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1일 (목) 핸드폰으로 촬영.
점심을 먹은 후 길 건너 도착한 안양암입니다.
입구에 있는 종무소입니다. 안양암은 만일회를 열었을 만큼 융성했던 절이었습니다. 스님이 들어와서 차 한잔 마시라고 하네요.
종무소안에 모셔 있는 관음보살님입니다.
대웅전과 관음전과 명부전.
명부전에 모신 부처님.
명부전 내부.
명부전 뒤편에 있는 금륜전과 천오백불전.
천오백불전부터 답사.
내부 모습입니다.
천오백불전에서 본 금륜전(가운데 건물)입니다. 위의 건물은 영당이고 아래의 건물은 거의 폐가 수준으로 무너지고 있는 건물입니다.
영당도 벽이 헐어졌습니다. 가운데 건물이 금륜전입니다.
금륜전 뒤 아래쪽에 있는 건물이 대웅전입니다.
금륜전.
내부.
금륜전에 있는 탱화.
대웅전도 ...
대웅전 뒤의 바위에는 굴이 있습니다.
굴을 답사하고 내려오는 회원들.
지붕이 무너지고 있는 건물.
대웅전
내부.
탱화.
반야용선도 있네요.
안양암을 나섭니다. 안양암을 나와 전철로 이동해서 혜화역으로 갔습니다. 1번 출구로 나와 8번 버스를 타고 장면 주택 앞 하차.
장면 가옥 입구 길가에 동상이 있습니다.
장면 가옥 / 등록문화재 제57호, 1937년 건립.
대한민국 제1공화국 국무총리와 부통령, 내각책임제인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역임한 운석 장면(1899~1966)이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건립하여 서거할 때까지 30년 남짓 거주하였던 곳으로 근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장소이다.
장면의 처남인 건축가 김정희가 설계하여 지은 이 집은 안채를 비롯해 사랑채, 경호원실, 수행원실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으며,
한국, 일본, 서양의 주거 양식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전통 한옥의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욕실과 화장실의 내실화(內室化), 대청의 거실화 등 1930년대 주택 개량 운동과 신주거 문화 운동의
영향이 드러나 있어, 근대 주거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가치가 있다. - 현지 설명문 -
운석(雲石) 장면(張勉) 선생 흉상.
일제하에서 교육과 종교활동을 통해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하였으며, 광복 이후 가톨릭계를 대표해 민주의원과
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함으로써 정계에 입문하였다.
1948년 5,10 총선거에서 제헌국회 의원으로 당선된 이래 제1공화국의 제2대 국무총리와 부통령, 그리고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낸 정치가였다. 특히 1948년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과 1950년 6,25 전쟁 시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 내며
대한민국의 건국과 수호에 발군의 역할을 한 외교관이었다. -현지 설명문 -
본채와 사랑채입니다.
사랑채 앞의 펌프.
안채의 안방입니다.
부엌
바티칸 교황청 훈장 / 1951년 5월 22일 제2대 국무총리 재직 시 받은 교황청 훈장.
영문 타자기
장독대
사랑채에 있는 선풍기.
사랑채 응접실.
건국훈장 / 1999년 8월 13일 영전에 추서된 대한민국 건국훈장. (복제품)
흥덕사 터(興德寺址)
이 지역은 조선 태조가 태종 1년 (1401)에 옛집 일대를 희사해서 흥덕사를 창건한 곳이다.
그 후 세종 때 불교를 선교(禪敎) 두 종파로 통폐합할 때
교종의 도회소가 되는 등 불교사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연산군 때 폐사된 후 흔적조차 없어졌다. -현지 표석에 새겨 있는 글 -
흥덕사지를 지나 조금 더 골목 안으로 올라가면, 송시열 선생의 집터가 나옵니다. 좌측 전신주 앞이 집터입니다.
바위에 '증주벽립'이라고 각자 되어 있는 곳이 송시열의 집이 있던 곳이라고 합니다.
우암 송시열 집터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7호, 1607~1689년(선조 40~ 숙종 15), 종로구 명륜동 1가 5-99번지
이곳은 우암 송시열(宋時熱, 1607~1689)의 집이 있던 곳이다.
송시열은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의 학풍을 계승한 노론의 영수이자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다.
또 후에 효종이 된 봉림대군의 스승이었고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치의 중심인물이 되어 북벌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아곳에는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유교의 성현인 증자(曾子)와 주자(朱子)의 뜻을 계승하고 받들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증주벽립.외에도 근처에 있는 서울과학고등학교 교정에는
'금고일반(今古一般 :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과
'영반(詠磐:올라앉아 시를 읊는 바위)' 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남아 있다.
이 일대는 송동(宋洞)이라 불렸는데, 송시열의 집이 있던 곳이라는 의미다.
이곳은 골짜기가 깊고 꽃나무들이 많아 봄에 놀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앵두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였다. - 현지 설명문 -
이 골목으로 직진해 올라가면 막다른 좁은 길이 나오는데, 안내문처럼 막다른 골목이 아니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골목을 통과하면 서울 도성과 만납니다.
서울성곽을 따라 내려가면,
성북동의 유명한 돈가스 집들이 나옵니다.
돈가스집 사잇길로 내려가면,
최순우 옛집이 나옵니다.
마지막 답사지인 최순우 옛집까지 왔지만,
최순우 옛집은 동절기(12월 30일부터 3월 31일까지) 휴관 중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역사의 시작인 첫 답사를 무사히 마친 것을 자축하며,
다음 답사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원하며 헤어졌습니다.
첫댓글 눈 사찰순례
감사함다_()()()_
덕분에 인양암
부처님 약사부처님
화엄성중 친견드립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