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문구의 관촌수필> (2) 화무십일(花無十日)
오랜만에 고향에 들른 나는 관촌 이발소 앞에서 우연히 지나가는 소반장사의 뒷모습에서 엉겁결의 착각으로 이미 오래 전에 잃어버린 윤 영감을 떠올린다. 그 해에 있은 일들을 회고하면 시방도 몸서리가 나며 끔찍스럽고 생지옥으로만 여겨지던 해였으니까.
그 무렵에는 부황(오래 굶어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되는 병)안 난 집이 드물고 채독(채소를 먹음으로써 위장 해하는 독기)들지 않은 사람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윤 영감네 일가가 관촌부락에 떠들어온 것도, 그렇게 죽지 못해 삼동을 물리고 해가 원수같이 길어지기 시작한 여름, 육순이 바라뵈는 귀밑머리 허연 늙은이가 턱밑이 안보이게 등이 굽은 노파를 앞세우고 들어왔다. '나'의 어머니는 전쟁통에 집안의 어른들을 모두 여의어서 남자라고는 어린 아들밖에 없는 집안을 이끌어 간다. 당시 집안은 난리가 나던 해에 농작물을 치안대에 의해 모조리 압수당한 여파로 매우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서원에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의미로 장리 쌀을 내주어 겨우 연명해 나가는 처지였다. 이와 같이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피난민들에게 서슴없이 빈방을 내주곤 하였다.
아무 일이나 며칠 간만 부려주어 며느리와 젖먹이 어린것까지 네 식구 굶지만 않게 해달라. 한끼에 밥 두 그릇씩만 주면 모자라는 만큼은 며느리를 내보내어 보태서 먹겠다고 했다. 장리 쌀로 연명해 나가던 형편이지만 이듬해 농사를 위해서는 선머슴이라도 둔다는 생각으로 어머니는 영감네 식구들을 받아들인다. 전쟁통에 피난을 다니던 윤 영감 일가가 솔이 엄마를 며느리로 맞게 된 것은 임진강을 건넌 직후 부모를 따라 도강을 했으나 폭격이 한 차례 거쳐간 뒤 고아가 되어버린, 두고 보기가 딱한 처녀의 부모 시체를 묻어 주고 동행하게 되는데, 그 처녀는 피난지에서 윤 영감의 아들 학로와 백년가약을 맺게 된다. 두 늙은 이는 보리죽을 먹고 초야를 치룬 학로 내외를 상전 받들 듯 살았다. 그 뒤, 허우대만 그럴싸하면 덮어놓고 잡아다가 군인을 만들던 판이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전쟁터에 보낼 수 없었던 윤 영감은 그 아들을 낮에는 늘 가마니 속에 담아두고 밤으로만 걸어 다니면서 피난살이를 한다. 부득이 대낮에 이동하지 않을 수 없을 때에는 가마니에 담은 아들을 지게로 져 날라야 했다.
그러던 윤 영감 일가가 결정적 파국을 맞게 되는 것은 며느리가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읍내의 여관에 일을 다니면서부터이다. 솔이 엄마의 외박이 잦아졌다. 일에 바쁘다 보면 통금에 걸려 못 들어 온다는 그녀의 변명을 학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며 가정불화가 그칠 날이 없었고 학로는 의처증에 시달렸다. 학로가 여관으로 찾아가 솔이 엄마 머리채를 끌어와 머리를 깎아 들여앉히고 그 대신 학로가 돈벌이를 하러 발벗고 나서면서 한동안은 영감네 셈평이 펴이고 학로도 의욕이 생겼다.
그러나 얼마 후 학로가 다시 열패감에 젖어 가정 분란이 재연되고, 어머니는 밤마다 문간방에서 일어나는 폭력 행위를 가로막아 말리는 것이 일과가 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솔이엄마가 여관에 머물던 서울 사내와 눈이 맞아 급기야는 유일한 혈육인 솔이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해 버렸다. 이후 아내의 가출로 충격을 받은 학로마저 뒷산 밤나무 가지에 목을 매달고 죽어 버림으로써 윤 영감 일가는 결딴이 나 버리고 만다. 결국 둘만 남게 된 윤 영감 내외는 며느리보다는 집안의 대를 이을 손주를 찾을 겸하여 소반 장수의 길을 정처 없이 나서게 된다.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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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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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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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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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합니다.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넘 아픕니다.
이제는 평화, 공존, 화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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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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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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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