함대를 갖고 있었으면 그는 세계 해상을 지배했을 것이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한국의 실업가 이영개에게 당신 나라의 이순신 장군은 나의 스승
입니다. 한산도대첩에서 개 털린 일본 최고의 명장 와키자카의 후손들은
아직도 이순신장군의 탄생일마다 존경의 표시로 한국을 방문한다.
아직도 전세계 해군 사관학교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전법을 가르친다.
(문화재단이사장의 글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